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관악5부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35 no image [공지] 연요절 제출 [2]
[레벨:20]강호영
115 2006-01-15
34 no image 서울대생의 성향 조사 결과
[레벨:20]강호영
74 2006-03-13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2005년 2학기 학부 등록생 1391명을 대상으로 11월 한 달 동안 실시한 ‘서울대학교 재학생 요구 및 실태 조사’(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대학신문에 대대적으로 기사가 났습니다.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서 1면 기사는 여기에 올리고, 나머지 관련 기사는 링크했습니다. 기사 제목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서울대 대학신문 사이트 주소는 http://www.snunews.com 입니다. [메인 기사] 우회전하는 서울대생 정치성향 스스로 ‘진보적’ - 2000년 54.6%, 최근 31.2% 서울대 학생 중 60.4%가 "지지 정당 없다" 김성규 취재부 차장 sg12@snu.ac.kr '서울대학교 재학생 요구 및 실태 조사'는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소장 이재열 교수)가 지난해 11월 서울대 재학생 1391명(전체 재학생 대비 7.7%)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작성됐다. 서울대 학생들의 특성을 파악해 학생들의 의식 및 생활태도, 학습 습관, 진로에 대한 고민 등 학생들의 대학생활 전반에 대한 연구를 목적으로 진행된 이번 조사결과를 게재한다. 서울대 학생들의 정치성향이 과거에 비해 중도ㆍ보수화되고 있으며, 정치에 대한 무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부모의 소득이 많고 이른바 ‘강남 8학군’ 등 대도시 지역 출신일수록 보수성향은 더욱 뚜렷했다. 아르바이트 등을 통한 학생들의 소득도 부모의 학력ㆍ소득과 비례하는 모습이다. 이는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2005년 2학기 학부 등록생 1391명을 대상으로 11월 한 달 동안 실시한 ‘서울대학교 재학생 요구 및 실태 조사’(조사) 결과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자신의 정치성향을 묻는 질문에 ‘중도’라고 답한 학생들이 40.5%로 가장 많았으며, 진보와 보수라는 대답은 각각 27.5%, 25.0%로 비슷한 수준이었다(그래프 참조). 이는 지난 2000년 『대학신문』이 실시한 ‘서울대생의 정치의식’ 조사에서 자신의 정치성향이 ‘진보적’이라고 답한 학생이 54.6%였던 것에 비해 크게 중도ㆍ보수화된 것이다. 정당 선호도도 보수성향의 한나라당(17.8%), 진보 성향의 민주노동당(10.2%), 열린우리당(10.1%) 순이었으며 60.4%는 지지 정당이 없었다. 이는 예전에 비해 정치에 무관심한 학생들이 늘어난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의 중도ㆍ보수화는 아버지가 고학력ㆍ고소득층인 것과 연관성을 보인다. 학생들은 집안 소득이 높고 이른바 ‘강남 8학군’이나 대도시 고등학교 출신일수록 ‘보수적’이었다. 재학생들의 아버지가 전문직ㆍ관리직에 종사하는 비율은 전국 평균 (2004년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와「조선일보」, 한국갤럽이 공동 조사한 결과)에 비해 월등히 높았고(관리직 전국 평균 1.4%, 재학생 아버지 25.7%), 이는 학력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대학원 이상 전국 평균 1.8%, 재학생 아버지 24.5%). ‘진보적’ 단과대와 ‘보수적’ 단과대, ‘고소득’ 단과대와 ‘저소득’ 단과대도 갈렸다. 인문대 학생들이 자신을 가장 ‘진보적’으로 인식했고, 간호대ㆍ수의대ㆍ약대ㆍ사회대가 그 뒤를 이었다. 반면 의대ㆍ경영대ㆍ음대ㆍ치대 학생들은 자신을 ‘보수적’이라고 생각했다. 또 약대와 의대 등은 아르바이트로 60만원 이상의 고소득을 올리고 있는 학생들의 비율이 30% 이상인 반면, 사회대ㆍ공대 등은 10%대에 그쳤다. 집안이 고소득층인 학생들은 저소득층 학생들에 비해 아르바이트를 적게 했지만, 일단 아르바이트를 하면 고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또 아르바이트 수단으로 이른바 ‘막노동’을 포함한 건설업이나 서비스업 직종을 택한 학생들은 대부분 저소득층 학생들인 것으로 조사됐다. 인문대ㆍ농생대ㆍ생활대는 서울대 내 다른 학과로 전공을 옮기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타 단과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들 단과대에는 진로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는 학생들이 많았으며, 학문적 흥미나 자신의 적성보다 합격 가능성 때문에 전공을 택한 학생들이 많았다. 전체적으로 이 학생들의 상당수(40.2%)는 서울대 내 다른 학과로의 전과를 바라고 있었다. 전공교육만족도가 가장 높은 단과대는 법대와 의대였으며, 미대는 모든 단과대 중 유일하게 마이너스(-) 만족도를 기록했다. 한편 서울대 학생 100명 중 4명 꼴로 자살충동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31.5%의 학생들이 ‘혼전 동거’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다. ‘결혼을 전제하지 않은 혼전 성관계’에 대해서는 69.6%가 ‘가능하다’고 응답했다. 이번 조사는 서울대 재학생의 ▲사회의식과 가치관 ▲대학생활형태 ▲인구학적 구성비율 등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돼있다. [관련 기사] [관련 1] 집안소득, 출신지역 따라 보수ㆍ진보 갈려 [관련 2] 서울대 학생 아버지 대학원졸 24.5% [관련 3] 취업 전망도 물론 중요하지만… [관련 4] 대학원 진학 희망자 증가, 그 속내는? [관련 5] 10명 중 7명, “결혼 안 해도 같이 살 수 있다” [관련 6] 서울대생이 생각하는 서울대 이미지 [관련 7] 가족 소득 많으면 ‘알바’ 수입도 많다 [관련 8] “교수님과의 상담은 좀…” [관련 9] 솔로 : 커플 = 57 : 43 "평균적인" 서울대생들만 만나는거야 아니지만, 양들에 대해 참고가 될만한 조사라고 생각합니다.
33 no image 미적분학2 스터디 [2]
[레벨:20]강호영
63 2006-09-01
32 no image 미적분학1과 공학수학 강의 추가 [2]
[레벨:20]강호영
48 2007-06-20
31 미국에 잘 도착하였습니다. 파일 [7]
[레벨:20]강호영
112 2007-07-25
30 no image Purdue 수양회 때 국제전화 [6]
[레벨:20]강호영
99 2008-07-13
29 no image 봄수양회 장소 및 계획 [6]
[레벨:20]강호영
87 2011-04-17
28 no image 센터 프린터 설정 변경 [2]
[레벨:20]강호영
43 2011-04-22
센터 주 프린터를 프린터복합기(복사기)인 삼성 SCX-6545N으로 변경하였습니다. 인쇄 품질이 중요한 경우에만 Lexmark E260n(기존 프린터)를 사용하여 주세요. 이는 장당 토너 비용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센터 좌우 컴퓨터에서 인쇄하시면 기본적으로 복사기에서 인쇄되어 나옵니다. 인쇄할 때 필요한 경우에만 Lexmark 프린터를 선택해서 쓰시기 바랍니다. 부탁드립니다. [노트북 등에서 인쇄하실 경우] 기존에 IP 주소 192.168.0.7로 연결되어 있던 Lexmark 프린터는 더이상 쓰실 수 없습니다.(랜포트 부족) 오른쪽 컴퓨터(WORKGROUP의 MYMAIN)가 켜져 있을 경우 이 컴퓨터를 통해 Lexmark를 공유해서 쓰실 수 있습니다. 삼성 복합기 SCX-6545N은 IP 주소 192.168.0.8로 연결하실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을 추천합니다. 먼저 삼성 홈페이지(http://www.samsung.com/sec/support/detail/supportPrdDetail.do?menu=SP01&prd_ia_cd=06012600&prd_mdl_cd=&prd_mdl_name=SCX-6545N&prd_ia_sub_class_cd=P)에서 드라이버를 다운받아 설치하신 다음에 [로컬프린터] [TCP/IP 포트] 192.168.0.8을 선택하시고 [프린터 목록]에서 [삼성] [SCX-5120 Series]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혹은 삼성 Universal Driver [설정]에서도 찾으실 수 있습니다. 또한 왼쪽 컴퓨터가 켜져 있는 경우 이 컴퓨터를 통해서 공유해서 쓰실 수도 있습니다. 방법을 모르시겠으면 강호영 목자에서 문의해주세요.
