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관악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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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정아브라함
57 2017-03-06
조선 의술 농축된 ‘패치’ 귓속의 소음 잡는 해결사 - 각종 약물 통해 체온조절, 점액분비…400년 만에 부활한 허임침법도 한몫 --> 허임 침법 & 청음고로 스트레스 싹, 보신고와 장원고로 피로 해소 기사입력 : 2017-03-05 09:13 각종 이비인후과 질환과 알레르기 질환의 치료로 유명한 서울 강남구 갑산한의원. 이곳은 요즘 난치질환인 이명(耳鳴)을 치료하려는 환자로 북적인다. 이 한의원의 원장 이상곤 박사는 조선시대 침의 대가였던 허임의 보사(補瀉)침법과 ‘동의보감’ 등 한의학 문헌에 나타난 처방으로 이명을 치료하는데, 그 효과가 입소문을 타면서 전국 곳곳에서 환자가 찾아온다. 이곳에서 치료를 받은 사람 중에는 수십 년간 이명으로 괴로움을 당하다 겨우 탈출한 사람도 있고, 끊임없는 자살충동으로 생의 마지막에 섰다 이곳에서 치료를 받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이도 있다. 최근 이 한의원은 한의학의 문헌적 자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패치 처방을 만들어 큰 효험을 보고 있다. 이 박사는 “문헌에서는 치료 효능을 자신 있게 표현했지만 실제 임상에서는 효능이 검증되지 않는 약물을 제외하고 선택적으로 약물을 압축했다”고 밝혔다. 스트레스성 이명에는 사향과 지룡 등의 약물이 들어간 청음고(淸音膏)가 특히 좋은 효능을 보였고, 보신고(補腎膏)와 장원고(狀元膏)도 효과가 좋았다. 보신고는 보신(補腎)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진 석창포 등이 들어간 약물로, 귀에 직접 넣는 게 특징. 장원고는 배에 붙여 원기를 돋우는 배꼽 패치인데 옛날 선현들이 배꼽 뜸을 뜨던 원리에서 착안했다. 이명은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서 다른 사람의 말이 잘 안 들리는 게 일반적 증상. 하지만 두통이나 어지럼증, 수면장애를 호소하는 이도 많다. 때로는 귀가 꽉 막힌 것 같은 폐색감과 귀에 뭔가가 들어간 것 같은 이물감을 느끼기도 한다. 귀가 아픈 사람도 있고 심하면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이르러 자살을 시도하는 이도 있다. 이명은 스트레스, 피로나 과로, 중이염이나 감기, 내이질환(메니에르병, 돌발성난청), 교통사고나 대수술, 음향 노출, 약물 복용, 수면 부족, 잦은 기압의 차이(비행기 탑승, 고지대 등산) 등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끝내 원인을 밝히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보면 스트레스로 발병한 경우가 가장 많고 피로나 과로가 그 뒤를 잇는다. 이는 갑산한의원의 환자 통계에서도 드러나는데 최근 내원한 이명 환자 100명의 원인을 조사해봤더니 스트레스 37명, 피로나 과로 17명, 중이염이나 감기 13명으로 나타났다. 그다음은 내이질환을 앓고 난 후 8명, 큰 소리에 자주 노출된 경우 7명 순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도 10명에 달했다. 심적 고통과 스트레스 생기면 ‘귀울음’ 그렇다면 스트레스가 이명을 일으키는 이유는 뭘까. 이 박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한의학에선 이명을 한자로 ‘耳鳴’이라 쓴다. ‘귀 소리’라 하지 않고 ‘귀울음’이라 표현한 것으로, 심적으로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스트레스다. 스트레스가 생기면 교감신경계가 흥분하고 우리 몸은 긴장한다. 싸울 때 주먹을 움켜쥐듯 혈관이 좁아지면서 몸이 굳고 저리게 된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흥분하거나 열 받는 상태가 된다. 한방에선 귀가 차가워야 건강하다고 본다. 뜨거운 것에 손을 데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귓불을 만지는 것도 귀가 차기 때문이다. 차가워야 정상인 귀가 열 받아 더워지면 병적인 상태로 간다. 이게 바로 이명이다.” ‘동의보감’ 귀울음 조문에는 ‘스트레스를 주관하는 경락은 간담이다. 간담이 열을 받으면 기가 치밀어 오르면서 귓속에서 소리가 난다’라고 쓰여 있다. 이런 사실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된다. 조선시대 후궁의 자손으로 처음 왕위에 오른 선조는 지독한 이명으로 고생했다. 후궁 태생이라는 콤플렉스와 나날이 강화되는 신권 때문에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결국 이명이 발병한 것이다. 이때 선조의 이명을 치료하고자 나선 이가 바로 허준이 조선 으뜸의 침의(鍼醫)라 극찬한 허임(어의 역임)이었고, 그가 선조에게 쓴 침법이자 조선 최고의 침법이 보사침법으로 알려진 천지인(天地人)침법이다. 선조가 허임에게 침을 맞은 것은 왕조실록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허임은 스트레스 때문에 귀로 치밀어 오른 기(氣)를 손발에 침을 놓아 손발 끝으로 분산시켰다. 기를 조화롭게 균형 잡아 귀울음을 해소한 것. 허임의 보사침법을 어렵사리 되살린 이 박사는 “보사침법에는 특징이 있는데, 일반적인 침법이 득기(得氣)를 위주로 한 번 찌르면 되는 반면, 허임의 침법은 세 번에 걸쳐 돌리고 기 방향에 따라 득기를 하면서 침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 침법은 이면에 천지인이라는 철학적 원리를 내포한 조선 고유의 심오한 침법”이라고 전한다. 보사침법을 흔히 풍선에 비유하는데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는 것처럼 몸에 기를 팽팽하게 채워넣는 것이 보법이고, 사법은 이와 반대로 풍선에서 공기를 빼는 것처럼 침을 놓는 것이다. 이 박사는 “이명은 귀 안의 신경세포인 유모세포가 지나치게 흥분한 것인데, 허임의 사법을 바탕으로 한 침술로 이를 진정시킨다”고 말한다. 갑산한의원에선 귀의 열을 식히고 집중된 기를 흩어주는 데 외용약물을 쓴다. 앞서 언급한 패치 처방은 이런 약물을 환자가 직접 몸에 붙이거나 삽입할 수 있도록 제작한 것. 외용약물에는 먼저 스트레스성 이명 치료제이자 ‘투관통기약(套管通氣藥)’인 ‘청음고’가 있다. 이 이름은 막힌 기를 열어줘 통하게 하는 약이라는 뜻이다. 사향과 용뇌를 대표적으로 쓰는데, 사향은 사향노루의 배꼽에 형성된 향료로 ‘마음속에 생긴 번열을 해소한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에 달아오른 열을 식혀주는 지렁이(蚓)와 여러 약물을 아울러 귀 뒤에 붙이거나 귓속에 솜으로 감싸 넣으면 스트레스로 인한 열이 진정된다. ① 배꼽에 붙여 원기를 돋우는 장원고. ② 귀 뒤에 붙여 스트레스를 없애는 청음고. ③ 귀에 넣어 신장 기능을 강화하는 보신고. 손상된 신장 기능 살리고 피로 해소 이 박사는 실제 통계조사에서도 나타났듯, 이명을 일으키는 한 축이 정신적 고통인 스트레스라면, 육체적으로는 피로나 과로가 큰 원인이 된다고 본다. 한의학은 피로나 과로가 신장(腎)의 작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인정한다. 실제 ‘동의보감’에는 ‘피로가 겹쳐 과로한 경우 또는 중년이 지나 중병을 앓거나 성생활이 지나친 경우에는 신수(腎水)가 고갈되고 음화(陰火)가 떠오르면서 늘 소리가 난다. 그 소리가 매미 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종이나 북치는 소리 같기도 하다’고 쓰여 있다. 한편 정통 한의학은 신장과 부신이 일치한다고 보는데, 부신의 기능이 떨어지면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고, 자주 깨며, 일어났을 때 피로하고 이명이 심해진다. 사는 게 재미 없거나 해야 할 일이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고 불안하다. 얼굴이나 다리가 잘 붓고 이마, 얼굴, 몸에 검은 점이 생기며 주위에서 혈색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참을성이 없고 화를 많이 내며 배고픔을 참기 힘들어진다. 알레르기나 이유 없는 알레르기 반응이 생기고 감기에 잘 걸린다. 갑산한의원은 이렇듯 손상된 부신(신장)의 기능을 살리고(補腎) 육체적 피로와 고통을 해결해 귀울음을 치료하고자 ‘동의보감’에 주목한다. ‘귀에 송진, 석창포 등의 약물을 솜으로 감싸 넣으면 신기(腎氣)가 허(虛)해 귀에서 바람 부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종·경소리 같은 소리가 나거나 갑자기 들리지 않는 것을 치료한다.’ 이 원리에 따라 만든 것이 고약을 귀 안에 넣는 ‘보신고’다. 이 박사는 “신허(腎虛)와 비슷한 말로 ‘하초가 허하다’ ‘허리 아랫부분이 시원치 않다’ 따위의 표현을 쓰는데 아랫배(배꼽)에 뜸 대신 붙이는 고약으로도 보신 효과를 볼 수 있다. 갑산한의원이 만든 ‘장원고’는 ‘하초’의 원기가 허하고 차서 배꼽 둘레가 차고 아픈 것을 치료하는 계피, 오수유를 이용해 만든 고약으로 먹는 약물과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밝혔다. 도움말, 자료제공 = 갑산한의원 (http://www.kabsan.net)
974 건강을 위한 제언
[레벨:20]정아브라함
45 2017-03-26
사람 속으로] 기를 막는 건 시기·질투 … 바른 자세가 건강 비결 실시간 트렌드 뉴스 순위 1717 J 트렌드 순위중앙일보 기사 중 조회수·추천·공유가 제일 활발한 30개의 기사를 표시합니다 [중앙일보] 입력 2017.03.25 01:00 | 종합 18면 지면보기 혈기도(穴氣道) 창시자, 81세 우혈 선생 혈기도 창시자 우혈 선생은 여든이 넘었지만 혈색이 좋다. 혈기도 수련으로 기운이 원활하게 흐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생은 “모든 기운을 단전에 쌓이게 하는 게 가장 바른 자세”라고 했다. [사진 오종택 기자] 한 택배회사의 수도권 물류센터에서 근무하는 박철진(41) 팀장은 어깨 통증으로 고생 중이다. 한두 해 전부터 오른쪽 어깨가 욱신거리더니 올 초부터는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지 못할 정도로 증상이 심해졌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옷을 입을 수도 벗을 수도 없다. 답답한 건 정확한 원인을 모른다는 점이다. 의사의 진단은 오십견(五十肩). 박씨는 40대 초반인 자신에게 왜 이런 증상이 생겼는지 궁금하다. 20대 중반까지 아마 복서 활동설악산서 17년 수련 후 혈기도 창시 여든 넘어서도 아이처럼 몸 유연해 356가지 동작·호흡법 등 수련 “몸은 정신의 도구 아닌 진정한 주인” 몸과 대자연이 소통하도록 도와줘 스트레스로 인한 성인병 예방 “단전호흡하고 적게 먹는 게 중요 마음 비우고 우주 기운 받아들여야” 혈기도(穴氣道)의 창시자이자 세계연맹본부 총재인 우혈(宇穴·81) 선생은 이달 1일 발간한 저서 『몸이 나의 주인이다』(일리)에서 박씨가 겪는 것 같은 원인불명 질환들과 각종 성인병을 ‘기(氣)의 단절로 인한 현상’으로 규정했다. 현대인들이 필요 이상으로 먹고 마시고, 다양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올바른 자세와 호흡을 외면하다 보니 자연과 교류가 끊겨 생긴 부작용이라는 설명이다. 최근 서울 종로의 혈기도 세계연맹본부 도장에서 만난 우혈 선생은 “기가 막히고 기가 차다는 표현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시기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남을 이기려 하는 인간의 감정들이 기를 막히게도 하고 차게도 하는 것”이라며 “병원과 한의원을 몇 년간 다녀도 차도가 없었다던 사람들이 수련을 통해 혈문(穴門)을 연 후 거짓말처럼 좋아지는 모습을 자주 봤다”고 말했다. 우혈 선생은 여든을 넘겼지만 청년처럼 혈색이 좋다. 깊은 주름이나 검버섯도 거의 없다. 눈빛은 강렬하고 목소리는 맑았다. 몸은 탄탄하면서 유연했다. 혈기도의 여러 행공 중 최고 난도로 꼽는 ‘발뒤꿈치 잡고 상체 세우기’(일명 곰 행공)를 시연할 땐 고관절이 믿을 수 없는 각도까지 돌아갔다. 혈기도 세계연맹본부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황남준 사범은 “마음을 비우고 우주의 기운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단성(丹成)’의 경지에 오르면 몸이 어린아이처럼 유연해져 어떤 동작이든 자연스럽게 소화할 수 있다”며 “(우혈) 선생님께선 곰 행공을 하며 몇 시간씩 주무시기도 한다”고 말했다. 우혈 선생은 20대 중반까지 ‘스포츠맨 허장수’로 살았다. 경희대 체육학과를 나와 아마추어 복싱 전국대회에서 입상할 만큼 운동신경이 뛰어났다. 태권도 등 여러 무예도 익혔다. 시원시원한 성격과 추진력을 앞세워 사업에도 성공했다. 남부러울 것 없는 날들이었다. 혈과 기의 세계에 입문한 건 29세 때인 1965년이다. 도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이 세상에 정말로 신선이 있는지 궁금해 무작정 내설악 한계령으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스승인 천우(天宇) 선생을 만나 17년간 수련했다. 우혈이라는 호도 스승한테 받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산으로 향한 이유에 대해 우혈 선생은 “하는 일마다 잘됐고 늘 이겼지만 마음이 허전했다.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는 생활이 싫었다”며 “진정한 나의 삶을 찾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스승이 등선(登仙·선인이 되어 하늘로 오름)한 이후 우혈 선생은 3년여간 전국 명산을 두루 돌며 자연과 호흡했다. 85년부터 서울에 ‘혈기도’ 간판을 단 도장을 내고 수련생을 받았다. 20년간의 구도 생활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세상 사람과 나누고 싶어서다. 혈기도는 ‘인간의 핵심은 정신이나 영혼이 아니라 몸’이라는 이론에 기반을 둔다. ‘육신은 껍데기일 뿐, 혼이 인간의 정수’라는 기존의 상식과 반한다. 우혈 선생은 “몸이 없으면 이 세상에서 나는 없는 존재다. 영혼도 결국 몸에 얹혀사는 것”이라며 “내 몸은 정신의 도구가 아니라 나의 진정한 주인이다. 몸이 대자연과 호흡할 수 있게 수련하고, 몸이 의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마음과 정신을 다스릴 수 있다”고 말했다. 혈기도 수련은 몸과 대자연이 원활히 소통하도록 돕는다. 우혈 선생은 “우리 몸에 있는 아홉 개의 큰 구멍(穴)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땀구멍들까지도 기의 통로 역할을 한다”며 “바른 자세와 호흡, 식사와 수련으로 내 몸 세포 속 탁한 기운을 내보내고 우주의 에너지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인터뷰 당일 도장을 가득 채운 수련생들이 혈기도를 수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범이 “지(地)~”를 외치자 가부좌를 한 수련생들이 일제히 긴 숨을 뱉었다. 뒤이은 “천(天)~”이라는 구령에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잔잔한 미소와 함께 수련생들을 지켜보던 우혈 선생은 “호흡은 오장육부의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새로운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혈기도 수련의 기본”이라고 말했다. 호흡에 이어 발목 관절과 허리를 푸는 등 스트레칭 등 예비 행공들이 이어졌다. 황남준 사범은 “예비 행공만 제대로 소화해도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땀은 혈문(穴門)이 열렸다는 신호”라며 “(우혈) 선생님께서 스승께 전수 받은 행공은 356가지나 되지만 수련생에게 가르치시는 건 수십 종 정도다. 고난도 동작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제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혈 선생은 현대인이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선 식생활에 대한 개념부터 바꿀 것을 조언했다. “도 중의 도는 식도(食道)”라고 언급한 그는 “입으로 먹는 것 그 자체를 뛰어넘어 눈·귀·코·피부·느낌으로 먹어야 할 것들이 있는데 현대인들은 그걸 놓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음식을 먹을 때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한다’ ‘배가 불러야 한다’는 등의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한다”며 “좋은 물과 공기, 기운을 섭취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아울러 적게 먹어 입 대신 위장을 즐겁게 하면 성인병을 대부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혈 선생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건강 비법은 바른 자세다. “현대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게 바른 자세를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라며 “바르게 서고 앉고 걷는 게 삶의 기본인데 그것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바른 자세가 주는 행복감을 체험하면 새로운 삶이 열린다. 나는 똑같은 자세로 24시간을 있어도 불편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우혈 선생은 “누구든 마음을 비우고 몸을 단련해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이면 단성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종교와 무관한 개념이라고 한다. 하늘과 땅의 에너지를 느끼고 받아들이는 행위는 육체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고, 그 에너지의 정체는 신과의 교감 또는 대자연의 축복이며 각자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우혈 선생에게 박철진씨를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드러난 현상만 보지 말고 그 이면의 원인부터 들여다봐야 한다”고 운을 뗐다. “의학적으로 문제가 없는데도 몸이 아픈 건 결과적으로 각종 스트레스 때문에 기의 밸런스가 무너진 결과”라며 “생활 속 스트레스가 크다지만 태어날 때와 죽을 때 받는 스트레스에 비할 바는 아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처음 올 때 이미 가장 큰 스트레스를 견뎌낸 사람들이다. 그 점을 깨닫고 새로운 용기를 내는 게 기의 흐름을 푸는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일상 속에서 치열한 생존 전투를 치르는 현대인에게 던지는 메시지였다. 동작 ① 동작 ② 동작 ③ 동작 ④ ■[S BOX] 넓적다리·골반 불균형 잡아주는 동작, 직장인들에게 좋아 「혈기도의 수련 동작이 어려워 보이지만 막상 따라 해보면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있다. 혈기도의 기본자세는 허리 세우기다. 바닥에 앉은 자세에서는 상체를 바로 세워야 한다. 그리고 가슴을 항상 쫙 펴야 한다. 서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허리가 앞으로 굽어져 엉거주춤 서면 안 된다. 위 사진을 보고 우혈 선생의 동작을 따라 해보자. ① 먼저 발바닥을 마주하고 앉아 양손으로 발뒤꿈치를 붙잡아 올려 다리를 옆으로 뻗어 벌린다. 요추를 앞으로 밀어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단전의 기운을 발뒤꿈치로 보낸다. 두 번째 동작으로 넘어가자. ② 벌렸던 다리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일자로 벌리면 좋지만 어렵다면 할 수 있는 만큼만 벌린다. 그 상태에서 골반을 앞으로 밀고 나간다. 그리고 바닥에 손을 짚고 상체만 앞으로 내밀어 쫙 편 가슴을 바닥에 닿도록 숙인다. 이때 양발 끝에 힘이 가야 한다. 엉덩이를 뒤로 빼면 안 된다. ③ 상체를 세우고 벌렸던 다리를 모아 앞으로 쭉 뻗는다. 이때도 허리는 굽으면 안 된다. 그 상태에서 오른쪽 무릎을 잡고 서서히 몸 쪽으로 끌어올린다. 가능하면 오른손으로 오른쪽 발뒤꿈치를 잡고 더 끌어당긴다. 오른발을 바닥에 내리고 왼발도 똑같이 한다. 마지막 동작은 난이도가 꽤 높다. ④ 가부좌 상태에서 오른발을 들어 목 뒤로 넘기고 양 손바닥을 붙여 합장한다. 다른 쪽 발도 따라 해보자. 네 동작은 넓적다리와 골반의 불균형을 바로잡아주는 동작이다. 오래 앉아 일하는 직장인에게 권할 만하다 [출처: 중앙일보] [사람 속으로] 기를 막는 건 시기·질투 … 바른 자세가 건강 비결
