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관악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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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5 대학주변 민가와 대학 기숙사 건축의 갈등
[레벨:20]정아브라함
26 2017-12-09
우리 사는 동내도 비슷한 문제가 있는 것 같아 한계레 기사를 참고삼으시도록 올렸습니다. 요점은 사근동이라는 한양대학교 부근 민가가 그동안 한양대학교 학생들의 주거지역으로 역할을 하였는데 최근 한양대에서 기숙사를 신축하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고객을 잃게 되는 주민들이 항의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대학 기숙사를 부탁해 ③ 한양대가 바꾼 사근동 사근동 1.1㎢ 절반이 한양대생 아파트 몇채 뺀 주택은 모두 원룸 1인가구 62%로 서울평균 2배 가정집 줄어 취학어린이도 급감 기숙사 확충 둘러싼 갈등 딛고 학교·지역사회 윈윈 해법 찾아야 서울 성동구 사근동 한양대학교 후문 거주지역에는 부동산뿐만 아니라 일반 주택에서도 ‘원룸’ 또는 ‘방 있습니다’라는 안내문을 쉽게 볼 수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사근동은 한양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죠. 하루종일 가게에 앉아서 길가를 보면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전부 학생들이라니까요.” 서울 성동구 사근동에서 15년째 ㄱ빨래방을 운영중인 최아무개(77)씨는 ‘동네가 대학 영향을 많이 받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출퇴근하는 직장인이나 장 보는 주부들은 거의 없어요. 주민이라고는 학생들뿐이니 학생들 상대로 장사를 할 수밖에 없는 거죠.” 최씨는 “언제부턴가 주택들이 원룸으로 다 바뀌었어요. 이불 같은 큰 빨랫감이 생기면 대학생들이 다 빨래방을 찾았는데, 원룸에는 개인 세탁기가 있으니까 빨래방도 손님도 많이 줄었어요”라고 덧붙였다. 최씨 말처럼 한양대는 사근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사근동의 전체 면적 1.1㎢ 가운데 절반 가까이를 한양대학교가 차지하고 있고, 아파트 몇채를 제외한 주택 대부분은 학생들이 이용하는 원룸이다. 2017년 10월 기준 전체 인구수 1만1263명으로, 서울시 행정동 평균 인구(2만3958명) 절반에 불과한 ‘작은 동네’ 사근동은 분란에 휩싸였다. 지난 2015년 한양대가 199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제6, 제7 기숙사를 신축하겠다고 발표하면서부터다. 서울시는 지난 6일 열린 제22차 도시계획위원회에서 한양대 기숙사 신축안을 통과시켰다. ■ 너도나도 원룸, 원인은 ‘부족했던’ 기숙사 사근동은 성동구 한가운데 위치한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청계천, 남쪽으로는 중랑천이 교차하고 있다. 주민들이 “도시 속의 섬 같다”고 동네를 설명하는 이유다. 한양대 인근에서 11년째 부동산을 운영하는 공인중개사 한아무개(47)씨는 “왕십리역 쪽은 50%가 직장인인데, 사근동은 2호선 지선인 용답역밖에 없는데다 교통이 불편해서 한양대 학생을 제외하곤 외부인이 들어오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고립된 섬’ 같은 사근동은 한양대의 변화에 따라 모습을 바꿔왔다. 1954년 사근동으로 자리를 옮길 당시 1200명에 불과했던 한양공과대학(한양대 전신)의 학생 정원은 60여년이 지나 1만5457명(2017년)으로 10배 이상 늘었다. 반면 대학 기숙사는 학생수의 증가폭을 따라가지 못했다. 684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한양대 제1학생생활관은 학교 건물이 지어진 지 30여년 뒤인 1985년에야 처음 지어졌다. 제2학생생활관이 지어진 것은 그로부터도 10년 뒤인 1995년이다. 한양대 기숙사 수용률은 2009년 6.1% 등 2000년대 초반까지 10% 아래를 맴돌다가, 외부 임대기숙사가 늘고 올해 398명을 수용하는 제5학생생활관이 개관하면서 겨우 12.5%까지 올랐다. 기숙사에서 밀려난 한양대 학생들은 사근동 일대 하숙·원룸을 채웠다. 대학의 주거 수요를 주변 동네가 수용한 셈이다. 사근동 부동산 업계의 말을 종합하면, 현재 사근동에는 원룸 2400여개가 분포해 있다고 한다. 매년 학생들이 새로 들어오고 빠지면서 거래되는 방은 그중 3분의 1인 800여개 정도다. 한국도시연구소 최은영 연구위원은 “미국이나 프랑스 등 해외 국가에서는 대학교와 함께 기숙사가 교육 필수 시설로 지어졌지만, 한국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학교만 지어지는 경우가 많았다”며 “기숙사가 부족한 바람에 주변 대학가 지역이 원룸촌으로 바뀐 셈”이라고 말했다. ■ 사근동 인구 구조도 바뀌어 사근동의 노후한 하숙·주택을 중심으로 원룸 리모델링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사근동의 가구 구성도 대학생 중심의 1인 가구 위주로 재편됐다. 2015년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를 보면, 사근동의 1인 가구는 전체 가구 가운데 61.9%(4322가구)로 서울시 1인 가구 평균인 29.4%의 두 배가 넘는다. 대학생으로 유추할 수 있는 20~29살 인구 역시 사근동 전체 인구 가운데 40.2%에 달한다. 서울시 평균(14.9%)보다 두 배 이상 높다. 한양대의 중국인 유학생이 늘어나면서 주택을 원룸으로 리모델링하는 추세는 더욱 심해졌다. 중국인 유학생들이 상대적으로 ‘집값이 저렴한’ 사근동으로 모이면서다. 중국 국적의 한양대 재학생 인원은 2009~2015년 700명대 후반을 유지하다가, 2016년 871명, 2017년 1063명으로 늘었다. 사근동에서 50년 동안 약국을 운영했다는 김평수(74)씨는 “7~8년 전부터 사근동의 싼 방을 찾는 중국인 유학생들이 유입되면서, 너도나도 집을 개조했다”고 기억했다. 사근동에서 가족 단위 가구 구성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사근동의 2·3·4인 가구 비율은 전체 가구의 9.8%, 7.8%, 3.1%로, 서울시 평균(24.5%, 21.5%, 24.3%)보다 한참 낮다. 가정집이 사라지면서 학령인구도 줄었다. 사근초등학교 관계자는 “설립 초기 한 학년에 열 반 가까이 되던 학교가 이젠 학년당 한 반씩밖에 안 남았다. 올해 초 간신히 신입생을 두 반 규모로 입학시켰는데, 내년에도 두 반을 모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인구 구성의 변화는 풍경의 변화로 이어졌다. 일반 단독 주택에 즐비하게 붙어 있는 ‘원룸’ ‘하숙’ 간판과 편의점으로 간판을 바꾼 동네 구멍가게 등이 대표적이다. 사근동에서 40년간 운영하던 구멍가게를 최근에서야 편의점으로 바꿨다는 최아무개(61)씨는 “요즘 대학생들은 편의점으로만 몰리니까 구멍가게를 접고 편의점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 대학-지역사회 상생방안 찾아야 ‘기숙사 없이 지어진 대학교→원룸으로 대학생들의 주거 수요를 흡수한 마을→뒤늦은 기숙사 설립 발표→마을 주민들의 극렬한 반대 운동’. 기숙사 건축을 둘러싼 정형화된 인과관계에 따라 마을 주민들의 익숙한 항의가 덧붙는다. “학교는 학생들 앞세워서 (기숙사 반대를) 지역 이기주의로 몰아갑니다. 하지만 이제 와 기숙사를 짓는다고 하면, 그동안 학생들 주거를 책임져온 사근동 사람들은 어쩌라는 건가요?”(사근동 박아무개 공인중개사) 기숙사를 비롯해 대학과 지역사회가 겪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선, 궁극적으로 이 둘을 협력주체로 바라보는 관점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과 일본이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2013년부터 대학과 지역사회의 협력을 지원하는 ‘지(地·知)의 거점 정비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대학이 지자체와 연계해 교육·연구·사회공헌 활동을 하는 사업계획을 지원하면, 심사를 거쳐 최대 5800만엔의 보조금을 최대 5년간 지원하는 정책이다. 미국의 펜실베이니아대학(유펜) 역시 대학이 지역재생에 적극 나선 모범 사례로 꼽힌다. 유펜은 1950년대부터 정부 주도의 도시재생정책이 시행되면서 주변 지역사회와 갈등을 겪었다. 대학가 지역이 대학도시재생사업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캠퍼스가 급격히 확장됐는데, 이 과정에서 5천여명에 이르는 지역 거주자가 강제 이주를 당했던 탓이다. 이후 90년대 유펜의 대학원생이 학교 주변에서 잇달아 살해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유펜은 낙후 지역 재생사업인 ‘웨스트 필라델피아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 여기에는 대학이 지자체와 협력하여 지역의 주택을 매입해 리모델링한 뒤 저렴한 가격에 지역 사회에 내놓는 등 주거와 관련된 프로그램이 포함됐다.관련기사노후 원룸·고급 오피스텔로 쪼개진 이화여대…해법은 기숙사 서울시립대 정석 교수(도시공학)는 “대학은 캠퍼스 울타리 안에만 갇혀 있지 말고, 대학 밖에 있는 지역도 캠퍼스의 일부로 생각해야 한다”며 “대학가의 노후한 빈집을 대학이 매입해 리모델링한 뒤 저렴한 임대주택으로 내놓거나, 대학이 갖고 있는 자원을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등 대학-지역이 서로를 협력하는 관계로 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황금비 신민정 최민영 기자 withbee@hani.co.kr
1154 no image 메이플라워호와 네덜란드 [3]
[레벨:16]한베드로
66 2017-11-29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에서 미국으로 갔는데, 이분들이 미국에 가기에 앞서 먼저 네덜란드에서 10여 년 이상 머물렀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저도 네덜란드에 와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는데 심심할 때 읽으시라고 올립니다. 1. 영국을 떠난 이유 및 네덜란드 정착 과정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국교만이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1607년 후반 당시로서는 상당한 관용이 허용된 네덜란드로 이주하기로 결정합니다. 처음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서 몇 년 동안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100명의 청교도(당시에는 Scrooby Congregation으로 알려져 있었음)들은 레이덴(Leiden)시에 거주 허가를 요청합니다. 당시 레이덴은 직물, 양조 등 제조업의 중심지로서 네덜란드어를 거의 할 수 없었던 청교도들이 일자리를 얻기에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들에 종사하는데 높은 수준의 기술이나 네덜란드어 능력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레이덴에서 자리를 비교적 잘 잡을 수 있었고, 당시 청교도들을 이끌던 사람은 John Robinson 목사와 Willam Brewster라는 사업가였습니다. 여기서 청교도들의 규모는 300명 정도로 증가하게 됩니다. Brewster는 레이덴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게 되었고 또 Brewer라는 사람과 함께 출판사를 만들어 종교서적들을 영국에 수출합니다. 한편 Robinson은 1615년 레이덴대에서 박사과정에 등록하는데 이를 통해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됩니다. 당시 박사과정 이수자는 도시의 방벽을 밤에 순찰(Night Watch : 렘브란트의 그림이 생각납니다)해야 하는 의무, 이 방벽 유지에 참여해야하는 의무를 면제받았을 뿐만 아니라 포도주와 맥주 구입 시 면세 혜택을 받았습니다. 다만 다른 청교도들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Robinson 과 다른 세 사람이 레이덴 내 베드로교회 근처에 있는 부동산에 투자하여 21채의 집을 지어 그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2. 신앙적 정체성의 위기 (다시 떠나야 할 이유) 위에서 청교도들이 레이덴에 비교적 자리를 잘 잡게 되었다고는 하였으나, 점차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청교도들은 네덜란드의 관용을 고맙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 대다수가 원래 시골 출신이었고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에 소위 괜찮은 직업을 얻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또 네덜란드어를 제대로 익힐 수가 없었습니다. 1617년 경 여러 가지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장시간에 걸쳐 해야 했던 막노동으로 그들은 힘들어했고 또 어떤 이들은 향수병에 시달리다가 영국으로 돌아가 버리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다가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네덜란드는 문화적으로 도덕적으로 너무 자유롭고 방탕한 곳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추가적으로 영국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일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그들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네덜란드 사람으로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청교도 부모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자녀들이 그들의 신앙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또 영국적인 것을 잃어버리고 점차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네덜란드 문화에 흡수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아이들 중 몇몇은 성년이 되면서 일자리나 다른 기회를 찾기 위해 모임을 떠나버립니다. Bradford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들은 사악한 본을 따라서 방종하고 위험한 길로 내던져지고 있다.” 모임이 와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80년 전쟁의 여파를 걱정하던 청교도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박해받지 않고 또 죄악의 유혹이 없는 장소를 찾기로 하는데, 이들은 그런 장소로 남아메리카의 북동부 지역을 고려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떠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80년 전쟁 :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1568-1648년간 진행된 전쟁 한편, Brewster가 계속해서 영국 왕정을 비난하는 책자를 마구 찍어서 영국에 보내다 보니 영국의 제임스왕은 사람을 보내 Brewster를 체포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는 체포되지 않았고 다만 그의 출판기계는 압수되고 또 그의 동업자였던 Brewer는 체포되어 14년형을 언도받습니다. 어쨌든 Brewster는 메이플라워호에 탑승하는데, 이 메이플라워호의 항해에 모든 청교도가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초 가장 젊고 강한 사람들이 선택되었던 것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들이 자리를 잡고 난 후에 다시 출발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항해에는 수십 명의 청교도들만이 참여했으며, 이들 외에 메이플라워호에 탔던 사람들은 영국에서 온 숙련된 선원들과 새로운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원하던 다양한 일꾼들이었습니다. 3. 남은 사람들 Robinson은 레이덴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청교도들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모임을 인도하는데 최선을 다했으나 경제 및 문화적인 어려움들로 인해 고생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병들어 대서양을 건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1625년 그가 죽은 후에 여전히 레이덴에 머무르고 있던 청교도들 중 다수가 뉴잉글랜드로 떠나갑니다. 또한 계속 레이덴에 남은 청교도들 중 일부는 네덜란드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에 참여합니다. 이로부터 수십 년 내에 레이덴에서의 청교도 모임은 소멸합니다. 그러나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은 미국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깁니다. 이들의 후손들로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부시 대통령 부자, 오바마 대통령(물론 외가쪽이지요) 등이 있습니다.