27 Summer School 강의 파일 [8]
[레벨:20]강호영
71 2011-06-05
26 no image Summer School OT(날짜변경)
[레벨:20]강호영
32 2011-06-13
25 Summer School 시간표(6/24 수정) 파일
[레벨:20]강호영
41 2011-06-18
24 no image [자료] 2012년 천로역정 심포지엄 소개 [2]
[레벨:20]강호영
51 2012-10-28
2012년 천로역정 심포지엄 소개 1. 천로역정과 저자 존 번연 천로역정의 원제는 “The Pilgrim’s Progress”로서 “순례자의 여로(전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1895년 최초의 번역판이 나올 때 “天路歷程”, 즉 “천국으로 가는 경로”라는 이름을 택한 이후로 이 제목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하나님 나라로 가는 순례자의 인생길을 실제 여행에 비유하여 서술한 소설입니다. 1678년 제1부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1684년에 제2부가 출판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함께 기독교 3대 고전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담고 있는 내용이 깊이가 있으면서도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어서 많은 사람에게 읽혀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이 책을 읽고 많은 영적인 유익과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든지 기독교가 전파되면 먼저 성경이 번역되고 그 다음으로 천로역정이 번역될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천로역정은 근대 최초의 번역 소설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믿음의 선배들도 이 책을 읽으면서 고난을 이겨낼 힘을 얻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 John Bunyan(1628~1688)은 1628년 England의 Bedford 근처 Elstow에서 땜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책 읽기와 글 쓰기 정도 외에는 거의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하였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땜장이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알기 전,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마귀에게 사로잡힌 바 되어 그의 뜻을 좇는 것”이 그의 기쁨이었으며, 거짓말하고 신성 모독하는 것에 있어서 그와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신실한 믿음의 여인이었던 그의 아내가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온 두 권의 신앙 서적을 읽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악한 행실을 고칩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구원의 확신이 없었고 온 영국에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은 없을 거라는 자기 의로만 가득해졌습니다. 그러던 중 Bedford에 갔다가 우연히 서너 명의 가난한 여인들의 말을 엿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온통 기쁨으로 예수님의 공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은혜를 나누며 기쁨이 충만한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후에 Bunyan은 이들의 대화에 끼어들었고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친 Bedford 침례교회의 John Gifford 목사를 찾아가 그의 카운셀링을 받습니다. Gifford 목사는 그의 좋은 멘토요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Bunyan은 성경을 정말 철저히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마귀의 유혹 사이에서 치열한 내적인 투쟁을 하면서 복음을 영접합니다. 그는 자신이 선택 받지 못한 자가 아닌지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한 소망 없는 자가 아닌지 말씀 앞에서 철저히 기도하며 씨름합니다. 치열한 영적 투쟁 끝에 구원의 확신을 얻고 거듭나자 그는 자기가 받은 은혜를 소감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그와 함께 하는 성령의 능력을 본 사람들은 그를 초청하여 복음을 전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했고, 그는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나중에는 담대하게 영국 여러 교회를 돌며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러나 Bunyan이 활동하던 시기는 청교도 혁명 이후 다시금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던 시기로 국교도가 아닌 사람을 철저히 핍박하던 시기였습니다. 영국 국교회는 개신교이기는 하지만 왕이 교회의 수장이 되는 영국의 국교로서 철저한 성직자 계급과 권위주의적인 예배 제도를 가졌습니다. 이로 인해 복음이 정확하게 선포되지 못했습니다. 청교도란 영국의 칼빈주의자들을 가리키는데 복음 중심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청교도가 주류인 의회파가 왕당파를 몰아낸 청교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다시 왕정이 회복되자, 왕당파는 청교도를 핍박했고 국교회에서 성직자로 임명되지 않은 사람이 설교하는 것을 반역 음모를 가진 불법 집회를 인도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에 살았다면 오늘 메시지를 전하신 인금철 목자님이나 여름 수양회 메신저 목자님들도 국교회 목사가 아닌데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을 것입니다. 평신도인 Bunyan은 이런 형편을 잘 알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각 청교도 교회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약 5년 간에 권세 있는 메시지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한 Bunyan은 1660년 결국 불법 집회를 인도했다는 죄목으로 당국에 체포됩니다. 당초 3개월 형을 받았지만, 출옥한 후에 설교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끝내 거절했기 때문에 결국 12년 간 옥살이를 합니다. 이 기간 동안에 Bunyan은 사형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싸우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듭니다. 억울한 옥살이였지만 그는 자신의 생애에서 이 때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탁월한 통찰력을 가진 적이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감옥에서 그는 죄수들에게 설교를 하고 여러 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 가운데 나온 최고의 작품이 바로 천로역정입니다. 1672년 출옥 후에는 그의 목자였던 Gifford 목사의 뒤를 이어서 Bedford 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1688년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까지 복음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탁월한 복음 전파자로 살았습니다. 천로역정은 바로 Bunyan의 회심 이전까지의 치열한 영적 투쟁과 회심 후 복음을 전파하던 과정, 또 12년 옥살이의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녹아 들어 있는 역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이 놀라운 작품을 쓰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깊이 읽으면 신앙 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어려움들을 이길 힘과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 우리의 목적지인 천국에 대한 소망을 충만하게 얻을 수 있습니다. 2. 천로역정 해제 천로역정은 저자의 꿈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가 꿈 속에서 본 크리스챤이라는 인물의 여행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믿는 사람의 대표입니다. Bunyan 자신이기도 하고 바로 우리들이기도 합니다. 그가 천국까지 걸어가는 순례길은 신자들의 인생길을 상징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곧게 뻗은 좁은 길을 따라 하나님 나라까지 나아갑니다.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의 친구가 되기도 하고 그와 논쟁을 하기도 하며 그를 도와주거나 유혹하기도 합니다. 믿음, 소망은 그의 동행자가 되고 허례, 위선 같은 사람은 그와 논쟁하며, 데마, 아첨쟁이 같은 사람은 그를 유혹하여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이 사람들은 그 이름 그대로 신앙 생활에서의 미덕이나 악덕을 상징합니다. 지명도 이런 상징성을 가지는데 해석자의 집과 아름다움의 집이 있는 반면 허영의 시장과 의심의 성도 있습니다. 크리스챤은 순례길에서 기쁨과 위로를 얻기도 하고 복음을 분명하게 증거하기도 하며 죄에 넘어지기도 하고 마귀와 싸워 이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광스러운 천국에 도착하여 천사들의 영접을 받으며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영원한 복락을 누립니다. 천로역정을 통해 내가 신앙 생활에서 어떤 단계에 있는가 점검할 수 있습니다. 또 내가 어떤 죄에 붙들려 있는가 깨닫고 크리스챤과 같이 천성으로 가는 좁은 길로 속히 돌아갈 수 있습니다. 3. 천로역정 심포지엄의 영적인 유익 천로역정 심포지엄은 천로역정을 읽고 그 중 본인이 은혜를 받았거나 감명을 받은 부분을 선택하여 그 내용을 정리하고 자신에게 적용하여 발표하는 독서 심포지엄입니다. 여러분의 선배들도 천로역정을 통해 하나님 나라로 끝까지 가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의 무지를 회개했고 어떤 분은 자신의 믿음 없음을 회개했습니다. 이로 인해 신앙 생활을 끝까지 감당할 힘을 얻었습니다. 