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관악5부

관악5부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71 no image [사진] 정아브라함 Jr., 사라 선교사님 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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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2005-06-07
70 no image [동영상] 전요한 박사님 소감, 전선지 사모님 소감, 이사무엘 목자님 메시지.
[레벨:20]서정수
107 2005-06-05
69 no image [사진] 정아브라함 Jr. 선교사님 선교보고 및 정 앤드류 선교사님, 서진우 군 선교사님!
[레벨:20]서정수
136 2005-06-05
68 no image [사진] 새로운 동아리방 완공!
[레벨:20]서정수
136 2005-06-03
67 no image [사진](추가)LA조나단 목자님, 호산나 선교사님 선교보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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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2005-06-02
66 [메시지-동영상] 이사무엘 목자님 한국대표 취임 메시지 파일
[레벨:20]서정수
89 2005-06-01
한국대표 취임 메시지 섬기러 오신 예수님 말씀/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 이 자리에 서는데 큰 마음의 눌림이 있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중압감과 떨림을 느낍니다. 또 지난 며칠 간 무슨 말씀을 주시나 고민하며 기도했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준 말씀을 보니 신31:6절에, “떨지 말라!”는 것이더라구요. 왜?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준 말씀도 왕상2:2,3절에 보면, “Be strong!”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면 형통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사실 떨렸고, 지금도 떨립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역사를 계승받을 때, “갑절의 영감”을 구했습니다. 저는 세 배의 영감을 주셔야 되겠다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은 저에게 금년 요절로 주신 막10:45절을 다시 한 번 붙들라고 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마더 사라 배리 선교사님과 전요한 목자님과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십니다. 한국 UBF는 이제 1세대 40년의 개척기를 지나 2세대 40년의 성장과 발전기의 문턱에 섰습니다. 저의 역할은 역사의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통하여 주신 영적 유산들을 잘 지키고 발전시키며, 제 2세대로의 계승을 위해 다리를 놓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역할에 합당한 지도력은 “섬김의 지도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점에서 가장 자격이 없는 이 종을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이는 저로 하여금 “섬김의 본이 되신 예수님을 계속 배워가며 이 직분을 감당하라”는 뜻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와 동역자(이옥희 사모)는 지난 10주 동안 지방 센터들을 심방하였습니다. 스탭 목자님들이 사는 집을 가보았고 이야기들을 듣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자녀들을 만났습니다. 자녀들이 어찌 그리 사랑스럽던지요? 잠깐 사귐을 갖고 안아주고 헤어지는 것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센터를 방문하여 “UBF선교에로의 부르심” 혹은 “하나님의 꿈” 특강을 섬기고, 동역자님들과 간담회를 가지며 발전적인 조언들을 많이 듣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밤 12시를 넘기는 때가 많았습니다. 개척하는 캠퍼스도 가보았습니다. 이 심방을 통하여 저는 몇 가지를 배웠습니다. 첫째, 우리 스탭 목자님들 한 분 한 분이 참으로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운 주의 종들임을 새삼 보게 된 것입니다. 이름도 명예도 없이 그렇게 주님께, 그리고 힘들고 좁은 캠퍼스 선교에 젊음과 생애를 바친 분들을 또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정말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우리 스탭 목자님들이 소명의식을 지키며 주님께 헌신하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에 두신 뜻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학사 목자님들과 사모님들, 학생 목자, 풀타임 목자 등 UBF의 실제 주인들이 참으로 훌륭하고 존경스러웠습니다. 바로 여기 계신 여러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은 물질적이고 쾌락적이고 이기적인 이 시대의 조류와 문화를 거슬러 살아가는 시대의 진정한 영웅들이요, 남은 자들이요, 역사의 창조자들이었습니다. 개척 센터에는 대개 가정이 둘 혹은 셋인데 아직 젊고, 주일 예배 수가 20-30명인데도 매월 기쁨으로 십의 2조 이상 헌금을 하여 스탭 목자 가정을 지원하고, 많은 액수의 센터 월세를 감당하며 자립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2041년 10만 명 선교사 파송과 2007년 배가의 역사를 위해, 그리고 주의 종들을 위하여 뜨겁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셋째, 저 자신의 실존을 다시 발견하는 기회였습니다. 저는 처음 심방을 시작할 때 의욕과 심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5주정도 지나 몸이 지치고 때로는 녹초가 되어 돌아와야 했습니다. 갈등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한양 센터에 돌봐야 할 리더들이 있어도 이들을 돌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돌보는 것은 뒷전이고, 우선 쉬고 피곤을 회복하는데 마음을 쓰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제가 많이 깨어지고 죽어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요, 천하와 열 왕들의 찬송과 경배를 세세토록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인자(the Son of man)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 왕의 왕이십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이 되시되 마구간 구유에 오셨습니다. 일생 머리 둘 곳 없이 사시면서 죄와 허물로 냄새나고 추한 인생들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저와 여러분들이 죄 때문에 받아야 할 저주와 심판을 십자가 위에서 대신 받으셨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이로써 하늘의 별과 같은 많은 사람들을 살리셨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나와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산 채로 못 박혀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는 것인데, 저는 어느 선을 그어놓고 그 한도 내에서만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1991년 8월, 뻬쩨르부르크에서 제 1회 UBF 소련 수양회가 열렸습니다. 