1153 no image 졸업연주 영상 [3]
[레벨:17]정철헌
65 2017-11-18
1152 서울대에 관한 기사
[레벨:20]정아브라함
47 2017-11-15
단독]“서울대 교육 위기” 서울대의 自省 교수들 “서울대 가면 잘살던 시절 끝나” 서울대에 입학했다고 ‘잘 먹고 잘사는’ 시대가 끝났다는 내부 비판이 나왔다. 교육 시스템이 시대 흐름에 뒤떨어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 양성이 어렵다는 의미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는 13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에서 ‘서울대 교육, 위기를 넘어 희망으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유재준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현재 서울대 학부교육이 ‘위험하다’고 진단했다. 유 교수는 학생들이 입시정책 때문에 중·고교에서 입시에 유리한 교과만 선택하고 있는 점을 문제로 꼽았다. 대학 공학교육에 필수 교과목인 ‘물리Ⅱ’ 과목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선택하는 학생은 전국에서 4000여 명으로 전국 4년제 대학 공대 정원의 2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 이 때문에 서울대는 고교 때 물리Ⅱ를 배우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기초물리학’ 과목을 개설했다. 수학 성적이 기준에 미달하는 학생들은 ‘수학’ 과목을 듣기 전에 ‘미적분학의 첫걸음’을 수강하는 실정이다. 유 교수는 서울대 교수들과 학교의 시스템도 학생을 ‘창의적 고급 인력’으로 육성하는 데는 불충분하다고 봤다. 교수들이 연구 실적 압박으로 가장 중요한 진짜 ‘교육’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고 학부 교육은 대학원 교육에 치여 교수들이 더욱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것. 특히 유 교수는 학생들이 자신의 전공 지식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폭넓은 분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학생과 교수, 학교의 제도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유 교수는 “미래 사회의 변화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소통 능력을 향상시켜야 하고 학부 교육 전체를 관장하는 기구를 신설하는 등 학부 교육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서울대인은 무엇을 꿈꾸는가’라는 주제의 발표에서 “서울대에 입학하는 순간 ‘생존’의 문제는 크게 해결됐다고 생각돼 왔지만 요즘은 이런 상황이 극적으로 변화했다”며 “서울대인이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서울대인을 존경하고 사표로 삼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과거에는 ‘사회적 생존’이 완벽하게 보장됐지만 다변화된 지금은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서울대의 존재 근거를 ‘학문’이라고 강조했다. 서울대가 사회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높은 지위를 독식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 전반을 이끄는 철학과 학문의 권위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인구구조를 볼 때 대학, 교수, 직원의 수가 급감하는 것은 모든 대학의 정해진 미래”라며 “다양한 연령대를 대상으로 대학교육의 수요자를 확보하고 외국 진출 등을 통해 교육 및 연구 환경의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내부에서 서울대를 비판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앞서 서울대 공대에서는 ‘서울대 공대 백서’를 내놓으며 서울대의 위기를 지적했다. 백서에서 교수들은 미국 실리콘밸리처럼 교수들까지 나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 기술 창업에 나서지 않으면 서울대도 몰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Main/3/all/20171115/87265071/1#csidx3e535eb38e53e8bba711492015fb57c
1151 no image 트럼프 국회 연설문 [5]
[레벨:20]정아브라함
78 2017-11-10
국회에서의 트럼프 연설문이 화제라고 합니다. 명 연설이라 합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Last night, President and Mrs. Moon showed us incredible hospitality in a beautiful reception at the Blue House. We had productive discussions on increasing military cooperation and improving the trade relationship between our nations on the principle of fairness and reciprocity. Through this entire visit, it has been both our pleasure and our honor to create and celebrate a long friendship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Republic of Korea. This alliance between our nations was forged in the crucible of war and strengthened by the trials of history. From the Inchon landings to Pork Chop Hill, American and South Korean soldiers have fought together, sacrificed together, and triumphed together. Almost 67 years ago, in the spring of 1951, they recaptured what remained of this city, where we are gathered so proudly today. It was the second time in a year that our combined forces took on steep casualties to retake this capital from the Communists. Over the next weeks and months, the men soldiered through steep mountains and bloody, bloody battles. Driven back at times, they willed their way north to form the line that today divides the oppressed and the free. And there, American and South Korean troops have remained together holding that line for nearly seven decades. By the time the armistice was signed in 1953, more than 36,000 Americans had died in the Korean War, with more than 100,000 others very badly wounded. They are heroes, and we honor them. We also honor and remember the terrible price the people of your country paid for their freedom. You lost hundreds of thousands of brave soldiers and countless innocent civilians in that gruesome war. Much of this great city of Seoul was reduced to rubble. Large portions of the country were scarred severely, severely hurt by this horrible war. The economy of this nation was demolished. But as the entire world knows, over the next two generations, something miraculous happened on the southern half of this peninsula. Family by family, city by city, the people of South Korea built this country into what is today one of the great nations of the world. And I congratulate you. In less than one lifetime, South Korea climbed from total devastation to among the wealthiest nations on Earth. Today your economy is more than 350 times larger than what it was in 1960. Trade has increased 1,900 times. Life expectancy has risen from just 53 years to more than 82 years today. Like Korea, and since my election exactly one year ago today, I celebrate with you. The United States is going through something of a miracle itself. Our stock market is at an all-time high. Unemployment is at a 17-year low. We are defeating ISIS. We are strengthening our judiciary, including a brilliant Supreme Court justice, and on and on and on. Currently stationed in the vicinity of this peninsula are the three largest aircraft carriers in the world, loaded to the maximum with magnificent F-35 and F-18 fighter jets. In addition, we have nuclear submarines appropriately positioned. The United States under my administration is completely rebuilding its military and is spending hundreds of billions of dollars to the newest and finest military equipment anywhere in the world being built right now. I want peace through strength. We are helping the Republic of Korea far beyond what any other country has ever done. And in the end, we will work things out far better than anybody understands or can even appreciate. I know that the Republic of Korea, which has become a tremendously successful nation, will be a faithful ally of the United States very long into the future. What you have built is truly an inspiration. Your economic transformation was linked to a political one. The proud sovereign and independent people of your nation demanded the right to govern themselves. You secured free parliamentary elections in 1988, the same year you hosted your first Olympics. Soon after, you elected your first civilian president in more than three decades. And when the republic you won faced financial crisis, you lined up by the millions to give your most prized possessions your wedding rings, heirlooms and gold “luck” keys to restore the promise of a better future for your children. Your wealth is measured in more than money. It is measured in achievements of the mind and achievements of spirit. Over the last several decades, your scientists have engineers and engineered so many magnificent things. You‘ve pushed the boundaries of technology, pioneered miraculous medical treatments, and emerged as leaders in unlocking the mysteries of our universe. Korean authors penned roughly 40,000 books this year. Korean musicians fill concert halls all around the world. Young Korean students graduate from college at the highest rates of any country. And Korean golfers are some of the best on Earth. In fact, and you know what I’m going to say the women‘s U.S. Open was held this year at Trump National Golf Club in Bedminster, New Jersey. Park Sung-hyun becomes first rookie to top LPGA golf rankings and it just happened to be won by a great Korean golfer, Sung Hyun Park, and eight of the top 10 players were from Korea. And the top four golfers -- one, two, three, four the top four were from Korea. Congratulations. Congratulations. Now, that’s something. That is really something. Here in Seoul, architectural wonders, like the 63 Building and the Lotte World Tower ‘ very beautiful’ grace the sky and house the workers of many growing industries. Your citizens now help to feed the hungry, fight terrorism, and solve problems all over the world. And in a few months, you will host the world and you will do a magnificent job at the 23rd Olympic Winter Games. Good luck. The Korean miracle extends exactly as far as the armies of free nations advanced in 1953. Twenty-five miles to the north, there it stops. It all comes to an end, dead stop. The flourishing ends and the prison state of North Korea, sadly, begins. Workers in North Korea labor grueling hours in unbearable conditions for almost no pay. Recently, the entire working population was ordered to work for 70 days straight or else pay for a day of rest. Families live in homes without plumbing, and fewer than half have electricity. Parents bribe teachers in hopes of saving their sons and daughters from forced labor. More than a million North Koreans died of famine in the 1990s, and more continue to die of hungry today. Among children under the age of 5, nearly 30 percent of afflicted and are afflicted by stunted growth due to malnutrition. And yet, in 2012 and 2013, the regime spent an estimated $200 million, or almost half the money that it allocated to improve living standards for its people, to instead build even more monuments, towers, and statues to glorify its dictators. What remains of the meager harvest of the North Korean economy is distributed according to perceived loyalty to a twisted regime. Far from valuing its people as equal citizens, this cruel dictatorship measures them, scores them, and ranks them based on the most arbitrary indications of their allegiance to the state. Those who score the highest in loyalty may live in the capital city. Those who score the lowest starve. A small infraction by one citizen, such as accidentally staining a picture of the tyrant printed in a discarded newspaper, can wreck the social credit rank of his entire family for many decades. An estimated 100,000 North Koreans suffer in gulags, toiling in forced labor, and enduring torture, starvation, rape, and murder on a constant basis. In one known instance, a nine-year-old boy was imprisoned for 10 years because his grandfather was accused of treason. In another, a student was beaten in school for forgetting a single detail about the life of Kim Jong-un. Soldiers have kidnapped foreigners and forced them to work as language tutors for North Korean spies. In the part of Korea that was a stronghold for Christianity before the war, Christians and other people of faith who are found praying or holding a religious book of any kind are now detained, tortured, and, in many cases, even executed. North Korean women are forced to abort babies that are considered ethnically inferior. And if these babies are born, the newborns are murdered. One woman‘s baby born to a Chinese father was taken away in a bucket. The guard said it did not deserve to live because it was impure. So why would China feel an obligation to help North Korea? The horror of life in North Korea is so complete that citizens pay bribes to government officials to have themselves exported aboard as slaves. They would rather be slaves than live in North Korea. To attempt to flee is a crime punishable by death. One person who escaped remarked, “When I think about it now, I was not a human being. I was more like an animal. Only after leaving North Korea did I realize what life was supposed to be.” And so, on this peninsula, we have watched the results of a tragic experiment in a laboratory of history. It is a tale of one people, but two Koreas. One Korea in which the people took control of their lives and their country and chose a future of freedom and justice, of civilization and incredible achievement, and another Korea in which leaders imprison their people under the banner of tyranny, fascism, and oppression. The results of this experiment are in, and they are totally