잠시 사진을 통해 선배들이 어떻게 심포지엄을 통해 천로역정을 기쁘게 소감과 연기로 표현했는지 보겠습니다. http://www.snu5ubf.kr/xe/inside_news/1893 http://www.snu5ubf.kr/xe/inside_news/27590 천로역정을 단순히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심포지엄으로 여러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에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첫째, 천로역정의 내용을 다시 돌아보면서 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읽고 책을 덮으면 금방 잊어버리기 쉬운데, 이를 발표와 연기로 표현하면 기억에 깊이 남습니다. 천로역정은 천국까지 가는 지도와 같아서 신앙 생활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이 내용을 기억하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천로역정 심포지엄을 하고 나면 천국 가는 길을 생생하게 미리 체험한 것과 같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가져갈 정확한 지도를 얻게 됩니다. 둘째, 천로역정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회개하며 새롭게 방향 잡을 수 있습니다. 천로역정을 보면서 자신의 현재 상태와 비슷한 부분을 한 군데 이상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세속 현자를 만난 크리스챤처럼 세상의 철학과 사상에 귀가 솔깃하여 따라가고 있을 수도 있고, 절망 거인에게 붙잡힌 것처럼 의심과 절망에 빠져 믿음의 길을 갈 힘을 많이 잃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 때 크리스챤이 말씀에 기초하여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보면 회개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셋째, 함께 하는 형제 자매님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라난 환경도 생각도 성격도 다른 형제자매님들을 한 팀이 되게 하신 데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다른 형제자매님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나와 똑 같은 문제로, 혹은 전에 겪었던 문제로 투쟁하는 분들의 진솔한 소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문제에 있어서 자기보다 더 깊이 성찰하고 투쟁한 분의 소감도 들을 수 있습니다. 크리스챤도 믿음과 소망이라는 동료를 얻었을 때 위로를 얻고 서로 도와주고 서로 격려하며 천성길을 끝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천로역정을 하는 동안 구원의 징표인 봉인 된 두루마리를 릴레이 하듯이 다음 사람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이 팀플레이가 큰 힘이 됩니다. 천국은 이처럼 한 팀이 되어 함께 갈 때 더 즐겁고 안전하게 갈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천로역정을 통해 당시 나태와 거만의 죄 문제가 우는 사자가 돌아다니는 위험한 길에서 잠을 자는 것과 같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게으르고 교만하면서도 큰 문제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이 부분이 큰 경계가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도 이 죄 문제를 인식하고 소감으로 투쟁하게 된 것은 천로역정에서 본 상징의 힘이 컸습니다. 또한 천로역정 심포지엄을 통해 무엇보다도 천국에 가고자 하는 소망이 커졌습니다. 이 세상 순례길 끝에는 나를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주신 임금님이 다스리고 계신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사실이 제게 힘을 주었습니다. 신앙 생활을 이제 막 시작하신 분이든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신 분이든 천로역정 심포지엄을 통해 큰 영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의 축제에 나와서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서로 격려할 수 있도록 여러분을 초청합니다. <참고문헌> 1. John Bunyan, The Pilgrim’s Progress (천로역정) 2. John Bunyan, Grace Abounding to the Chief of Sinners (죄인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 3. 오병학 (1994), 신앙위인전기 시리즈 존 번연, 규장 4. 김동언 (1998), 텬로력뎡과 개화기 국어, 한국문화사 참고로 천로역정 원작에 충실한 크리스찬 영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자막 없음)
23 no image [자료] 2015 봄수양회 특강 "물리학자가 보는 창세기" 파일 [2]
[레벨:20]강호영
66 2015-05-06
2015년 봄수양회 특강 물리학자가 보는 창세기 말씀 / 창세기 1:1-25 요절 /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강의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yUE4MG6fY3A 지난 4월 초 세계 최대의 입자 가속기인 Large Hadron Collider (LHC)는 2년 동안의 휴식과 정비를 마치고 재가동되었습니다. 75억 유로, 현재 환율로 9조원에 달하는 비용을 들여 만든 이 기계는 스위스-프랑스 국경에 걸쳐 있으며 지하 175m에 둘레 27km짜리 터널 속에 들어 있습니다.[1] 이 실험에 100개국 이상에서 온 1만명 이상의 과학자와 기술자가 동원되었습니다. 이 가속기는 지극히 작은 입자를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가속하여 충돌시키는 장치입니다. 이를 운용한다고 해서 당장 응용 성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경제적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도대체 인류는 이런 가속기를 왜 만들고 실험하는 것일까요? LHC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말로 대답하면 우주의 초기 상태를 재현하고 모든 물질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 한 가지가 궁금해서 이런 거대한 기계를 만들어 수많은 과학자들이 탐구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우리의 기원을 알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이것이 과학을 하는 근본 이유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성경의 창세기도 같은 문제 의식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없이는 우리 인생의 의미도 목적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장엄한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온 인류가 그토록 알고자 해온 문제에 대한 해답입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이 해답을 받아 들이고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았습니다. 그 중에는 과학자도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과 종교, 과학과 성경이 대립된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혹은 객관적인 세계는 과학에게 맡기고 성경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격언으로만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과학의 놀라운 진보가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객관적인 세계는 과학에게 모두 맡겨도 되고, 우리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완전한 대답도 과학이 줄 수 있는 것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과학이 무엇이며 과학자들은 무엇을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또한 과학과 성경, 특히 창세기가 대립되는지 조화되는지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2] 1. 무엇이 과학인가? 1.1 과학에 대한 오해 우선 과학이란 무엇일까요? 과학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과학기술을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삶을 편리하게 해주는 스마트폰, GPS 시스템, 비행기로부터 CT나 MRI처럼 발달된 의학 기구, 나아가 무시무시한 전투기나 핵폭탄을 떠올립니다. 많은 사람이 과학에 열광하고 과학 연구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과학기술이 주는 혜택과 과학의 성취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과학의 열매이지 과학 그 자체는 아닙니다. 오늘날 과학에 대한 오해는 대부분 과학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에서 출발합니다. 많은 영화와 소설에서 과학자는 문제를 척척 해결하고 세상의 문제를 푸는 해답처럼 나옵니다. 최근 영화 『인터스텔라』의 광고 카피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가 과학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를 잘 요약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자가 생각하는 과학과 대중이 생각하는 과학은 상당히 괴리되어 있습니다. 과학에 대한 언론 보도나 대중 과학 서적은 이런 현상을 심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의 연구는 매우 제한된 조건에서 이루어지며 그 답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도 조심스럽습니다.[3] 하지만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야 하는 과학 기사는 성과를 과장하며, 과학적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인도합니다. 이 과정에서 명성을 얻고 연구비를 얻어야 하는 과학자와 대학은 이를 방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중 과학 서적은 유익한 면도 있지만 조심스럽게 읽어야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 책들의 전반부는 대개 과학적으로 이미 입증된 사실을 잘 설명합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책의 재미를 위해서, 혹은 아직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이론을 홍보하기 위해서 입증되지 않은 가설 설명으로 가득합니다. 