저는 그 때 주제 3강인 요21장을 영어로 섬기는 사명을 맡았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전날 오후 5시경부터 이사무엘 선교사님 숙소에서 메시지 리허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하였는데,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제가 알지도 못하는 말씀을 전한다고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강대상 앞에 선 채로 구절 구절 반복 훈련을 하는데 식사시간이 지나고 밤중이 되어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레이스(Grace A. Lee) 선교사님이 곁에서 보다 못해 사무엘 선교사님께 “제발 좀 그만 하세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훈련은 계속되어 다음날 새벽 5시에야 끝이 났습니다. 12시간을 계속한 것입니다. 사무엘 선교사님과 저는 자의반 타의반 저녁 금식과 철야를 하였고, 저녁 축제 프로그램과 파티에도 참석치 못했습니다. 이 훈련을 통하여 저는 요21장의 예수님과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 알 수가 있었습니다. 1998년 6월, 세계선교 보고회(이사무엘 선교사님의 마지막 선교보고대회)의 메시지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었습니다. 제가 통역으로 숙소에서 리허설을 할 때, 사무엘 선교사님은 힘들어하셨습니다. “이사무엘 목자는 예수님을 모르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아니, 목자 생활 20여 년에 늘 예수님을 전하는 데, 예수님을 모르는 것 같다니” 한 편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맞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마지막 절규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 날도 수 없이 리허설을 반복하고, 숲 속에서 회개하며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저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 알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렇듯 본래 섬김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초중고는 물론 대학까지 수석졸업을 한 저는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 앞에서 상을 받고 높임을 받는 것이 자연스럽게 몸에 베었습니다. 엄청난 속 교만이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등 자리를 지키기 위해 친구들과 경쟁하며 피나는 노력을 하는 동안 강인한 야곱적 기질과 세리적 이기심이 깊이 형성되었습니다. 엊그제 저의 동역자가 저의 아들에게 말했답니다. “아버지가 한국 UBF를 섬기게 되어 요즘 고심하며 힘이 드신 것 같은데 함께 기도를 하자.” 이때 아들이 대답했답니다. “아버지께서 상처도 더 받으시고 더 절망하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자아가 강한 저는 스탭 목자로 부름을 받은 이후, 광주, 한양개척, 종로3부, 다시 한양으로 크게 4번의 목장이동 훈련을 통하여 예수님의 자기 비움과 섬김의 의미를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예수님을 잘 모릅니다. 제가 예수님을 배워가면서 너무나 귀한 스탭 목자님들, 그리고 학사 목자님들과 학생 목자님들이 어떻게 하면 신바람이 나서 좁고도 험한 캠퍼스 제자양성과 전문인 자비량 선교의 하나님의 소명을 섬길 수 있을까 기도하고, 살피고, 섬김으로, 역사환경을 이루는데 힘쓰고자 합니다. 그리고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배워가고자 합니다. 첫째로,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신 예수님을 배우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말씀에 붙잡힌 생애였고, 말씀을 이루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신 생애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무엘 선교사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영적 유산 중 첫째는 절대적인 성경신앙과 성경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무엘 선교사님은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성경을 사서 붉은 줄을 그어가며 자나깨나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언제 어디를 가나 성경을 들고 다니셨습니다. 얼마나 말씀을 사랑하고, 읽고, 암송하고, 성경을 만지셨든지 일년이 지나면 성경책이 헤어질 정도였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남기고 떠나셨습니다. 사무엘 선교사님은 성경신앙에서 한국 백성들의 운명주의를 극복하는 무모하리만큼 우직하고 단순한 믿음을 가질 수 있으셨고, 믿음의 역사를 이룰 수 있으셨습니다. 마더 배리 선교사님의 희생과 큰사랑, 전요한 목자님의 겸손과 넓은 도량과 충성심 역시 성경신앙과 성경사랑의 열매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이 외에 한 영혼을 귀히 여기는 목자의 심정과 일대일을 통한 캠퍼스 제자양성,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 파송을 통한 세계선교 소명, 가정교회를 통한 말구유 역사, 일용할 양식과 소감쓰기, 오병이어의 주는 정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의 기도, 이 모두가 성경신앙과 성경사랑의 열매로 주신 소중한 영적 유산들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생애는 기도의 생애이셨습니다. 기도로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셨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개척 조상들도 기도를 많이 하였습니다. 광주 개척기에 기도하다가 통행금지 시간이 되어 밤을 새운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스탭 수양회에서 합심하여 기도하느라 밤을 새운 적도 많았습니다. 1971년 전국 여름수양회에서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향후 10년이 되는 1981년도에 미국 나이아가라에서 200명 참석하는 UBF 수양회를 열게 해주시도록 기도하자”는 기도제목을 제시하셨습니다. 당시에 미국에는 훈련 없이 이민을 떠난 서너 명의 회원들이 있었는데, 우리는 이들을 선교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미국에 가 본 사람도 없었고, “미국” 하면, 나이아가라가 최고인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제목이 학생들의 가슴에 비전의 불을 붙였습니다. 학생들은 수양회에서 돌아온 후에도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치켜든 채 계속하여 이 기도를 하였습니다. 사무엘 선교사님은 학생들이 우직한 믿음으로 뜨겁게 기도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속으로 약간 겁이 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시고 1981년에 나이아가라 근방에서 400여명이 참석한 수양회를 이루셨습니다. 1985년 선교보고대회에서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향후 10년이 되는 1995년까지 소련에 UBF 선교사를 파송하여 주시도록 기도하자”는 기도 제목을 제시하셨습니다. 