conclusive. When the Korean War began in 1950, the two Koreas were approximately equal in GDP per capita. But by the 1990s, South Korea’s wealth had surpassed North Korea‘s by more than 10 times. And today, the South’s economy is over 40 times larger. So you started the same a short while ago, and now you‘re 40 times larger. You’re doing something right. Considering the misery wrought by the North Korean dictatorship, it is no surprise that it has been forced to take increasingly desperate measures to prevent its people from understanding this brutal contrast. Because the regime fears the truth above all else, it forbids virtually all contact with the outside world. Not just my speech today, but even the most commonplace facts of South Korean life are forbidden knowledge to the North Korean people. Western and South Korean music is banned. Possession of foreign media is a crime punishable by death. Citizens spy on fellow citizens. Their homes are subject to search at any time, and their every action is subject to surveillance. In place of a vibrant society, the people of North Korea are bombarded by state propaganda practically every waking hour of the day. North Korea is a country ruled as a cult. At the center of this military cult is a deranged belief in the leader‘s destiny to rule as parent-protector over a conquered Korean peninsula and an enslaved Korean people. The more successful South Korea becomes, the more decisively you discredit the dark fantasy at the heart of the Kim regime. In this way, the very existence of a thriving South Korean republic threatens the very survival of the North Korean dictatorship. This city and this assembly are living proof that a free and independent Korea not only can but does stand strong, sovereign, and proud among the nations of the world. Here the strength of the nation does not come from the false glory of a tyrant. It comes from the true and powerful glory of a strong and great people, the people of the Republic of Korea, a Korean people who are free to live, to flourish, to worship, to love, to build, and to grow their own destiny. In this republic, the people have done what no dictator ever could. You took, with the help of the United States, responsibility for yourselves and ownership of your future. You had a dream, a Korean dream, and you built that dream into a great reality. In so doing, you performed the Miracle on the Han that we see all around us, from the stunning skyline of Seoul to the plains and peaks of this beautiful landscape. You have done it freely, you have done it happily, and you have done it in your own very beautiful way. This reality, this wonderful place, your success is the greatest cause of anxiety, alarm, and even panic to the North Korean regime. That is why the Kim regime seeks conflict abroad, to distract from total failure that they suffer at home. Since the so-called armistice, there have been hundreds of North Korean attacks on Americans and South Koreans. These attacks have included the capture and torture of the brave American soldiers of the USS Pueblo, repeated assaults on American helicopters, and the 1969 downing of a U.S. surveillance plane that killed 31 American servicemen. The regime has made numerous lethal incursions in South Korea, attempted to assassinate senior leaders, attacked South Korean ships, and tortured Otto Warmbier, ultimately leading to that fine young man’s death. All the while, the regime has pursued nuclear weapons with the deluded hope that it could blackmail its way to the ultimate objective. So -- and that objective we are not going to let it have. We are not going to let it have. All of Korea is under that spell divided in half. South Korea will never allow what‘s going on in North Korea to continue to happen. The North Korean regime has pursued its nuclear and ballistic missile programs in defiance of every assurance, agreement, and commitment it has made to the United States and its allies. It’s broken all of those commitments. After promising to freeze its plutonium program in 1994, it repeated the benefits of the deal and then, and then immediately continued its illicit nuclear activities. In 2005, after years of diplomacy, the dictatorship agreed to ultimately abandon its nuclear programs and return to the treaty on nonproliferation. But it never did. And worse, it tested the very weapons it said it was going to give up. In 2009, the United States gave negotiations yet another chance and offered North Korea the open hand of engagement. The regime responded by sinking a South Korean Navy ship, killing 46 Korean sailors. To this day, it continues to launch missiles over the sovereign territory of Japan and all other neighbors, test nuclear devices, and develop ICBMs to threaten the United States itself. The regime has interpreted America‘s past restraint as weakness. This would be a fatal miscalculation. This is a very different administration than the United States has had in the past. Today I hope I speak not only for our countries, but for all civilized nations when I say to the North: Do not underestimate us. And do not try us. We will defend our common security, our shared prosperity, and our sacred liberty. We did not choose to draw here on this peninsula. this magnificent peninsula the thin line of civilization that runs around the world and down through time. But here it was drawn, and here it remains to this day. It is the line between peace and war, between decency and depravity, between law and tyranny, between hope and total despair. It is a line that has been drawn many times in many places throughout history. To hold that line is a choice free nations have always had to make. We have learned together the high cost of weakness and the high stakes of its defense. America’s men and women in uniform have given their lives in the fight against Nazism, imperialism, Communism, and terrorism. America does not seek conflict or confrontation. But we will never run from it. History is filled with discarded regimes that have foolishly tested America‘s resolve. Anyone who doubts the strength or determination of the United States should look to our past, and you will doubt it no longer. We will not permit America or our allies to be blackmailed or attacked. We will not allow American cities to be threatened with destruction. We will not be intimidated. And we will not let the worst atrocities in history be repeated here on this ground we fought and died so hard to secure. That is why I come here to the heart of a free and flourishing Korea with a message for the peace-loving nations of the world: The time for excuses is over. Now is the time for strength. If you want peace, you must stand strong at all times. The world… The world cannot tolerate the menace of a rogue regime that threatens with nuclear devastation. All responsible nations must join forces to isolate the brutal regime of North Korea, to deny it and any form, any form of it, you cannot support, you cannot supply, you cannot accept. We call on every nation, including China and Russia, to fully implement U.N. Security Council resolutions, downgrade diplomatic relations with the regime, and sever all ties of trade and technology. It is our responsibility and our duty to confront this danger together, because the longer we wait, the greater the danger grows and the fewer the options become. And to those nations that choose to ignore this threat or worse still, to enable it. the weight of this crisis is on your conscience. I also have come here to this peninsula to deliver a message directly to the leader of the North Korean dictatorship. The weapons you are acquiring are not making you safer. They are putting your regime in grave danger. Every step you take down this dark path increases the peril you face. North Korea is not the paradise your grandfather envisioned. It is a hell that no person deserves. Yet despite every crime you have committed against God and man, you are ready to offer and we will do that we will offer a path to a much better future. It begins with an end to the aggression of your regime, a stop to your development of ballistic missiles, and complete, verifiable, and total denuclearization. A sky-top view of this peninsula shows a nation of dazzling light in the South and a mass of impenetrable darkness in the North. We seek a future of light, prosperity, and peace. But we are only prepared to discuss this brighter path for North Korea if its leaders cease their threats and dismantle their nuclear program. The sinister regime of North Korea is right about only one thing: The Korean people do have a glorious destiny. But they could not be more wrong about what that destiny looks like. The destiny of the Korean people is not to suffer in the bondage of oppression, but to thrive in the glory of freedom. What South Koreans have achieved on this peninsula is more than a victory for your nation. It is a victory for every nation that believes in the human spirit. And it is our hope that someday soon all of your brothers and sisters of the North will be able to enjoy the fullest of life intended by God. Your republic shows us all of what is possible. In just a few decades, with only the hard work, courage, and talents of your people, you turned this war-torn land into a nation blessed with wealth, rich in culture, and deep in spirit. You built a home where all families can flourish and where all children can shine and be happy. This Korea stands strong and tall among the great community of independent, confident, and peace-loving nations. We are nations that respect our citizens, cherish our liberty, treasure our sovereignty, and control our own destiny. We affirm the dignity of every person and embrace the full potential of every soul. And we are always prepared to defend the vital interests of our people against the cruel ambition of tyrants. Together, we dream of a Korea that is free, a peninsula that is safe, and families that are reunited once again. We dream of highways connecting North and South, of cousins embracing cousins, and this nuclear nightmare replaced with the beautiful promise of peace. <iframe width="250" height="250" src="http://ar.donga.com/RealMedia/ads/adstream_sx.ads/2012.donga.com/news@x15" border="0" frameborder="0" marginwidth="0" marginheight="0" scrolling="no"></iframe> Until that day comes, we stand strong and alert. Our eyes are fixed to the North and our hearts praying for the day when all Koreans can live in freedom. Thank you. God bless you. God bless the Korean people. Thank you very much. Thank you.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Main/3/all/20171109/87183667/1#csidx1fbebacf096b2338f85084ed004276b
1150 샌드버그 이야기
[레벨:20]정아브라함
25 2017-11-04