예를 들어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를 보면 전반부는 양자 역학과 상대성 이론 같이 실험적으로 잘 검증된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후반부에는 초끈 이론이나 허수 시간 같이 제안만 되고 검증된 적이 없는 이론을 설명하는데 마치 전반부의 이론들처럼 후반부의 이론도 확실한 사실인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나아가 결론에서는 과학과 우주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내놓습니다. 과학자도 철학을 말할 수 있지만, 이는 과학이 아닙니다.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저자의 철학도 과학으로 받아들일 위험이 있습니다. 분명 과학자들이 논문으로 발표하는 공식적이고 신중한 연구 결과와 과학 기사나 대중 과학서적을 통해 얻게 되는 과학 지식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C.P. 스노우, 『두 문화』, 오영환 옮김, 사이언스북스(2001) 1.2. 과학적 방법론 그렇다면 진짜 과학은 무엇일까요? 과학을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인 정의에 따르면, 과학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해 실험과 관측으로 검증 가능한 체계적인 지식을 쌓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과학적 방법론에 따르는 학문이 과학입니다. 과학적 방법론은 우리가 고등학교 과학책 처음 부분에서 배우게 됩니다. 먼저 관찰을 통해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을 세웁니다. 이 가설을 실험과 관측을 통해 검증하여 반복적으로 옳은 것으로 증명되면 가설이 이론이나 법칙이 되는 것이고 아니면 버려집니다. 인문학이나 사회학도 이 방법론을 따르면 인문과학, 사회과학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과학적 방법론에서 중요한 것은 가설과 실험, 관측입니다. 가설이 없으면 어떤 실험을 해야 할지도 알기 어렵고 데이터를 해석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가설은 실험이나 관측으로 검증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실험은 실험군과 대조군을 설정하고 엄격한 변인 통제를 한 후 통계적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4] 이 검증은 한 번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 사회에 논문으로 결과를 발표함으로써 다른 과학자들이 또 다른 실험으로 독립적으로 검증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하면 이론이나 법칙이 됩니다. 이렇게 가설을 실험과 관측을 통해 엄밀하게 검증하는 방법이 과학적 방법론입니다. 과학적 방법론은 연구자가 범할 수 있는 여러 오류를 방지합니다.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결과만을 모으는 오류, 우연히 한 번 일어난 현상을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오류 등을 막아줍니다. 과학자 사회의 검증을 통해 재현 가능한 결과만 살아남습니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가설이 옳은지에 대해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 심판자가 됩니다. 실험과 관측이 중요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사람의 편견이 개입할 여지를 줄여주고 자연에게 객관적인 판단을 맡깁니다. 이것이 과학적 방법론이 그토록 강력한 이유입니다. 물론 과학적 방법론의 한계도 잘 알아야 합니다. 첫째, 이는 철저히 귀납논리를 따라갑니다. 지금까지 하얀 백조만 보았다고 해서 검은 백조가 없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검은 백조 한 마리를 발견하는 순간 앞서 옳은 것으로 판정된 이론은 무너집니다. 아울러 이는 과학이 정의상 하나님의 뜻대로 주어지는 초자연적인 사건인 기적의 가능성에 대해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반복적인 실험을 할 때마다 하나님이 기적으로 응답해주시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5] 과학은 초자연적인 사건을 검토해본 후 이것이 진짜 기적인지 자연 현상인지 혹은 속임수인지를 구별하는 역할을 할 수는 있습니다.[6] 그렇지만 기적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수치화하기 어려운 분야일수록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돈이 많을수록 행복하다는 가설을 검증하려면 행복을 수치화할 수 있어야 하는데, 행복도라는 것이 엄밀하게 정의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수치화한다고 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탐구하는 대상의 복잡성이 늘어날수록, 혹은 직접 실험하거나 관측하기 어려울수록 신뢰도가 떨어집니다. 반복적인 실험을 통해서 철저하게 규명된 기본적인 물리 법칙은 믿을 만 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변수가 개입되고 관측이 불완전한 자연사는 신뢰도가 떨어집니다. 지구의 역사에 대한 이론이 그 동안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보십시오. 또 임상 과학적 방법론이 정립된 후로도 질병 치료 방법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보십시오. 모든 과학적 지식이 동일한 신뢰도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한계와 적용되는 조건을 잘 살펴야 합니다. 넷째, 무엇보다도 과학은 ‘어떻게’에 대해서는 효과적인 답을 하지만, ‘왜’에 대해서는 불완전한 대답밖에 줄 수 없습니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은 중력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왜 이런 중력이 존재하며 왜 이런 형태인지에 대해서 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중력의 본성이나 본질에 대해서 뉴턴에서 아인슈타인으로 패러다임 전환은 있었지만 질문을 더욱 깊은 수준으로 끌어간 것일 뿐입니다. 과학적 방법론은 만능이 아니며, 이를 통해 얻은 결과는 신중하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홍성욱, 『과학은 얼마나』, 서울대학교출판부(2004) 1.3. 과학주의 이처럼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검증할 수 있는 지식만이 과학입니다. 하지만 과학에 대한 오해로 인해 과학의 일부인 것처럼 보여지는 과학주의가 있습니다. 과학주의는 과학적 지식이 사실에 대한 유일한 지식의 원천이고 가장 우월한 세계관이라는 주장입니다. 나아가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종교는 열등하거나 무의미하며, 과학이 진보하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 것이라고 봅니다. 이는 과학 자체에 대한 신앙이라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SNULIFE에서 전도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과학만 믿어요”하면서 거절한다는 한 학생의 댓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과학주의입니다. 보통 과학주의는 자연스럽게 자연주의로 이어지고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을 정당화하는 데 쓰여집니다. 모든 시대 모든 사회는 세계관을 필요로 합니다. 세상의 근본 문제에 대한 잠정적인 답이라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신화를 만들어 세계를 설명했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은 아폴론의 수레가 태양을 끌고 달리기 때문이고, 번개가 치는 것은 제우스가 분노한 결과라고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세계관의 일부였습니다. 현대에는 이것을 과학이 대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과학적 지식이 어떻게 검증되었고 어떤 한계를 가진 것인지 잘 모르면서도 소위 “과학적”인 설명을 믿습니다. 과학주의적 설명은 우리가 왜 존재하고 우주가 운행하는지에 대한 현대의 신화가 되었습니다. 현대 과학주의자들이 퍼뜨리는 신화의 핵심은 모든 것이 우연에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우주도 우연히 생겨났고, 생명도 우연히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인생도 우연히 생긴 것이라는 것이 이 신화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세계관인 이상 이것은 다른 경쟁적 세계관과 대등한 링에서 겨루어보아야 합니다. 세계관은 증명이 불가능한 전제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관과 종교는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우며, 이는 과학주의가 또 다른 종교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와 모든 것이 우연의 법칙을 따르는 자연만으로도 설명된다는 전제는 과학주의자들의 신앙이지 증명된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전제들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나아가 과학주의의 전제를 인정하더라도 내부 모순이 발생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의 이성이 우연과 진화의 산물이라면 우리의 논리와 과학적 탐구를 믿을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과학주의의 주장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믿을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또한 우연히 세상이 생겨났다는 주장을 믿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우주의 근본 법칙인 물리 법칙과 물리 상수가 너무나 정교하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과학주의는 매우 부실한 세계관이자 신화에 불과합니다. 이런 과학주의 무신론 과학자들이 몇 명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대표적인 사례인데, 그는 그의 저서 『만들어진 신』에서 종교를 비웃고 무신론이 과학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관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를 매우 피상적으로 이해하며 현대 종교학과 신학에서 극복된 프레이저 경의 견해를 가지고 종교를 정의해서 공격합니다.