당시 소련은 철의 장막 안에 있는 미지의 세계였고, 현실적으로 볼 때에는 아무도 이 기도제목이 이루어질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직한 믿음으로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고르바초프를 일으키시고 소련에 선교의 문을 여셨고, 4년을 앞당겨 1991년에 102명이 참석하는 제 1회 소련 수양회가 열렸습니다. 오늘날의 UBF 개척과 세계선교의 역사는 모두가 단순한 믿음으로 한 맺힌 심정을 갖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한 조상들의 믿음의 기도를 축복하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조상들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소중한 영적 유산들을 잘 계승하고 더욱 강화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특히 말씀과 기도와 믿음의 영성이 더욱 강화되고 성장하도록 이에 좀더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제가 힘쓸 일은 우선 본국의 스탭 목자님들과 전 세계 선교지부장님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임을 영접합니다. 둘째로, 사람을 키우는 일에 집중하신 예수님을 배우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의 영성과 지성, 믿음과 인격의 성장을 위하여 모든 것을 집중하셨습니다. 성장과 발전의 새로운 40년 역사를 생각할 때, 스탭 목자들의 성장이 중요합니다. 이제는 우리 공동체도 먼 미래를 내다보며 사람을 키우는 일에 많은 관심을 둘 때입니다. 스탭 목자들이 자긍심과 비전을 품고 미래의 지도자들을 키우는 가장 영광스럽고 중요한 캠퍼스 미션을 감당할 수 있도록 스탭들의 성장을 위한 적절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과, 과감한 투자와 기도 지원이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 학사 목자, 학생 목자들의 성장을 위한 방안도 강구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우리 공동체의 지도자들과 모든 구성원들이 마음을 모으고 함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에 투자할 때, 계속하여 역량 있는 목자 선교사들이 일어나고, 사회 각 분야에서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지도자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공동체가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하여 사용되는 그릇으로 성장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 섬기신 예수님을 배우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교육의 내용을 보면 그들의 영성의 성장과 하나됨이 중심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섬김의 도리 교육도 제자들이 서로 높아지기 위해 경쟁할 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대제사장의 기도의 핵심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였습니다. 우리의 공동체는 몇 번의 사건들을 통하여 연단을 받기도 하였으나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지난 개척기 동안 개척에 치중하느라 서로를 돌보는 일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이번 심방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알게 모르게 유기성이 많이 깨어진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제 성장과 발전의 새로운 역사의 출발선상에서 우리 공동체가 좀더 힘쓸 일은 그리스도의 한 몸을 세우는 일입니다. 내적 성숙이 필요합니다.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연약한 지체를 돌아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자립정신을 해치지 않는 가운데서도 꼭 도움이 필요한 지체들은 구체적으로 도와주고, 또 큰 센터들은 작은 센터와 개척 센터들에게 가진 것들을 나누어줄 수 있는 나눔의 영성을 키워야 합니다. 언로를 터서 의사가 원활히 소통되게 하고, 함께 참여하여 동역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합니다.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서로 돌아보는 나눔의 영성에서 성장할 때, 전체 몸이 커지더라도 사랑의 유기성이 함께 성장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성령님이 하십니다. 우리가 힘쓸 일은 합심과 동역, 사랑과 믿음과 순종의 그릇을 잘 만드는 일입니다. 세계 UBF 공동체 속에서 영적인 질서를 지키고 하나됨을 잘 이루며, 세계 복음화를 위하여 동역하고 섬겨야 하겠습니다. 스탭 목자님들은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의 지도력으로 지체들을 섬기고, 지체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스탭 목자님들을 존경하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아름다운 유산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넷째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이 되신 예수님의 섬김을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초창기부터 드러내지 않고 국내외의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 환난 당한 형제들을 구제하고 섬길 수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이 섬김의 도리를 계속 배우고 실천하며 더욱 성장하고 성숙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세계교회와 한국교회의 한 지체로서 필요한 부분은 협력하고, 배우고, 나눔으로서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한국 UBF가 캠퍼스 제자양성과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 파송에 더욱 헌신하여 하나님의 세계 구속사의 한 모퉁이를 계속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결론합니다. 우리 주님이 보이신 리더십은 섬김의 리더십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위대성은 섬김의 크기와 비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섬김의 도리를 본받고 배울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쓰시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키우실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새롭게 결단하고 예수님의 섬김의 도리를 본받음으로 새 역사 창조에 쓰임 받는 주역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전 세계 UBF 역사를 책임 맡고 섬기시는 노종 마더 배리 선교사님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앞으로 세계 대표로서 큰 십자가를 감당해야 되시는 전요한 목자님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부족한 저가 예수님의 섬김의 도를 배워가며 열정적으로 섬기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2041년 10만 선교사 파송과, 2007년 한국 UBF 배가 역사를 이루어 새 역사의 기초를 놓을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2005. 5. 30)