책 속으로] 행복해지고 싶은가 마음의 근육을 키워라 기자이은주 기자 ━ DEEP INSIDE │ ‘회복탄력성’을 말한 두 권의 책 페북 COO 샌드버그의 『옵션 B』 멕시코 휴양지서 갑자기 남편 사망 슬픔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자책 최악 가정하자 살아있다는 것 감사 변광호 박사의 『E형 인간』 직장 상사만 보면 화가 치밀었는데 내 성장을 위해 그럴지도 모른다 긍정의 생각·말 단련시키면 평온 옵션 B 옵션 B 셰릴 샌드버그· 애덤 그랜트 지음 안기순 옮김, 와이즈베리 E형 인간: 성격의 재발견 변광호 지음, 불광출판사 E형 인간 스트레스 없는 일상은 없다. 완벽한 삶도 없다. 학자들은 여기에 더 심한 말을 보태기도 한다. “행복이란 것은 없고 행복한 성격이 있을 뿐”이라고. 『꾸뻬씨의 행복 여행』을 쓴 프랑스 정신과 의사 프랑수아 를로르는 몇 년 전 한국을 찾았을 때 “행복은 균형의 문제이자 인성의 문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행복할 수 있는’ 균형과 인성은 어디서, 어떻게 얻어야 하는 걸까. 이와 관련해 최근 ‘회복탄력성’(Resilience) 개념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회복탄력성이란 원래 제자리로 돌아오는 힘을 일컫는 말로, 심리학에서는 시련을 이겨내는 긍정적인 힘을 뜻한다. 최근 출간된 『옵션 B』와 『E형 인간:성격의 재발견』은 각기 큰 역경과 일상의 스트레스에 대한 대처법을 다룬 책으로, 저자들은 “회복탄력성은 근육처럼 후천적으로 노력과 연습을 통해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은 완벽하지 않다=“상실도 슬픔도 실의도 철저히 개인적인 감정이다(…) 어쨌거나 이 어둠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의 몫이었다.”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인 셰릴 샌드버그(Sheryl Sandberg·48)가 한 말이다. 그의 화려한 배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적어도 ‘그 일’이 그에게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하버드대 경제학과와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최우등으로 졸업했고, 세계은행·맥킨지를 거쳐, 27세에 미국 재무부 수석보좌관으로 일했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구글 부사장을 거친 뒤 2008년부터 페이스북에서 일해 왔다. ‘블룸버그 비즈니스 위크’는 그를 “미래의 미국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일’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2015년 아이들을 친정 부모님께 맡기고 모처럼 남편(데이비드 골드버그)과 함께 떠난 멕시코의 휴양지에서 남편이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그에게 ‘바위 같은 사람’이었고, ‘평생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살아가리라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휴가지에서 1시간가량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남편의 의자는 비어 있었다. 그리고 후에 헬스장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남편을 발견한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전한다. “나는 지금도 ‘헬스장이 어디죠?’라는 말을 들으면 숨이 턱 막히고 온몸이 굳어버린다. 앞으로도 그 말을 들으면 심장이 요동칠 것 같다.” 정신없이 장례식을 치렀고, 남편 없는 그의 삶이 시작됐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결코 내 자의로는 선택하지 않았을 삶이고, 철저하게 무방비 상태에서 맞닥뜨린 삶”이었다. 『옵션 B』는 샌드버그와 애덤 그랜트 와튼 스쿨 심리학 교수가 함께 쓴 책이다. 샌드버그가 ‘삶의 균형이 무너지는’ 자신의 경험과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절절하게 털어놨다면, 그랜트 교수는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회복탄력성을 구축하는 법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옵션 B’는 상실과 역경으로 마주하게 된 삶을 말한다. 저자들은 “살면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실직, 사업 실패, 이혼, 질병 등으로 ‘옵션 B’를 마주하게 된다”며 “‘옵션 B’를 살아가기 위해선 마음 근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옵션 B』의 저자 샌드버그(왼쪽)와 애덤 그랜트(오른쪽). ◆회복탄력성에 달렸다=회복탄력성은 최근 정신의학부터 심리학·교육학 등의 영역에서 주목받고 있는 개념이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오뚝이 정신’이다. 이 개념은 긍정심리학에서 나왔다. 미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 교수인 마틴 셀리그먼은 사람들이 역경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수십 년 동안 연구해 왔는데, 그가 ◆회복탄력성에 달렸다=회복탄력성은 최근 정신의학부터 심리학·교육학 등의 영역에서 주목받고 있는 개념이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오뚝이 정신’이다. 이 개념은 긍정심리학에서 나왔다. 미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 교수인 마틴 셀리그먼은 사람들이 역경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수십 년 동안 연구해 왔는데, 그가 바로 긍정심리학의 창시자다. 셀리그먼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사건을 마주했을 때 ‘회복을 방해하는 3가지 생각’ 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이게 내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자책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 사건이 다른 데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는 것이고, 셋째는 영원히 여기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거라며 지레 좌절하는 것이다. 샌드버그는 자신 역시 “세 가지 덫에 걸렸었다”고 한다. ‘내가 남편을 좀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건강에 더 좋은 음식을 섭취하라고 말했더라면…’ 하는 생각으로 끊임없이 자책했다. 그리고 “슬픔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자신과 아이들이 앞으로는 영원히 순수한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주목할 것은 샌드버그가 그랜트 교수의 조언을 받아 심리적인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훈련을 지속했다는 점이다. “언제나” “결코”라는 극단적인 말을 “최근에는” “때때로”라는 말로 바꿔 쓰려 노력했고, ‘슬프고 화나는 것은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울고 싶을 땐 울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된 방법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보는 것이었다고 털어놓는다. 남편이 아이들을 태우고 운전하다가 심장부정맥을 일으켰을 수도 있었다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세상에 맙소사. 하마터면 가족 셋을 한꺼번에 잃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순간, 아이들이 여전히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감사했다.” 『E형 인간』의 저자 변광호 박사. ◆생각을 바꿔라=회복탄력성은 성격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것일까. 『E형 인간: 성격의 재발견』은 스트레스를 평생 연구해온 변광호(75) 박사가 쓴 책이다. 가톨릭대 의대 교수를 역임한 그는 일찌감치 스트레스와 성격, 건강의 상관관계를 연구해왔다. 그런 그가 “즐거운 인생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성격”으로 제시하기 위해 직접 만든 개념이 바로 ‘E형’ 성격이다. E형의 ‘E’는 ‘유스트레스’ (Eustress, 좋은 스트레스라는 뜻)에서 따온 것으로, 한마디로 스트레스에 유연한 성격을 뜻한다. 부정적인 스트레스를 대할 때마다 이를 긍정 에너지로 빠르게 전환해 나쁜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성격을 말한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만 보면 조건반사적으로 화가 치미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는 ‘어쩌면 상사는 나의 성장을 위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안해지더란다. 저자는 이게 바로 “그의 몸에서 긍정 호르몬인 엔도르핀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약간의 생각 전환만으로 엔도르핀이 나오도록 호르몬 분비를 조절하며 E형 성격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속에 숨어 있는 긍정을 가리켜 “마음의 탄력”이라고 말하는 그는 “우리가 좌절하고 힘들 때 잘 꺼내 쓸 수 있도록 평소 긍정의 생각과 말들로 마음을 단련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E형 인간’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킨 것은 정년퇴직하고 노인 요양병원에 근무하면서부터라고. 그곳에서 환자들을 지켜보며 왜 누구는 병과 죽음에 의연하고 담담하게 대처하며, 또 누구는 고통에 신음하며 괴로워할까 궁금했단다.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통은 똑같지만 이에 대해 대처하는 마음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즐거움을 훈련하라=지난 7월 뉴욕타임스는 ‘중년의 회복탄력성’을 주제로 한 기사를 실었다. “부모님을 여의거나, 실직(혹은 퇴직)을 경험하는 중년이야말로 회복탄력성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회복탄력성을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 낙관주의를 연습하라(그것도 안 되면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라), 자책하지 마라, 다른 사람들을 도와라, 새로운 것에 도전하라고 제안했다. 샌드버그는 상실의 경험담을 책으로 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일하는 페이스북의 장례 유급휴가를 10일에서 20일로 확대했다. 역경에 처한 사람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비영리 조직(OptionB.Org)을 설립했다. 변광호 박사는 ‘스트레스 회복탄력성을 지닌 새로운 E타입 성격’에 대한 논문을 내년 국제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놀랍게도 두 책이 공유하고 있는 대목이 적잖다. 첫째,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둘째, 감사할 줄 아는 마음과 유머는 회복탄력성에 도움이 된다. [출처: 중앙일보] [책 속으로] 행복해지고 싶은가 마음의 근육을 키워라 [출처: 중앙일보] [책 속으로] 행복해지고 싶은가 마음의 근육을 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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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정철헌
51 2017-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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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정아브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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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정아브라함
52 2017-08-30
에어프랑스 홈페이지에서 검색한 대한항공 공동운항 항공편은 대한항공에서 검색한 것보다 50만원 이상 저렴했다. [에어프랑스 홈페이지 캡처] 한국 출발을 기준으로 했을 때 외국계 항공사는 대체로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보다 저렴하다. 특히 할인 프로모션을 잘만 이용하면 파격적인 가격으로 한국 국적기를 탈 수 있다. 공동운항편도 같은 할인 운임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에어프랑스는 지난 8월23일부터 29일까지 할인 이벤트(출발일 기준 11월~2018년 3월 출발)를 벌였는데 인천~파리 노선이 최저 79만원이었다. 여기엔 물론 대한항공을 타는 공동운항편도 포함됐다. 외국 항공사가 파는 공동운항 항공권이 대체로 저렴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니다. 낮은 운임의 항공권이 모두 팔렸을 경우가 그렇다. 가령 여행 비수기인 11월, 델타항공이 대한항공 인천~로스앤젤레스 노선 좌석을 30석 할당 받았는데 한두 자리 밖에 남지 않았고, 대한항공은 자리가 많이 남았다면 대한항공에서 직접 사는 게 훨씬 저렴할 수 있다. 실제로 11월에 출발하는 대한항공의 유럽·미주 왕복 항공권은 현재 80만원대로 여느 외국 항공사보다 저렴한 편이다. 공동운항 항공권이 반드시 유리한 건 아니다. 제공되는 서비스 기준이 천차만별이어서다. 가령 위탁 수하물은 탑승 항공사가 아니라 구매 항공사 기준이 적용된다. 공동운항 항공편을 이용할 때 다른 유의점도 있다. 헷갈리는 게 은근히 많다. 먼저 구매 항공사가 아닌 탑승 항공사 기준이 적용되는 경우다. 공항에서는 구매 항공사가 아닌 실제 탑승 항공사 카운터로 가야 한다. 이걸 혼동해서 터미널이 여럿인 유럽이나 미국의 대형 공항에서 비행기를 놓치는 경우도 다반사다. 면세점에서 쇼핑을 할 때도 구매 항공사가 아닌 실제 탑승 항공사 편명을 알려줘야 한다. 공동운항편을 이용할 경우, 사진과 같은 채식 기내식을 사전 주문할 수 없다. 반대로 수하물과 마일리지는 구매 항공사 기준이 적용된다. 유나이티드항공을 통해 아시아나항공 인천~로스앤젤레스 공동운항 항공권을 구매했다면, 위탁 수하물은 32㎏(아시아나 기준)가 아닌 23㎏(유나이티드 기준)밖에 부칠 수 없다. 항공사에 따라 탑승 전 좌석 지정·기내식과 면세품 사전 주문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 [출처: 중앙일보] [여행의 기술]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싸게 타는 법
1145 비행기표 싸게 사는 법
[레벨:20]정아브라함
41 2017-08-30
[여행의 기술]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싸게 타는 법 [중앙일보] 입력 2017.08.30 00:01 수정 2017.08.30 09:53 인쇄기사 보관함(스크랩)글자 작게글자 크게 기자최승표 기자 SNS 공유 및 댓글SNS 클릭 수145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스토리SNS 공유 더보기구글플러스 핀터레스트URL 복사SNS 공유 더보기 닫기 해외여행을 가지만 비행기만큼은 ‘우리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 기내식은 무조건 한식을 먹어야 하는 사람, 승무원이라면 모름지기 한국어를 쓰고 친절해야 한다는 사람. 은근히 많다. 이렇게 한국식 서비스를 고집하지 않는다 해도 한국인에게 한국 항공사가 여러모로 편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저비용항공을 제외한 한국 국적 항공사, 즉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값이 비싸서 부담스럽다. 단돈 5만원이라도 저렴하게 국적 항공사를 타고 싶다면 ‘공동운항’, 이 네 글자를 기억하시라. 요즘 항공사들은 실제로 비행기를 띄우지 않는 노선 항공권도 판매한다. 제휴 항공사 좌석을 이용하는 '공동운항'을 통해서다. 비행기 편명 숫자가 네자리인 게 공동운항 편이다. 공동운항(Code share)이란 A항공사가 제휴사인 B항공사의 좌석 일부를 자사의 항공편명으로 판매하는 걸 말한다. 보통 A항공사를 판매사(Marketing Carrier), B항공사를 운항사(Operating Carrier)라 한다. 이를테면 아시아나항공은 캐나다에 취항하지 않지만 인천~밴쿠버 노선 항공권을 판다. 실제로 인천~밴쿠버 노선에 비행기를 띄우는 에어캐나다와 공동운항 제휴를 맺은 것이다. 단순 왕복 노선뿐 아니라 경유편도 가능하다. 대한항공은 프랑스 니스에 취항하지 않지만 웹사이트에서 인천~니스 항공권을 예약할 수 있다. 인천에서 대한항공이나 에어프랑스를 타고 파리로 가서 에어프랑스 국내선 항공편을 타고 니스로 가는 방식이다. 반대로 외국 제휴 항공사를 통해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을 이용할 수도 있다. 편명 네자리 숫자에 비밀 있다 제휴 항공사 네트워크 이용하는 공동운항 장거리 노선 같은 비행기 50만원 저렴하기도 수하물 ·마일리지 등은 구매 항공사 기준 적용 같은 비행기를 탄 승객이지만 실제 구매 항공사는 무척 다양할 수 있다. 가령 아시아나항공 인천~방콕 노선을 보면, 타이항공·에어캐나다·에티오피아항공 등이 공동운항 항공권을 판매하고 있다. 현재 대한항공은 35개 항공사 604개 노선, 아시아나항공은 30개 항공사 277개 노선에 대해 공동운항 제휴를 맺고 있다. 최근에는 외국 항공사뿐 아니라 자회사인 저비용항공사와도 공동운항을 늘리고 있다. 공동운항이 효율성이 높기 때문이다. 판매사 입장에서는 직접 비행기를 띄우지 않고도 고객에게 다양한 항공편을 팔 수 있고, 운항사는 판매 채널을 다양화해 빈 좌석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어 이득이다. 롯데백화점이 관계사인 롯데닷컴뿐 아니라 롯데닷컴의 경쟁사이기도 한 지마켓·옥션 등을 통해 상품을 판매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주요 공동운항 제휴사. 여행자 입장에서 공동운항은 잘만 이용하면 저렴한 여행의 일등공신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8월29일 에어프랑스 홈페이지에서 오는 9월1일 출발해 9월8일 도착하는 인천~파리 일반석 항공권을 검색했다. 왕복 노선을 모두 대한항공을 타는 공동운항 항공권(편명 AF5093·5092)이 최저 166만원이었다. 대한항공 사이트에서 검색한 같은 항공편(KE901·902), 최저가 항공권은 219만원이었다. AF5093과 KE901 항공편은 인천에서 오후 1시20분에 출발하는 똑같은 대한항공 비행기인데도 53만원이나 차이가 났다. 참고로 일반 항공편은 두자리 알파벳과 숫자 세자리로 이뤄져 있지만 공동운항편은 숫자가 네자리다. [출처: 중앙일보] [여행의 기술]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싸게 타는 법
1144 no image 노인으로 사는 것 [2]
[레벨:20]정아브라함
74 2017-08-19
가끔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방문하면 슬픈 생각이 듭니다. 저 어머니의 모습이 바로 10 혹은 20년 후의 나와 내 동역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인의 삶이 어떠하여야 할까요? [내가 만난 名문장]<8>만년의 쓸쓸함은 숙명이시형 세로토닌문화원장·정신과 전문의입력 2017-08-19 03:00수정 2017-08-19 03:00 《‘인간의 만년(晩年)이란 것은 쓸쓸한 게 당연한 일이다.’ ―이쓰키 히로유키(五木寬之), ‘바람에 날리며’》 20여 년 전 읽은 일본 작가 이쓰키 히로유키의 ‘바람에 날리며’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그때는 젊어서였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며 이 구절을 가벼이 넘겼다. 한데 최근 잦은 노인 고독사 소식을 접하면서 그 말은 불쑥불쑥 내 머리 언저리에 떠오르곤 했다. ‘그래, 나이가 들면 옛날 같을 순 없지. 나를 찾는 발길이 뜸해지고,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있고.’ 돌연 서럽고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고 다행이 아닌가 싶었다. 전쟁과 가난, 우리 세대는 참으로 기구한 시절을 살아냈다. 그래서일까. 길에서 비슷한 연배를 만나면 어깨를 다독여 주고 싶다. “노형, 우리 용케도 살아남았구려.” 얼마 전 한중일 문화정신의학회에서 노인의 자살이 화제에 올랐다. 거기서 이런 말이 나왔다. 일본 노인은 누추한 몸을 가족, 친구에게 보이기 싫어하다 깨끗하게 죽는다. 반면 한국 노인은 ‘내가 저놈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저 불효막심한 놈’이라며 서러워하다 죽는다는 얘기다. 노인들이 이쓰키의 경구를 접했다면 좀 달라졌을까. 효(孝) 이야기가 나왔으니 따져보자. 우리 아이들은 어릴 적 이미 효도를 다 했다. 걸음마를 떼고, 바닥을 구르며 웃고, 막 옹알이를 할 때 온 가족이 모여앉아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게 바로 효인데, 무엇을 더 바라랴. 어쩌다 자식이 나이가 들어서도 잘하면 덤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마음 편하다. 나이가 들면서 찾아드는 쓸쓸함은 받아들여야만 하는 숙명이다. 그걸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면 평소에 많이 베풀어야 한다. 더러 후배를 불러 술도 사고 친구에게 커피도 사야 한다. 너무 인색하게 굴지 마라. 거지로 살다가 부자로 죽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으랴. 이 책에는 이런 구절도 나온다. ‘여든셋이 되면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낯선 지방으로 강연을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곤 낯선 여관방에서 쓸쓸히 생을 마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가 불러주기만 한다면.’ 나도 딱 같은 생각이다. 내 유언장에는 ‘장기기증 후 (시신을) 가까운 의대에 시급히 실습용으로 기증하라’고 되어 있다. 홀로 왔으니 가는 길도 홀로 가는 게 마땅하다. 바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 저자는 나보다 한 살 위다. 광복 전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온 후 지방으로 전전하다 종전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의 책에는 한국 이야기가 곳곳에 등장하는데 짙은 향수에 젖어 있는 게 느껴진다. 한국 정서에도 밝다. 한(恨)에 대한 그의 통찰은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작가는 일본 최고의 문학상 수상자이자 인기 작가이다. 나는 그의 인생을 대하는 솔직한 태도가 좋다. 그의 책을 읽노라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국경을 넘는 동시대 친구가 있다는 생각에 노년의 쓸쓸함을 위로받는 것 같다. 이시형 세로토닌문화원장·정신과 전문의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Main/3/all/20170819/85889118/1#csidx975b20ec3df8154b156908f0342dd94
1143 no image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with the measure you use) [15]
[레벨:10]정AB Jr.