[7] 나아가 과학을 신봉한다고 하면서 종교 바이러스니 밈(meme)이니 하는 가설로 종교의 전염성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용어만 과학적으로 보일 뿐, 과학적 주장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신을 믿게 하는 밈이 뇌에서 뇌로 건너 다니는 것은 관측된 적도 없고, 실험적 증명도 불가능합니다. 그는 과학자라면 당연히 무신론자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과학을 통해서 증거들을 검토한 사람들 중에는 창조주를 인정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앨런 샌디지라는 천문학자는 처음으로 정확한 허블 상수와 우주의 나이를 측정하고 퀘이사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는 저명한 무신론자 과학자로서 1985년 미국 댈러스에서 열린 과학과 종교에 관한 회의에 초청 받았습니다. 모두 그가 무신론을 지지하는 강연을 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그는 물질, 시간, 공간, 에너지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태초에 어떤 초월적 존재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과학적 증거를 검토한 끝에 기독교인인 된 것을 고백했습니다. 일부 과학주의자들의 기대와 선전과는 달리 신을 믿는 과학자들은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줄어들지도 않았습니다. 1916년 과학자들에게 인류와 적극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신을 믿는지에 대해 물은 결과 40%가 믿는다고 했고, 40%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1997년 완전히 똑같은 질문을 한 결과 여전히 40%의 과학자가 신을 믿고 있었습니다.[8]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신을 믿는 과학자가 줄어들리라는 가설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무신론적인 과학자들조차 과학 때문에 무신론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성향과 믿음 때문에 무신론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다윈주의에 대한 반대 서명을 모으는 운동[9]이 있습니다. 여기에 서명한 수백 명의 과학자들은 현직에서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다윈주의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을 공개적으로 표명했습니다. 도킨스의 기대와는 달리 과학주의는 과학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과학주의라는 증명할 수 없는 세계관에 기초하여 자기의 철학적인 견해를 말하고 있을 뿐 과학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경우 과학자로서의 권위를 내려놓고 철학적 논증을 통해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과학주의는 결코 과학이 아닙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과학주의자가 아닙니다.[10] 알리스터 맥그라스, 『도킨스의 신』, 김태완 옮김, SFC(2007) 알리스터 맥그라스 · 조애나 맥그라스, 『도킨스의 망상』, 전성민 옮김, 살림(2007) 앤터니 플루, 『존재하는 신』, 홍종락 옮김, 청림출판(2011) 1.4. 과학철학과 과학사회학의 응답 과학주의는 과학에 대한 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과학이 과연 절대적인 진리이고 다른 학문에 비해 우월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20세기부터 많은 학문적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 출발은 논리 실증주의라고 하는 주로 빈 학파가 주장한 사상에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이들은 형이상학과 신학은 검증 불가능한 진술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무의미하며, 논리적이거나 실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주장만 의미가 있다고 하면서 논리학, 수학, 자연 과학적 지식의 우월성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주장의 기초가 되었던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이 비트겐슈타인 자신으로부터 반박을 당했습니다. 나아가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가장 엄밀한 수학에서조차도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명제가 있다는 것을 보이면서 점차 논리 실증주의는 빛을 잃었습니다. 빈 학파와 교류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던 칼 포퍼는 과학의 정의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는 과학에서 최종적인 진리란 없으며 반증 가능성이 있는 것만이 진짜 과학이라고 주장합니다. 과학의 핵심은 자기 비판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과학 발전의 성격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이루어집니다. 토머스 쿤은 그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을 역사와 사회적 맥락 속에서 바라봅니다. 그는 과학자들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 내는 대담한 모험가가 아니라 오히려 확립된 세계관 속에서 작업하는 퍼즐풀이자에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쿤은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도입합니다. 정상과학, 즉 이미 과학자들 사이에서 인정 받은 과학이 패러다임으로 작용하여 과학자의 인식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무너지는 과학 혁명이 때로 가능한데, 과학자들은 기존 패러다임의 영향 때문에 기존 이론과 다른 결과가 나타나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새로운 결과가 반복해서 나타나면 그제서야 과학자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이 그러했고, 뉴턴 역학에서 양자 역학으로의 전환이 그러했습니다. 현대 과학철학과 과학사회학은 과학도 어떤 고정된 진리가 아니며, 과학자들도 완전한 진리 탐구자가 아니라 당대의 패러다임에 종속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주장했습니다. 게다가 현대에는 과학이 산업화되면서 연구 자금을 내어주는 기관에 따라 결론이 바뀌는 사태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담배 회사가 연구 자금을 대주는 경우에는 담배의 해악을 말할 수 없고, 특정 약품 회사가 돈을 대주는 경우에는 경쟁 약품의 부작용을 과장해야 합니다. 이는 과학자가 사회와 분리되어 있는 고고한 진리 탐구자가 아님을 잘 보여줍니다. 따라서 과학적 주장도 비판적 검증이 필요하며, 다른 학문에 비해 우월성이나 우선권을 가진 학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과학자가 자신의 철학적 편견에 따른 견해를 과학적인 것처럼 말할 때가 있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주장은 과학과 분리해서 보고 철학적 논증에 따라 판단해야 합니다. 토마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김명자 옮김, 까치글방(1999) 칼 포퍼, 『추측과 논박: 과학적 지식의 성장』, 이한구 옮김, 민음사(2001,2002) 코페르니쿠스 외, 『과학고전선집 – 코페르니쿠스에서 뉴턴까지』, 홍성욱 편역, 서울대학교출판부(2006) 지아우딘 사더, 『토마스 쿤과 과학전쟁』, 김환석 · 김명진 옮김, 이제이북스(2002) 홍성욱, 『과학은 얼마나』, 서울대학교출판부(2004) 윌리엄 브로드 · 니콜라스 웨이드,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 김동광 옮김, 미래인(2007) 2. 창세기와 과학 2.1. 창세기 1장의 특수성 이제 과학과 창세기의 관계를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과학주의자들은 창세기 1장을 과학과 모순되며 과학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신화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을 조심스럽게 읽으면 본문이 다른 신화와 강력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다른 신화에 섞일 수밖에 없는 문화적인 요소가 없습니다. 보통 신화에는 첫 신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느니, 거대한 기둥들이 세상을 떠받히고 있었다느니 하는 문화적 요소가 반드시 포함됩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에는 이런 문화적 영향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이집트의 창세 신화에서 신은 물에서 나타나서 세상을 헤매다가 발 디딜 곳을 만들고자 땅을 만듭니다. 여기서 벌써 중력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발 디딜 곳으로 내려간다는 발상 자체가 중력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무로부터 창조를 말합니다. 시공간이나 중력같이 고대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조차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고대인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는 창세기가 결코 고대인의 머리 속에서 나온 신화가 아님을 간접적으로 증명합니다.[11] 2.2. 창세기를 읽는 바른 방법 그러나 창세기 1장을 읽을 때, 잘못된 성경 해석 방법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중요한 단계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원 저자가 무엇을 의도하였고 당시 처음 이를 듣고 읽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사람들에게 과학적인 지식을 주기 위해 창세기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는 당시 사람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그들의 언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용어가 오늘날 과학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라고 해서 비판하면 안됩니다. 하늘에 있는 광명체 중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고 태양 빛을 반사하는데도 광명체라고 했다고 엄밀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것은 부당한 비판입니다.