973 no image 베네주엘라 기도제목
[레벨:20]정아브라함
28 2017-04-12
베네수엘라 민심 폭발, 포퓰리즘 독재 끝이 보인다 [베네수엘라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수도 카라카스를 비롯한 주요 도시 곳곳에서 반정부 시위가 5일째 이어지며 그 양상이 더욱 격화되고 있다고 현지 일간 엘 나시오날 등이 1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신문은 “진압 과정에서 한 대학생이 총격으로 사망하고, 200명 이상 부상자가 발생했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며 “갓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가 최루 가스를 흡입해 응급실에 실려 가고, 거리는 연기로 가득 찼다”고 긴박한 상황을 전했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잔인하고 사악한 독재자의 억압”이라며 니콜라스 마두로(사진) 대통령의 폭력적 진압을 비난하고 나섰다. 시위는 최근 정부의 독재적인 조치에 대한 항의로 시작됐다. 친정부 성향의 대법원이 지난달 29일, ‘별도로 지정한 기관이나 대법원 산하 헌법위원회에 의회의 입법권을 맡기겠다’는 판결을 내리면서다. 야당이 장악한 의회를 무력화하는 이 판결은 국내외의 거센 반발 속에 3일 만에 취소됐지만, 시민들의 반발은 가라앉지 않았다. 여기에 지난 7일, 베네수엘라 감사원이 중도우파 성향의 차기 유력 대선 주자인 엔리케 카프릴레스 미란다 주지사에게 15년간 공직 선거 출마를 금지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가 영국과 폴란드 대사관으로부터 기부를 받았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마두로 대통령의 정적인 미란다 지사를 정치적으로 봉쇄하는 이 조치가 시위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마두로 정권에 대한 베네수엘라 국민의 불만이 이미 목 끝까지 차오른 상태였기 때문이다. 현재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심각한 위기 상태다. 살인적인 물가 상승과 극심한 식량난에 국민의 평균 체중이 줄었을 정도다. 의약품까지 바닥나면서 의료대란까지 벌어졌다. 베네수엘라 정부가 유엔에 의약품 원조를 요청했지만 턱없이 모자란 상태다. 출산을 위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임산부들이 속출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몇 달간 임산부 수백 명이 출산을 위해 콜롬비아로 넘어갔다”고 보도했다. 콜롬비아 정부에 따르면 지난해 이후 출산을 위해 콜롬비아로 건너간 베네수엘라 임산부는 1000명에 육박했다. 아예 불임 수술을 받는 이들도 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급등하고 도저히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젊은 여성들이 불임 수술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 시절 ‘남미의 파라다이스’로 불렸던 석유 부국 베네수엘라의 쇠락은 포퓰리즘형 독재의 종말이라는 것이 외신들의 평가다. ‘남미 좌파의 아이콘’이었던 차베스는 1999년 집권한 뒤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고 이 돈을 빈민 복지에 쓰면서 인기를 누렸다. DA 300 <iframe id="DASlot574" title="광고" height="250" marginheight="0" src="http://dgate.joins.com/hc.aspx?ssn=574&b=joins.com&slotsn=591" frameborder="0" width="250" name="DASlot574" marginwidth="0" scrolling="no"></iframe> 그러나 경제 체질 개선을 등한시한 가운데 국제 유가 급락 상황을 맞으면서 경제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차베스 집권 말기 정부의 무리한 경제 통제는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성장률 하락과 인플레이션 속에 가격과 공급 통제가 생필품 부족 사태를 촉발했다. 차베스의 후계자로 지명된 마두로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도리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강압적인 조치들이 남발되면서 위기가 심화되는 모습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포퓰리즘은 어떻게 독재가 되는가’라는 칼럼에서 “포퓰리즘은 처음엔 민주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독재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며 베네수엘라 사태를 분석했다. 포퓰리즘 정권의 경우 대개 민생 경제 붕괴로 터져나온 시민들의 불만을 진압하기 위해 독재가 동원된다는 것이다. NYT는 “베네수엘라는 범죄가 만연하고 부패가 거의 보편적이며 사람들의 삶의 질이 붕괴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고 진단했다. 결국 국민이 희생양이 된 것이다.
972 데살로니카의 역사
[레벨:20]정아브라함
30 2017-04-14
그리스 문명기행 <上> 신약성서 속 사도 바울이 머물렀던 데살로니가로 익숙한 곳 그리스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 로마·비잔틴·오토만… 모두가 거쳐갔지만 소유한 적은 없었다 정복당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수많은 영웅이 미인을 원하듯 이 도시를 탐했지만 영원히 소유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불가능했다. 그리스 테살로니키 고지대의 비잔틴 성벽 위엔 햇볕을 쬐며 발아래 펼쳐진 시내 풍경과 에게해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늘 있다. 이 도시를 소유했다고 믿었던 제국과 정복자들은 사라졌으나, 영욕의 시간을 뛰어넘은 도시는 제국의 유산을 제 속에 진주처럼 품고 살아남아 나그네들의 귀에 옛 영광을 속삭이고 있었다. /테살로니키=이태훈 기자 그리스 동부 테살로니키, 고(高)지대 주거 지역 '아노 폴리'의 비잔틴 성벽 위에 앉아 시내 풍경과 에게해(海)를 바라보며 이 도시가 겪은 2000년 넘는 세월을 상상한다. 처음 이 도시에 이름을 붙였던 마케도니아의 정복 군대가 유럽과 소아시아를 잇는 대로 위를 행진하고, 이어서 로마제국 황제가 승리를 기념해 세운 건축물들이 솟아오르고 또 무너졌다. 동로마제국 제2 도시로 번성하던 시절 비잔틴 사람들은 등 뒤의 성벽을 방패 삼아 북쪽에서 들이치는 슬라브 침략자들을 막아냈다. 지중해를 항해하는 상인들이 바닷길을 통해 도시로 몰려들었고, 시대마다 다른 황제가 새겨진 금화를 주고받았다. 비잔틴 교회들은 이슬람 오토만제국이 도시를 점령하며 모스크로 바뀌었지만, 그리스 영토로 돌아온 뒤 다시 교회가 됐다. 서로 다른 인종과 민족이 내뱉었던 환성과 탄식들이 지중해의 날 선 햇빛 아래 봄날 아지랑이처럼 흩어진다. 신약성서 속 사도 바울이 머물렀던 '데살로니가'로 익숙한 곳, 그리스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다. 이미지 크게보기그리스 제2도시이자 무역항인 테살로니키의 해변, 대제국을 이뤘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은 거대한 동상이 되어 2000년의 세월 건너 에게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 테살로니키=이태훈 기자 기원전 342년 무렵 마케도니아 왕 필립 2세가 그리스 동부 테살리에서 포케이아인들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날 궁정으로부터 공주 출생 소식이 도착했다. 왕은 기쁨에 겨워 소리쳤다. “이 아이를 ‘테살리의 승리’라고 부르게 하라!” 공주의 이름은 ‘테살리(Thessaly)’의 ‘승리’(nike), ‘테살리니케’가 되었다. 승전의 기쁨을 품은 이름이지만 그 삶은 비극이었다. 대제국을 건설한 오빠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년)이 서른셋에 요절하자 휘하의 장군들은 영토를 차지하려 칼을 뽑고 피를 뿌렸다. 왕위를 찬탈한 카산데르 장군은 전리품처럼 공주를 아내로 삼고, 에게해 테르마이코스만(灣) 교통 요지에 세운 도시에 그녀의 이름을 붙였다. 남편 사후 그녀는 왕위 싸움에 휘말려 아들의 칼에 죽는다. 이미지 크게보기비잔틴 시대 요새 망루, 오토만 시대 감옥이었던 ‘화이트 타워’.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상이 서 있는 중심가 아리스토텔레스광장을 지나 해안 도로를 따라 걷는다. ‘화이트 타워(The White Tower)’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이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허락한 마케도니아 공주 역시 탑처럼 하얗고 우아하게 빛났을 것이다. 비잔틴 시대 바다로부터 오는 외적을 막는 망루였던 탑. 오토만 점령기에는 한 번 갇히면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감옥이었지만 1912년 도시가 다시 그리스의 영토가 된 뒤 시민들은 이 탑에 까맣게 더께 앉은 전쟁의 그을음과 핏자국을 닦아낸 뒤 ‘화이트 타워’라 부르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로마제국의 갈레리우스 황제가 세운 ‘갈레리우스 아치’가 있다. 본래 8개의 문과 중앙 상부에 거대한 돔을 가진 구조였고 동서를 오가는 여행객들은 모두 이 문 아래를 지났다. 지금은 9.7m 너비의 중앙문과 4.95m 너비의 제2문 구조물만 남아 과거의 영광을 추억한다. 그는 황제가 되기 전인 서기 298년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긴 것을 기념해 이 거대한 개선문을 지었다. 황제의 영광을 새긴 대리석 조각이 바닷바람과 세월의 풍상을 견뎌내며 살아남았다. 로마 판테온과 흡사한 건물 ‘로툰다(Rotunda)’도 흥미롭다. 본래 갈레리우스가 본인을 기념할 무덤 사원으로 지었으나 황제는 지금의 세르비아에 묻혔고, 건물은 비잔틴 시대에 교회가 되었다가 오토만 점령기에 모스크로 쓰였다. ‘로만 포럼’ 혹은 ‘로만 아고라’로 불리는 거대한 원형극장은 1962년 버스 정류장을 옮기려 땅을 팠을 때 햇빛을 봤다. 기원전 30년부터 기원후 143년까지의 도시 관련 기록이 새겨진 명문이 함께 발굴됐는데,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바울의 전도 여행 당시 이야기를 증명하는 기록이 남았다. 이미지 크게보기로마 황제 갈레리우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갈레리우스 아치’. 시내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만나는 ‘아이아 소피아’ 교회도 수많은 비잔틴 교회 중 하나다. 8세기 처음 세워진 이 교회는 도시가 가진 15개 유네스코 세계유산 가운데 하나. 오스만 투르크인들은 제단 뒤 모자이크화에 그려진 성모(聖母)가 두려웠다. 성모의 눈이 그들을 뒤쫓는다고 생각한 제국의 정복자들은 눈동자를 파냈다. 기둥 상단의 석조 장식, 벽에 붙은 프레스코화들이 각각 낡았거나 새로워 이채롭다. 헤쳐나온 세월 동안 옛 건물 위에 계속해서 새로 짓고 세웠기 때문이다. 도시의 수호성인의 이름을 딴 ‘아이오스 디미트리오스’ 교회도 아름답기로 첫손에 꼽힌다. 2000년에 걸쳐 전쟁·지진·화재를 견뎌낸 도시 수난사가 그대로 녹아 있는 곳이며, 지금도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아이오스 디미트리오스 교회 내부, 아이아 소피아 교회 돔의 성모자 모자이크화, 고고학 박물관의 구리 세공 항아리(왼쪽부터). / 테살로니키=이태훈 기자 로마의 건축물, 비잔틴 성벽과 교회, 오토만의 목욕탕과 상점을 둘러본 뒤 도달하는 이 도시 순례의 정점은 고고학 박물관이다. 유적 위에 세워진 도시, 찬란한 황금 세공품과 그리스 석상, 도자기와 투구, 묘석과 유골들이 하나도 허투루 볼 것이 없다. 점령자들은 이 도시를 가졌다고 믿었지만, 테살로니키는 그 모든 정복의 역사를 품어 자기 안에 소유하고 있다고 웅변하는 곳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제국이 번성할 때 도시는 함께 번성했다. 한 제국이 쓰러지면 도시는 또 다른 제국과 함께 번영을 이어갔다. 그리스인들은 누군가 조바심을 내고 성급해 할 때 “할라라!”라고 말한다. ‘조급히 굴지 말라’는 의미다. 테살로니키에선 천천히 걷는 편이 옳다. 느리게 살피고 깊이 상상하면 이 도시는 더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971 no image 두려움에 관하여 [2]
[레벨:20]정아브라함
77 2017-05-13
근심 걱정 하지 마라 » 픽사베이 제공 믿는 것 만큼 우리가 행복하고, 믿지 않는 만큼 불행함을 우리는 세상살이에서도, 신앙살이에서도 느끼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새롭게 뜬다면, 우리는 부활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6,47)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형성되려면, 서로 상호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초대하시고, 우리는 진리를 갈구하는 열망으로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상호성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돌보아 주시고 우리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 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산 위의 마을에서 함께 지내게 된 이유, 계기가 다양할 것입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그 바탕에 있는 핵심은 우리 인간의 한계성과 삶의 갈증을 느끼며 불멸의 진리와 영원한 생명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눈뜨면 대개가 힘겨운 일들 뿐입니다만. 오죽하면 삶은 끔찍한 삶과 비참한 삶, 둘로 나눠진다고 말했겠습니까?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 일 보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슬픔 없네 두려움 없네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우리 앞에 어려움을 본다는 것은 삶이 그 만큼 끔찍하고, 비참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런 삶에서 우리가 마냥 근심과 두려움에 떨고만 있을 것인지, 아니면 믿음을 회복하고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맡길 것인지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성가의 가사처럼 우리는 당연히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성경에 걱정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는 단어가 1000번 이상 나온다고 합니다. 걱정과 두려움은 우리의 신앙을 부식시킵니다. 걱정과 두려움은 하느님 나라 건설에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걱정과 두려워하는 마음에는 믿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걱정과 두려워하는 마음은 불신앙과 같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것은 내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 하느님께 자기자신을 온전히 의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탄의 무기 중에 탐욕, 험담, 교만 보다도 더 강력한 무기는 근심걱정이라고 합니다.