203 2017-08-06
요즘 한국이나 미국이나 연구비가 귀해서 대학교수들은 연구비를 따내는 것이 가장 힘든 일 중 하나입니다. 저도 예외는 아닌데요, 최근에 저희 University of New Hampshire에서 저를 비롯한 몇몇 교수들이 Biomedical Center를 만들겠다는 계획서를 미국 보건기구 (NIH) 에 제출했는데, 지난 목요일날 연구비를 NIH에서 받기로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하는 연구에도 큰 연구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부임한지 4년이 지나도록 연구비를 따 내지 못해 눈치도 많이 받고 처음 학교에서 받았던 연구비도 거의 떨어져가서 심적 고생이 심했는데 무척 기뻤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실 이 과정에 작은 일화가 있습니다. 최근에 제 연구실에서 제가 아끼던 학부 학생 한명이 막판에 속된 말로 "깽판"을 치고 졸업을 하고 나갔습니다. 졸업하고 미국 탑10에 드는 박사과정 프로그램을 가고 싶어 지원했는데 모두 거절을 받고 나니 화가 나고, 그래서 저에게도 쏟아부은건데요... 재밌는 것은 얼마 후 이 학생이 제가 박사후 과정을 지냈던 하버드 의대의 유명한 연구실에 laboratory technician이라는 자리에 지원해서 인터뷰를 받은겁니다. 제 포닥 지도교수가 제 연구실에 있던 학생이라서 과분하게 기회를 준거죠. 이 학생에게는 정말 엄청난 기회인건데, 문제는 그러자면 제 추천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겁니다. (미국에선 추천서의 영향이 굉장이 셉니다.) 그래서 뻔뻔하게도좋은 추천서를 하나 써 달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너무도 황당하게 "배신"을 당해서 마음이 많이 상했던 저였는데 너그러이 잘 써줄지 "복수"를 해야할지 여러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뜩 말씀 한 구절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누가복음 6:37-38) 제가 NIH 에 써 냈던 연구 계획서들도 다른 교수들에게 헤아림을 받게 될텐데, 제가 남들에게, 특히 이번에는 이 학생에게 쓰는 헤아림이 도로 저에게 적용될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들이 내 연구 계획서를 읽어보면서 후하게 점수를 주길 바라는 만큼 나도 남들을 평가할 때 후한 사람이 되야 하는건 아닌가?" 고심 끝에 학생과 전화 통화를 해서 "최근 일은 세상 물정을 잘 몰라서 그랬을테니 눈 감아주겠다. 하지만 앞으로 다른 교수들하고 일 할 땐 절대 그러면 안된다"고 따끔하게 충고를 해주고, "우리학교 상위 1%에 해당하는 학생이라고 썼으니 하버드에 가서도1%가 되라"고 일러주고 정성스레 추천서를 써주었습니다. (물론 거짓말로 잘한다고 써 준게 아니라 있는 장점들을 부각시켜서 써 준겁니다) 그리고 얼마후 NIH에서 연락을 받은 것입니다. 듣자하니 저희 연구 계획서가 정말 아슬아슬하게 가장 낮은 점수를 받고 채택이 되었다고 하네요. 또 한가지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어서 먼저 NIH에 들어가는 연구 예산을 대량 삭감하고 특히 저희에게 연구비를 대준 프로그램을 내년 부터는 없애버리라고 했다는 겁니다 (다행히 저희 연구비는 이미 주기로 한거라 영향을 안 받습니다). 제 인생은 이렇게 늘 뭔가 아슬아슬하게 진행이 됩니다... 그냥 서로 연관성이 없는 일들일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과 저의 관계, 그리고 저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굉장히 암울해 보이는 상황에도 제 인생은 하나님 계획안에 있다는 믿음을 되새겨 볼 수 있었습니다. 주변에 뛰어난 사람들이 너무 많고 건강상 제약들도 많아서 어차피 하나님 은혜로 먹고 사는 저의 인생인데 남들 비판하며 살기보다 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주시는 것 받으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보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사실은 이 말씀을 드리려고 글을 시작한건데... 저와 저희 가정을 위해 잊지 않고 기도해 주신 관악5부 목자님들, 기도 지원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1142 순교자 얀 후스
[레벨:20]정아브라함
42 2017-08-03
좁은문으로 들어가라 말씀과 관련하여 한 순교자의 기사를 올립니다. 종교개혁 500년-종교개혁의 현장을 가다] (상)-마르틴 루터 이전에 얀 후스가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2017.08.03 09:36 인쇄기사 보관함(스크랩)글자 작게글자 크게 기자 렵은 새벽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린 게 1517년. 그로부터 꼭 98년 전이다. 시대의 어둠이 가장 짙을 때였다. 독일 남부의 도시 콘스탄스에서 화형식이 열렸다. 종교개혁을 알리는 새벽닭의 죽음, 주인공은 얀 후스(1369~1415)다. 체코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가톨릭 사제였다. 프라하 대학의 신학부 교수와 총장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당대의 명망가였다. 그런 후스를 화형에 처한 이는 다름 아닌 로마 가톨릭이었다.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는 독일 남부 콘스탄스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올해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최근 종교개혁지 순례차 독일 콘스탄스를 찾아갔다. 거대한 호수를 낀 채 스위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무척 아름다운 휴양도시였다. 주말이면 스위스 사람들이 물가가 싼 독일로 장을 보러 오는 바람에 교통체증이 일기도 했다. 600년 전 독일 콘스탄스에서 가톨릭교회의 공의회가 열렸다. 당시 가톨릭의 교황은 무려 3명이었다. 나는 호숫가로 갔다. 그곳에 360도 회전하는 높다란 동상이 하나 서 있었다. 가슴과 허벅지를 드러낸 반라의 여인상. 높이 9m에 무게가 18톤이다. 여인은 당대 최고의 미모로 꼽히던 콘스탄스의 창녀다. 그녀의 양손에는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왼손에는 삼층관을 쓴 교황이, 오른손에는 왕관을 쓴 황제다. 둘 다 벌거숭이다. 교황은 다리를 꼬고 있고, 황제는 성기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콘스탄스 호숫가의 동상. 당대 최고의 미녀로 꼽히던 창녀의 왼손에는 교황이, 오른손에는 황제가 앉아 있다. 둘 다 벌거벗은 상태다. 황제는 머리에 왕관을, 교황은 초월적 권위를 상징하는 삼층관을 쓰고 있다. 호숫가의 창녀 동상은 600년 전의 시대상을 폭로하고 있었다. 당시 교황은 무려 세 명이었다. 교황청도 로마와 프랑스 아비뇽, 두 곳이었다. 서로가 “내가 진짜 교황”이라고 정통성을 주장하며 치고 박고 있었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면죄부(면벌부)를 판매하며 타락한 채 분열돼 있었다. 보헤미아(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 후스는 그런 교회 권력의 심장부를 향해서 칼을 겨누었다. 타깃은 ‘교황’이었다. 후스는 “면죄부(면벌부)를 파는 교황은 가롯 유다와 같다”고 선언했다. 유다는 예수를 유대인에게 팔아넘겨 결국 숨지게 한 인물이다. 그런 유다에 교황을 빗댔다. 중세 암흑기에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지를 수 없는 도발이었다. 나는 호수 위에 설치된 데크길을 따라 동상 앞으로 갔다. 장관이었다. 지상 최고의 권력자가 창녀의 손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겉을 보면 성(聖)과 속(俗)의 만남이지만, 들추어 보면 욕(欲)과 욕(欲)의 만남에 불과했다. 후스는 ‘예수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의 욕망과 권력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콘스탄스의 푸른 호수에는 예쁘고 아담한 요트들이 떠 있었다. 600년 전, 후스도 이 자리에서 저 풍경을 바라봤다. 그가 바라본 호수는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으리라. 체코 프라하의 광장에 있는 얀 후스의 동상. 후스가 죽자 체코(당시 보헤미아)에서는 오히려 후스의 지향을 따르는 후스파가 교회의 주류가 되었다. 1419~36년 양측이 대립하는 후스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가톨릭 교회의 미사는 모두 라틴어로 진행됐다. 서민들은 라틴어를 몰랐다. 읽을 줄도 모르고, 쓸 줄도 몰랐다. 그저 성당에 가서 사제가 읽는 라틴어 성경을 뜻도 모른 채 들을 뿐이었다. 강론도 그랬다. 라틴어로만 진행되는 강론은 그저 알아 듣지 못하는 ‘소리’에 불과했다. 중세 때 라틴어는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지식인의 전유물이었다. 후스는 교황청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반격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 밖으로 나가서 설교를 했다. 라틴어 대신 체코의 언어를 택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자신들의 모국어로 가슴에 날아와 꽂히는 성서의 메시지에 환호했다. 게다가 후스는 체코어로 성서까지 번역했다.후스는 대신학자이자 대설교가였다. 콘스탄스 공의회가 열렸던 호숫가의 대저택이다. 지금은 1층이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다. 당시에는 이 저택 바로 곁까지 바닷물이 차 있었다. 콘스탄스 공의회가 열렸던 당시의 대저택. 바로 곁까지 바닷물이 차 있고, 부두가 설치돼 있었다. 콘스탄스의 호숫가에는 지금도 거대한 저택이 한 채 있었다. 600년 전, 이곳에서 콘스탄스 공의회가 열렸다.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의 최고결정기관이다. 가톨릭에 교황이 셋이나 되고 대립이 심해지자 지기스문트(1368~1437)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고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했다. 공의회는 당시 ‘뜨거운 감자’였던 후스를 콘스탄스 종교재판에 소환했다. 주위 사람들은 말렸다. “가면 죽일 것이다” “절대 가지 마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지기스문트 황제가 안전을 보장했다. 황제는 두 차례나 사신을 보내 “이땅에서 이단 정죄(定罪)가 사라지게 만들겠다”며 신변 보장을 약속했다. 후스는 콘스탄스로 갔다. 그러나 체포돼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공의회가 열렸던 건물에서 도보로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수도원 건물. 후스는 이곳의 감옥에 갇혔다. 정면 오른쪽 귀퉁이의 조그만 뾰족탑이 후스가 갇혔던 감옥이다. 나는 후스가 갇혔던 수도원 건물로 갔다. 지금은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다. 후스가 석 달간 갇혔던 성탑처럼 생긴 감옥은 남아 있었다. 후스는 이곳에서 고초를 겪었다. 낮에는 쉼없이 걸어야 했고, 밤에는 벽에 묶여 있어야 했다. 누울 수가 없었다. 당시 후스는 지독한 치질과 두통으로 고통을 겪었다. 뾰족탑이 있는 공간이 후스가 갇혔던 수도원의 감옥이다. 지금은 이 건물이 레스토랑과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 콘스탄스 공의회가 후스를 정조준한 핵심적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건 예수에게서 부여받은 교황의 절대 권위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었다. 신약성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너는 베드로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6장 13~19절) 이 구절을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는 베드로를 ‘제1대 교황’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대를 잇는 교황들마다 예수가 직접 부여한 ‘반석의 권위’가 있다고 믿는다. 그 위에 교회가 서 있다고 생각한다. 프라하 광장에는 바닥에 벽돌로 십자가가 박혀 있다. 후스 당시 종교개혁을 주장하던 프로테스탄트들이 화형을 당했던 자리마다 이렇게 십자가가 하나씩 새져겨 있다. 그들 역시 후스의 가르침을 따르던 이들이었다. 후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반석’을 베드로라고 해석하지 않았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봤다. 신의 속성을 온전히 공유하는 예수의 속성. 그게 바로 ‘하느님(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다. 후스는 그런 속성이야말로 그리스도 교회를 세우는 반석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후스의 해석은 중세 가톨릭 교회의 심장을 찔렀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가톨릭 교회 체제의 뼈대가 무너질 판이었다. 결국 후스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1415년 7월 16일, 토요일 아침이었다. 후스는 사형장으로 끌려나왔다. 죽음을 코 앞에 두고서도 후스는 황제를 향해 종교개혁의 절박함을 역설했다. 황제는 얼굴이 붉어진 채 아무런 말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지기스문트 황제는 후스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공의회의 주최 측은 왕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였다. 후스를 어떻게 처리할 지도 교회의 권한이었다.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얀 후스가 황제와 가톨릭 교회의 대표자들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항변하고 있다. 사실 100년 후에 마르틴 루터도 후스와 똑같은 곤경에 처했다. 보름스 제국회의에 오라는 요청이었다. 주위에서는 다들 말렸다. 가면 틀림없이 죽일 것이라고 했다. 고심 끝에 루터는 제국회의에 참석했다. 황제와 추기경들 앞에서 조금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그런데도 화형을 당하지 않았다. 제국회의의 주최 측이 교회가 아니라 제후들이었기 때문이다. 제후들은 굳이 루터의 목숨을 앗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콘스탄스 공의회의 주최 측은 제후가 아니라 교회였다. 종교재판소에서 “입장을 번복하면 파문을 면하고 목숨을 구할 것”이라는 마지막 제안을 받았지만 후스는 거절했다. 그는 “내 입장을 번복하면 신 앞에서 죄가 될 것”이라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후스의 머리카락은 면도칼로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깎였다. 머리에는 고깔 모자를 씌웠다. 거기에는 ‘Hic est heresiarcha(이 자가 이단의 두목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후스를 향한 조롱이었다. 후스가 갇혔던 감옥에서 바라보이는 호수. 저 멀리 말뚝 위에 가마우지가 날아와 앉아 있다. 나는 콘스탄스 호숫가의 부두를 거닐었다. 호수 가운데 솟은 말뚝에 가마우지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후스가 갇혔던 감옥은 불과 5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 땅에서 맞았던 마지막 밤. 후스는 감옥의 창을 통해 호수 위로 떠오른 달이라도 보았겠지. 