[12] 광명체라는 단어는 light emission하는 물체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reflection하는 물체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역으로 창세기의 문장들을 과도하게 해석하여 창세기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해석해도 곤란합니다. 예를 들어 궁창 위의 물을 노아의 홍수 이전까지 하늘 위에 있었던 수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창세기 저자가 의도한 해석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성령께서 저자가 깨닫지 못했어도 심어 놓으신 의미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랬다면 다른 본문을 통해 증명되거나, 신빙성 있는 과학적 사실로 증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집중하고 본문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해석이 다양하게 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무에서부터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질서 있고 심히 좋게 창조하셨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2.3. 창세기를 보는 크리스천 과학자들의 견해 창세기를 바라보는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의 견해는 몇 가지로 갈립니다. 첫째, 전통적인 창조론(창조 과학)이 있습니다. 이는 성경의 창조 과정을 있는 그대로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들은 진화론을 비판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창조론이 옳다고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창조론은 진화론의 증명되지 않은 기초를 공격하여 그 실체를 드러냈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둘째, 지적설계론이 있습니다. 과학이 지적 설계자가 창조한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낼 수 있다고 보고 정보 이론에 기초하여 지적 설계자를 증명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이 좋은 예입니다. 예를 들어 박테리아의 편모는 지극히 복잡하고 효율적인 세포 기계입니다. 여기서 단 한 부품이라도 없어지면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는 누적적인 진화로 이런 편모가 생겨났다고 하는 주장에 대한 강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더 근본적으로 DNA에 새겨진 정보는 DNA를 만드는 물리, 화학적 과정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마치 종이와 잉크가 있다고 해서 책에 적힌 정보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정보는 지적 설계자의 개입을 필요로 합니다. 지적설계론은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여 지적 설계자의 개연성을 발견했다는 중대한 의의가 있습니다. 셋째, 전통적 견해가 있습니다. 앞의 견해들은 의의가 있지만 창세기를 이해할 때는 전통적인 견해를 따르는 것이 가장 균형 잡힌 방법일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떤 성경 본문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러한 본문을 당시 우세한 과학 이론들에 얽매여 해석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모호한 문제들과 관련해 우리 믿음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여러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본문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창세기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의 신비가 담겨 있고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문제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의 시간으로 제시된 7일이 24시간이 일곱 번 반복된 것이 아니라고 다른 성경 본문을 들어 해석했는데, 이는 현대에 밝혀진 시간의 상대성을 이해하면 매우 앞선 통찰입니다. 시간은 관찰자에 따라 다르게 흘러갑니다. 상대성이론을 이해한다면 신적 관찰자의 속도나 중력에 따라 시간을 다르게 측정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본래 의미를 해치지 않고 과학과 대립하지 않으면서도 창세기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봅니다. 과학과 신학(성경)은 다른 영역이기 때문에 연역적으로 한 쪽에서 다른 쪽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고 논리 구조도 다릅니다. 그러나 과학과 성경이 서로 모순이 없음을 보임으로써 학제간 교류와 마찬가지로 서로 교류하고 상호 지지를 할 수 있습니다. 2.4. 물리학자의 눈으로 본 창세기 그렇다면, 창세기와 과학이 상호 지지를 해줄까요? 저는 물리학자의 눈으로 이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 과학자와 철학자, 신학자들의 견해도 참고했고, 입자물리학자로서 저의 해석도 있습니다.[13] 첫째, 빅뱅과 우주의 시작 문제가 있습니다. 우주에 시작이 있다는 시각은 과거 잘못된 견해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우주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창조주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14] 그러나 현대 과학은 우주가 시작이 있었다는 것, 시공간에도 시작이 있었다는 것을 강력히 증명했습니다. 태초가 있었으며 그 때 무에서 유가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창세기는 현대 과학의 결과를 경쟁적인 세계관들에 비해 가장 적합하게 설명합니다. 간혹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있다고 하면서 양자 진동이 그런 예라고 경우도 있는데, 이는 무에 대한 정의가 잘못된 것입니다. 법칙도 상수도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는 아무 것도 나올 수 없습니다. 오직 자연을 초월한 존재만이 무에서 유가 생기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미세 조정 문제가 있습니다. 물리학자들은 밝혀진 과학적 사실을 보면서 두 가지 의문을 가집니다. “근본 법칙은 어디서 오는가?” 그리고 “물리 상수는 왜 이렇게 생명에 적합하게 조정되어 있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만유인력의 법칙을 봅시다.[15] 여기서 G는 중력 상수입니다. 우리는 실험적으로 측정하여 G가 얼마인지 알고 있을 뿐이지, 왜 그런 값이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이 중력 상수를 아주 조금만 바꾸어도 우주는 금방 붕괴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진공에서의 빛의 속도, 플랑크 상수 등 왜 그런 값이 되었는지 알 수 없는 물리 상수들이 30가지나 됩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중성자의 질량이 700분의 1 늘어나면 별들의 핵융합이 멈춥니다. 강한 핵력의 크기를 자연의 기본 힘들의 세기가 가능한 범위의 1051분의 1만큼 바꾸면 수소를 제외한 모든 원자가 해체됩니다. 이 물리상수들이 우연히 우리에게 적합하도록 정해졌다고 주장하려면 수없이 많은 우주 중에서 우연히 생명이 살기 적합한 우주가 있는데 이것이 우리 우주라고 믿어야 합니다. 평행 우주니 다중 우주니 하는 것이 이런 주장입니다. 이는 전혀 증명되지 않았고 증명하기 불가능에 가까운 믿음입니다. 이에 대해서 어떤 과학자는 “수천 억 개의 우주를 믿는 새로운 교회에 가입하라”고 비꼬았습니다. 다시 만유인력의 법칙을 봅시다. 왜 중력이 두 물체의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 제곱에 반비례해야 합니까? 왜 중력은 인력만 있고 척력은 없습니까? 도대체 이런 법칙은 어디서 왔습니까? 설사 다중 우주를 믿는다고 해도 다중 우주가 탄생하게 되는 법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연히 생겼다고 믿는 것은 매우 근거 없는 믿음입니다. 셋째, 우주의 초기 상태는 물과 같았습니다.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는 것은 초기 물질이 생기기 전 고온 고압의 상태를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 속에서도 물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물은 우리가 알고 있는 H2O가 아니라 액체 같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16] 실제로 입자 가속기 RHIC에서 발견된 사실은 초기 우주가 물과 같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물과 같았던 초기 물질이 팽창을 통해 식으면서 여러 입자가 나온 것입니다. 이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시면서 하늘[17]을 창조하신 모습과 조화됩니다. 우주가 팽창하면서 초기 물과 같던 물질이 온 우주로 퍼져나가 원시 은하를 만든 것입니다.[18] 넷째, 빛의 특수성이 있습니다. 3절에 나온 대로 빛이 가장 먼저 창조된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빛은 광원 없이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광명체가 존재하기도 전에 빛이 존재했다고 하는 것은 고대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참으로 타당한 통찰입니다. 여기서 빛은 모든 힘을 매개하는 gauge boson으로 보입니다. 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이라는 자연의 네 가지 힘은 각각 그 힘을 이를 매개하는 입자가 있습니다. 이런 힘이 없이는 어떠한 물질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빛을 먼저 창조하신 것은 현대 물리학과 합치되는 설명입니다. 다섯째, 오직 말씀으로 창조하신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물리학은 처음에 물질을 탐구했으나 점차 에너지가 더 본질적인 것이라고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더 탐구해보니 정보가 더욱 본질적이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물리 법칙과 상수, 생명의 DNA 등은 모두 정보입니다. 