970 건강음식 [1]
[레벨:20]정아브라함
42 2017-06-10
먹고 바르고 청소하고… 버리는 식재료도 다시 보자! 입력 : 2017.06.09 16:30 Food 식재료 활용 채소나 과일에서 껍질·뿌리·씨앗 등 안 먹고 버리는 부분이 많다. 그런데 여기에 의외로 몸에 좋은 성분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양파 껍질, 파 뿌리, 포도 씨처럼 흔히 버려지는 식재료 활용법을 알아봤다. 1. 영양이 풍부한 식재료 1 —— 양파 껍질 양파 껍질에는 항산화 영양소인 ‘플라보노이드’가 알맹이의 30~40배로 많이 들어 있다. 플라보노이드는 노화를 일으키고 피로물질이 쌓이게 하는 활성산소를 제거한다. 노인성치매나 파킨슨병 등 뇌질환도 예방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어떻게 먹나? 양파 껍질을 먹으려면 육수를 낼 때 양파를 껍질째 넣으면 좋다. 열에 약하지 않기 때문에, 물에 끓여도 영양소가 파괴되지 않는다. 한 번 끓이면 껍질의 식감이 좋아져 껍질째 먹을 수 있다. 2 —— 단호박 껍질 단호박 껍질에는 알맹이에는 없는 ‘페놀산’이 들어 있다. 페놀산은 강력한 항산화 물질로, 암이나 심혈관계질환 예방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먹나? 단호박은 껍질째 쪄서 먹으면 특유의 질긴 식감이 사라진다. 껍질만 모아서 차로 끓여 마셔도 좋다. 껍질을 깎아 깨끗이 씻은 뒤 3~4일간 말려서 물과 함께 끓이면 된다. 3 —— 대파 뿌리 대파 뿌리에는 혈액순환을 돕는 ‘알리신’ 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또 폴리페놀이 잎이나 줄기보다 두 배로 많다. 한의학에서는 파뿌리를 ‘총백(蔥白)’이라고 하는데, 감기로 인한 두통이나 고열을 치료하는 약재로 쓰인다. 땀을 내 체온을 낮추고, 몸속 추운 기운을 밖으로 배출시킨다고 한다. 어떻게 먹나? 대파 뿌리와 무, 배를 물에 넣어서 차로 끓여 마시면 감기 증상을 완화하는 데 좋다. 4 —— 호박씨 호박씨에는 미네랄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인인데, 인은 전립선질환 예방 효과가 있다. 또 칼슘·마그네슘이 들어 있어서 뼈·신경·근육 강화에 도움이 된다. 어떻게 먹나? 호박씨는 깨끗이 씻어서 말린 뒤 껍질을 까서 먹으면 된다. 밥에 넣거나, 다져서 다른 견과류와 꿀과 함께 버무려 아이들 간식으로 먹여도 좋다. 5 —— 참외 껍질 참외에는 비타민C, 칼륨, 칼슘, 무기질 등이 골고루 들어 있다. 이뇨작용과 여름철 탈수 증상 개선에 효과적이다. 참외 껍질에는 과육보다 면역 성분과 생리활성물질이 5배로 많다. 항산화 작용이 뛰어나다. 어떻게 먹나? 참외는 껍질 깎기 전에 깨끗이 씻는 게 중요하다. 껍질을 얇게 채썰어서 비빔국수나 물회 등에 넣으면 좋다. 소금에 절였다가 물기를 뺀 후 고추장에 버무려서 열흘 정도 두면 장아찌가 된다. 6 —— 수박 흰 껍질 수박 껍질에는 이뇨 작용이 뛰어난 아미노산이 풍부하다. 혈액순환을 돕기도 한다. 날씨가 더워서 어지럽거나 답답할 때 수박 껍질을 먹으면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된다. 어떻게 먹나? 가장 바깥 부분의 초록색 껍질을 벗겨낸 흰 부분을 얇게 썰어서 말린 뒤, 약한 불에 달여서 차로 마시면 좋다. 깍두기처럼 김치로 담글 수 있고, 기름에 살짝 볶아 먹어도 된다. 7 —— 표고버섯 밑동 표고버섯 밑동에는 면역력을 높이고, 장운동을 활발하게 하며, 혈당 조절을 돕는 성분이 많이 들었다. 식감이 쫄깃쫄깃해서 소고기와 비슷하다. 어떻게 먹나? 표고버섯 밑동을 삶아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좋다. 국물을 우릴 때 손으로 찢어서 멸치, 다시마와 함께 사용해도 된다. 장조림이나 장아찌로 만들어도 괜찮다. 말린 버섯인 경우 국물을 우려서 밥물로 쓰거나, 물에 살짝 불린 뒤 볶음요리에 넣어도 좋다. 자투리 부분은 한데 모아 육수로 무, 배, 당근, 마늘 등은 의외로 버리는 부분이 많다. 먹고 남은 자투리 부분은 한데 모아서 육수를 내면 좋다. 조각 난 식재료를 건져내는 게 걱정이라면 ‘육수망’을 이용하면 된다. 2. 피부에 양보하세요 1 —— 포도 씨 포도 씨에는 피부 재생에 좋은 ‘레스베라트롤’, 멜라닌 색소 형성을 억제하는 ‘폴리페놀’,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는 ‘카테킨’ 등이 들어 있다. 어떻게 쓰나? 포도 먹을 때 씨까지 잘 씹어서 먹는 게 가장 좋지만, 먹기 부담스럽다면 갈아서 팩을 한다. 얼굴에 거즈를 얹고, 그 위에 곱게 간 포도 씨를 골고루 펴 바르면 피부미백, 주름개선 등에 도움이 된다. 2 —— 귤 껍질 귤, 오렌지 같은 감귤류 과일의 껍질에는 AHA 성분이 들어 있다. 이 성분은 피부 각질 제거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쓰나? 평소 각질이 많이 일어나는 부위에 껍질을 문지르면 된다. 유자에도AHA성분이 들어 있으므로, 유자차를 마시고 난 뒤 찌꺼기로 얼굴 팩을 해도 좋다. 3 —— 시금치 데친 물 시금치를 데친 물에는 비타민A, 비타민B, 비타민C 등 각종 미네랄이 녹아 있다. 이런 성분은 항산화 효과를 내기 때문에, 피부에 흡수될 경우 미백, 주름개선 등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어떻게 쓰나? 시금치는 보통 흐르는 물에 깨끗이 헹군 뒤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먹는데, 시금치 데친 물을 식혀서 세안 후 헹굼 물로 활용하면 된다. 4 —— 쌀뜨물 쌀을 씻을 때 비타민B1, 비타민B2가 최대 60%까지 씻겨 나온다. 쌀의 비타민이 쌀뜨물에도 담겨 있다는 뜻이다. 단백질, 지방 같은 영양소도 많다. 어떻게 쓰나? 쌀을 두 번 정도 씻어낸 뒤 세 번째 물부터 쓰는 게 좋다. 세안할 때 헹굼물로 쓰면 미백, 수분공급 효과 등을 볼 수 있다. 5 —— 양배추 꽁다리 양배추에는 피부를 진정시키고 열을 내리는 효과가 있다. 여름철 햇빛에 그을려 빨갛게 달아 오른 피부를 진정시킬 때 양배추를 활용해보자. 어떻게 쓰나? 양배추 꽁다리를 버리지 말고 믹서에 간 뒤, 밀가루와 물을 이용해 점도를 조절한다. 얼굴에 펴 발랐다가 10~15분 뒤 미온수로 헹구면 된다. 6 —— 유통기한 지난 우유 우유 속에 든 지방 성분이 피부에 영양을 공급해준다. 비타민, 미네랄이 풍부하게 들어서 항산화 효과도 낼 수 있다. 어떻게 쓰나? 세안 후에 유통기한이 지난 차가운 우유를 얼굴에 펴 발라 마사지하듯 문지르고, 깨끗한 물로 헹구면 된다. 팩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거즈에 차가운 우유를 조금 적셔서 얼굴에 얹었다가 10~15분 뒤에 물로 헹궈낸다. 농약이 걱정된다면? 채소나 과일 껍질 등에 잔류하는 농약이 걱정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물, 소금물, 식초물, 숯을 담근 물로 씻었을 때 각각의 세척 효과는 큰 차이가 없다. 일반적으로 물에 잠시 담갔다가 흐르는 물에 30초 정도 씻으면 대부분 없어진다. 식품 세척이 가능한 세정제나 베이킹파우더를 이용해 문질러서 씻어도 효과적이다. 3. 청소할 때 쓰면 좋아요 1 —— 유통기한 지난 식빵 유통기한이 지나서 딱딱하게 굳은 식빵은 기름을 제거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식빵은 기름을 흡수하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가스레인지나 오븐 등에 묻은 기름을 닦는 데 쓰면 된다. 식빵을 비닐봉지에 담은 채 입구를 살짝 열어서 냉장고에 넣으면 냄새를 줄이는 효과도 볼 수 있다. 2 —— 귤 껍질 귤 껍질은 피부 개선뿐 아니라 냄새 제거 효과도 있다. 귤 껍질을 모아서 전자레인지나 오븐에 넣고 눌러 붙지 않을 정도로만 돌리면 전자레인지와 오븐 속 퀴퀴한 냄새를 없앨 수 있다. 3 —— 밀가루 조금 남은 밀가루는 싱크대 청소 하는 데 쓰면 좋다. 싱크대에 기름때가 묻었을 때 밀가루를 뿌려서 닦으면 깨끗하게 지워진다. 물과 밀가루를 5대 1의 비율로 섞어서 끓이면 풀이 되는데, 누렇게 변한 흰 옷에 잠시 발라뒀다가 세탁하면 다시 하얗게 되돌릴 수 있다. 4 —— 김 빠진 콜라 콜라 속 시트르산 성분은 찌든 때를 없애는 효과가 있다. 먹다 남은 김 빠진 콜라가 있다면 변기에 낀 물때, 곰팡이를 없애는 데 쓰면 좋다. 콜라를 변기 구석까지 닿도록 뿌린 뒤 30분 정도 놔뒀다가 물을 내리면 된다. 냉장고 속 찌든 때를 없앨 때도 사용할 수 있다. 행주에 콜라를 적셔서 때가 긴 부위에 묻히고, 깨끗한 행주로 다시 콜라를 닦아내면 된다. 출처 : http://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07/2017060701640.html
969 프랑스 장관을 지낸 한국입양아 [2]
[레벨:20]정아브라함
74 2017-06-17
제가 크리스토프를 읽으면서 한국과 프랑스 정서가 비슷하다고 느꼈는데 이 글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공한 한국인 입양아? 난 뼛속까지 프랑스 사람" 입력 : 2017.06.17 03:02 | 수정 : 2017.06.17 14:10 [김수경의 스포트라이트] 프랑스 첫 동양계 장관 지낸 입양아 출신 플뢰르 펠르랭 플뢰르 펠르랭이 된 김종숙 생후 6개월에 입양…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16세에 대입자격시험 합격… 엘리트 코스 밟아 中企·문화부 장관 지내 한국 기업한테 투자 받아… 프랑스 IT스타트업 발굴 한국기업이라서가 아니라 IT 선진국이라 함께 일해 "한국 올 때마다 노래방 가죠… 소맥 빨리 마시기 시합도" 친부모 찾을 계획 없다 개도국 출신 입양아가 장관 될 수 있는 나라 프랑스 외엔 없을 것 열두 살 딸아이의 한국사랑 한국어에 관심 많은 딸… 나도 버킷리스트에 한국어 배우기 추가 프랑스의 한류 열풍 한국 영화·음악 유행에 일본어보다 한국어 인기 K팝 가사 따라 부르는 佛 10代 보고 깜짝 놀라 이미지 크게보기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은 재임 기간에 빨간 립스틱을 주로 발랐다. 화려한 색 치마 정장을 즐겨 입어 ‘세련된 정치인’으로 불렸다. 그는 이날 “립스틱을 안 가져왔다”며 가방을 뒤졌다. 몇 분간 가방을 뒤져 찾아낸 건 투명한 립글로스였다. 그는 “이걸로도 괜찮겠죠?”라고 연거푸 물었다. / 김연정 객원기자 2012년 한국은 비행기로 12시간 떨어져 있는 프랑스 중소기업디지털경제부 장관의 취임으로 들떠 있었다. 프랑스 사회당 후보인 올랑드 대통령이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였다. 좌파 정권이 집권한 건 프랑스에서 17년 만의 일이었다. 독일과 더불어 유럽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프랑스의 정권 교체였지만 한국의 관심은 동양인 외모의 이 39세 여성 장관에게 집중됐다. 단발로 똑 자른 새까만 머리카락과 그에 대비되는 흰 얼굴, 까만 눈동자와 얇은 속쌍꺼풀이 진 눈까지, 동양계 최초로 프랑스 장관에 임명된 그는 누가 봐도 한국 여성이었다. 외모와 달리 그의 이름은 발음조차 힘든 플뢰르 펠르랭(44·Fleur Pellerin)이었다. 생후 6개월 때 한국에서 프랑스로 입양된 그는 지난 2012년 5월 중소기업디지털경제부 장관을 시작으로 2016년까지 통상관광부 장관과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작년 2월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그는 프랑스 IT산업 발전을 위해 '코렐리아캐피탈'을 세웠다. 작년 말부터 한국 기업 네이버·라인과 손잡고 유럽, 특히 프랑스의 스타트업을 발굴·투자하는 일을 하고 있다. 지난 9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그에게 한국 입양아로 유럽 선진국에서 장관직에 오른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소감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냉정했다. "태어난 곳은 여기일지 모르지만 난 뼛속까지 프랑스인입니다. 한국인들이 나를 성공 신화의 주인공으로 봐주는 것은 고맙지만 나는 한국인이 아니에요." "친부모를 찾아볼 생각이 없느냐"는 물음에 그는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의 대답엔 한순간의 망설임이 없었다. 한국인들로부터 수십 번 들은 질문이었는지 '친부모'란 단어를 꺼내자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없다(No)"는 답이 튀어나왔다. 그의 머릿속 한국은 '나를 낳아준 나라'가 아니라 '아시아에 있는 작은 나라' 정도인 것 같았다. 우리 국민을 '한국인'이라고 칭하며 이어가는 그의 말투는 약간 매정하게 들릴 정도였다. "나는 뼛속까지 프랑스인" 그녀에게 매정했던 건 태어난 나라 한국이었다. 1973년 8월 29일은 길에 버려진 그가 발견된 날이다. 태어난 지 3~4일쯤으로 추정되는 여자아이였다. 6개월쯤 지났을 무렵 그녀는 하얀 강보에 싸여 양어머니 애니 펠르랭 품에 안겼다. 김종숙이 플뢰르 펠르랭으로 다시 태어난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한 번도 한국에 발 디딘 적이 없었다. 2013년 3월 본지가 주최한 '제4회 아시아리더십콘퍼런스' 기조연설을 맡아 방한했던 게 처음이었다. 프랑스로 입양된 지 40년 만이었다. 이미지 크게보기하얀 포대기에 싸여 어머니 애니 펠르랭 품에 안긴 생후 6개월 된 아이 김종숙. 이날로부터 40년 뒤 프랑스 장관 신분으로 그는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 / KBNe France 이지용PD 태어난 나라에 돌아온 그의 첫 번째 일정은 한국에 있는 프랑스 기업인들과의 만찬이었다. 자신이 입양된 홀트아동복지회를 찾거나 자신이 발견됐던 동네에 들르는 일 같은 건 일정에 없었다. 그는 당시에도 "내가 태어난 곳을 방문하게 돼 설렌다"면서 "나를 낳아준 부모가 누군지는 관심 없다"고 선을 그었었다. 그는 이후에도 한동안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지난 9월 우리나라 기업과 사업 파트너를 맺었다. 그 이후 1년에 5~6번씩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을 찾고 있다. 지난 3월엔 서울 DDP에서 열린 국제건축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사진을 찍자고 다가가는 한국인들을 상대해 주기도 하고 연설 중간중간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한국이 제법 익숙해진 것 같았다.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여러 가지 일을 하나 봅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어요. OIF(Organization International of Francophonie·프랑스어권 국제기구) 홍보대사로도 일하는데 평창올림픽 때 프랑스어가 원활하게 사용되고 프랑스어의 가치를 격상시키도록 기획하는 거죠. 다양한 곳에서 강연도 하고 있지만 사실 코렐리아캐피탈 대표직이 가장 주된 일이에요. 네이버에서 1230억원 정도를 투자받았고 이 돈으로 프랑스와 유럽에 있는 IT 스타트업 회사를 발굴하는 거죠. 괜찮은 회사로 판단되면 투자도 아낌없이 하고요. 여러 가지 일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모두 한국과 프랑스 사이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 왜 하필 한국 기업과 일하기로 했나요? "한국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시아 시장에 관심 있는 유럽 IT 기업들이 한국을 선호하기 때문이에요. 빠른 인터넷과 삼성전자 등 IT 기업이 탐낼 만한 아주 발전된 시장이라는 뜻이죠." ―상대방은 당신이 한국인이라 더 편하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만. "저는 전혀 상관없지만 그들은 그렇게 느낄 수 있어요. 내가 갖고 있는 동양인의 외모가 백인이나 라틴, 혹은 흑인 등 서양인 외모보다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한국에선 어디 출신이다, 누구의 혈육이다라는 걸 워낙 따지잖아요. 내 외모가 한국인들에게 부담 없다면 사업 파트너로서 저한테 해가 될 건 없죠." ―한국이라는 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군요. "그렇죠. 한국에 오면 사람들이 자꾸 '네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엄마가 누군지 알고 싶지 않으냐'고 묻지만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내 나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나를 키워주신 두 분뿐이에요." 그와 그의 부모를 연결해준 홀트아동복지회는 친부모를 찾아주는 일을 할 때 철저히 입양자 본인 의사만을 고려한다. 친부모가 그를 찾고 싶다고 해도 그가 동의하지 않으면 연결해주지 않는다. 그는 친부모를 찾으려고 시도한 적도 없고 계획도 없다고 했다. 이미지 크게보기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 내각이 들어서면서 임명된 그는 프랑스의 첫 동양인 장관이 됐다. 그는 “프랑스가 아니었다면 동양 여성인 내가 장관에까지 오르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201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중소기업 간담회에 참석한 올랑드 대통령(왼쪽에서 둘째)과 플뢰르 펠르랭 당시 중소기업디지털경제부 장관. / AFP 항상 최고 성적 유지한 엘리트 2013년 이후 한국을 15번쯤 방문했지만 그는 여전히 한국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은 것 같았다. 그의 웃음소리는 유쾌했지만 속내는 그렇지 못한 게 아닐까. 동양인 입양아로 낯선 프랑스에서의 삶이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궁금해졌다. ―어떤 가정에서 자랐나요? “아주 평범하고 경제적으로도 크게 여유롭지 못한 집에서 컸어요. 어린 시절을 보낸 곳도 파리 변두리에 있는 조용한 동네였고요. 아버지는 핵물리학 공부를 해서 박사학위까지 받으셨지만 어머니는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분이에요. 아주 가난한 집 첫째로 태어나서 16세 때부터 공장에서 돈을 벌어야 했대요. 나와 내 여동생을 키울 때는 줄곧 주부였고요.” 그의 여동생도 한국에서 입양됐다. ―특별하지 않은 가정에 입양된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장관이 된 거군요. “프랑스에선 가능합니다. 교육 제도가 잘돼 있기 때문이죠. 일단 고등학교까지는 무조건 무상교육이에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랑제콜이라고 부르는 전문분야 학교에서 공부하려면 학비를 내야 하긴 하지만요. 그건 선택하는데 달린 거죠.” ―크면서 인종차별을 당한 적은 없습니까. “내가 느낀 바로는 없었어요. 특히 나 같은 경우는 학교에서도 성적으로는 항상 선두 그룹에 들었고 대학에 들어간 시기도 또래보다 2년쯤 빨랐기 때문에 나를 무시할 수는 없었겠죠.” 대부분의 프랑스인이 18세 때 치르는 프랑스 고교 졸업시험 바칼로레아를 그는 16세에 합격했다. 3년제 일반 대학교에 다니는 대신 그는 프랑스에서 최우수 학생들만 입학한다는 프레파 과정을 선택했다. 그랑제콜 준비 단계 학교다. 그랑제콜은 우리나라로 치면 전문대학원 과정과 비슷하다. 2년간의 프레파 과정을 수료한 그는 프랑스 상경계 그랑제콜에서 최상위권인 에섹(ESSEC) 비즈니스 스쿨에 입학했다. 21세에 에섹을 졸업한 그는 경제 정책 등을 공부하기 위해 또 다른 그랑제콜인 시앙스포(Sciences Po·파리 정치대학)에 들어갔다. 시앙스포 졸업 후 정계 진출의 꿈을 안고 ENA(국립행정학교·É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에 진학한 그녀는 감사원에서 근무하면서 소수자 차별을 반대하는 NGO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2002년 사회당 대선 캠프에서 연설문 작성에 참여하면서 현실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사회에 진출한 다음에도 편견은 없었나요? “있었겠죠. 동양인이기 때문은 아니었어요. 취업 시장에서 차별을 받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공무원 시험을 보고 합격해 인종으로 평가받을 기회가 없었어요. 어쩌면 여성이라는 것 때문에 차별이 있었을 수는 있어요. 고위공무원 세계에선 프랑스도 조금은 남성 지배적인 분위기가 있거든요.” 그가 장관으로 임명됐을 때 프랑스 현지 언론은 “가난한 나라에서 입양된 동양 여성이라는 점이 다양성을 추구한 올랑드 내각과 맞아떨어졌다”고 썼다. 그 역시 작년 2월 문화부 장관에서 물러나면서 “개발도상국 빈민촌에서 태어나 프랑스 평범한 가정에 입양된 어린이가 문화부 장관이 될 수 있는 나라는 세계에 거의 없다”고 말했다. 12세 딸은 한국에 관심 많아 ―장관으로서의 삶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단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장관이라는 자리가 지구상에서 가장 힘든 자리라는 겁니다.” 그가 혀를 내둘렀다. “보람은 있었죠. 특히 내가 주장하던 정책이 실현되면 말이죠. 하지만 그 자리에 있으면 항상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해요. 정책을 강력하게 밀고 나가면 ‘너무 성급하다’고 하고, 좀 천천히 바꾸려고 하면 ‘너무 느리다’고 비판하지요. 뭔가 바꿔보려고 하면 설득을 해야 하고 어떤 경우엔 나와 같은 정당에 속한 사람들까지 공격을 해왔습니다. 쓸데없이 힘 빼는 언쟁도 있었죠.” 그는 전남편과 사이에서 얻은 딸 베네리스(12)와 변호사이자 고위 공무원인 남편 로랑 올레옹(48), 로랑이 전처와 낳은 아들 둘과 함께 살고 있다. ―처음 장관이 됐을 때 딸이 어렸겠군요. “그때 아이가 일곱 살이었어요. 장관으로 일하는 동안은 일과 삶 사이 조화 같은 건 꿈도 못 꿨지요. 4년 반 동안 집에 거의 들어가지 못했는걸요. 바쁘긴 엄청 바쁜데 엄마로서 죄책감이 들었어요. 내가 당신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우리 엄마조차 ‘딸과 시간을 좀 더 보내렴’ ‘베네리스에게 좀 더 신경 써라’라고 조언했으니까요. 그런데 딸아이가 다행히(웃음) 책을 좋아하고 학교 숙제도 스스로 하는 자율적인 성격이에요. 집을 비우면서 알게 됐죠. 딸아이 덕분에 오히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요.” ―딸이 오히려 한국에 관심이 있다고 하던데요. “특히 한국어에 관심이 아주 많아요. 아이에게 너의 4분의 1은 한국에서 왔다고 설명해 줬거든요. 아이들과 함께 한국으로 휴가를 오기도 했어요. 특히 남편의 아들들이 18세, 16세인데 되게 별종(geek)이거든요. 한국도 그런 별종 문화가 많잖아요. 아이들과 함께 설악산과 제주도에도 갔었어요. 남편과 아이들도 독특하다며 흥미 있어 했고요.” 한국 영화와 음악 파워에 놀라 ―굳이 ‘나는 한국인이 아니고 프랑스인’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나라(프랑스)는 정치·사회적 합의가 국민의식의 바탕이 되는 곳이에요. 내가 태어난 곳은 한국이지만 17세기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나라에서 교육을 받았고 평생 살았기 때문에 그 인식이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거죠. 