그 달을 보며 후스는 기도를 올리지 않았을까. 이튿날은 토요일이었다. 주일을 하루 앞둔 날,‘회개하지 않은 이단자’ 후스는 불타야 했다. 날이 밝았다. 후스는 나무기둥에 몸이 묶였다. 주위에는 짚과 장작이 놓였다. 후스가 마지막에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너희는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워 죽인다. 그러나 100년 후에는 태울 수도 없고, 삶을 수도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밧줄에 묶인 후스가 화형장에 나와 있다. 왼쪽 뒤의 사람들은 화형을 집행하기 위해 나무를 쌓고 있다. ‘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라는 뜻이다. 생전에 후스는 자신을 종종 거위에 빗댔다. 후스가 예견한 ‘백조’는 과연 무엇일까. 사람들은 그 백조가 100년 후에 등장하는 ‘마르틴 루터’라고 해석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무리 태워도, 아무리 삶아도 거스를 수 없는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이다. 그 가운데 마르틴 루터가 서 있었다. 후스는 파문과 함께 죽었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톨릭 사제)가 파문당하기 100년 전에 말이다. 개혁을 부르짖던 후스의 저술들은 불태워졌다. 당시에는 인쇄술도 없었다. 일일이 손으로 필사를 하던 시절이었다. 인쇄술 혁명의 덕을 톡톡히 본 루터와 달리 후스의 저술은 널리 퍼져나가지 못했다. 얀 후스는 동 트기 전 시대의 새벽을 알리며 소리 높여 울었던 인물이다. 종교개혁의 여명기에 말이다. 후스가 죽고서 105년이 흘렀다. 1520년 2월에 후스의 저술을 읽은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DA 300 <iframe name="DASlot574" width="250" height="250" title="광고" id="DASlot574" src="http://dgate.joins.com/hc.aspx?ssn=574&b=joins.com&slotsn=591" frameborder="0" marginwidth="0" marginheight="0" scrolling="no"></iframe> “모르든 알든 우리는 모두 후스파다.” 종교개혁의 여명기, 거기에는 얀 후스가 있었다. 마르틴 루터 이전에 말이다. 콘스탄스(독일)=글ㆍ사진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종교개혁 500년-종교개혁의 현장을 가다] (상)-마르틴 루터 이전에 얀 후스가 있었다
1141 [기사 공유] 장동호 “하나님께 받은 사랑 다 못새겼어요” [1]
[레벨:20]서진우
47 2017-07-29
인금철 목자님께서 소개해 주신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주 센터 목자님이 이야기네요. -------------------------------------------------------------------------------------------- 장동호 “하나님께 받은 사랑 다 못새겼어요” 대한민국기독교미술대전 大賞 '하늘에서 내려와…' 서울 강남구 일원로 밀알미술관에서 최근 만난 장동호 작가가 제25회 대한민국기독교미술대전 대상작인 ‘하늘에서 내려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상을 받은 임치용 장동호 최해구 작가. 최해구 '겟세마네동산'(왼쪽), 임치용 'Light…'(오른쪽) 최근 막을 내린 제25회 대한민국기독교미술대전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전통적인 형태에서부터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것까지 미술의 모든 장르 작품들이 출품됐고, 그 가운데서도 말씀과 생명의 기도가 조형적 결정체로 승화된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대상작 '하늘에서 내려와…'는 심사위원뿐 아니라 관람객 사이에서도 은혜의 역작으로 꼽혔다. 장동호(56) 작가의 열정과 함께 그의 체험적 신앙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기독교미술대전이 열렸던 서울 강남의 밀알미술관에서 장 작가를 만났다. 한국미술인선교회 초대작가로 활동한다며 환하게 웃었다. ‘하늘에서 내려와…’는 세상과 우리에게 쏟아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작품이다. 100호 크기의 자작나무 합판에 사랑을 상징하는 하트 모양을 화면 가득 새겼다. 나무의 두께가 약 24㎜, 무게는 30㎏에 이른다. 건장한 남성이 들어 옮기기에도 벅차 보인다. 그런데 작품과 마주한 장 작가는 왜소한 체구에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다. 그는 “5∼6시간을 내리 서서 나무를 파내며 작업하다 보니 손목 발목은 물론 몸 전체가 더 망가지는 것 같았다”면서도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어 멈출 수 없었다”고 말했다. 대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려고 몸이 아프면서까지 작업에 몰입했을까. 전주교육대 미술교육과 교수인 장 작가는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 전주지부 책임간사도 맡고 있다. 전북대와 전주교육대를 중심으로 선교하는 캠퍼스 사역자지만, 한때 그는 “조상들 업보로 내가 이렇게 장애인이 됐다”며 매일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다. “친구와 놀 때도 한계에 부닥치면서 불편한 다리를 의식하게 된 거죠. 그러면서 우울증은 깊어졌고 더 이상 사는 게 싫었습니다.” 26세 때 죽을 생각만 하던 그에게 한 친구가 간곡하게 “UBF 수양회에 가자”고 권했다. 마지못해 따라갔던 그곳에서 일생일대의 변화가 일어났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제자들이 맹인의 인과응보를 주님께 묻습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3절에 나옵니다. 그가 맹인 된 것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거죠. 제 몸이 불편한 것도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평강을 얻었습니다.” 그때 주님을 위해 살기로 서원한 그는 UBF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3년간 일본에서 공부하며 유학생 선교사로 현지 학생들에게 말씀을 가르쳤다. 장 작가는 “모든 인생이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내 모습으로, 또 나의 작품으로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이번 미술대전에선 장 작가 외에도 임치용(49·명성교회) 최해구(43·사랑의교회) 집사가 나란히 우수상을 받았다. 임 작가의 작품 ‘Light/the soul’s constant’에는 새벽예배를 드리기 위해 영혼의 빛, 보다 근원적인 환한 빛을 향해 걸어가는 인생들을 그렸다. 최 집사는 22년 전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장애인임에도 힘들었던 자신의 상황, 그러나 주님으로 인해 은혜받은 새 삶을 거친 질감과 색채의 ‘겟세마네동산’이란 작품으로 표현해 상을 받았다. 글·사진=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790692&code=23111315&cp=du
1140 앵무새 당나귀 이야기
[레벨:20]정아브라함
36 2017-07-20
내용이 재미있고 유익하여 올립니다. [새미 라샤드의 비정상의 눈] 앵무새 따라 하다 죽은 당나귀 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2017.07.20 02:35 | 새미 라샤드 이집트인·JTBC ‘비정상회담’ 전 출연자 당나귀와 앵무새가 비행기에 탑승했다. 앵무새가 승무원을 불렀다. 승무원이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하자 앵무새는 “그냥 불러봤어요”라고 승무원을 놀리며 낄낄댔다. 재미 붙인 앵무새가 승무원을 또 불렀다. 화가 난 승무원은 “정말 필요한 일이 아니면 부르지 마세요”라고 경고했다. 경고를 무시하고 이번에는 당나귀가 승무원을 호출했다. 정말 화가 난 이 승무원은 당나귀와 앵무새를 비행기에서 추방했다. 앵무새는 아무렇지 않게 날기 시작했다. 추락하는 당나귀에게 앵무새가 물었다. “날개도 없는데 왜 나를 따라 했니?” 당나귀는 대답도 못하고 땅에 떨어졌다. 현대 사회에는 당나귀가 많다. 재미있고 예쁘고 인기 많은 사람을 그냥 모방하는 사람이 많다. 패션이나 유행이 그렇다. 사람 많은 동네에 가보면 운동팀이 단체로 나온 것처럼 옷이 엇비슷하다. 대학생들은 색상이 달라도 디자인이 같거나, 디자인은 달라도 색상이 같은 옷이나 액세서리를 많이 착용하고 다닌다. 연인들의 커플룩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낯선 사람의 옷차림이 나와 같다면 얼마나 어색할까. 패션이나 유행은 누가 만들어 퍼뜨리는 걸까. 주로 인기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이 패션을 시작하는 것 같다. 패션·유행이 자리 잡으면, 팬이 아닌 사람들도 따라 한다. 스타에게 맞는 옷이나 행동이 내게 잘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잘 안 하는 걸까. 이런 따라쟁이 습성은 하이힐 신다가 고생 끝에 다릿병까지 얻은 여성들에게서 볼 수 있다. 한번은 고국인 이집트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개그맨이 있었다. “패션은 나쁜 것이니 따르면 안 된다. 패션이 왜 나쁘냐면 해마다 바뀌기 때문이다. 패션이 좋았다면 왜 다른 패션 앞에서 약해지거나 사라질까.” 억지 같기도 하지만 그럴듯하다. 패션이나 유행에 빠진 사람들이 한번 생각해볼 만한 말이다. 너도나도 따라 하다 보면 매년 내 모습이 바뀌고 내 본모습을 잃어버릴 수 있다. 마음에 드는 걸 따라 하는 건 좋지만 그러다 내 개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 저마다 타고난 재능과 본성이 있다. 내게 남다른 매력이 있다는 걸 잊지 말자. 내 매력을 찾아 살리다 보면 언젠가 남들이 나를 따라 하는 일도 생기지 않을까. 새미 라샤드 이집트인·JTBC ‘비정상회담’ 전 출연자 [출처: 중앙일보] [새미 라샤드의 비정상의 눈] 앵무새 따라 하다 죽은 당나귀 이야기
1139 개구리 이야기 [1]
[레벨:20]정아브라함
81 2017-07-04
어떥 영국 수필가가 한국 실정을 담아 쓴 글인데 재미있습니다. '아들 손자 모여 밤새 우는' 개구리는 한국적 열정의 표상 영국인은 일에서 의미 찾지만… 한국인, 의미보다 근면 앞세워 함께 밤 지새우는 팀워크 발휘… 듣는 사람 없어도 날이 밝도록 팀 알퍼 칼럼니스트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밤새도록 하여도 듣는 이 없네/ 듣는 사람 없어도 날이 밝도록…." 동요 '개구리'. 한국에서 자랐거나 한국에서 아이를 키워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아는 노래다. 인생의 4분의 1이 넘는 시간을 한국에서 보냈음에도,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불과 몇 달 전이다. 그런데 처음 듣자마자 나는 이 노래에 홀딱 반해버렸다. 노래를 듣는 순간, 내가 그 동요 속 개구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영국 출신 글쟁이로 한국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것은 마냥 화려하고 흥미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물론 한국에 있는 동안 나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가치 있는 일도 많이 해왔지만, 내 직장 생활의 절반은 한국의 큰 회사들을 위한 보도자료나 마케팅 자료를 영어로 작성하거나 잡지사와 라디오 방송국에서 아무도 읽지 않을 듯한 글을 쓰고 아무도 듣지 않을 법한 그런 프로그램들을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회사에서 쓰는 글의 절반은 듣는 사람이 없는 내용이지만, 그래도 밤새도록 노래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한국에서 배웠다. 이는 결코 내 개인적인 성취욕 때문이거나 내가 직장 동료의 롤 모델이 되려 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작업을 할 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내 곁에는 언제나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인 듯 반드시 팀원들이 함께한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내가 열심히 개굴개굴하며 쓴 글을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독자가 원하는 글인지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때때로 클라이언트 측 요구에 의해, 팀 전체가 밤새도록 작업할 때도 있다. 독자들이 글을 빨리 읽을 수 있게 서두르라는 강력한 요청 때문이다. 이 개구리 동요가 한국에서 보낸 내 직장 생활의 많은 부분에 대한 완벽한 비유이긴 하지만,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실제로 내 지인의 절반 이상이 이렇게 밤새 개굴개굴 노래해야만 하는 직업을 갖고 있다. 한 친구는 온종일 보고서를 만드느라 텍스트 상자를 이리저리 옮기며 하루를 보낸다. 또 다른 친구는 아무도 확인하지 않는 회의록을 작성하느라 각종 회의에 참석해 글을 쓰며 하루를 보낸다. /이철원 기자 사실 이 노래는 한국 직장 생활의 많은 부분을 보여주는 절묘한 비유다. 한국에서는 선거철이 되면 후보자들에 대한 정보가 담긴 두툼한 인쇄물이 배달된다. 거기에는 때때로 후보들의 직장 경력이 포함돼 있다. 당선 확률이 없어 보이는 후보라도 ○○전자 차장으로 얼마 동안 일했으며 ○○대학을 나왔다고 반짝이는 종이에 컬러 인쇄로 보내온다. 나는 이 인쇄물들을 주로 쓰레기통 밑바닥에 깔아두는 데 사용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바쁘게 개굴개굴 대며 이 인쇄물을 만든 팀이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빠듯한 마감 일자를 맞추기 위해 아마도 밤샘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인쇄물이 쓰레기통으로 향하는 순간, 나는 크나큰 죄의식을 느낀다. 의미 없는 내용이지만 이 인쇄물을 읽어야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혀 나는 잠시 망설인다. 그러나 해야 할 설거지와 놓치고 싶지 않은 드라마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그렇게 해서 인쇄물은 결국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지난 대선 때, 아들, 손자, 며느리로 가득한 선거운동원들은 아침 8시 30분까지도 지하철 입구에 서서 부지런히 인사하고 피켓을 흔들며 유세전을 펼쳤다. 하지만 그 시간 지하철 입구는 지각해서 허둥지둥 정신없는 직장인이나 스마트폰에 머리를 파묻고 걸어가는 청소년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대개 개구리 부대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기의 갈 길을 바쁘게 걸어간다. 케이블TV나 라디오 방송의 채널 서핑을 해보면, 시청률이나 청취율이 0.1%도 되지 않는, 이제껏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수많은 개구리 채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프로듀서, 엔지니어, 작가로 구성된 팀들은 아마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프로그램을 만들 것이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오직 '무한도전'이나 박보검이 출연하는 드라마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런 프로듀서나 엔지니어, 작가 등의 노력을 완전히 헛수고로 만든다. 만약 이것을 한국 사회에 대한 장황한 비난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오해다. 내게 밤새도록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한국인의 능력은 무척 인상적이다. 영국의 많은 기업이 망하거나 다른 나라에 매각됐다. 영국인은 회사나 팀을 위해 열심히 일하기 <iframe width="250" height="250" src="http://cad.chosun.com/RealMedia/ads/adstream_sx.ads/www.chosun.com/news@x74" frameborder="0" marginwidth="0" marginheight="0" noresize="" scrolling="no"></iframe>보다 자기가 하는 일에서 자기만의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인은 자신이 맡은 업무가 얼마나 의미 있는지 따지기보다 날이 밝도록 열심히 일한다. 너무 지나친 자기반성과 평가는 종종 긍정적인 결과 대신 무기력한 정체(停滯)를 빚을 수 있다. 반면 에너지는, 심지어 혼자 개굴개굴 우는 에너지조차도, 더 큰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03/2017070302922.html