65 [소감-동영상] 전요한 박사님 세계 대표 파송소감(대표기도, 특송 포함) 파일
[레벨:20]서정수
102 2005-06-01
=================================================================== Testimony of John CS Jun. 주님께 잡힌 바 된 것을 좇아가노라 요절 / 빌 3:12,14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 I. 가난한 과부의 둘째 아들 저는 1941년 6월 27일에 전남 담양군 창평면 일산리 이부에서 2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태어날 때는 저희 집은 부농의 대가족의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3살 때 아버지가 폐렴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의 홀어머니는 여섯 마지기의 논과 두 마지기의 밭을 분배받아 분가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갑자기 부농의 집에서 가난한 과부의 둘째 아들로 신분이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4살 때 몸이 아파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다가 야곱처럼 한의사의 손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저는 어렸을 때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활발한 어린 아이였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를 분교인 창평북초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저희 집에서 학교까지 8km의 거리나 되었습니다. 게다가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저는 학교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매일 아침 책보를 허리에 붙여 매고 학교까지 마라톤을 해야 늦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때문에 초등학교에서 축구선수, 높이뛰기, 넓이뛰기 선수가 되었습니다. 저희 형은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여 광주에 있는 1류 중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가난한 저희 집 사정으로 저는 중학교를 갈 생각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에서 진학반에 들지 못했으나 우등으로 졸업을 하고 농사일에 전념을 해야만 했습니다. 새벽부터 열심히 논에 가서 농사일을 하고 집에서는 염소, 돼지, 개, 2백 마리의 오리를 키우고 1,000평의 집 뜰에는 감을 많이 가꿨습니다. 그 결과 졸업 1년 후에 하나님께서 이삭처럼 저희 농사와 가축을 크게 축복하셔서 제가 중학교에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중학교에 입학을 하여 광주시에서 변두리인 시골에서 싼 방을 얻어 형과 같이 자취를 했습니다. 그 당시 6.25 직후라 정규 버스가 거의 없어서 자취를 위하여 저는 시골에서 쌀, 김치, 땔감인 장작을 어깨에 매고 어떤 때는 16km의 거리를 걸어서 자취방까지 가져가기도 했고 재수가 좋을 때는 트럭을 타고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 열심히 공부를 하여 중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1956년에 그 당시 1류 고등학교였던 광주고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저는 최고 선생님들에게 배울 수 있어서 매우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가 1년 늦게 중학교를 들어왔기 때문에 열심히 새벽부터 공부를 하여 이를 따라잡고자 했습니다. 그 당시 오늘날과 같이 방에 스팀이 되지 않으므로 어떨 때는 방에 있는 잉크병의 잉크가 얼어서 잉크병이 깨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별로 좋지 않은 머리를 가지고 새벽 5시부터 저녁 12시까지 억지로 무리하게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신경쇠약에 걸려 공부만 하면 두통이 매우 심하고 불면증이 있고 근육의 경련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수업시간에는 꽉 째인 모자를 쓰고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저희 담임선생님은 학교를 1년간 휴학을 하도록 권면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냥 슬슬 쉬면서 학교공부를 했고 옛날 공부했던 실력으로 해양대학교와 전남의과대학에 합격을 했습니다. 저는 선배님들의 권유로 전남의과대학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신경쇠약이 매우 심하여 공부만 하면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프고 불면증이 심한데 내가 과연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의과대학공부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이것은 저에게 큰 고민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고 나는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방황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저를 위해 27세의 젊은 과부로서 청춘을 희생하면서 저희 3남매를 키우고 가르치신 홀어머니를 위해 제가 악착같이 성공을 하여 어머님께 효도하는 것을 제일 목표로 삼았습니다. II. 한국 책임 목자로 부르신 하나님 저는 저희 인생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도서관에 가서 열심히 독서를 하였습니다. 약 2백권의 전기를 읽고 또한 점차 철학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철학에 흥미를 가져 의예과에 가서는 철학교수의 자문을 받아가며 고대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부터 근대와 현대 철학자들을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읽고 필요한 것을 summary로 노트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예과 1학년 여름방학 때는 2달 동안 도시락을 싸서 가지고 와 도서관에 와서 열심히 독서를 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 개똥 철학자였고 교통규칙을 엄격히 지키는 도덕주의자였고 지금 생각해보면 외식자였습니다. 저는 서양사상과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아야 한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성경을 가르쳐준다는 UBF를 물어물어 한 친구와 같이 광주 대인동 UBF 센터에 찾아왔었습니다. 그 당시 광주 대인동에 있는 UBF 센터에는 이창우 목자님(Dr. Samuel Lee)과 Sarah Barry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당시 Sarah Barry 선교사님은 29세의 잉그리드 버그만과 같은 아름다운 미국 처녀 선교사였습니다. 