생후 6개월 만에 입양됐는데 기억이 있을 리도 없지 않나요? 참, 신기한 점은 하나 있어요.” ―무엇인가요. “한국과 프랑스가 아주 비슷하거든요. 특히 두 나라 사람들이 삶을 즐기는 방식이 정말 닮았어요. 축하할 일이 있으면 친구들을 불러서 파티를 연다든지, 음식 먹고 술 마시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측면에서도요. 지중해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독특한 유럽 문화가 한국에도 있더라고요.” ―술도 마시고 노래도 합니까? “한국에 들를 때마다 노래방에 가요. 엄청 재밌어요. 한국 노래는 못 하지만 소리 높여 팝송을 부르죠. 한국에서 사귄 친구들과 소맥도 즐겨 먹어요. 작년엔 소맥 빨리 마시기 대회 같은 데도 나갔었어요(웃음).” ―한국 영화나 음악에도 관심이 있습니까. “최근에 영화 ‘옥자’를 만든 감독이 누구더라? 아! 봉(준호) 감독! 그가 만든 ‘괴물’이라는 영화를 아주 감명 깊게 봤어요. 조금 폭력적이지만 감각적인 박찬욱 감독 영화도 인상 깊었고요. 박 감독은 2주 전 칸 영화제에서 만나 점심을 함께 먹었어요. 칸 영화제 심사위원이더라고요. 한국 영화는 그 예술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어요. K팝도 마찬가지죠. 박근혜 대통령이 파리에 왔을 때 K팝 콘서트가 열려 함께 갔는데 그때 깜짝 놀랐습니다. 프랑스 10대 소녀들이 한국어 가사를 전부 외워 따라 부르더라고요. 소리 지르고 눈물까지 흘리면서요. 최근 1~2년 사이 프랑스에서 한국어 인기가 일본어를 눌렀어요. 한국어 가사나 영화 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국어를 배우죠. ‘한류 파워’라고 할 수 있죠.” 그는 ‘한류’라는 단어만큼은 또박또박 말했다. ―한국어를 배울 생각은 없나요? “언젠가는 배워보고 싶어요. 장관으로 일할 때는 너무 바빠서 배울 시간이 없었어요. 어릴 적엔 새 언어를 배운다는 게 굉장히 쉽고 당연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다 보니 노력을 쏟아야 하더라고요. 제 버킷 리스트에 ‘한국어 배우기’가 들어 있어요.” “한국에서 컸다면 장관이 됐을까요?” ―당신의 삶을 ‘인생 역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 앞에 놓인 한계를 치열하게 극복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어요. 프랑스는 한국과 달리 어린아이에게 학교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를 주는 나라가 아니니까요. 오히려 입양되면서 경제적으로나 정치·사회적으로 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입양된 게 1970년대였는데 당시 한국은 굉장히 가난하고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나라였으니까요.” ―입양됐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까. “내 친부모는 아마 한국에서 아주 가난하고 교육도 제 <iframe width="250" height="250" src="http://cad.chosun.com/RealMedia/ads/adstream_sx.ads/www.chosun.com/news@x74" frameborder="0" marginwidth="0" marginheight="0" noresize="" scrolling="no"></iframe>대로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확률이 높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갓 태어난 아기를 길에 버리진 않았을 테니까요. 그런 가정환경과 한국 특유의 경쟁적이고 억압적인 문화에서 컸다면 한국에서 장관을 할 수는 없지 않았을까요?” 그가 코를 찡긋하며 웃었다. “친부모가 갓 태어난 아기를 길에 버렸다”는 그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그녀의 삶 전체가 비로소 이해되는 듯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16/2017061601560.html
968 개구리 이야기 [1]
[레벨:20]정아브라함
81 2017-07-04
어떥 영국 수필가가 한국 실정을 담아 쓴 글인데 재미있습니다. '아들 손자 모여 밤새 우는' 개구리는 한국적 열정의 표상 영국인은 일에서 의미 찾지만… 한국인, 의미보다 근면 앞세워 함께 밤 지새우는 팀워크 발휘… 듣는 사람 없어도 날이 밝도록 팀 알퍼 칼럼니스트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밤새도록 하여도 듣는 이 없네/ 듣는 사람 없어도 날이 밝도록…." 동요 '개구리'. 한국에서 자랐거나 한국에서 아이를 키워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아는 노래다. 인생의 4분의 1이 넘는 시간을 한국에서 보냈음에도,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불과 몇 달 전이다. 그런데 처음 듣자마자 나는 이 노래에 홀딱 반해버렸다. 노래를 듣는 순간, 내가 그 동요 속 개구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영국 출신 글쟁이로 한국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것은 마냥 화려하고 흥미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물론 한국에 있는 동안 나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가치 있는 일도 많이 해왔지만, 내 직장 생활의 절반은 한국의 큰 회사들을 위한 보도자료나 마케팅 자료를 영어로 작성하거나 잡지사와 라디오 방송국에서 아무도 읽지 않을 듯한 글을 쓰고 아무도 듣지 않을 법한 그런 프로그램들을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회사에서 쓰는 글의 절반은 듣는 사람이 없는 내용이지만, 그래도 밤새도록 노래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한국에서 배웠다. 이는 결코 내 개인적인 성취욕 때문이거나 내가 직장 동료의 롤 모델이 되려 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작업을 할 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내 곁에는 언제나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인 듯 반드시 팀원들이 함께한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내가 열심히 개굴개굴하며 쓴 글을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독자가 원하는 글인지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때때로 클라이언트 측 요구에 의해, 팀 전체가 밤새도록 작업할 때도 있다. 독자들이 글을 빨리 읽을 수 있게 서두르라는 강력한 요청 때문이다. 이 개구리 동요가 한국에서 보낸 내 직장 생활의 많은 부분에 대한 완벽한 비유이긴 하지만,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실제로 내 지인의 절반 이상이 이렇게 밤새 개굴개굴 노래해야만 하는 직업을 갖고 있다. 한 친구는 온종일 보고서를 만드느라 텍스트 상자를 이리저리 옮기며 하루를 보낸다. 또 다른 친구는 아무도 확인하지 않는 회의록을 작성하느라 각종 회의에 참석해 글을 쓰며 하루를 보낸다. /이철원 기자 사실 이 노래는 한국 직장 생활의 많은 부분을 보여주는 절묘한 비유다. 한국에서는 선거철이 되면 후보자들에 대한 정보가 담긴 두툼한 인쇄물이 배달된다. 거기에는 때때로 후보들의 직장 경력이 포함돼 있다. 당선 확률이 없어 보이는 후보라도 ○○전자 차장으로 얼마 동안 일했으며 ○○대학을 나왔다고 반짝이는 종이에 컬러 인쇄로 보내온다. 나는 이 인쇄물들을 주로 쓰레기통 밑바닥에 깔아두는 데 사용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바쁘게 개굴개굴 대며 이 인쇄물을 만든 팀이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빠듯한 마감 일자를 맞추기 위해 아마도 밤샘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인쇄물이 쓰레기통으로 향하는 순간, 나는 크나큰 죄의식을 느낀다. 의미 없는 내용이지만 이 인쇄물을 읽어야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혀 나는 잠시 망설인다. 그러나 해야 할 설거지와 놓치고 싶지 않은 드라마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그렇게 해서 인쇄물은 결국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지난 대선 때, 아들, 손자, 며느리로 가득한 선거운동원들은 아침 8시 30분까지도 지하철 입구에 서서 부지런히 인사하고 피켓을 흔들며 유세전을 펼쳤다. 하지만 그 시간 지하철 입구는 지각해서 허둥지둥 정신없는 직장인이나 스마트폰에 머리를 파묻고 걸어가는 청소년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대개 개구리 부대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기의 갈 길을 바쁘게 걸어간다. 케이블TV나 라디오 방송의 채널 서핑을 해보면, 시청률이나 청취율이 0.1%도 되지 않는, 이제껏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수많은 개구리 채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프로듀서, 엔지니어, 작가로 구성된 팀들은 아마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프로그램을 만들 것이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오직 '무한도전'이나 박보검이 출연하는 드라마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런 프로듀서나 엔지니어, 작가 등의 노력을 완전히 헛수고로 만든다. 만약 이것을 한국 사회에 대한 장황한 비난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오해다. 내게 밤새도록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한국인의 능력은 무척 인상적이다. 영국의 많은 기업이 망하거나 다른 나라에 매각됐다. 영국인은 회사나 팀을 위해 열심히 일하기 <iframe width="250" height="250" src="http://cad.chosun.com/RealMedia/ads/adstream_sx.ads/www.chosun.com/news@x74" frameborder="0" marginwidth="0" marginheight="0" noresize="" scrolling="no"></iframe>보다 자기가 하는 일에서 자기만의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인은 자신이 맡은 업무가 얼마나 의미 있는지 따지기보다 날이 밝도록 열심히 일한다. 너무 지나친 자기반성과 평가는 종종 긍정적인 결과 대신 무기력한 정체(停滯)를 빚을 수 있다. 반면 에너지는, 심지어 혼자 개굴개굴 우는 에너지조차도, 더 큰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03/2017070302922.html
967 앵무새 당나귀 이야기
[레벨:20]정아브라함
36 2017-07-20
내용이 재미있고 유익하여 올립니다. [새미 라샤드의 비정상의 눈] 앵무새 따라 하다 죽은 당나귀 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2017.07.20 02:35 | 새미 라샤드 이집트인·JTBC ‘비정상회담’ 전 출연자 당나귀와 앵무새가 비행기에 탑승했다. 앵무새가 승무원을 불렀다. 승무원이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하자 앵무새는 “그냥 불러봤어요”라고 승무원을 놀리며 낄낄댔다. 재미 붙인 앵무새가 승무원을 또 불렀다. 화가 난 승무원은 “정말 필요한 일이 아니면 부르지 마세요”라고 경고했다. 경고를 무시하고 이번에는 당나귀가 승무원을 호출했다. 정말 화가 난 이 승무원은 당나귀와 앵무새를 비행기에서 추방했다. 앵무새는 아무렇지 않게 날기 시작했다. 추락하는 당나귀에게 앵무새가 물었다. “날개도 없는데 왜 나를 따라 했니?” 당나귀는 대답도 못하고 땅에 떨어졌다. 현대 사회에는 당나귀가 많다. 재미있고 예쁘고 인기 많은 사람을 그냥 모방하는 사람이 많다. 패션이나 유행이 그렇다. 사람 많은 동네에 가보면 운동팀이 단체로 나온 것처럼 옷이 엇비슷하다. 대학생들은 색상이 달라도 디자인이 같거나, 디자인은 달라도 색상이 같은 옷이나 액세서리를 많이 착용하고 다닌다. 연인들의 커플룩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낯선 사람의 옷차림이 나와 같다면 얼마나 어색할까. 패션이나 유행은 누가 만들어 퍼뜨리는 걸까. 주로 인기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이 패션을 시작하는 것 같다. 패션·유행이 자리 잡으면, 팬이 아닌 사람들도 따라 한다. 스타에게 맞는 옷이나 행동이 내게 잘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잘 안 하는 걸까. 이런 따라쟁이 습성은 하이힐 신다가 고생 끝에 다릿병까지 얻은 여성들에게서 볼 수 있다. 한번은 고국인 이집트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개그맨이 있었다. “패션은 나쁜 것이니 따르면 안 된다. 패션이 왜 나쁘냐면 해마다 바뀌기 때문이다. 패션이 좋았다면 왜 다른 패션 앞에서 약해지거나 사라질까.” 억지 같기도 하지만 그럴듯하다. 패션이나 유행에 빠진 사람들이 한번 생각해볼 만한 말이다. 너도나도 따라 하다 보면 매년 내 모습이 바뀌고 내 본모습을 잃어버릴 수 있다. 마음에 드는 걸 따라 하는 건 좋지만 그러다 내 개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 저마다 타고난 재능과 본성이 있다. 내게 남다른 매력이 있다는 걸 잊지 말자. 내 매력을 찾아 살리다 보면 언젠가 남들이 나를 따라 하는 일도 생기지 않을까. 새미 라샤드 이집트인·JTBC ‘비정상회담’ 전 출연자 [출처: 중앙일보] [새미 라샤드의 비정상의 눈] 앵무새 따라 하다 죽은 당나귀 이야기
966 순교자 얀 후스
[레벨:20]정아브라함
42 2017-08-03
좁은문으로 들어가라 말씀과 관련하여 한 순교자의 기사를 올립니다. 종교개혁 500년-종교개혁의 현장을 가다] (상)-마르틴 루터 이전에 얀 후스가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2017.08.03 09:36 인쇄기사 보관함(스크랩)글자 작게글자 크게 기자 렵은 새벽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린 게 1517년. 그로부터 꼭 98년 전이다. 시대의 어둠이 가장 짙을 때였다. 독일 남부의 도시 콘스탄스에서 화형식이 열렸다. 종교개혁을 알리는 새벽닭의 죽음, 주인공은 얀 후스(1369~1415)다. 체코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가톨릭 사제였다. 프라하 대학의 신학부 교수와 총장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당대의 명망가였다. 그런 후스를 화형에 처한 이는 다름 아닌 로마 가톨릭이었다.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는 독일 남부 콘스탄스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올해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최근 종교개혁지 순례차 독일 콘스탄스를 찾아갔다. 거대한 호수를 낀 채 스위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무척 아름다운 휴양도시였다. 주말이면 스위스 사람들이 물가가 싼 독일로 장을 보러 오는 바람에 교통체증이 일기도 했다. 600년 전 독일 콘스탄스에서 가톨릭교회의 공의회가 열렸다. 당시 가톨릭의 교황은 무려 3명이었다. 나는 호숫가로 갔다. 그곳에 360도 회전하는 높다란 동상이 하나 서 있었다. 가슴과 허벅지를 드러낸 반라의 여인상. 높이 9m에 무게가 18톤이다. 여인은 당대 최고의 미모로 꼽히던 콘스탄스의 창녀다. 그녀의 양손에는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왼손에는 삼층관을 쓴 교황이, 오른손에는 왕관을 쓴 황제다. 둘 다 벌거숭이다. 교황은 다리를 꼬고 있고, 황제는 성기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콘스탄스 호숫가의 동상. 당대 최고의 미녀로 꼽히던 창녀의 왼손에는 교황이, 오른손에는 황제가 앉아 있다. 둘 다 벌거벗은 상태다. 황제는 머리에 왕관을, 교황은 초월적 권위를 상징하는 삼층관을 쓰고 있다. 호숫가의 창녀 동상은 600년 전의 시대상을 폭로하고 있었다. 당시 교황은 무려 세 명이었다. 교황청도 로마와 프랑스 아비뇽, 두 곳이었다. 서로가 “내가 진짜 교황”이라고 정통성을 주장하며 치고 박고 있었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면죄부(면벌부)를 판매하며 타락한 채 분열돼 있었다. 보헤미아(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 후스는 그런 교회 권력의 심장부를 향해서 칼을 겨누었다. 타깃은 ‘교황’이었다. 후스는 “면죄부(면벌부)를 파는 교황은 가롯 유다와 같다”고 선언했다. 유다는 예수를 유대인에게 팔아넘겨 결국 숨지게 한 인물이다. 그런 유다에 교황을 빗댔다. 중세 암흑기에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지를 수 없는 도발이었다. 나는 호수 위에 설치된 데크길을 따라 동상 앞으로 갔다. 장관이었다. 지상 최고의 권력자가 창녀의 손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겉을 보면 성(聖)과 속(俗)의 만남이지만, 들추어 보면 욕(欲)과 욕(欲)의 만남에 불과했다. 후스는 ‘예수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의 욕망과 권력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콘스탄스의 푸른 호수에는 예쁘고 아담한 요트들이 떠 있었다. 600년 전, 후스도 이 자리에서 저 풍경을 바라봤다. 그가 바라본 호수는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으리라. 체코 프라하의 광장에 있는 얀 후스의 동상. 후스가 죽자 체코(당시 보헤미아)에서는 오히려 후스의 지향을 따르는 후스파가 교회의 주류가 되었다. 1419~36년 양측이 대립하는 후스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가톨릭 교회의 미사는 모두 라틴어로 진행됐다. 서민들은 라틴어를 몰랐다. 읽을 줄도 모르고, 쓸 줄도 몰랐다. 그저 성당에 가서 사제가 읽는 라틴어 성경을 뜻도 모른 채 들을 뿐이었다. 강론도 그랬다. 라틴어로만 진행되는 강론은 그저 알아 듣지 못하는 ‘소리’에 불과했다. 중세 때 라틴어는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지식인의 전유물이었다. 후스는 교황청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반격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 밖으로 나가서 설교를 했다. 라틴어 대신 체코의 언어를 택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자신들의 모국어로 가슴에 날아와 꽂히는 성서의 메시지에 환호했다. 게다가 후스는 체코어로 성서까지 번역했다.후스는 대신학자이자 대설교가였다. 콘스탄스 공의회가 열렸던 호숫가의 대저택이다. 지금은 1층이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다. 당시에는 이 저택 바로 곁까지 바닷물이 차 있었다. 콘스탄스 공의회가 열렸던 당시의 대저택. 바로 곁까지 바닷물이 차 있고, 부두가 설치돼 있었다. 콘스탄스의 호숫가에는 지금도 거대한 저택이 한 채 있었다. 600년 전, 이곳에서 콘스탄스 공의회가 열렸다.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의 최고결정기관이다. 가톨릭에 교황이 셋이나 되고 대립이 심해지자 지기스문트(1368~1437)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고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했다. 공의회는 당시 ‘뜨거운 감자’였던 후스를 콘스탄스 종교재판에 소환했다. 주위 사람들은 말렸다. “가면 죽일 것이다” “절대 가지 마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지기스문트 황제가 안전을 보장했다. 황제는 두 차례나 사신을 보내 “이땅에서 이단 정죄(定罪)가 사라지게 만들겠다”며 신변 보장을 약속했다. 후스는 콘스탄스로 갔다. 그러나 체포돼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공의회가 열렸던 건물에서 도보로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수도원 건물. 후스는 이곳의 감옥에 갇혔다. 정면 오른쪽 귀퉁이의 조그만 뾰족탑이 후스가 갇혔던 감옥이다. 나는 후스가 갇혔던 수도원 건물로 갔다. 지금은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다. 후스가 석 달간 갇혔던 성탑처럼 생긴 감옥은 남아 있었다. 후스는 이곳에서 고초를 겪었다. 낮에는 쉼없이 걸어야 했고, 밤에는 벽에 묶여 있어야 했다. 누울 수가 없었다. 당시 후스는 지독한 치질과 두통으로 고통을 겪었다. 뾰족탑이 있는 공간이 후스가 갇혔던 수도원의 감옥이다. 지금은 이 건물이 레스토랑과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 콘스탄스 공의회가 후스를 정조준한 핵심적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건 예수에게서 부여받은 교황의 절대 권위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었다. 신약성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너는 베드로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6장 13~19절) 이 구절을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는 베드로를 ‘제1대 교황’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대를 잇는 교황들마다 예수가 직접 부여한 ‘반석의 권위’가 있다고 믿는다. 그 위에 교회가 서 있다고 생각한다. 프라하 광장에는 바닥에 벽돌로 십자가가 박혀 있다. 후스 당시 종교개혁을 주장하던 프로테스탄트들이 화형을 당했던 자리마다 이렇게 십자가가 하나씩 새져겨 있다. 그들 역시 후스의 가르침을 따르던 이들이었다. 후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반석’을 베드로라고 해석하지 않았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봤다. 