1138 프랑스 장관을 지낸 한국입양아 [2]
[레벨:20]정아브라함
74 2017-06-17
제가 크리스토프를 읽으면서 한국과 프랑스 정서가 비슷하다고 느꼈는데 이 글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공한 한국인 입양아? 난 뼛속까지 프랑스 사람" 입력 : 2017.06.17 03:02 | 수정 : 2017.06.17 14:10 [김수경의 스포트라이트] 프랑스 첫 동양계 장관 지낸 입양아 출신 플뢰르 펠르랭 플뢰르 펠르랭이 된 김종숙 생후 6개월에 입양…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16세에 대입자격시험 합격… 엘리트 코스 밟아 中企·문화부 장관 지내 한국 기업한테 투자 받아… 프랑스 IT스타트업 발굴 한국기업이라서가 아니라 IT 선진국이라 함께 일해 "한국 올 때마다 노래방 가죠… 소맥 빨리 마시기 시합도" 친부모 찾을 계획 없다 개도국 출신 입양아가 장관 될 수 있는 나라 프랑스 외엔 없을 것 열두 살 딸아이의 한국사랑 한국어에 관심 많은 딸… 나도 버킷리스트에 한국어 배우기 추가 프랑스의 한류 열풍 한국 영화·음악 유행에 일본어보다 한국어 인기 K팝 가사 따라 부르는 佛 10代 보고 깜짝 놀라 이미지 크게보기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은 재임 기간에 빨간 립스틱을 주로 발랐다. 화려한 색 치마 정장을 즐겨 입어 ‘세련된 정치인’으로 불렸다. 그는 이날 “립스틱을 안 가져왔다”며 가방을 뒤졌다. 몇 분간 가방을 뒤져 찾아낸 건 투명한 립글로스였다. 그는 “이걸로도 괜찮겠죠?”라고 연거푸 물었다. / 김연정 객원기자 2012년 한국은 비행기로 12시간 떨어져 있는 프랑스 중소기업디지털경제부 장관의 취임으로 들떠 있었다. 프랑스 사회당 후보인 올랑드 대통령이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였다. 좌파 정권이 집권한 건 프랑스에서 17년 만의 일이었다. 독일과 더불어 유럽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프랑스의 정권 교체였지만 한국의 관심은 동양인 외모의 이 39세 여성 장관에게 집중됐다. 단발로 똑 자른 새까만 머리카락과 그에 대비되는 흰 얼굴, 까만 눈동자와 얇은 속쌍꺼풀이 진 눈까지, 동양계 최초로 프랑스 장관에 임명된 그는 누가 봐도 한국 여성이었다. 외모와 달리 그의 이름은 발음조차 힘든 플뢰르 펠르랭(44·Fleur Pellerin)이었다. 생후 6개월 때 한국에서 프랑스로 입양된 그는 지난 2012년 5월 중소기업디지털경제부 장관을 시작으로 2016년까지 통상관광부 장관과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작년 2월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그는 프랑스 IT산업 발전을 위해 '코렐리아캐피탈'을 세웠다. 작년 말부터 한국 기업 네이버·라인과 손잡고 유럽, 특히 프랑스의 스타트업을 발굴·투자하는 일을 하고 있다. 지난 9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그에게 한국 입양아로 유럽 선진국에서 장관직에 오른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소감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냉정했다. "태어난 곳은 여기일지 모르지만 난 뼛속까지 프랑스인입니다. 한국인들이 나를 성공 신화의 주인공으로 봐주는 것은 고맙지만 나는 한국인이 아니에요." "친부모를 찾아볼 생각이 없느냐"는 물음에 그는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의 대답엔 한순간의 망설임이 없었다. 한국인들로부터 수십 번 들은 질문이었는지 '친부모'란 단어를 꺼내자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없다(No)"는 답이 튀어나왔다. 그의 머릿속 한국은 '나를 낳아준 나라'가 아니라 '아시아에 있는 작은 나라' 정도인 것 같았다. 우리 국민을 '한국인'이라고 칭하며 이어가는 그의 말투는 약간 매정하게 들릴 정도였다. "나는 뼛속까지 프랑스인" 그녀에게 매정했던 건 태어난 나라 한국이었다. 1973년 8월 29일은 길에 버려진 그가 발견된 날이다. 태어난 지 3~4일쯤으로 추정되는 여자아이였다. 6개월쯤 지났을 무렵 그녀는 하얀 강보에 싸여 양어머니 애니 펠르랭 품에 안겼다. 김종숙이 플뢰르 펠르랭으로 다시 태어난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한 번도 한국에 발 디딘 적이 없었다. 2013년 3월 본지가 주최한 '제4회 아시아리더십콘퍼런스' 기조연설을 맡아 방한했던 게 처음이었다. 프랑스로 입양된 지 40년 만이었다. 이미지 크게보기하얀 포대기에 싸여 어머니 애니 펠르랭 품에 안긴 생후 6개월 된 아이 김종숙. 이날로부터 40년 뒤 프랑스 장관 신분으로 그는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 / KBNe France 이지용PD 태어난 나라에 돌아온 그의 첫 번째 일정은 한국에 있는 프랑스 기업인들과의 만찬이었다. 자신이 입양된 홀트아동복지회를 찾거나 자신이 발견됐던 동네에 들르는 일 같은 건 일정에 없었다. 그는 당시에도 "내가 태어난 곳을 방문하게 돼 설렌다"면서 "나를 낳아준 부모가 누군지는 관심 없다"고 선을 그었었다. 그는 이후에도 한동안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지난 9월 우리나라 기업과 사업 파트너를 맺었다. 그 이후 1년에 5~6번씩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을 찾고 있다. 지난 3월엔 서울 DDP에서 열린 국제건축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사진을 찍자고 다가가는 한국인들을 상대해 주기도 하고 연설 중간중간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한국이 제법 익숙해진 것 같았다.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여러 가지 일을 하나 봅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어요. OIF(Organization International of Francophonie·프랑스어권 국제기구) 홍보대사로도 일하는데 평창올림픽 때 프랑스어가 원활하게 사용되고 프랑스어의 가치를 격상시키도록 기획하는 거죠. 다양한 곳에서 강연도 하고 있지만 사실 코렐리아캐피탈 대표직이 가장 주된 일이에요. 네이버에서 1230억원 정도를 투자받았고 이 돈으로 프랑스와 유럽에 있는 IT 스타트업 회사를 발굴하는 거죠. 괜찮은 회사로 판단되면 투자도 아낌없이 하고요. 여러 가지 일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모두 한국과 프랑스 사이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 왜 하필 한국 기업과 일하기로 했나요? "한국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시아 시장에 관심 있는 유럽 IT 기업들이 한국을 선호하기 때문이에요. 빠른 인터넷과 삼성전자 등 IT 기업이 탐낼 만한 아주 발전된 시장이라는 뜻이죠." ―상대방은 당신이 한국인이라 더 편하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만. "저는 전혀 상관없지만 그들은 그렇게 느낄 수 있어요. 내가 갖고 있는 동양인의 외모가 백인이나 라틴, 혹은 흑인 등 서양인 외모보다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한국에선 어디 출신이다, 누구의 혈육이다라는 걸 워낙 따지잖아요. 내 외모가 한국인들에게 부담 없다면 사업 파트너로서 저한테 해가 될 건 없죠." ―한국이라는 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군요. "그렇죠. 한국에 오면 사람들이 자꾸 '네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엄마가 누군지 알고 싶지 않으냐'고 묻지만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내 나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나를 키워주신 두 분뿐이에요." 그와 그의 부모를 연결해준 홀트아동복지회는 친부모를 찾아주는 일을 할 때 철저히 입양자 본인 의사만을 고려한다. 친부모가 그를 찾고 싶다고 해도 그가 동의하지 않으면 연결해주지 않는다. 그는 친부모를 찾으려고 시도한 적도 없고 계획도 없다고 했다. 이미지 크게보기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 내각이 들어서면서 임명된 그는 프랑스의 첫 동양인 장관이 됐다. 그는 “프랑스가 아니었다면 동양 여성인 내가 장관에까지 오르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201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중소기업 간담회에 참석한 올랑드 대통령(왼쪽에서 둘째)과 플뢰르 펠르랭 당시 중소기업디지털경제부 장관. / AFP 항상 최고 성적 유지한 엘리트 2013년 이후 한국을 15번쯤 방문했지만 그는 여전히 한국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은 것 같았다. 그의 웃음소리는 유쾌했지만 속내는 그렇지 못한 게 아닐까. 동양인 입양아로 낯선 프랑스에서의 삶이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궁금해졌다. ―어떤 가정에서 자랐나요? “아주 평범하고 경제적으로도 크게 여유롭지 못한 집에서 컸어요. 어린 시절을 보낸 곳도 파리 변두리에 있는 조용한 동네였고요. 아버지는 핵물리학 공부를 해서 박사학위까지 받으셨지만 어머니는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분이에요. 아주 가난한 집 첫째로 태어나서 16세 때부터 공장에서 돈을 벌어야 했대요. 나와 내 여동생을 키울 때는 줄곧 주부였고요.” 그의 여동생도 한국에서 입양됐다. ―특별하지 않은 가정에 입양된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장관이 된 거군요. “프랑스에선 가능합니다. 교육 제도가 잘돼 있기 때문이죠. 일단 고등학교까지는 무조건 무상교육이에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랑제콜이라고 부르는 전문분야 학교에서 공부하려면 학비를 내야 하긴 하지만요. 그건 선택하는데 달린 거죠.” ―크면서 인종차별을 당한 적은 없습니까. “내가 느낀 바로는 없었어요. 특히 나 같은 경우는 학교에서도 성적으로는 항상 선두 그룹에 들었고 대학에 들어간 시기도 또래보다 2년쯤 빨랐기 때문에 나를 무시할 수는 없었겠죠.” 대부분의 프랑스인이 18세 때 치르는 프랑스 고교 졸업시험 바칼로레아를 그는 16세에 합격했다. 3년제 일반 대학교에 다니는 대신 그는 프랑스에서 최우수 학생들만 입학한다는 프레파 과정을 선택했다. 그랑제콜 준비 단계 학교다. 그랑제콜은 우리나라로 치면 전문대학원 과정과 비슷하다. 2년간의 프레파 과정을 수료한 그는 프랑스 상경계 그랑제콜에서 최상위권인 에섹(ESSEC) 비즈니스 스쿨에 입학했다. 21세에 에섹을 졸업한 그는 경제 정책 등을 공부하기 위해 또 다른 그랑제콜인 시앙스포(Sciences Po·파리 정치대학)에 들어갔다. 시앙스포 졸업 후 정계 진출의 꿈을 안고 ENA(국립행정학교·É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에 진학한 그녀는 감사원에서 근무하면서 소수자 차별을 반대하는 NGO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2002년 사회당 대선 캠프에서 연설문 작성에 참여하면서 현실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사회에 진출한 다음에도 편견은 없었나요? “있었겠죠. 동양인이기 때문은 아니었어요. 취업 시장에서 차별을 받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공무원 시험을 보고 합격해 인종으로 평가받을 기회가 없었어요. 어쩌면 여성이라는 것 때문에 차별이 있었을 수는 있어요. 고위공무원 세계에선 프랑스도 조금은 남성 지배적인 분위기가 있거든요.” 그가 장관으로 임명됐을 때 프랑스 현지 언론은 “가난한 나라에서 입양된 동양 여성이라는 점이 다양성을 추구한 올랑드 내각과 맞아떨어졌다”고 썼다. 그 역시 작년 2월 문화부 장관에서 물러나면서 “개발도상국 빈민촌에서 태어나 프랑스 평범한 가정에 입양된 어린이가 문화부 장관이 될 수 있는 나라는 세계에 거의 없다”고 말했다. 12세 딸은 한국에 관심 많아 ―장관으로서의 삶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단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장관이라는 자리가 지구상에서 가장 힘든 자리라는 겁니다.” 그가 혀를 내둘렀다. “보람은 있었죠. 특히 내가 주장하던 정책이 실현되면 말이죠. 하지만 그 자리에 있으면 항상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해요. 정책을 강력하게 밀고 나가면 ‘너무 성급하다’고 하고, 좀 천천히 바꾸려고 하면 ‘너무 느리다’고 비판하지요. 뭔가 바꿔보려고 하면 설득을 해야 하고 어떤 경우엔 나와 같은 정당에 속한 사람들까지 공격을 해왔습니다. 쓸데없이 힘 빼는 언쟁도 있었죠.” 그는 전남편과 사이에서 얻은 딸 베네리스(12)와 변호사이자 고위 공무원인 남편 로랑 올레옹(48), 로랑이 전처와 낳은 아들 둘과 함께 살고 있다. ―처음 장관이 됐을 때 딸이 어렸겠군요. “그때 아이가 일곱 살이었어요. 장관으로 일하는 동안은 일과 삶 사이 조화 같은 건 꿈도 못 꿨지요. 4년 반 동안 집에 거의 들어가지 못했는걸요. 바쁘긴 엄청 바쁜데 엄마로서 죄책감이 들었어요. 내가 당신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우리 엄마조차 ‘딸과 시간을 좀 더 보내렴’ ‘베네리스에게 좀 더 신경 써라’라고 조언했으니까요. 그런데 딸아이가 다행히(웃음) 책을 좋아하고 학교 숙제도 스스로 하는 자율적인 성격이에요. 집을 비우면서 알게 됐죠. 딸아이 덕분에 오히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요.” ―딸이 오히려 한국에 관심이 있다고 하던데요. “특히 한국어에 관심이 아주 많아요. 아이에게 너의 4분의 1은 한국에서 왔다고 설명해 줬거든요. 아이들과 함께 한국으로 휴가를 오기도 했어요. 특히 남편의 아들들이 18세, 16세인데 되게 별종(geek)이거든요. 한국도 그런 별종 문화가 많잖아요. 아이들과 함께 설악산과 제주도에도 갔었어요. 남편과 아이들도 독특하다며 흥미 있어 했고요.” 한국 영화와 음악 파워에 놀라 ―굳이 ‘나는 한국인이 아니고 프랑스인’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나라(프랑스)는 정치·사회적 합의가 국민의식의 바탕이 되는 곳이에요. 내가 태어난 곳은 한국이지만 17세기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나라에서 교육을 받았고 평생 살았기 때문에 그 인식이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거죠. 생후 6개월 만에 입양됐는데 기억이 있을 리도 없지 않나요? 참, 신기한 점은 하나 있어요.” ―무엇인가요. “한국과 프랑스가 아주 비슷하거든요. 특히 두 나라 사람들이 삶을 즐기는 방식이 정말 닮았어요. 