저는 매일 새벽 5시에 2시간씩 Sarah Barry 선교사님과 성경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저 혼자만 공부를 하면 배사라 선교사님께 미안한 감이 들어 매일 새벽에 친구들을 설득을 하여 그 친구들을 심방해서 5,6명씩 센터에 데리고 와서 약 6년간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성경공부를 한 가운데 제가 이제까지 독서를 통해 알아왔던 인생관과 달리 더 완벽한 인생관과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뜨겁게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고 신경쇠약이 치유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쁨과 생명력이 넘치는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제일 먼저 저의 의예과 친구들을 초청해 복음을 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1:1이 없었고 저는 캠퍼스 그룹 바이블 스터디를 제일 먼저 인도했습니다. 그 당시 열심히 의예과에서 양을 초청하여 그룹 바이블 스터디를 했는데 저희 의예과 1학년 80명 중 한때는 60명이 UBF 그룹 바이블 스터디 멤버가 되어서 UBF 그룹 바이블 스터디를 하게 되면 학교 실험시간도 자동 휴강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당신 자전차를 다니면서 여러 양을 심방하며 양육했습니다. 의대를 다닐 때는 정규해 형제와 이남균 형제를 제자로 키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꽁초 담배만을 피우고 시골에 있는 girl friend에게 사랑의 편지를 써서 코스모스 꽃을 넣어서 보내는 낭만적인 형제였습니다. 저는 그 형제를 돕기 위해 매일 일찍 학교에 나가서 제일 좋은 자리를 잡아주고 같이 식사를 하고 도서관도 제일 좋은 자리를 잡아서 항시 같이 공부를 하며 제가 요청을 하면 그는 무엇이든지 yes, yes 하게끔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센터에 가자고 했을 때 그는 yes 하였습니다. 그가 성경공부를 하고 나중에는 그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서 목자의 인생을 살고자 했을 때 저는 가난한 그를 저의 방에 초청하여 무료로 공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아마 이것이 UBF 최초의 공동생활 역사였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 의과대학 시절에 매일 새벽마다 다음과 같은 기도를 6년간 했습니다. 제가 미국의사시험(ECFMG)에 합격을 하여 UBF에서 첫 선교사로 갈 수 있도록 간구했습니다. 열심히 미국의사시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대학 4학년 때 전기 X-ray 검사결과 폐결핵 경증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폐결핵이면 미국의사시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 절망이 컸습니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많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항의를 했습니다. 그때 이창우 목자님(Dr. Samuel Lee 선교사님)이 저를 심방하여 다음과 같이 카운셀링을 했습니다. 나와 전요한 목자는 조상이므로 선교사로 나가는 것보다 선교사를 파송하는 그룹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저에게 힘을 주시고 카운셀링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64세에 미국선교일선에 가게 된 것은 제가 그 당시 6년 동안 줄기차게 드렸던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45년 만에 응답이 되어 오늘 선교사로 가게된 줄 믿고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기도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시고 45년만에도 응답해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당시 UBF 초기에는 지금과 같이 1:1, 요회가 없었습니다. 대학 2,3학년 때 저는 이미 시니어 목자로서 여러 양들의 문제를 카운셀링해 주는 은사가 있다고 해서 카운셀링을 많이 했습니다. 어떤 때는 7,8명이 저희 카운셀링을 받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고 저는 적은 room에서 차례로 카운셀링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심방을 많이 하고 카운셀링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그 당시 평신도 목자가 되어서 많은 양들을 심방하고 양육하고 또 카운셀링해주는 사명을 감당하고자 했었습니다. 그 당시 저희 결혼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의과대학교 4학년 때 지금 저의 동역자인 김선지 자매 목자는 농대 화공과를 졸업한 부자집 딸이었고 그의 큰오빠는 학장이었고 언니와 형부는 교수님이었고 또 그 당시 탤런트와 같이 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초기 UBF 내에서는 학사로서 적당한 결혼상대자가 없었습니다. 책임목자이신 사무엘 목자님은 이 문제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시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캐나다 유학 시험에 합격한 시니어 목자를 김선지 자매 목자와 결혼을 하도록 주선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 목자님은 그 결혼에 대해서는 확신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 시니어 목자와 김선지 자매 목자가 김선지 목자의 집에 가서 결혼승낙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때 사무엘 목자님은 전요한 목자가 따라가서 결혼승낙을 받도록 도우라고 방향을 주었습니다. 저는 단순히 순종하여 김선지 자매 목자의 큰오빠인 김 교수님과 만나서 그 시니어 목자가 캐나다 유학생으로 가게 되고 또 앞으로 얼마나 장래가 촉망되는가 또 그 분이 이 결혼에 얼마나 합당한 분인가를 입이 마르도록 열심히 설득을 했습니다. 그러나 김선지 자매 목자의 큰 오빠는 결국 승낙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무엘 리 목자님은 저를 한쪽방으로 오라고해서 조그마한 팔뚝 시계를 선물하시고 전요한 목자가 직접 김선지 자매 목자와 결혼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당시 심히 당황했습니다. 김선지 자매 목자는 부자집 딸이요 너무 미인이어서 저와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을 해왔습니다. 마치 평강공주와 온달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아직 학생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무엘 목자님의 기도 가운데서 하신 말씀을 저는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러면 제가 하지요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 선교사님의 방향에 따라서 저는 바로 김선지 자매 목자의 오빠를 만나러 갔습니다. 김선지 목자의 오빠는 하루 전에는 친구가 결혼적격자라고 주장하더니 이제는 자신이 적격자라고 말하니 너무 코메디 같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적극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저희는 7개월 후에 의대를 졸업하고 1969년 1월 3일에 House Church를 이뤘습니다. 저는 광주기독병원에서 내과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군의관으로 입대하여 1977년 4월 30일에 제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서울 시내 모 종합병원에서 근무를 할 예정이었습니다. 저는 제대인사차 그 당시 Dr. Samuel Lee 선교사님께 인사를 하러 갔습니다. 그 당시 사무엘 선교사님은 세계개척을 위해 미국 선교사로 50세에 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 선교사님은 저에게 전요한 목자가 자신의 후임으로 한국 UBF 디렉터 직분을 맡으면 어떻겠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때 매우 당황했습니다. 