그렇다면 정보가 어떻게 전달될 수 있을까요? 정보를 실어 나르기 가장 적합한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은 지극히 본질적입니다. 창조의 과정에서 다른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모습은 참으로 본질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Logos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말씀의 정보 전달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물리학적으로도 자연스럽고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과학신학: 자연과학과 신학의 대화』, 박세혁 옮김,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2011) 리 스트로벨, 『창조설계의 비밀』, 홍종락 옮김, 두란노(2005) 윌리엄 뎀스키, 『지적 설계』, 서울대학교 창조과학연구회 옮김, IVP(2002) 앤터니 플루, 『존재하는 신』, 홍종락 옮김, 청림출판(2011) 3. 창세기 말씀 역사 3.1. 제가 받은 은혜 저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신앙인이고 동시에 현직에서 연구하고 있는 물리학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자연의 질서를 탐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장은 제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창세기 말씀을 통해 받은 은혜를 두 가지만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창세기는 제게 사람의 이성을 사용하여 자연 질서를 파악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자연이 우연히 아무 목적 없이 생겨난 것이라면 아무 목적 없는 진화의 결과 얻어진 사람의 이성은 믿을 수 없습니다. 과학을 하는데 필수적인 날카로운 이성은 믿을 수 없는 우연의 산물에 불과합니다. 나아가 우연히 생긴 세상에 자연 법칙이 존재하고 질서가 있다는 것은 더욱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인격을 가지시고 논리적이신 창조주가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면 달라집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에는 이성도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저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성을 신뢰하고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렘10:12는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의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의 명철로 하늘을 펴셨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명철로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세상을 합리적이고 질서 있게 세우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 말씀을 공부할수록 저의 이성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비판정신은 살아나며 창조적인 생각이 솟아 나옵니다. 연구를 하면서 먼저 일용할 양식을 먹고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면 지혜의 근원되시는 분께서 지혜를 주시는 것을 많이 체험합니다. 둘째, 창세기는 자연을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저의 인생도 완전하게 인도하고 계심을 믿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생존에 적합하도록 우주의 물리 법칙을 세심하게 조정하시고 지구를 생명에 적합한 위치와 안정적인 궤도에 놓으셨습니다. 저 광대한 우주부터 가장 작은 원자 속 세계까지 질서 있게 창조하셨습니다. 제가 탐구하는 핵입자물리는 강한 핵력, 약한 핵력, 전자기력이 얼마나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 원자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게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를 깊이 탐구하면 할수록 세상을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신 창조주가 계시다는 확신을 줍니다. 이렇게 우리를 위해 아름답고 안정적인 자연을 완벽하게 창조하신 분께서 어찌 우리 인생을 완벽하게 인도하시지 않겠습니까? 자연을 보고 창세기를 보면 저를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됩니다. 저를 창조하신 분이 바라시는 제 인생의 목적이 있고 제 삶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은 제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평안을 줍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저를 위해 모든 것을 만드신 사랑으로 또한 예수님을 보내셔서 저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온 세계에 새겨져 있고 제대로 탐구하기만 하면 과학을 통해서도 그 사무치는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창세기 1장과 과학은 결코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세기는 과학이 답할 수 없는 과학적 탐구 결과의 의미와 목적을 알려줍니다. 과학을 제대로 연구하기만 하면 창조주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과학주의적으로 과장된 추론이 아니라 확립된 과학적 지식만을 따라가면 과학은 창세기를 오히려 지지해줍니다. 또한 창세기는 과학이 가능하다는 논리적 전제를 줍니다. 이 말씀으로 마치고자 합니다. 전12:1a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후배님들이 이 청년의 때에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깊이 있는 학문을 하고 동시에 성경을 통해 창조주를 기억한다면 창조주께서 만나주십니다. 성경을 통해서도, 동시에 학문을 통해서도 창조주를 만날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1] 둘레 27km면 지름이 9km입니다. 관악캠퍼스 남북 길이가 2.5km입니다. [2] 각 장 끝에 기록한 참고 문헌 목록은 모든 참고 자료를 다 포괄하지 않습니다. 각 장의 주제에 대해 더 깊이 알아보고자 하는 경우에 제시된 책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3] 2009년 5월 18일자 PhD comics( http://www.phdcomics.com/comics/archive.php?comicid=1174 )는 A와 B는 상관 관계가 있다는 논문이 대학 홍보물과 언론 보도를 통해 A가 반드시 B를 일으키며, 건강을 위해서는 A를 피해야 한다는 대중적인 오해로 바뀌는 것을 풍자합니다. [4] 어떤 새로 개발된 위장약이 위통을 감소시킨다는 가설을 검증해야 한다고 합시다. 우선 충분한 숫자의 피험자를 데려와야 합니다. 한두 명에게 약을 먹이고 결과를 보는 것은 실험이 아닙니다. 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에게는 약을 주고 다른 그룹에게는 약이라고 하면서 밀가루로 만든 위약을 줍니다. 약을 먹는 그룹을 실험군, 위약을 먹는 그룹을 대조군이라고 합니다. 이 때 연령이나 현재 건강 상태 등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신중하게 변인 통제를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젊은 사람들을 실험군에 몰아넣고 늙은 사람들을 대조군에 모으면 약의 효과를 과장할 수 있습니다. 위약을 먹은 사람들도 약을 먹는다고 믿으면 효과가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를 위약효과라고 합니다. 그래서 진짜 약을 먹은 사람들이 위약을 먹은 사람들과 비교해서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을 정도로 큰 효과를 봐야 이 약이 효과가 있다는 가설이 검증되는 것입니다. [5] 전에 어떤 과학자들이 기도가 질병 치료에 효과가 있는지 실험했는데 이는 지극히 잘못된 실험입니다. 기도가 성경이 말하는 대로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대화라면, 병자를 치료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반드시 치료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달린 문제입니다. 수치화 할 수 없는 개인의 믿음과 귀납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어떻게 실험할 수 있습니까? 아울러 기적적인 치료가 있었다고 해도 통계는 이를 일회적인 사건으로 보고 다른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사례들 속에 묻어버립니다. [6] 그런 의미에서 부활 논증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 부활의 역사성과 사실성을 점검하기 위해 과학적인 지식은 도움이 됩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 매우 사실적이라는 것, 고고학적인 십자가 처형의 근거, 매우 이른 시기 성경 사본의 존재 등에 대해 과학은 역사학, 심리학, 사회학 등과 연대하여 강력한 판단을 제시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리 스트로벨, 『예수는 역사다』, 윤관희 · 박중렬 옮김, 두란노(2002)에 실린 여러 학자들의 논증이 도움이 됩니다. [7]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은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대한 서평에서 “생물학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유일하게 『영국의 조류』(저자 주석 - 새에 대한 기초적인 교양서)인 사람이 생물학에 대해 장황하게 지껄이고 있는 것을 상상해 보라. 그러면 신학에 대한 리처드 도킨스의 논의를 읽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대충 알게 될 것이다”라고 평했습니다. 도킨스는 초대 교회 교부인 터툴리안이 “불합리하기에 반드시 믿어야 한다”라는 말을 했다며 혹평했는데, 터툴리안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의 자료 조사의 정확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합니다. 