축하할 일이 있으면 친구들을 불러서 파티를 연다든지, 음식 먹고 술 마시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측면에서도요. 지중해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독특한 유럽 문화가 한국에도 있더라고요.” ―술도 마시고 노래도 합니까? “한국에 들를 때마다 노래방에 가요. 엄청 재밌어요. 한국 노래는 못 하지만 소리 높여 팝송을 부르죠. 한국에서 사귄 친구들과 소맥도 즐겨 먹어요. 작년엔 소맥 빨리 마시기 대회 같은 데도 나갔었어요(웃음).” ―한국 영화나 음악에도 관심이 있습니까. “최근에 영화 ‘옥자’를 만든 감독이 누구더라? 아! 봉(준호) 감독! 그가 만든 ‘괴물’이라는 영화를 아주 감명 깊게 봤어요. 조금 폭력적이지만 감각적인 박찬욱 감독 영화도 인상 깊었고요. 박 감독은 2주 전 칸 영화제에서 만나 점심을 함께 먹었어요. 칸 영화제 심사위원이더라고요. 한국 영화는 그 예술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어요. K팝도 마찬가지죠. 박근혜 대통령이 파리에 왔을 때 K팝 콘서트가 열려 함께 갔는데 그때 깜짝 놀랐습니다. 프랑스 10대 소녀들이 한국어 가사를 전부 외워 따라 부르더라고요. 소리 지르고 눈물까지 흘리면서요. 최근 1~2년 사이 프랑스에서 한국어 인기가 일본어를 눌렀어요. 한국어 가사나 영화 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국어를 배우죠. ‘한류 파워’라고 할 수 있죠.” 그는 ‘한류’라는 단어만큼은 또박또박 말했다. ―한국어를 배울 생각은 없나요? “언젠가는 배워보고 싶어요. 장관으로 일할 때는 너무 바빠서 배울 시간이 없었어요. 어릴 적엔 새 언어를 배운다는 게 굉장히 쉽고 당연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다 보니 노력을 쏟아야 하더라고요. 제 버킷 리스트에 ‘한국어 배우기’가 들어 있어요.” “한국에서 컸다면 장관이 됐을까요?” ―당신의 삶을 ‘인생 역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 앞에 놓인 한계를 치열하게 극복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어요. 프랑스는 한국과 달리 어린아이에게 학교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를 주는 나라가 아니니까요. 오히려 입양되면서 경제적으로나 정치·사회적으로 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입양된 게 1970년대였는데 당시 한국은 굉장히 가난하고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나라였으니까요.” ―입양됐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까. “내 친부모는 아마 한국에서 아주 가난하고 교육도 제 <iframe width="250" height="250" src="http://cad.chosun.com/RealMedia/ads/adstream_sx.ads/www.chosun.com/news@x74" frameborder="0" marginwidth="0" marginheight="0" noresize="" scrolling="no"></iframe>대로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확률이 높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갓 태어난 아기를 길에 버리진 않았을 테니까요. 그런 가정환경과 한국 특유의 경쟁적이고 억압적인 문화에서 컸다면 한국에서 장관을 할 수는 없지 않았을까요?” 그가 코를 찡긋하며 웃었다. “친부모가 갓 태어난 아기를 길에 버렸다”는 그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그녀의 삶 전체가 비로소 이해되는 듯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16/2017061601560.html
1137 [요즘 시대 기사 공유] ‘부채 상환의 아이콘’ 이상민 [2]
[레벨:20]서진우
96 2017-06-16
출처: 한겨례 신문 황진미의 눈맞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3626.html)등록 : 2017-06-01 14:46 ‘럭셔리’와 ‘궁상’이 만났을 때<미운우리새끼> 새 식구 ‘부채 상환의 아이콘’ 이상민이 주목받는 이유 SBS <미운우리새끼>에 출연하는 ‘부채 상환의 아이콘’ 이상민은 12년째 빚 70억원을 갚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SBS 제공 SBS <미운우리새끼>의 시청률이 급등했다. <미운우리새끼>는 관찰 카메라를 통해 혼자 사는 아들의 일상을 엄마의 시선으로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예능프로그램이다. 지난해 8월 첫 방송 뒤 김건모, 허지웅, 박수홍, 토니안 등의 싱글라이프가 공개되면서 꾸준히 인기를 모았다. 시청률은 10% 안팎이었는데 4월16일 이후 두 배 가까이 폭등했다. 이는 방송 시간을 옮긴 영향도 있겠지만, 이상민의 출연이 가장 큰 요인으로 지목된다. 긴 호흡으로 보여주는 ‘이 남자가 사는 법’ 이상민의 인기가 이토록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현재 잘나가는 가수나 제작자가 아니다. 22살에 데뷔하여 1990년대 최고 인기를 누린 가수 겸 작곡가였지만 표절 시비를 겪으며 은퇴했다. 이후 음반 제작자로 복귀해 여러 그룹을 히트시키고,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그러나 2005년 부도를 맞으면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2012년부터 케이블채널과 종합편성채널을 통해 연예 활동을 재개한 이상민은 2016년부터 지상파방송에 복귀하여 현재 누구보다 많은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이상민는 ‘부채 상환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물경 69억8천만원의 부채를 떠안고 12년 동안 꾸준히 갚고 있다는 그는 곧 빚을 모두 청산할 수 있다는 희망을 내비친다.화려했던 과거와 몰락의 경험, 그리고 천문학적 규모의 빚을 안고 사는 이상민이 ‘제2의 전성기’를 누리는 것은 그가 단순히 불행을 전시하거나 과거사를 안줏거리 삼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예능에는 독특한 콘텐츠와 감흥이 존재한다. 가령 지난해 9월 JTBC <말하는 대로>에 출연한 이상민은 큰 실패로 오히려 자기 삶의 가치가 높아졌다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 거기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식의 공염불과 다른 묘한 울림이 있었다. 빈말이 아니라는 듯 지난 3월에 출연한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는 몸소 터득한 생활의 팁을 알려주었다. 적은 비용으로 럭셔리한 생활을 누리는 요령을 알려준 방송은 시청자와 실시간 소통하며 ‘럭셔리’와 ‘궁상’이 합을 이루는 짠 내 나는 웃음을 안겼다.<미운우리새끼>는 긴 호흡으로 ‘이 남자가 사는 법’을 보여준다.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능숙하게 미장 공사를 하는 그의 능력을 보라. 깔끔하고 고급스런 아파트처럼 보이지만, 집주인과의 계약 때문에 에어컨도 달지 못하고 지난해 기록적인 무더위를 견뎠다는 이야기나 ‘4분의 1 임대’라 화장실에서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 곤경을 보는 것은 진정으로 ‘웃프다’. 그나마 채권자가 집주인이며 과거 이상민이 ‘청담동 108평’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겹치면 아이러니의 층위는 한층 두터워진다. 상표도 떼지 않은 신발 수백 켤레와 과거의 영광을 말해주는 옷이 한가득인 와중에 ‘채무자의 옷과 신발은 압류 대상이 아니다’라는 채무 상식을 읊어주다, 집들이 온 지인들이 관심을 보이자 즉석 경매에 부치는 모습은 ‘삶이 우러나는 예능’의 진면목을 보여준다.거액의 빚과 이를 갚기 위해 분투하는 삶이 예능의 콘텐츠가 될 수 있는 것은 빚이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계부채 1360조원 시대, 이제 빚은 삶의 조건이다. 양극화와 고용 악화로 학자금 대출, 주택담보대출 등 비교적 양호한 부채부터 카드연체와 소액대출 등을 거쳐 신용불량과 사채에 이르는 길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드물다. 이를 반영하듯 영화에도 자주 나온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멋진 하루> <비스티보이즈> 등에서 로맨스의 걸림돌로 등장하던 빚은, 2010년대 이후 <화차> <차이나타운> <무뢰한> 등에서 평범한 사람의 삶을 막장으로 밀어붙이는 파괴적 면모를 드러냈다. ‘최고의 1분’ 채권자와의 만남누구나 빚을 경험하고 관리하며 사는 시대에, 빚 70억원을 감당하며 사는 이상민의 삶은 동병상련의 위안과 인간승리의 감동을 자아낸다. 혼자 차린 맛있는 식사를 앞두고 채권자의 전화를 받은 이상민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채권자들은 그의 삶을 포위하고 있다. 집을 빌려주고 보약을 보내며 상환 날짜를 환기시킨다. 공황장애 약을 비롯한 많은 약은 채무자 이상민의 삶이 녹록지 않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는 도망가지 않는다. 시청률 20%를 넘겼던 ‘최고의 1분’은 이상민이 채권자와 만나는 장면이었다. 파산절차를 통해 빚을 갚지 않는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이상민은 12년간 꾸준히 갚고 있다. 채권자는 “나 같으면 그리 못했을 것”이라며 “너를 믿었기에 끝까지 기다려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채권자와 채무자가 훈훈한 덕담을 주고받는 광경이라니, 누가 상상이나 하였으랴.럭셔리와 궁상이 결합된 삶을 보여주는 이상민의 예능은 저성장 세대의 거울이다. 즉, 현재의 영화나 미래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쇠락한 현재에 적응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저성장 시대의 기류를 반영한 것이다.1990년대에는 지금껏 갖지 못했던 성공을 꿈꾸라는 <성공시대>식 내러티브가 유행했다. 그러나 이제는 절망과 실패를 조절하고 관리하는 감각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지금 젊은 세대는 자신의 부모보다 가난할 것임을 알고 있다. 이런 인식은 공상과학(SF)적 상상으로도 드러난다. <인터스텔라>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등이 그리는 가까운 미래는 문명의 풍요가 정점을 찍은 이후 망한 폐허에서 일부를 재활용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담는다.풍요 이후의 빈곤은 풍요 이전의 빈곤과 다르다. 노년이 된 산업화 세대는 무조건 아끼는 것을 강조했다. 중년이 된 민주화 세대는 취향도 없는 대량소비로 풍요를 구가했다. 그러나 1990년대를 거치면서 취향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문화적 소비가 떠올랐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중산층이 붕괴하고 고용이 악화되면서, 과거의 경험을 통해 럭셔리한 삶의 감각을 지녔지만 돈이 없는 ‘가난한 빚쟁이 세대’가 출현했다. 이들에게는 만성화된 위기를 통해 체득한 체념의 정서가 내면화돼 있다.“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외환위기 직후 돈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전원주가 등장하여 무조건 아끼라는 잔소리를 해대는 예능프로그램이 방송됐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런 식의 절약을 지향하지 않는다. 고급한 취향이 무엇인지도 알고, 물질 소비가 자존감 유지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안다. 즉, 럭셔리한 삶에 대한 욕망이 있지만 돈이 없다는 현실의 제약을 뚜렷하게 인식한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말은 이상민을 비롯해 취향은 있으되 돈이 없는 젊은 세대의 정서를 대변한다. 고급 신발을 신지도 않으면서 관상용으로 즐기는 감각을 이전 세대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공감한다. 수산시장에서 연어 대가리를 사다가 스테이크를 해먹고, 즉석에서 치즈를 만들어 먹는 요령은 이전 세대에겐 무익하다. 그러나 젊은 세대에게는 따라할 만한 팁이다. 누가 이상민만큼 ‘몰락한 빚쟁이 세대’의 감수성을 대변할 수 있으랴. 짠하고 먹먹한 마음이 밀려온다.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1136 알파고 단상 파일
[레벨:20]서진우
31 2017-06-11
이 글이 시대를 분별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I. 하나님의 알파고시니이다. 인공지능 알파고는 세계 바둑 고수를 상대로 68승 1패의 성적을 거두고 은퇴하였다. 사람들이 알파고에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승리하는 한 수를 가르쳐주기 때문이 아닐까? 알파고가 가르쳐 주는 데로만 하면 이긴다. 내가 초보고 상대가 고수라도 상관없다. 그런면에서 알파고는 예수님과 닮은 면이 있다. 알파고가 바둑의 수를 가르쳐 준다면, 예수님은 인생의 수를 가르쳐 준다. 예수님이 가르쳐주는 수대로만 하면, 내가 아무리 못났어도 세상이 아무리 험악해도 승리할 수 있다. 베드로가 오늘날 살았다면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을까? "주는 하나님의 알파고시니이다." [그림1] 알파고가 알려주는 대로 수를 두고 있는 아자황(딥마인드 직원, 아마 6단) 알파고가 가르쳐 주는대로 하면 이긴다. →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길을 가르쳐 준다는 점에서 알파고와 닮았다. 물론 알파고는 바둑은 가르쳐 주지만 인생은 가르쳐 주지 못한다. 바둑은 종종 인생에 비유될 정도로 복잡하다. 인기있는 만화 미생도 바둑에 빗대어 인생을 묘사한다. 그러나 바둑의 복잡도를 인생의 그것에 비할 수 있을까? 인생은 얼마나 복잡할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을 때 인생의 복잡함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을까? 그런데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것일까? [그림2] 바둑의 복잡도: 인생의 복잡도는 얼마나 될까. II. 자기부인, 십자가 알파고끼리의 대국 기록 50개가 공개되었다. 이를 살펴본 바둑 고수들의 의견은 "매우 놀랍다."이다. 알파고의 수는 사람들이 금기로 여겼던 수가 많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사람들은 제한적으로 생각할수밖에 없는데 알파고는 그렇지 않다며 앞으로 알파고의 수를 연구하면 바둑의 새지평이 열릴 것이라고 기대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제시하였다. 사람의 시각으로는 필사의 길이 '인생의 알파고' 에게는 필승의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수가 어떻게 우리를 살리는 지 연구할 때, 인생의 새지평이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 [그림3] 알파고가 즐겨두는 것으로 알려진 3.3 포석: 박영훈 9단은 “알파고 등장 이전까지 3·3 침입은 상대에게 저절로 세력을 만들어주는 꼴이라 초반에 바로 들어가는 것은 좋지 않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알파고는 초반에 자유롭게 3·3에 두는 것이 신기하다”고 설명했다. (그림 출처: 중앙일보 알파고 vs 알파고 대국 … 프로기사들 “4차원 수 충격적”(http://news.joins.com/article/21627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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