제일 먼저 저의 홀어머니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저는 스탭 훈련도 받지 않고 이미 많은 스탭들이 있는데 어떻게 내가 한국책임목자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주님께서 저를 스탭으로 부르신다면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부르실 일이지 대학 졸업 후 10년이 지난 후에 부르신다 말입니까? 그러나 저는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를 갖고 배사라 선교사님과 말씀을 공부하고 나서 결단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로마서 10:l4절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이가 없으면 어찌 들으리요” 저는 이 말씀을 통해 내가 영적으로 목말라 죽어가고 있는 지성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어찌 그들이 듣고 믿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스탭 목자로 결단을 하였습니다. 저는 본래 어렸을 때부터 말을 더듬었고 영적인 리더로서 인간적인 능력을 갖지 못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무엘 목자님은 제가 UBF의 최고선배 중 하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제가 능력이 있어서 저를 부른 것이 아니고 제가 필요하기 때문에 부른 것으로 영접을 하고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영적인 권위 Dr. Samuel Lee 선교사님의 뒤를 이어 전국책임목자와 종로 2부(학사회)의 책임목자를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 골리앗과 싸우기 전 다윗처럼 사울왕의 갑옷을 받아 입었을 때와 같이 어색하고 옷이 너무 컸습니다. 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남모르는 많은 영적인 투쟁을 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종로 학사회에서 메시지를 전할 때도 전라도 사투리를 메시지 쓰는데서 고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 당시 말씀의 종으로 양떼들을 섬기기 위해서 금요일부터 주말은 센터에서 자고 기도하면서 메시지를 준비했습니다. 하도 제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하여서 말씀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저에게 제일 어려운 일은 전국 디렉터로서 선장과 같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를 위해 수시로 기도를 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3번 센터 건축역사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1978년에는 본부센터요 종로센터인 3층 센터 건축역사를 섬겼습니다. 물론 그 당시 김모세 목자님이 많은 수고를 하셨습니다. 1998년에는 3년 동안 본부 센터 건축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 당시 반대하는 산발랏이 하도 많아 저는 대부분의 머리가 그 당시 빠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희들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이와 같이 아름다운 선교센터를 건축하여주셨습니다. 저는 그 당시 다음과 같은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센터 건물 건축을 하는 것으로 오는 유익보다는 센터 건축을 위해서 기도의 응답을 받는 영적인 유익이 더욱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2001년에는 관악 3,5부 센터 건축을 하였습니다. 저는 98년부터 서울대학교 개척을 위해서 관악3부 목자의 직분도 겸하여 맡게 되었습니다. 매주일 종로에서 11시와 2시 반 메시지를 전하고 차를 타고 가서 5시에 관악 3부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저녁식사를 하고 나면 밤 8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요일에는 관악 기도모임과 요회 목자 보고모임을 인도하였습니다. 감사한 것은 그 동안에 매주일 4시에 종로에서 출발하여 5시까지 도착을 하여 메시지를 빠뜨리지 않고 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데모로 인해 종로와 서울역이 완전히 데모대에 의해서 막히고 경찰서 교통과로 전화를 하여 잘 빠져 나가는 길을 물어서 헐레벌떡 도착하여 메시지를 전할 때도 있었습니다. 관악 3부 센터 건축을 위해서 지난 98년에 IMF로 인해 땅가격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그 당시 센터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2개의 집을 동시에 계약을 하여 부지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이를 007 부지 매입작전이라고 불렀습니다. 2001년에는 종로 1부에서 정아브라함 목자님을 책임목자로 세우고 관악 5부 개척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최고 대학인 SNU 개척을 위해 UBF가 관악 1부, 3부, 5부를 세우고 개척할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제는 명실공히 서울대 캠퍼스 개척을 위해서 학생단체에서 가장 많은 리더들이 개척역사를 섬기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간 제가 한국 책임을 맡았을 때 전국 주일 집회가 650명이었는데 2000년대까지는 10배의 성장의 역사가 있었고 약 2,5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세계 85개국을 개척하는 역사를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종로 학사회는 시작할 때 약 주일집회가 90명이었는데 2000년대까지는 약 10배의 성장의 역사가 있었고 14개 챕터를 개척하는 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동안 UBF를 통해서 성령으로 크게 역사하시고 축복하신 것은 저 한 사람의 믿음과 능력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제가 잘 알다시피 자신은 사무엘 선교사님과 같은 카리스마와 영적인 지도자로서 능력이 부족한 자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한국 스탭 목자님들이 성령의 그릇을 굳게 이루고 각 챕터 요회 목자님들의 헌신과 기도를 축사하사 이와 같은 역사를 이룬 줄 믿습니다. 제가 그 동안 목자로서 가장 힘써 왔던 것은 매일 아침마다 제가 그 전날에 나의 죄와 한국과 전세계 형제자매님들의 죄를 회개하고 중보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절을 보겠습니다. 빌 3:12,14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 제가 선교일선에 나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힘써서 하고자 합니다. 첫째, 지혜의 능력인 영인 충만한 성령의 인도함을 받도록 기도하고자 합니다(12). 저는 세계를 개척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가면서 요절로서 빌립보서 3:12,14절을 잡았습니다. 그간 28년 동안 내가 이미 얻고 완전히 이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 제 사역에 있어서 제 2기를 맞이하여 저는 세계개척을 위해 미국으로 가고자 합니다. 한국에서 내가 무엇을 이뤘다고 포만감에 사로잡히지 않고 모든 것을 무로 돌리고 새롭게 출발코자 합니다. 저는 영적인 면에서 예수님께 잡힌 바 되고 예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통해 성령의 충만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자 합니다. 둘째, 저는 세계책임자로서 분명한 푯대를 잡고자 합니다(14). 2010년까지 전세계의 배가의 역사를 이루고 2041년까지 10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전세계 캠퍼스 개척역사를 섬기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분명한 실천세부계획을 가지고 줄기차게 기도하며 추진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 동안 전 세계 선교일선에서 피땀이 나도록 수고하신 여러 선교사님들과 한국 여러 목자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에게 사랑과 섬김과 기도를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도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주 안에서 전요한 드림