저명한 무신론 철학자 마이클 루즈는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은 내가 무신론자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만든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8] 이는 사실 “우리와 의사소통 하는 신”을 믿는지를 물은 것으로, 이신론자와 같은 다른 형태의 유신론자를 포함하면 유신론자 과학자의 숫자는 크게 늘어날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이 연구가 기대했던 유신론 과학자 수의 의미 있는 감소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9] http://www.dissentfromdarwin.org [10] 양자 역학 창시자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막스 플랑크는 “종교와 자연과학은 회의주의와 독단론, 불신과 미신을 반대하는 끊임없고 지칠 줄 모르는 십자군 전쟁에서 힘을 합쳐 싸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폴 디랙은 “신은 대단히 높은 수준의 과학자이며 고등수학을 이용해 우주를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에르빈 슈뢰딩거는 “과학이 제공하는 세계상은 대단히 불충분하다. (중략) 아름다움과 추함, 선악, 신과 영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과학은 가끔 이런 영역의 질문에 대답하는 척 하지만, 그 대답이 너무 엉터리일 때가 많아서 진지하게 받아들일 마음이 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11] 혹 창세기 1장의 역사성을 믿지 않고도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성경 전체와 모순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을 믿지 않고 예수님만 믿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창세기 1장을 비유나 신화로 이해하는 순간 기독교 신앙은 무너집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만들지도 않은 것에 대해 어떻게 완전한 주권을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나아가 만물을 다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 외의 다른 실체들의 권세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성경은 창세기 1장에 기초하여 만물이 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조되었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창조 신앙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창세기 1장의 역사성을 믿지 않는 것은 사상누각적 신앙입니다. [12] 후대에 형성되었으며 일상 언어와는 다른 과학 용어의 정의를 사용하여 과학이 아닌 다른 분야의 글을 공격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물리학에서는 힘을 가해도 물체가 이동하지 않으면 물체에 일을 해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쓰는 일이라는 용어는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13] 저의 해석이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충분히 개연성 있는 해석이라고 봅니다. [14] 심지어 중세 신학을 대표하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주의 시작이 있었다고 하면 창조주가 있는 것은 당연하니까 자기는 우주에 시작이 없었다고 보고 창조주를 증명하겠다고 했습니다. 중세에도 우주에 시작이 있었다는 생각은 지배적이지 않았습니다. [15] F = G m1m2/r2, F는 두 물체에 작용하는 힘의 크기, m1과 m2는 두 물체의 질량, r은 두 물체 사이의 거리입니다. 중력은 두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 제곱에 반비례합니다. 이때 G는 중력 상수입니다. [16] 이는 9,10절의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셨다는 표현과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혼돈(formless) 가운데 있었던, 빛이 창조되기도 전의 물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물과 동일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빛이 창조된 이후라면 각종 원소들이 생겼을 것이기 때문에 9,10절에서처럼 바다를 이루는 물(H2O)이 되었다고 해도 맞는 해석일 것입니다. [17] 14-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궁창에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신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창세기 1장의 궁창이 단순히 지구의 대기권인 하늘이 아니라 우주 공간임을 알려줍니다. [18] 넷째 날의 태양 창조는 태양이 비로소 원시 태양에서 지금의 형태에 가까워진 것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22 [공지] 서울문화탐방 8/22(토) 국립중앙박물관 파일 [8]
[레벨:20]강호영
125 2015-07-12
Summer school 서울 문화 탐방 공지입니다. 서울 문화 탐방은 이번에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summer school 프로그램입니다. 이번 기회에 서울의 중요한 문화 탐방지를 다녀오고자 하시는 분들을 환영합니다. 유익한 나들이를 통해 양들과 교제를 나누고자 하시는 목자님들도 환영합니다. 2주에 한 번 토요일 오전에 서울 내의 문화 유적, 박물관, 미술관 중에서 유익한 곳을 선정하여 탐방하고 점심을 먹고 마칩니다. 전체 안내와 답사 가이드는 제가 섬깁니다. 두번째 탐방지는 국립중앙박물관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915년 개관한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해방 후 그대로 인수하여 국립박물관으로서 개관하였습니다. 1986년부터 구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건물로 이전했고, 중앙청 철거후 용산에 새로 건물을 지어서 2005년 현재의 위치에 이전 개관했습니다. 명실공히 국내 최대의 박물관이며 세계에서 6번째로 큰 박물관으로 총 33만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중 1만여점을 상설 전시하고 있습니다. 국보만 61점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농경문 청동기, 백제금동대향로, 황남대총 금관, 청자 어룡 모양 주전자 등 교과서에서만 보던 한국의 대표 문화재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강호영(010-4621-1574) 목자에게 꼭 미리 알려주세요. 인원을 미리 파악하고 혹 일정 변동이 있으면 즉시 공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카카오톡으로 공지를 받고자 하시는 분은 제게 단톡방 초청을 요청하세요. 8월 22일(토) 9시에 센터에 모이는 것으로 시작하여 10-13시까지 주요 유물 중심으로 전시실들을 둘러본 후 1시에 식사를 하고 돌아오고자 합니다. 대부분 식비로 사용될 회비는 일인당 1만원입니다. 지난 번 경복궁 답사 사진입니다.
21 no image [동영상] 2016 부활댄싱 연습
[레벨:20]강호영
68 2016-03-28
20 no image 2016년 성탄시 [4]
[레벨:20]강호영
131 2016-12-18
19 no image 스티브 세인트 선교사 초청 강의 영상
[레벨:20]강호영
53 2010-03-26
18 no image "나는 배웠다" [7]
[레벨:20]강혜란
109 2012-11-24
요즘 시를 보고 있습니다... -------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받을만한 사람이 되는 것뿐임을.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에 달린 일 /1 나는 배웠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쏟아 다른 사람을 돌보아도 그들은 때로 보답도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뢰를 쌓는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임을. /2 삶은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곁에 있는가에 달려 있음을 나는 배웠다. 우리의 매력이라는 것은 15분을 넘지 못하고 그 다음은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함을. /3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함을 나는 배웠다. 삶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린 것임을. /4 또 나는 배웠다. 무엇을 아무리 얇게 베어낸다 해도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5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놓아야 함을 나는 배웠다. 어느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 시간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6 두 사람이 서로 다툰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님을 나는 배웠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두 사람이 한 가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를 수 있음을. /7 나는 배웠다. 나에게도 분노할 권리는 있으나 타인에 대해 몰인정하고 잔인하게 대할 권리는 없음을.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 해서 내 전부를 다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8 그리고 나는 배웠다.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 하더라도 이 세상은 내 슬픔 때문에 운행을 중단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것과 내가 믿는 것을 위해 내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9 나는 배웠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을. /10 (트라피스트 수도회 출신으로 예수의 작은 형제회를 설립한 샤를르 드 푸코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의 시라고 주장하고 있다) ------
17 no image [음악] 2012년 성탄 합창 파일
[레벨:20]강혜란
48 201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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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강혜란
91 2013-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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