신의 속성을 온전히 공유하는 예수의 속성. 그게 바로 ‘하느님(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다. 후스는 그런 속성이야말로 그리스도 교회를 세우는 반석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후스의 해석은 중세 가톨릭 교회의 심장을 찔렀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가톨릭 교회 체제의 뼈대가 무너질 판이었다. 결국 후스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1415년 7월 16일, 토요일 아침이었다. 후스는 사형장으로 끌려나왔다. 죽음을 코 앞에 두고서도 후스는 황제를 향해 종교개혁의 절박함을 역설했다. 황제는 얼굴이 붉어진 채 아무런 말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지기스문트 황제는 후스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공의회의 주최 측은 왕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였다. 후스를 어떻게 처리할 지도 교회의 권한이었다.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얀 후스가 황제와 가톨릭 교회의 대표자들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항변하고 있다. 사실 100년 후에 마르틴 루터도 후스와 똑같은 곤경에 처했다. 보름스 제국회의에 오라는 요청이었다. 주위에서는 다들 말렸다. 가면 틀림없이 죽일 것이라고 했다. 고심 끝에 루터는 제국회의에 참석했다. 황제와 추기경들 앞에서 조금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그런데도 화형을 당하지 않았다. 제국회의의 주최 측이 교회가 아니라 제후들이었기 때문이다. 제후들은 굳이 루터의 목숨을 앗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콘스탄스 공의회의 주최 측은 제후가 아니라 교회였다. 종교재판소에서 “입장을 번복하면 파문을 면하고 목숨을 구할 것”이라는 마지막 제안을 받았지만 후스는 거절했다. 그는 “내 입장을 번복하면 신 앞에서 죄가 될 것”이라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후스의 머리카락은 면도칼로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깎였다. 머리에는 고깔 모자를 씌웠다. 거기에는 ‘Hic est heresiarcha(이 자가 이단의 두목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후스를 향한 조롱이었다. 후스가 갇혔던 감옥에서 바라보이는 호수. 저 멀리 말뚝 위에 가마우지가 날아와 앉아 있다. 나는 콘스탄스 호숫가의 부두를 거닐었다. 호수 가운데 솟은 말뚝에 가마우지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후스가 갇혔던 감옥은 불과 5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 땅에서 맞았던 마지막 밤. 후스는 감옥의 창을 통해 호수 위로 떠오른 달이라도 보았겠지. 그 달을 보며 후스는 기도를 올리지 않았을까. 이튿날은 토요일이었다. 주일을 하루 앞둔 날,‘회개하지 않은 이단자’ 후스는 불타야 했다. 날이 밝았다. 후스는 나무기둥에 몸이 묶였다. 주위에는 짚과 장작이 놓였다. 후스가 마지막에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너희는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워 죽인다. 그러나 100년 후에는 태울 수도 없고, 삶을 수도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밧줄에 묶인 후스가 화형장에 나와 있다. 왼쪽 뒤의 사람들은 화형을 집행하기 위해 나무를 쌓고 있다. ‘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라는 뜻이다. 생전에 후스는 자신을 종종 거위에 빗댔다. 후스가 예견한 ‘백조’는 과연 무엇일까. 사람들은 그 백조가 100년 후에 등장하는 ‘마르틴 루터’라고 해석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무리 태워도, 아무리 삶아도 거스를 수 없는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이다. 그 가운데 마르틴 루터가 서 있었다. 후스는 파문과 함께 죽었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톨릭 사제)가 파문당하기 100년 전에 말이다. 개혁을 부르짖던 후스의 저술들은 불태워졌다. 당시에는 인쇄술도 없었다. 일일이 손으로 필사를 하던 시절이었다. 인쇄술 혁명의 덕을 톡톡히 본 루터와 달리 후스의 저술은 널리 퍼져나가지 못했다. 얀 후스는 동 트기 전 시대의 새벽을 알리며 소리 높여 울었던 인물이다. 종교개혁의 여명기에 말이다. 후스가 죽고서 105년이 흘렀다. 1520년 2월에 후스의 저술을 읽은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DA 300 <iframe name="DASlot574" width="250" height="250" title="광고" id="DASlot574" src="http://dgate.joins.com/hc.aspx?ssn=574&b=joins.com&slotsn=591" frameborder="0" marginwidth="0" marginheight="0" scrolling="no"></iframe> “모르든 알든 우리는 모두 후스파다.” 종교개혁의 여명기, 거기에는 얀 후스가 있었다. 마르틴 루터 이전에 말이다. 콘스탄스(독일)=글ㆍ사진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종교개혁 500년-종교개혁의 현장을 가다] (상)-마르틴 루터 이전에 얀 후스가 있었다
965 no image 노인으로 사는 것 [2]
[레벨:20]정아브라함
74 2017-08-19
가끔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방문하면 슬픈 생각이 듭니다. 저 어머니의 모습이 바로 10 혹은 20년 후의 나와 내 동역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인의 삶이 어떠하여야 할까요? [내가 만난 名문장]<8>만년의 쓸쓸함은 숙명이시형 세로토닌문화원장·정신과 전문의입력 2017-08-19 03:00수정 2017-08-19 03:00 《‘인간의 만년(晩年)이란 것은 쓸쓸한 게 당연한 일이다.’ ―이쓰키 히로유키(五木寬之), ‘바람에 날리며’》 20여 년 전 읽은 일본 작가 이쓰키 히로유키의 ‘바람에 날리며’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그때는 젊어서였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며 이 구절을 가벼이 넘겼다. 한데 최근 잦은 노인 고독사 소식을 접하면서 그 말은 불쑥불쑥 내 머리 언저리에 떠오르곤 했다. ‘그래, 나이가 들면 옛날 같을 순 없지. 나를 찾는 발길이 뜸해지고,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있고.’ 돌연 서럽고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고 다행이 아닌가 싶었다. 전쟁과 가난, 우리 세대는 참으로 기구한 시절을 살아냈다. 그래서일까. 길에서 비슷한 연배를 만나면 어깨를 다독여 주고 싶다. “노형, 우리 용케도 살아남았구려.” 얼마 전 한중일 문화정신의학회에서 노인의 자살이 화제에 올랐다. 거기서 이런 말이 나왔다. 일본 노인은 누추한 몸을 가족, 친구에게 보이기 싫어하다 깨끗하게 죽는다. 반면 한국 노인은 ‘내가 저놈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저 불효막심한 놈’이라며 서러워하다 죽는다는 얘기다. 노인들이 이쓰키의 경구를 접했다면 좀 달라졌을까. 효(孝) 이야기가 나왔으니 따져보자. 우리 아이들은 어릴 적 이미 효도를 다 했다. 걸음마를 떼고, 바닥을 구르며 웃고, 막 옹알이를 할 때 온 가족이 모여앉아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게 바로 효인데, 무엇을 더 바라랴. 어쩌다 자식이 나이가 들어서도 잘하면 덤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마음 편하다. 나이가 들면서 찾아드는 쓸쓸함은 받아들여야만 하는 숙명이다. 그걸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면 평소에 많이 베풀어야 한다. 더러 후배를 불러 술도 사고 친구에게 커피도 사야 한다. 너무 인색하게 굴지 마라. 거지로 살다가 부자로 죽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으랴. 이 책에는 이런 구절도 나온다. ‘여든셋이 되면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낯선 지방으로 강연을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곤 낯선 여관방에서 쓸쓸히 생을 마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가 불러주기만 한다면.’ 나도 딱 같은 생각이다. 내 유언장에는 ‘장기기증 후 (시신을) 가까운 의대에 시급히 실습용으로 기증하라’고 되어 있다. 홀로 왔으니 가는 길도 홀로 가는 게 마땅하다. 바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 저자는 나보다 한 살 위다. 광복 전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온 후 지방으로 전전하다 종전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의 책에는 한국 이야기가 곳곳에 등장하는데 짙은 향수에 젖어 있는 게 느껴진다. 한국 정서에도 밝다. 한(恨)에 대한 그의 통찰은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작가는 일본 최고의 문학상 수상자이자 인기 작가이다. 나는 그의 인생을 대하는 솔직한 태도가 좋다. 그의 책을 읽노라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국경을 넘는 동시대 친구가 있다는 생각에 노년의 쓸쓸함을 위로받는 것 같다. 이시형 세로토닌문화원장·정신과 전문의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Main/3/all/20170819/85889118/1#csidx975b20ec3df8154b156908f0342dd94
964 비행기표 싸게 사는 법
[레벨:20]정아브라함
41 2017-08-30
[여행의 기술]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싸게 타는 법 [중앙일보] 입력 2017.08.30 00:01 수정 2017.08.30 09:53 인쇄기사 보관함(스크랩)글자 작게글자 크게 기자최승표 기자 SNS 공유 및 댓글SNS 클릭 수145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스토리SNS 공유 더보기구글플러스 핀터레스트URL 복사SNS 공유 더보기 닫기 해외여행을 가지만 비행기만큼은 ‘우리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 기내식은 무조건 한식을 먹어야 하는 사람, 승무원이라면 모름지기 한국어를 쓰고 친절해야 한다는 사람. 은근히 많다. 이렇게 한국식 서비스를 고집하지 않는다 해도 한국인에게 한국 항공사가 여러모로 편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저비용항공을 제외한 한국 국적 항공사, 즉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값이 비싸서 부담스럽다. 단돈 5만원이라도 저렴하게 국적 항공사를 타고 싶다면 ‘공동운항’, 이 네 글자를 기억하시라. 요즘 항공사들은 실제로 비행기를 띄우지 않는 노선 항공권도 판매한다. 제휴 항공사 좌석을 이용하는 '공동운항'을 통해서다. 비행기 편명 숫자가 네자리인 게 공동운항 편이다. 공동운항(Code share)이란 A항공사가 제휴사인 B항공사의 좌석 일부를 자사의 항공편명으로 판매하는 걸 말한다. 보통 A항공사를 판매사(Marketing Carrier), B항공사를 운항사(Operating Carrier)라 한다. 이를테면 아시아나항공은 캐나다에 취항하지 않지만 인천~밴쿠버 노선 항공권을 판다. 실제로 인천~밴쿠버 노선에 비행기를 띄우는 에어캐나다와 공동운항 제휴를 맺은 것이다. 단순 왕복 노선뿐 아니라 경유편도 가능하다. 대한항공은 프랑스 니스에 취항하지 않지만 웹사이트에서 인천~니스 항공권을 예약할 수 있다. 인천에서 대한항공이나 에어프랑스를 타고 파리로 가서 에어프랑스 국내선 항공편을 타고 니스로 가는 방식이다. 반대로 외국 제휴 항공사를 통해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을 이용할 수도 있다. 편명 네자리 숫자에 비밀 있다 제휴 항공사 네트워크 이용하는 공동운항 장거리 노선 같은 비행기 50만원 저렴하기도 수하물 ·마일리지 등은 구매 항공사 기준 적용 같은 비행기를 탄 승객이지만 실제 구매 항공사는 무척 다양할 수 있다. 가령 아시아나항공 인천~방콕 노선을 보면, 타이항공·에어캐나다·에티오피아항공 등이 공동운항 항공권을 판매하고 있다. 현재 대한항공은 35개 항공사 604개 노선, 아시아나항공은 30개 항공사 277개 노선에 대해 공동운항 제휴를 맺고 있다. 최근에는 외국 항공사뿐 아니라 자회사인 저비용항공사와도 공동운항을 늘리고 있다. 공동운항이 효율성이 높기 때문이다. 판매사 입장에서는 직접 비행기를 띄우지 않고도 고객에게 다양한 항공편을 팔 수 있고, 운항사는 판매 채널을 다양화해 빈 좌석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어 이득이다. 롯데백화점이 관계사인 롯데닷컴뿐 아니라 롯데닷컴의 경쟁사이기도 한 지마켓·옥션 등을 통해 상품을 판매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주요 공동운항 제휴사. 여행자 입장에서 공동운항은 잘만 이용하면 저렴한 여행의 일등공신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8월29일 에어프랑스 홈페이지에서 오는 9월1일 출발해 9월8일 도착하는 인천~파리 일반석 항공권을 검색했다. 왕복 노선을 모두 대한항공을 타는 공동운항 항공권(편명 AF5093·5092)이 최저 166만원이었다. 대한항공 사이트에서 검색한 같은 항공편(KE901·902), 최저가 항공권은 219만원이었다. AF5093과 KE901 항공편은 인천에서 오후 1시20분에 출발하는 똑같은 대한항공 비행기인데도 53만원이나 차이가 났다. 참고로 일반 항공편은 두자리 알파벳과 숫자 세자리로 이뤄져 있지만 공동운항편은 숫자가 네자리다. [출처: 중앙일보] [여행의 기술]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싸게 타는 법
963 비행기표 싸게 사는 법 (속)
[레벨:20]정아브라함
52 2017-08-30
에어프랑스 홈페이지에서 검색한 대한항공 공동운항 항공편은 대한항공에서 검색한 것보다 50만원 이상 저렴했다. [에어프랑스 홈페이지 캡처] 한국 출발을 기준으로 했을 때 외국계 항공사는 대체로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보다 저렴하다. 특히 할인 프로모션을 잘만 이용하면 파격적인 가격으로 한국 국적기를 탈 수 있다. 공동운항편도 같은 할인 운임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에어프랑스는 지난 8월23일부터 29일까지 할인 이벤트(출발일 기준 11월~2018년 3월 출발)를 벌였는데 인천~파리 노선이 최저 79만원이었다. 여기엔 물론 대한항공을 타는 공동운항편도 포함됐다. 외국 항공사가 파는 공동운항 항공권이 대체로 저렴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니다. 낮은 운임의 항공권이 모두 팔렸을 경우가 그렇다. 가령 여행 비수기인 11월, 델타항공이 대한항공 인천~로스앤젤레스 노선 좌석을 30석 할당 받았는데 한두 자리 밖에 남지 않았고, 대한항공은 자리가 많이 남았다면 대한항공에서 직접 사는 게 훨씬 저렴할 수 있다. 실제로 11월에 출발하는 대한항공의 유럽·미주 왕복 항공권은 현재 80만원대로 여느 외국 항공사보다 저렴한 편이다. 공동운항 항공권이 반드시 유리한 건 아니다. 제공되는 서비스 기준이 천차만별이어서다. 가령 위탁 수하물은 탑승 항공사가 아니라 구매 항공사 기준이 적용된다. 공동운항 항공편을 이용할 때 다른 유의점도 있다. 헷갈리는 게 은근히 많다. 먼저 구매 항공사가 아닌 탑승 항공사 기준이 적용되는 경우다. 공항에서는 구매 항공사가 아닌 실제 탑승 항공사 카운터로 가야 한다. 이걸 혼동해서 터미널이 여럿인 유럽이나 미국의 대형 공항에서 비행기를 놓치는 경우도 다반사다. 면세점에서 쇼핑을 할 때도 구매 항공사가 아닌 실제 탑승 항공사 편명을 알려줘야 한다. 공동운항편을 이용할 경우, 사진과 같은 채식 기내식을 사전 주문할 수 없다. 반대로 수하물과 마일리지는 구매 항공사 기준이 적용된다. 유나이티드항공을 통해 아시아나항공 인천~로스앤젤레스 공동운항 항공권을 구매했다면, 위탁 수하물은 32㎏(아시아나 기준)가 아닌 23㎏(유나이티드 기준)밖에 부칠 수 없다. 항공사에 따라 탑승 전 좌석 지정·기내식과 면세품 사전 주문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 [출처: 중앙일보] [여행의 기술]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싸게 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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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정아브라함
30 2017-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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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정아브라함
25 2017-11-04
책 속으로] 행복해지고 싶은가 마음의 근육을 키워라 기자이은주 기자 ━ DEEP INSIDE │ ‘회복탄력성’을 말한 두 권의 책 페북 COO 샌드버그의 『옵션 B』 멕시코 휴양지서 갑자기 남편 사망 슬픔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자책 최악 가정하자 살아있다는 것 감사 변광호 박사의 『E형 인간』 직장 상사만 보면 화가 치밀었는데 내 성장을 위해 그럴지도 모른다 긍정의 생각·말 단련시키면 평온 옵션 B 옵션 B 셰릴 샌드버그· 애덤 그랜트 지음 안기순 옮김, 와이즈베리 E형 인간: 성격의 재발견 변광호 지음, 불광출판사 E형 인간 스트레스 없는 일상은 없다. 완벽한 삶도 없다. 학자들은 여기에 더 심한 말을 보태기도 한다. “행복이란 것은 없고 행복한 성격이 있을 뿐”이라고. 『꾸뻬씨의 행복 여행』을 쓴 프랑스 정신과 의사 프랑수아 를로르는 몇 년 전 한국을 찾았을 때 “행복은 균형의 문제이자 인성의 문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행복할 수 있는’ 균형과 인성은 어디서, 어떻게 얻어야 하는 걸까. 이와 관련해 최근 ‘회복탄력성’(Resilience) 개념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회복탄력성이란 원래 제자리로 돌아오는 힘을 일컫는 말로, 심리학에서는 시련을 이겨내는 긍정적인 힘을 뜻한다. 최근 출간된 『옵션 B』와 『E형 인간:성격의 재발견』은 각기 큰 역경과 일상의 스트레스에 대한 대처법을 다룬 책으로, 저자들은 “회복탄력성은 근육처럼 후천적으로 노력과 연습을 통해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은 완벽하지 않다=“상실도 슬픔도 실의도 철저히 개인적인 감정이다(…) 어쨌거나 이 어둠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의 몫이었다.”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인 셰릴 샌드버그(Sheryl Sandberg·48)가 한 말이다. 그의 화려한 배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적어도 ‘그 일’이 그에게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하버드대 경제학과와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최우등으로 졸업했고, 세계은행·맥킨지를 거쳐, 27세에 미국 재무부 수석보좌관으로 일했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구글 부사장을 거친 뒤 2008년부터 페이스북에서 일해 왔다. ‘블룸버그 비즈니스 위크’는 그를 “미래의 미국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일’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2015년 아이들을 친정 부모님께 맡기고 모처럼 남편(데이비드 골드버그)과 함께 떠난 멕시코의 휴양지에서 남편이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그에게 ‘바위 같은 사람’이었고, ‘평생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살아가리라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휴가지에서 1시간가량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남편의 의자는 비어 있었다. 그리고 후에 헬스장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남편을 발견한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전한다. “나는 지금도 ‘헬스장이 어디죠?’라는 말을 들으면 숨이 턱 막히고 온몸이 굳어버린다. 앞으로도 그 말을 들으면 심장이 요동칠 것 같다.” 정신없이 장례식을 치렀고, 남편 없는 그의 삶이 시작됐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결코 내 자의로는 선택하지 않았을 삶이고, 철저하게 무방비 상태에서 맞닥뜨린 삶”이었다. 『옵션 B』는 샌드버그와 애덤 그랜트 와튼 스쿨 심리학 교수가 함께 쓴 책이다. 샌드버그가 ‘삶의 균형이 무너지는’ 자신의 경험과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절절하게 털어놨다면, 그랜트 교수는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회복탄력성을 구축하는 법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옵션 B’는 상실과 역경으로 마주하게 된 삶을 말한다. 저자들은 “살면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실직, 사업 실패, 이혼, 질병 등으로 ‘옵션 B’를 마주하게 된다”며 “‘옵션 B’를 살아가기 위해선 마음 근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옵션 B』의 저자 샌드버그(왼쪽)와 애덤 그랜트(오른쪽). ◆회복탄력성에 달렸다=회복탄력성은 최근 정신의학부터 심리학·교육학 등의 영역에서 주목받고 있는 개념이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오뚝이 정신’이다. 이 개념은 긍정심리학에서 나왔다. 