64 no image [사진] 종로센터에서 있었던 세계대표 파송 및 한국대표 취임 예배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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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2005-05-30
63 [사진] 전요한 박사님 세계 대표 취임-관악센터방문 파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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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 2005-05-29
62 no image [사진] Toledo Paul Hong 선교사님 관악센터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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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2005-05-22
61 no image [사진] 영종도 봄 수양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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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 2005-05-16
60 no image [사진] 그레이스 A. Lee 선교사님 관악센터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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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2005-05-16
59 no image [사진] 벚꽃놀이(김느헤미아, 레베카 선교사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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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 2005-04-17
58 no image [사진]관악산 등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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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 2005-04-06
57 [사진] BibleAcademy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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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 2005-03-18
56 no image 2월 2일, 27일자 군대에서 온 편지(서진우 형제) [2]
[레벨:1]김원용
251 2005-03-04
그냥 Paper 로만 있어서 저도 오늘에야 읽었는데 다른 분들을 위해서 여기에 본인의 허락없이 올립니다. 주소도 함께 올릴 테니 모두들 많이 편지해주세요. 선교지(?)에서의 편지군요... UBF 동역자님들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다윗 요회 서진우입니다. 지금은 67번 훈련병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명절 잘 보내고 계신지? Fellowship, 써빙을 함께 나눌 모습이 떠오릅니다. 떠나온지 무척 오래된 것 같지만 이제 주일 예배 한번 참석하지 못했을 뿐이군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곳의 시설은 군대라기에는 아주 좋습니다. 오늘은 설이라고 음료수 2개, 카스테라빵 하나, 약과&찹쌀떡을 주고 목욕도 시켜주었습니다. (덕분에 아주 배가 부르군요.) 이곳에 온지도 열흘 남짓 되어가지만 엄밀히는 2일차 훈련병입니다. 나머지는 오늘처럼 쉬는 날이거나 훈련 전 각종 검사를 받으며 보냈습니다. 그래서 아직 이곳 생활에 적응을 논의할 단계는 못됩니다. 남들도 받는 훈련 나라고 못 받으랴는 자신감으로 들어왔습니다. 정요한 목자님 이야기를 듣고 나도 훌륭한 훈련병이 되리라 다짐도 했습니다. 서울대 생이니 어떻게 잘 되리라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제대로 훈련받고자 하는 마음과는 한편으로) 군대에서 남는 시간 느긋하게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 생각을 해보자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처음 며칠, 각종 검사를 하며 보내는 동안은 순조로웠습니다. 군대가 뭐 이런가 할 정도로. 그러나 입소대에서 교육 연대로 옮겨온 후 사정이 좀 달라졌습니다. 입소식이 있던 날 저는 얼차려(Push up)자세 불량으로 따로 불려내어져 분대장 감독 하에 얼차려를 받았습니다. 힘이 달리는 저로서는 20개 푸쉬업을 하기 위해 40개 이상을 해야 했지요. 저는 녹초가 되 버렸습니다. (그나마 20개도 잘 봐준 셈이었습니다.) 저는 이 한 번의 얼차려로 폭삭 무너져버렸습니다. 갑자기 큰 두려움이 생겨 버렸죠. 앞으로도 얼차려 받을 일이 많을 텐데 매번 불려내어 오늘처럼 혼쭐이 나지는 않을까. 군기 교육대로 보내 지지는 않을까. 우울한 기분으로 종일을 보냈습니다. 한 번의 얼차려에 사내 놈이 이렇게까지 움츠러들다니 스스로에게 절망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아직은 웃지 못하지만) 이 일로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날과 그 다음날(주일) 만큼은 감히 성경을 무슨 교양서적이라도 읽듯이 보지도, 머리로 하나님이 과연 계신가 하며 있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많이 낮아져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주일 예배에 갔습니다. 찬양 소리에 눈앞이 찌잉 해지더군요.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려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수 1:9) 설교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지키신다. 두려워 말라' 대강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Powerful하고 은혜로웠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그냥 그말 그대로 위로가 되었고 '아멘'이 나오더군요. 설교 내용 중에 군대에서 눈물젖은 밥을 먹지 않아본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라는 명언을 들었습니다. 과연 공감이 갔습니다. 