미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 교수인 마틴 셀리그먼은 사람들이 역경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수십 년 동안 연구해 왔는데, 그가 ◆회복탄력성에 달렸다=회복탄력성은 최근 정신의학부터 심리학·교육학 등의 영역에서 주목받고 있는 개념이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오뚝이 정신’이다. 이 개념은 긍정심리학에서 나왔다. 미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 교수인 마틴 셀리그먼은 사람들이 역경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수십 년 동안 연구해 왔는데, 그가 바로 긍정심리학의 창시자다. 셀리그먼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사건을 마주했을 때 ‘회복을 방해하는 3가지 생각’ 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이게 내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자책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 사건이 다른 데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는 것이고, 셋째는 영원히 여기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거라며 지레 좌절하는 것이다. 샌드버그는 자신 역시 “세 가지 덫에 걸렸었다”고 한다. ‘내가 남편을 좀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건강에 더 좋은 음식을 섭취하라고 말했더라면…’ 하는 생각으로 끊임없이 자책했다. 그리고 “슬픔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자신과 아이들이 앞으로는 영원히 순수한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주목할 것은 샌드버그가 그랜트 교수의 조언을 받아 심리적인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훈련을 지속했다는 점이다. “언제나” “결코”라는 극단적인 말을 “최근에는” “때때로”라는 말로 바꿔 쓰려 노력했고, ‘슬프고 화나는 것은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울고 싶을 땐 울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된 방법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보는 것이었다고 털어놓는다. 남편이 아이들을 태우고 운전하다가 심장부정맥을 일으켰을 수도 있었다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세상에 맙소사. 하마터면 가족 셋을 한꺼번에 잃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순간, 아이들이 여전히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감사했다.” 『E형 인간』의 저자 변광호 박사. ◆생각을 바꿔라=회복탄력성은 성격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것일까. 『E형 인간: 성격의 재발견』은 스트레스를 평생 연구해온 변광호(75) 박사가 쓴 책이다. 가톨릭대 의대 교수를 역임한 그는 일찌감치 스트레스와 성격, 건강의 상관관계를 연구해왔다. 그런 그가 “즐거운 인생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성격”으로 제시하기 위해 직접 만든 개념이 바로 ‘E형’ 성격이다. E형의 ‘E’는 ‘유스트레스’ (Eustress, 좋은 스트레스라는 뜻)에서 따온 것으로, 한마디로 스트레스에 유연한 성격을 뜻한다. 부정적인 스트레스를 대할 때마다 이를 긍정 에너지로 빠르게 전환해 나쁜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성격을 말한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만 보면 조건반사적으로 화가 치미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는 ‘어쩌면 상사는 나의 성장을 위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안해지더란다. 저자는 이게 바로 “그의 몸에서 긍정 호르몬인 엔도르핀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약간의 생각 전환만으로 엔도르핀이 나오도록 호르몬 분비를 조절하며 E형 성격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속에 숨어 있는 긍정을 가리켜 “마음의 탄력”이라고 말하는 그는 “우리가 좌절하고 힘들 때 잘 꺼내 쓸 수 있도록 평소 긍정의 생각과 말들로 마음을 단련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E형 인간’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킨 것은 정년퇴직하고 노인 요양병원에 근무하면서부터라고. 그곳에서 환자들을 지켜보며 왜 누구는 병과 죽음에 의연하고 담담하게 대처하며, 또 누구는 고통에 신음하며 괴로워할까 궁금했단다.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통은 똑같지만 이에 대해 대처하는 마음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즐거움을 훈련하라=지난 7월 뉴욕타임스는 ‘중년의 회복탄력성’을 주제로 한 기사를 실었다. “부모님을 여의거나, 실직(혹은 퇴직)을 경험하는 중년이야말로 회복탄력성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회복탄력성을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 낙관주의를 연습하라(그것도 안 되면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라), 자책하지 마라, 다른 사람들을 도와라, 새로운 것에 도전하라고 제안했다. 샌드버그는 상실의 경험담을 책으로 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일하는 페이스북의 장례 유급휴가를 10일에서 20일로 확대했다. 역경에 처한 사람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비영리 조직(OptionB.Org)을 설립했다. 변광호 박사는 ‘스트레스 회복탄력성을 지닌 새로운 E타입 성격’에 대한 논문을 내년 국제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놀랍게도 두 책이 공유하고 있는 대목이 적잖다. 첫째,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둘째, 감사할 줄 아는 마음과 유머는 회복탄력성에 도움이 된다. [출처: 중앙일보] [책 속으로] 행복해지고 싶은가 마음의 근육을 키워라 [출처: 중앙일보] [책 속으로] 행복해지고 싶은가 마음의 근육을 키워라
960 no image 트럼프 국회 연설문 [5]
[레벨:20]정아브라함
78 2017-11-10
국회에서의 트럼프 연설문이 화제라고 합니다. 명 연설이라 합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Last night, President and Mrs. Moon showed us incredible hospitality in a beautiful reception at the Blue House. We had productive discussions on increasing military cooperation and improving the trade relationship between our nations on the principle of fairness and reciprocity. Through this entire visit, it has been both our pleasure and our honor to create and celebrate a long friendship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Republic of Korea. This alliance between our nations was forged in the crucible of war and strengthened by the trials of history. From the Inchon landings to Pork Chop Hill, American and South Korean soldiers have fought together, sacrificed together, and triumphed together. Almost 67 years ago, in the spring of 1951, they recaptured what remained of this city, where we are gathered so proudly today. It was the second time in a year that our combined forces took on steep casualties to retake this capital from the Communists. Over the next weeks and months, the men soldiered through steep mountains and bloody, bloody battles. Driven back at times, they willed their way north to form the line that today divides the oppressed and the free. And there, American and South Korean troops have remained together holding that line for nearly seven decades. By the time the armistice was signed in 1953, more than 36,000 Americans had died in the Korean War, with more than 100,000 others very badly wounded. They are heroes, and we honor them. We also honor and remember the terrible price the people of your country paid for their freedom. You lost hundreds of thousands of brave soldiers and countless innocent civilians in that gruesome war. Much of this great city of Seoul was reduced to rubble. Large portions of the country were scarred severely, severely hurt by this horrible war. The economy of this nation was demolished. But as the entire world knows, over the next two generations, something miraculous happened on the southern half of this peninsula. Family by family, city by city, the people of South Korea built this country into what is today one of the great nations of the world. And I congratulate you. In less than one lifetime, South Korea climbed from total devastation to among the wealthiest nations on Earth. Today your economy is more than 350 times larger than what it was in 1960. Trade has increased 1,900 times. Life expectancy has risen from just 53 years to more than 82 years today. Like Korea, and since my election exactly one year ago today, I celebrate with you. The United States is going through something of a miracle itself. Our stock market is at an all-time high. Unemployment is at a 17-year low. We are defeating ISIS. We are strengthening our judiciary, including a brilliant Supreme Court justice, and on and on and on. Currently stationed in the vicinity of this peninsula are the three largest aircraft carriers in the world, loaded to the maximum with magnificent F-35 and F-18 fighter jets. In addition, we have nuclear submarines appropriately positioned. The United States under my administration is completely rebuilding its military and is spending hundreds of billions of dollars to the newest and finest military equipment anywhere in the world being built right now. I want peace through strength. We are helping the Republic of Korea far beyond what any other country has ever done. And in the end, we will work things out far better than anybody understands or can even appreciate. I know that the Republic of Korea, which has become a tremendously successful nation, will be a faithful ally of the United States very long into the future. What you have built is truly an inspiration. Your economic transformation was linked to a political one. The proud sovereign and independent people of your nation demanded the right to govern themselves. You secured free parliamentary elections in 1988, the same year you hosted your first Olympics. Soon after, you elected your first civilian president in more than three decades. And when the republic you won faced financial crisis, you lined up by the millions to give your most prized possessions your wedding rings, heirlooms and gold “luck” keys to restore the promise of a better future for your children. Your wealth is measured in more than money. It is measured in achievements of the mind and achievements of spirit. Over the last several decades, your scientists have engineers and engineered so many magnificent things. You‘ve pushed the boundaries of technology, pioneered miraculous medical treatments, and emerged as leaders in unlocking the mysteries of our universe. Korean authors penned roughly 40,000 books this year. Korean musicians fill concert halls all around the world. Young Korean students graduate from college at the highest rates of any country. And Korean golfers are some of the best on Earth. In fact, and you know what I’m going to say the women‘s U.S. Open was held this year at Trump National Golf Club in Bedminster, New Jersey. Park Sung-hyun becomes first rookie to top LPGA golf rankings and it just happened to be won by a great Korean golfer, Sung Hyun Park, and eight of the top 10 players were from Korea. And the top four golfers -- one, two, three, four the top four were from Korea. Congratulations. Congratulations. Now, that’s something. That is really something. Here in Seoul, architectural wonders, like the 63 Building and the Lotte World Tower ‘ very beautiful’ grace the sky and house the workers of many growing industries. Your citizens now help to feed the hungry, fight terrorism, and solve problems all over the world. And in a few months, you will host the world and you will do a magnificent job at the 23rd Olympic Winter Games. Good luck. The Korean miracle extends exactly as far as the armies of free nations advanced in 1953. Twenty-five miles to the north, there it stops. It all comes to an end, dead stop. The flourishing ends and the prison state of North Korea, sadly, begins. Workers in North Korea labor grueling hours in unbearable conditions for almost no pay. Recently, the entire working population was ordered to work for 70 days straight or else pay for a day of rest. Families live in homes without plumbing, and fewer than half have electricity. Parents bribe teachers in hopes of saving their sons and daughters from forced labor. More than a million North Koreans died of famine in the 1990s, and more continue to die of hungry today. Among children under the age of 5, nearly 30 percent of afflicted and are afflicted by stunted growth due to malnutrition. And yet, in 2012 and 2013, the regime spent an estimated $200 million, or almost half the money that it allocated to improve living standards for its people, to instead build even more monuments, towers, and statues to glorify its dictators. What remains of the meager harvest of the North Korean economy is distributed according to perceived loyalty to a twisted regime. Far from valuing its people as equal citizens, this cruel dictatorship measures them, scores them, and ranks them based on the most arbitrary indications of their allegiance to the state. Those who score the highest in loyalty may live in the capital city. Those who score the lowest starve. A small infraction by one citizen, such as accidentally staining a picture of the tyrant printed in a discarded newspaper, can wreck the social credit rank of his entire family for many decades. An estimated 100,000 North Koreans suffer in gulags, toiling in forced labor, and enduring torture, starvation, rape, and murder on a constant basis. In one known instance, a nine-year-old boy was imprisoned for 10 years because his grandfather was accused of treason. In another, a student was beaten in school for forgetting a single detail about the life of Kim Jong-un. Soldiers have kidnapped foreigners and forced them to work as language tutors for North Korean spies. In the part of Korea that was a stronghold for Christianity before the war, Christians and other people of faith who are found praying or holding a religious book of any kind are now detained, tortured, and, in many cases, even executed. North Korean women are forced to abort babies that are considered ethnically inferior. And if these babies are born, the newborns are murdered. One woman‘s baby born to a Chinese father was taken away in a bucket. The guard said it did not deserve to live because it was impure. So why would China feel an obligation to help North Korea? The horror of life in North Korea is so complete that citizens pay bribes to government officials to have themselves exported aboard as slaves. They would rather be slaves than live in North Korea. To attempt to flee is a crime punishable by death. One person who escaped remarked, “When I think about it now, I was not a human being. I was more like an animal. Only after leaving North Korea did I realize what life was supposed to be.” And so, on this peninsula, we have watched the results of a tragic experiment in a laboratory of history. It is a tale of one people, but two Koreas. One Korea in which the people took control of their lives and their country and chose a future of freedom and justice, of civilization and incredible achievement, and another Korea in which leaders imprison their people under the banner of tyranny, fascism, and oppression. The results of this experiment are in, and they are totally conclusive. When the Korean War began in 1950, the two Koreas were approximately equal in GDP per capita. But by the 1990s, South Korea’s wealth had surpassed North Korea‘s by more than 10 times. And today, the South’s economy is over 40 times larger. So you started the same a short while ago, and now you‘re 40 times larger. You’re doing something right. Considering the misery wrought by the North Korean dictatorship, it is no surprise that it has been forced to take increasingly desperate measures to prevent its people from understanding this brutal contrast. Because the regime fears the truth above all else, it forbids virtually all contact with the outside world. Not just my speech today, but even the most commonplace facts of South Korean life are forbidden knowledge to the North Korean people. Western and South Korean music is banned. Possession of foreign media is a crime punishable by death. Citizens spy on fellow citizens. Their homes are subject to search at any time, and their every action is subject to surveillance. In place of a vibrant society, the people of North Korea are bombarded by state propaganda practically every waking hour of the day. North Korea is a country ruled as a cult. At the center of this military cult is a deranged belief in the leader‘s destiny to rule as parent-protector over a conquered Korean peninsula and an enslaved Korean people. The more successful South Korea becomes, the more decisively you discredit the dark fantasy at the heart of the Kim regime. In this way, the very existence of a thriving South Korean republic threatens the very survival of the North Korean dictatorship. This city and this assembly are living proof that a free and independent Korea not only can but does stand strong, sovereign, and proud among the nations of the world. Here the strength of the nation does not come from the false glory of a tyrant. It comes from the true and powerful glory of a strong and great people, the people of the Republic of Korea, a Korean people who are free to live, to flourish, to worship, to love, to build, and to grow their own destiny. In this republic, the people have done what no dictator ever could. You took, with the help of the United States, responsibility for yourselves and ownership of your future. You had a dream, a Korean dream, and you built that dream into a great reality. In so doing, you performed the Miracle on the Han that we see all around us, from the stunning skyline of Seoul to the plains and peaks of this beautiful landscape. You have done it freely, you have done it happily, and you have done it in your own very beautiful way. This reality, this wonderful place, your success is the greatest cause of anxiety, alarm, and even panic to the North Korean regime. That is why the Kim regime seeks conflict abroad, to distract from total failure that they suffer at home. Since the so-called armistice, there have been hundreds of North Korean attacks on Americans and South Koreans. These attacks have included the capture and torture of the brave American soldiers of the USS Pueblo, repeated assaults on American helicopters, and the 1969 downing of a U.S. surveillance plane that killed 31 American servicemen. The regime has made numerous lethal incursions in South Korea, attempted to assassinate senior leaders, attacked South Korean ships, and tortured Otto Warmbier, ultimately leading to that fine young man’s death. All the while, the regime has pursued nuclear weapons with the deluded hope that it could blackmail its way to the ultimate objective. So -- and that objective we are not going to let it have. We are not going to let it have. All of Korea is under that spell divided in half. South Korea will never allow what‘s going on in North Korea to continue to happen. The North Korean regime has pursued its nuclear and ballistic missile programs in defiance of every assurance, agreement, and commitment it has made to the United States and its allies. It’s broken all of those commitments. After promising to freeze its plutonium program in 1994, it repeated the benefits of the deal and then, and then immediately continued its illicit nuclear activities. In 2005, after years of diplomacy, the dictatorship agreed to ultimately abandon its nuclear programs and return to the treaty on nonproliferation. But it never did. And worse, it tested the very weapons it said it was going to give up. In 2009, the United States gave negotiations yet another chance and offered North Korea the open hand of engagement. The regime responded by sinking a South Korean Navy ship, killing 46 Korean sailors. To this day, it continues to launch missiles over the sovereign territory of Japan and all other neighbors, test nuclear devices, and develop ICBMs to threaten the United States itself. The regime has interpreted America‘s past restraint as weakness. This would be a fatal miscalculation. This is a very different administration than the United States has had in the past. Today I hope I speak not only for our countries, but for all civilized nations when I say to the North: Do not underestimate us. And do not try us. We will defend our common security, our shared prosperity, and our sacred liberty. We did not choose to draw here on this peninsula. this magnificent peninsula the thin line of civilization that runs around the world and down through time. But here it was drawn, and here it remains to this day. It is the line between peace and war, between decency and depravity, between law and tyranny, between hope and total despair. It is a line that has been drawn many times in many places throughout history. To hold that line is a choice free nations have always had to make. We have learned together the high cost of weakness and the high stakes of its defense. America’s men and women in uniform have given their lives in the fight against Nazism, imperialism, Communism, and terrorism. America does not seek conflict or confrontation. But we will never run from it. History is filled with discarded regimes that have foolishly tested America‘s resolve. Anyone who doubts the strength or determination of the United States should look to our past, and you will doubt it no longer. We will not permit America or our allies to be blackmailed or attacked. We will not allow American cities to be threatened with destruction. We will not be intimidated. And we will not let the worst atrocities in history be repeated here on this ground we fought and died so hard to secure. That is why I come here to the heart of a free and flourishing Korea with a message for the peace-loving nations of the world: The time for excuses is over. Now is the time for strength. If you want peace, you must stand strong at all times. The world… The world cannot tolerate the menace of a rogue regime that threatens with nuclear devastation. All responsible nations must join forces to isolate the brutal regime of North Korea, to deny it and any form, any form of it, you cannot support, you cannot supply, you cannot accept. We call on every nation, including China and Russia, to fully implement U.N. Security Council resolutions, downgrade diplomatic relations with the regime, and sever all ties of trade and technology. It is our responsibility and our duty to confront this danger together, because the longer we wait, the greater the danger grows and the fewer the options become. And to those nations that choose to ignore this threat or worse still, to enable it. the weight of this crisis is on your conscience. I also have come here to this peninsula to deliver a message directly to the leader of the North Korean dictatorship. The weapons you are acquiring are not making you safer. They are putting your regime in grave danger. Every step you take down this dark path increases the peril you face. North Korea is not the paradise your grandfather envisioned. It is a hell that no person deserves. Yet despite every crime you have committed against God and man, you are ready to offer and we will do that we will offer a path to a much better future. It begins with an end to the aggression of your regime, a stop to your development of ballistic missiles, and complete, verifiable, and total denuclearization. A sky-top view of this peninsula shows a nation of dazzling light in the South and a mass of impenetrable darkness in the North. We seek a future of light, prosperity, and peace. But we are only prepared to discuss this brighter path for North Korea if its leaders cease their threats and dismantle their nuclear program. The sinister regime of North Korea is right about only one thing: The Korean people do have a glorious destiny. But they could not be more wrong about what that destiny looks like. The destiny of the Korean people is not to suffer in the bondage of oppression, but to thrive in the glory of freedom. What South Koreans have achieved on this peninsula is more than a victory for your nation. It is a victory for every nation that believes in the human spirit. And it is our hope that someday soon all of your brothers and sisters of the North will be able to enjoy the fullest of life intended by God. Your republic shows us all of what is possible. In just a few decades, with only the hard work, courage, and talents of your people, you turned this war-torn land into a nation blessed with wealth, rich in culture, and deep in spirit. You built a home where all families can flourish and where all children can shine and be happy. This Korea stands strong and tall among the great community of independent, confident, and peace-loving nations. We are nations that respect our citizens, cherish our liberty, treasure our sovereignty, and control our own destiny. We affirm the dignity of every person and embrace the full potential of every soul. And we are always prepared to defend the vital interests of our people against the cruel ambition of tyrants. Together, we dream of a Korea that is free, a peninsula that is safe, and families that are reunited once again. We dream of highways connecting North and South, of cousins embracing cousins, and this nuclear nightmare replaced with the beautiful promise of peace. <iframe width="250" height="250" src="http://ar.donga.com/RealMedia/ads/adstream_sx.ads/2012.donga.com/news@x15" border="0" frameborder="0" marginwidth="0" marginheight="0" scrolling="no"></iframe> Until that day comes, we stand strong and alert. Our eyes are fixed to the North and our hearts praying for the day when all Koreans can live in freedom. Thank you. God bless you. God bless the Korean people. Thank you very much. Thank you.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Main/3/all/20171109/87183667/1#csidx1fbebacf096b2338f85084ed00427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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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정아브라함
47 2017-11-15