그러나 얼차려 한번에 흘린 눈물을 가지고 그 눈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몹시 나약하여 이런 것에 힘들어 했지만 그 것을 가지고 힘이 드니 어쩌니 해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예배 중에 여러 번 눈물을 밀어넣었습니다. 이틀차 훈련병 말이 길었습니다. 다음에는 훈련다운 훈련을 실제로 겪고 나서 이야기하겠습니다. 현재 저의 기분은 많이 나아져 있고 내무반 동기들과도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쪽 소식도 궁금합니다. 명아 목자님은 예배를 회복하셨는지, 학생회는 줄기차게 나아가고 있는지, 요회 식구들, 장막원들 근황은 어떠한지. 편지 한통 써주세요. 군인에게 편지는 꿀보다 달다 합니다. ^.^ 그리고 '기도해'주십시오. 그럼 건강히. 2005. 2. 10. 서진우 올림 추신 : 인금철 목자님 재우에게 목자님 만나보도록 편지하였습니다. 평일에는 종각역 부근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르바이트 하고 있을 거에요. 함께 피싱하였던 '송민호'형제님과도 연락하고 계신지? 피싱 용지는 우석 목자님에게 맡긴 가방 안 기도 수첩 안에 있습니다. 미처 전해드리지 못하였네요. -_-; UBF 동역자님들께 안녕하세요, 67번 훈련병 서진우입니다. 새학기가 임박했군요. 피싱역사로 인해 영육간에 많은 수고를 하실 목자님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 맘때면 방학이 끝나가는 학생 리더들은 군에서 속편하게 있는 제가 슬슬 부러웁기 시작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랬습니다.) ^.^ 저는 이제 당당 3주차 훈련병입니다. 2일차 훈련병 때 쓴 편지는 센타 주소를 알 수 없어 보내지 못하다가 친구(재우)의 편지를 통해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썼던 편지를 읽어보면서 담담하였습니다. 이제는 그만큼 이곳 생활에 적응하였다는 것이겠지요. 몸은 피곤할지언정 속은 전보다 편하게 되었습니다. 내무실 전우들이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함께 훈련받고 함께 웃고 떠들고 농담하고 불평하고 때로 함께 욕도 하지요.ㅋ 이들이 있기에 몸이 힘들어도 웃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전우들이 저를 친구로 여겨주고 관심 가져주는 것이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영적인 것은 아니지만 '인간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친구들. 이런 교제도 참 소중하고 필요한 것 같습니다. 반면에 저는 '목자의 심정'이니 '영적인 교제'니 하는 것을 생각하지만 자기 중심적이고 애가 좀 뻣뻣하다고 하겠습니다. 전우들 중에는 신학대에 다니는 이도 있습니다. 성경과 하나님도 잘 알고 있는 것 같고 무엇보다 믿음의 중심(소신)이 있는 친구입니다. 지나간 주에는 사격 훈련이 있었습니다. 지난 토요일 사격 담당 소대장은 주일에 사격보충훈련이 있을 것인데 꼭 종교활동(예배)에 가야겠는 사람만 가도록 하였습니다. 전보다는 적은 수의 인원만이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제 내무실 친구도 일어났지요. 저도 일어났습니다. 저는 그냥 왠지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UBF에서 몸에 벤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사실 보충교육에 빠지고 종교 활동 간 사람은 후에 불이익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다들 주저한 것이었겠지만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사격 결과는...당당히 합격하였습니다. 군사보안상 여유있게 합격하였다는 것만 알려드립니다. 아, 지난 토요일에는 세례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작년에 세례를 받았으나 받은 사람은 오면 기도해 준다고 하여서 참석하였는데 따로 배려받지는 못했습니다. 초코파이와 핫브레이크, 십자가 목걸이, 미란다, 영어성경, 교리만화책자가 탐나서 참석한 것만은 아닙니다. 많이들 와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뜻대로 살고자 약속하였습니다. 전우들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가슴에 댄채 세례를 받는 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물론 그냥 빠져나왔습니다. (세례를 받지 않고, But 초코파이는 받고) 저는 연무대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좋아합니다. 그 분의 설교는 논리가 치밀하지는 않지만 힘이 있고 진정이 담겨있는 듯 합니다. 지난주 말씀은 약할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3:9,10)이었습니다. 설교내용중에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적어봅니다. 영국 북쪽으로 청어잡이 어선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배들은 잡은 청어를 항구로 싣고 오는 과정에서 청어를 모두 죽게 하였는데(온도차이, 압사 등의 이유로) 한 노인의 배만은 청어를 산채로 잡아왔습니다. 모두 의아하여 비결을 물어보았더니 잡은 청어들 속에 청어의 천적인 뱀장어를 넣어 가지고 왔다고 말하였습니다. 청어들이 뱀장어에게 잡아 먹히지 않고자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온갖 고생을 하는 가운데 오히려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난이 강함을 가져다준 예라고 할 수 있겠지요. 2주일간 저희 소대는 배식을 담당하기로 되었습니다. 매 끼니마다 먼저 가서 준비하고 주말엔 2시간 가량 대청소를 했습니다. 그리하여 훈련이 없는 날에는 배식만 하고 지낸 기분이 됩니다. 220명의 훈련병을 위해 할당되는 양은 일정한데 그것을 골고루 나워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자라면 배식 분대장에게 온갖 책망을 듣고 남으면 훈련병들이 왜 남길 것을 조금 주냐고 아우성입니다. 맥아더는 말했습니다. 작전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할 수 없다. 우리들은 말합니다. 경계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할 수 있어도 배식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할 수 없다. 낙이라고는 식사 시간 뿐인 훈련병에게 밥문제는 예민할 수 밖에 없나 봅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국당번으로서 어려움이 좀 덜합니다. 어떻게 하면 모두가 불만없는 배식을 할 수 있을 까 고심하고 있습니다. ㅋ 계속해서 제 이야기 뿐이군요. 금철 목자님은 그리움을 담아 편지를 쓰라고 하셨지만 제게 그리움은 아직 낯선 감정입니다. 그래도 센타 소식 궁금합니다. 답장 한통 간구합니다. ^.^ 저는 3월 15일 퇴소예정입니다. 늦게 편지하시면 받을 수 없습니다. ^.^ 그럼 안녕히. 05. 2. 27 진우 올림 PS : 악필을 용서하소서
55 [사진]오병이어 음악회 파일 [1]
[레벨:20]서정수
239 2005-02-26
54 no image <공지> 2005년 믿음의 졸업 축하 예배 [1]
[레벨:0]조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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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no image 군으로 간 서진우선교사의 파송소감 파일 [2]
[레벨:17]김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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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인금철
171 200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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