단독]“서울대 교육 위기” 서울대의 自省 교수들 “서울대 가면 잘살던 시절 끝나” 서울대에 입학했다고 ‘잘 먹고 잘사는’ 시대가 끝났다는 내부 비판이 나왔다. 교육 시스템이 시대 흐름에 뒤떨어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 양성이 어렵다는 의미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는 13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에서 ‘서울대 교육, 위기를 넘어 희망으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유재준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현재 서울대 학부교육이 ‘위험하다’고 진단했다. 유 교수는 학생들이 입시정책 때문에 중·고교에서 입시에 유리한 교과만 선택하고 있는 점을 문제로 꼽았다. 대학 공학교육에 필수 교과목인 ‘물리Ⅱ’ 과목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선택하는 학생은 전국에서 4000여 명으로 전국 4년제 대학 공대 정원의 2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 이 때문에 서울대는 고교 때 물리Ⅱ를 배우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기초물리학’ 과목을 개설했다. 수학 성적이 기준에 미달하는 학생들은 ‘수학’ 과목을 듣기 전에 ‘미적분학의 첫걸음’을 수강하는 실정이다. 유 교수는 서울대 교수들과 학교의 시스템도 학생을 ‘창의적 고급 인력’으로 육성하는 데는 불충분하다고 봤다. 교수들이 연구 실적 압박으로 가장 중요한 진짜 ‘교육’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고 학부 교육은 대학원 교육에 치여 교수들이 더욱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것. 특히 유 교수는 학생들이 자신의 전공 지식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폭넓은 분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학생과 교수, 학교의 제도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유 교수는 “미래 사회의 변화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소통 능력을 향상시켜야 하고 학부 교육 전체를 관장하는 기구를 신설하는 등 학부 교육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서울대인은 무엇을 꿈꾸는가’라는 주제의 발표에서 “서울대에 입학하는 순간 ‘생존’의 문제는 크게 해결됐다고 생각돼 왔지만 요즘은 이런 상황이 극적으로 변화했다”며 “서울대인이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서울대인을 존경하고 사표로 삼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과거에는 ‘사회적 생존’이 완벽하게 보장됐지만 다변화된 지금은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서울대의 존재 근거를 ‘학문’이라고 강조했다. 서울대가 사회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높은 지위를 독식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 전반을 이끄는 철학과 학문의 권위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인구구조를 볼 때 대학, 교수, 직원의 수가 급감하는 것은 모든 대학의 정해진 미래”라며 “다양한 연령대를 대상으로 대학교육의 수요자를 확보하고 외국 진출 등을 통해 교육 및 연구 환경의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내부에서 서울대를 비판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앞서 서울대 공대에서는 ‘서울대 공대 백서’를 내놓으며 서울대의 위기를 지적했다. 백서에서 교수들은 미국 실리콘밸리처럼 교수들까지 나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 기술 창업에 나서지 않으면 서울대도 몰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Main/3/all/20171115/87265071/1#csidx3e535eb38e53e8bba711492015fb57c
958 대학주변 민가와 대학 기숙사 건축의 갈등
[레벨:20]정아브라함
26 2017-12-09
우리 사는 동내도 비슷한 문제가 있는 것 같아 한계레 기사를 참고삼으시도록 올렸습니다. 요점은 사근동이라는 한양대학교 부근 민가가 그동안 한양대학교 학생들의 주거지역으로 역할을 하였는데 최근 한양대에서 기숙사를 신축하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고객을 잃게 되는 주민들이 항의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대학 기숙사를 부탁해 ③ 한양대가 바꾼 사근동 사근동 1.1㎢ 절반이 한양대생 아파트 몇채 뺀 주택은 모두 원룸 1인가구 62%로 서울평균 2배 가정집 줄어 취학어린이도 급감 기숙사 확충 둘러싼 갈등 딛고 학교·지역사회 윈윈 해법 찾아야 서울 성동구 사근동 한양대학교 후문 거주지역에는 부동산뿐만 아니라 일반 주택에서도 ‘원룸’ 또는 ‘방 있습니다’라는 안내문을 쉽게 볼 수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사근동은 한양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죠. 하루종일 가게에 앉아서 길가를 보면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전부 학생들이라니까요.” 서울 성동구 사근동에서 15년째 ㄱ빨래방을 운영중인 최아무개(77)씨는 ‘동네가 대학 영향을 많이 받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출퇴근하는 직장인이나 장 보는 주부들은 거의 없어요. 주민이라고는 학생들뿐이니 학생들 상대로 장사를 할 수밖에 없는 거죠.” 최씨는 “언제부턴가 주택들이 원룸으로 다 바뀌었어요. 이불 같은 큰 빨랫감이 생기면 대학생들이 다 빨래방을 찾았는데, 원룸에는 개인 세탁기가 있으니까 빨래방도 손님도 많이 줄었어요”라고 덧붙였다. 최씨 말처럼 한양대는 사근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사근동의 전체 면적 1.1㎢ 가운데 절반 가까이를 한양대학교가 차지하고 있고, 아파트 몇채를 제외한 주택 대부분은 학생들이 이용하는 원룸이다. 2017년 10월 기준 전체 인구수 1만1263명으로, 서울시 행정동 평균 인구(2만3958명) 절반에 불과한 ‘작은 동네’ 사근동은 분란에 휩싸였다. 지난 2015년 한양대가 199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제6, 제7 기숙사를 신축하겠다고 발표하면서부터다. 서울시는 지난 6일 열린 제22차 도시계획위원회에서 한양대 기숙사 신축안을 통과시켰다. ■ 너도나도 원룸, 원인은 ‘부족했던’ 기숙사 사근동은 성동구 한가운데 위치한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청계천, 남쪽으로는 중랑천이 교차하고 있다. 주민들이 “도시 속의 섬 같다”고 동네를 설명하는 이유다. 한양대 인근에서 11년째 부동산을 운영하는 공인중개사 한아무개(47)씨는 “왕십리역 쪽은 50%가 직장인인데, 사근동은 2호선 지선인 용답역밖에 없는데다 교통이 불편해서 한양대 학생을 제외하곤 외부인이 들어오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고립된 섬’ 같은 사근동은 한양대의 변화에 따라 모습을 바꿔왔다. 1954년 사근동으로 자리를 옮길 당시 1200명에 불과했던 한양공과대학(한양대 전신)의 학생 정원은 60여년이 지나 1만5457명(2017년)으로 10배 이상 늘었다. 반면 대학 기숙사는 학생수의 증가폭을 따라가지 못했다. 684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한양대 제1학생생활관은 학교 건물이 지어진 지 30여년 뒤인 1985년에야 처음 지어졌다. 제2학생생활관이 지어진 것은 그로부터도 10년 뒤인 1995년이다. 한양대 기숙사 수용률은 2009년 6.1% 등 2000년대 초반까지 10% 아래를 맴돌다가, 외부 임대기숙사가 늘고 올해 398명을 수용하는 제5학생생활관이 개관하면서 겨우 12.5%까지 올랐다. 기숙사에서 밀려난 한양대 학생들은 사근동 일대 하숙·원룸을 채웠다. 대학의 주거 수요를 주변 동네가 수용한 셈이다. 사근동 부동산 업계의 말을 종합하면, 현재 사근동에는 원룸 2400여개가 분포해 있다고 한다. 매년 학생들이 새로 들어오고 빠지면서 거래되는 방은 그중 3분의 1인 800여개 정도다. 한국도시연구소 최은영 연구위원은 “미국이나 프랑스 등 해외 국가에서는 대학교와 함께 기숙사가 교육 필수 시설로 지어졌지만, 한국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학교만 지어지는 경우가 많았다”며 “기숙사가 부족한 바람에 주변 대학가 지역이 원룸촌으로 바뀐 셈”이라고 말했다. ■ 사근동 인구 구조도 바뀌어 사근동의 노후한 하숙·주택을 중심으로 원룸 리모델링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사근동의 가구 구성도 대학생 중심의 1인 가구 위주로 재편됐다. 2015년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를 보면, 사근동의 1인 가구는 전체 가구 가운데 61.9%(4322가구)로 서울시 1인 가구 평균인 29.4%의 두 배가 넘는다. 대학생으로 유추할 수 있는 20~29살 인구 역시 사근동 전체 인구 가운데 40.2%에 달한다. 서울시 평균(14.9%)보다 두 배 이상 높다. 한양대의 중국인 유학생이 늘어나면서 주택을 원룸으로 리모델링하는 추세는 더욱 심해졌다. 중국인 유학생들이 상대적으로 ‘집값이 저렴한’ 사근동으로 모이면서다. 중국 국적의 한양대 재학생 인원은 2009~2015년 700명대 후반을 유지하다가, 2016년 871명, 2017년 1063명으로 늘었다. 사근동에서 50년 동안 약국을 운영했다는 김평수(74)씨는 “7~8년 전부터 사근동의 싼 방을 찾는 중국인 유학생들이 유입되면서, 너도나도 집을 개조했다”고 기억했다. 사근동에서 가족 단위 가구 구성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사근동의 2·3·4인 가구 비율은 전체 가구의 9.8%, 7.8%, 3.1%로, 서울시 평균(24.5%, 21.5%, 24.3%)보다 한참 낮다. 가정집이 사라지면서 학령인구도 줄었다. 사근초등학교 관계자는 “설립 초기 한 학년에 열 반 가까이 되던 학교가 이젠 학년당 한 반씩밖에 안 남았다. 올해 초 간신히 신입생을 두 반 규모로 입학시켰는데, 내년에도 두 반을 모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인구 구성의 변화는 풍경의 변화로 이어졌다. 일반 단독 주택에 즐비하게 붙어 있는 ‘원룸’ ‘하숙’ 간판과 편의점으로 간판을 바꾼 동네 구멍가게 등이 대표적이다. 사근동에서 40년간 운영하던 구멍가게를 최근에서야 편의점으로 바꿨다는 최아무개(61)씨는 “요즘 대학생들은 편의점으로만 몰리니까 구멍가게를 접고 편의점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 대학-지역사회 상생방안 찾아야 ‘기숙사 없이 지어진 대학교→원룸으로 대학생들의 주거 수요를 흡수한 마을→뒤늦은 기숙사 설립 발표→마을 주민들의 극렬한 반대 운동’. 기숙사 건축을 둘러싼 정형화된 인과관계에 따라 마을 주민들의 익숙한 항의가 덧붙는다. “학교는 학생들 앞세워서 (기숙사 반대를) 지역 이기주의로 몰아갑니다. 하지만 이제 와 기숙사를 짓는다고 하면, 그동안 학생들 주거를 책임져온 사근동 사람들은 어쩌라는 건가요?”(사근동 박아무개 공인중개사) 기숙사를 비롯해 대학과 지역사회가 겪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선, 궁극적으로 이 둘을 협력주체로 바라보는 관점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과 일본이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2013년부터 대학과 지역사회의 협력을 지원하는 ‘지(地·知)의 거점 정비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대학이 지자체와 연계해 교육·연구·사회공헌 활동을 하는 사업계획을 지원하면, 심사를 거쳐 최대 5800만엔의 보조금을 최대 5년간 지원하는 정책이다. 미국의 펜실베이니아대학(유펜) 역시 대학이 지역재생에 적극 나선 모범 사례로 꼽힌다. 유펜은 1950년대부터 정부 주도의 도시재생정책이 시행되면서 주변 지역사회와 갈등을 겪었다. 대학가 지역이 대학도시재생사업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캠퍼스가 급격히 확장됐는데, 이 과정에서 5천여명에 이르는 지역 거주자가 강제 이주를 당했던 탓이다. 이후 90년대 유펜의 대학원생이 학교 주변에서 잇달아 살해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유펜은 낙후 지역 재생사업인 ‘웨스트 필라델피아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 여기에는 대학이 지자체와 협력하여 지역의 주택을 매입해 리모델링한 뒤 저렴한 가격에 지역 사회에 내놓는 등 주거와 관련된 프로그램이 포함됐다.관련기사노후 원룸·고급 오피스텔로 쪼개진 이화여대…해법은 기숙사 서울시립대 정석 교수(도시공학)는 “대학은 캠퍼스 울타리 안에만 갇혀 있지 말고, 대학 밖에 있는 지역도 캠퍼스의 일부로 생각해야 한다”며 “대학가의 노후한 빈집을 대학이 매입해 리모델링한 뒤 저렴한 임대주택으로 내놓거나, 대학이 갖고 있는 자원을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등 대학-지역이 서로를 협력하는 관계로 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황금비 신민정 최민영 기자 withbee@hani.co.kr
957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고향 마을
[레벨:20]정아브라함
29 2017-12-21
캐럴의 고향으로 떠나는 크리스마스 여행 [중앙일보] 입력 2017.12.21 00:01 이맘때 오스트리아는 말 그대로 겨울왕국이다. 눈부시도록 새하얀 설경과 동화 같은 크리스마스 마켓, 그리고 이 계절만의 별미까지. 오감이 즐거운 볼거리·즐길거리가 가득하다. 이렇게 유럽인들 사이에선 이미 최고의 겨울 여행지로 정평이 난 오스트리아로 향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2018년 200주년을 맞는 캐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흔적을 좇는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 크리스마스엔 잘츠부르크에 가야 한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주 오번도르프에 있는 '고요한 밤 성당'. 오번도르프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탄생하고 최초로 연주된 마을이다. [잘츠부르크주 관광청] 캐럴의 전설로 손꼽히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고향은 잘츠부르크에서 북쪽으로 20㎞ 떨어진 오번도르프(Oberndorf)다. 잘자흐강을 끼고 독일과 국경을 접한 마을로, 강줄기가 굽이치는 평화로운 이 마을의 성니콜라스 성당에서 1818년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탄생했다. 노래가 초연된 원래 성당은 1800년대 후반 잘자흐강 범람으로 철거됐다. 1924년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어진 뒤 ‘고요한 밤 성당(Stille Nacht Kapelle)’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고향 눈부신 자연 있는 음악의 성지 크리스마스 시즌 최고 여행지로 [출처: 중앙일보] 캐럴의 고향으로 떠나는 크리스마스 여행
956 우울증에 관한 기사
[레벨:20]정아브라함
36 2017-12-22
양들을 섬길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글입니다. 닫기 DA 300 중앙일보 중앙SUNDAY JTBC 일간스포츠 Korea JoongAng Daily JMnet 더보기 로그인 중앙일보 J 플러스시사 문화 라이프 비즈& 전체보기 검색뉴스검색검색 생명미학과 삶 이야기21 : 생명의 현상으로서 우울증 생명미학과 삶 이야기21: 생명의 현상으로서 우울증 - 우울증의 이치와 자기 치유법- 생명미학적으로 보면 불필요한 감정은 없다. 인간의 모든 감정이 삶에 꼭 필요하다. 우울증도 생명의 당연한 현상이며 삶에 필요한 것으로 이해된다. 우울증은 마음에 아무런 파동이 없는 정체와 침잠의 상태로 정의되곤 한다. 마음 에너지가 지나치게 파도치는 분노, 기쁨, 슬픔 등 격동상태의 반대이다. 파도와 흐름이 없어 침잠된 호수는 밑에서부터 썩어간다. 결국 생기를 느낄 수 없는 음울한 호수가 되어버린다. 우울증에 걸려 회복하지 못하는 마음도 점점 죽어간다. 정체된 호수는 둑을 허물어 강이 되어야 한다. 바다로 흘러가야 한다. 바닥 깊은 곳에서부터 맑은 샘물이 샘솟게 하여 스스로를 살려야 한다. 우울증이 그 주인에게 하려는 간절한 말은 자신의 둑을 허물라는 것이다. 자기 심연과 통하여 생명이 샘솟게 하라는 무의식의 염원이 말을 전하려고 우울증이 나타난다. 에리히 프롬은 “우울증 그것은 감각의 무능력이다. 우리의 몸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어있는 느낌을 가지는 것이다. 우울증은 슬픔을 경험하는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기쁨을 경험할 능력도 없는 것을 말한다.” (에리히 프롬, 『건강한 사회』) 프롬에 의하면 마음에 아무런 감정의 파동이 일어나지 않을 때 그것이 우울의 증세이다. 만일 기쁨이나 슬픔을 느낀다면 그는 우울증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죽어버린 감정의 파도를 어떻게 해야 되살릴 수 있는지가 우울증 자가 치유의 관건이다. 여기에 우울증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산후 우울증의 어머니가 아기와 함께 죽었다는 소식을 가끔 듣는다. 산후 어머니는 많은 보살핌과 관심, 즉 사랑을 필요로 한다. 남편과 가족의 사랑을 받는 어머니는 사랑으로 아기를 키울 것이다. 그러나 주위의 사랑이 없더라도 어머니 스스로 아기에 대한 사랑을 품고 있다면 그 어머니는 훌륭하게 양육할 것이다. 정서의 풍부함이란 면에서 시인이 첫 손에 꼽힐 것이다. 시인들을 만나면 듣는 얘기 중 하나는 ‘한국은 시집이 세계적으로 많이 팔리는 나라’라는 것이다. 국민의 독서량이 형편없이 낮은 데 시집은 잘 팔린다니,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한국의 시인들은 문학을 사랑하는 나라에 산다는 자부심을 갖기 어렵다. 뛰어난 극소수의 시인은 사랑을 받지만 대다수의 무명 시인과 시인이 되려는 자는 괄시를 받는다. 삶이 팍팍한 시인들은 우울증 경험 비율이 일반인에 비해 현저하게 높다고 한다. 그들의 우울한 정서는 시로 승화되어 독자에게 읽힌다. 우울증은 승화되어 예술이 될 수 있다. 독자는 시 구절에서, 시인의 삶에서 배우게 될 것이다. 우울한 정서를 어떻게 미적으로 승화하고 해소하는지 말이다. 시인을 비롯 예술가들은 일반인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가난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들은 생명, 사물, 자연과 사회, 대중 등 세상만물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을 품고 있다. 삶에 대한 사랑의 증거로 꿈도 꾸며 슬퍼하고 분노하기도 한다. 무언가에 대한 사랑을 품고 있느냐 없느냐가 우울증의 큰 관건이라는 짐작이 든다. 사랑을 얻지 못해도, 사랑을 품고 있지 않아도 심한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명에서 신비와 아름다움을 느끼고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생명의 진리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가 연인과 친구, 평판과 재산 모든 것을 다 잃었어도 죽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자신의 생명에 대한 사랑은 자신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타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 다른 종의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열어준다. 이 사랑이 한 인간을 감동과 행복의 길로 이끈다.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한 수도자들은 욕망을 소멸하여 마음을 고요하고 안정되게 만든다. 고요와 안정을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수도자는 마음에 희노애락 감정의 파동이 없는 가운데 진리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파동이 없는 마음은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마음과 같다. 따라서 우울증 환자는 수도자의 경지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수도자는 욕망과 희노애락 감정의 파동을 지워 자신을 보고자 한다. 자신의 안에서 변치 않는 기쁨의 근원인 인(仁), 불성, 생명, 에로스 같은 인간의 본성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발견한 자는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의 이치에 따라 살아가고자 한다. 따라서 수도자의 안정과 무욕, 무아는 삶의 근원적인 행복을 위한 것으로 고통으로 빠져드는 우울증과는 확연히 다르다. 우울증에 빠진 이는 어떤 이유로 자신을 사랑하는 길, 세상을 사랑하는 길을 열지 못한 경우이다. 어릴 적에 부모, 교사, 친지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을 수 있다. 혹은 자기 자신의 신경적, 경험적인 문제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된 경우일 수도 있다. 이런 사람은 개화하지 못한 꽃 봉우리 같다. 사랑이 빈약하니 열정과 욕망도 빈약하다. 남이 보기에는 작은 실패에도 크게 절망하며, 에너지가 금새 바닥이 난다. 반성과 성찰, 내성에 대한 돌봄이 미숙하고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 가느다란 가지 끝으로만 향하다가 결국 흔들리고 매달리는 처지가 되어 좌절하고 원망하며 우울증에 빠진다. 그는 생명력의 근원을 찾아 줄기와 뿌리, 씨앗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생명에 깃든 은총과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어떤 경로로든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열리다 만 꽃 봉우리를 활짝 열어 개화의 시기를 맞는다면 그는 우울증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사진 크게보기 탈출 불가능한 우울증의 허상: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는 우울증의 수렁에 빠져 죽어가는 한 사내의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바틀비는 변호사 사무실에 필경사로 취직했으나 곧 의욕을 잃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는 변호사 사무실의 구석 자리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도 “난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를 반복한다. 그는 웃지도 않고 인정을 바라지도 않는다. 바틀비는 결국 남의 사무실에서 무단 거주하다가 감옥에 들어간다. 바틀비는 감옥 안에서 먹기를 거부하다가 굶어 죽고 만다. 바틀비는 과거 우편배달부로 일할 때 ‘수취인 불명 우편물 처리반’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편지 중에는 이미 죽어서 받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되돌아 온 경우가 많았다. 죽은 자의 반지, 지폐를 처리하기도 했다. 소설의 화자는 바틀비가 우울한 일을 매일 하면서 생긴 마음의 상처 때문에 죽은 건 아닌지 추측하면서 이야기를 맺는다. 필경사 바틀비는 수취인 불명 우편물이 주는 부정적인 경험에 지나치게 함몰된 특수한 경우로 추정된다. 다른 우편배달부는 수취인 불명 우편물을 세상의 한 현상으로 이해하고 넘겨버릴 것이다. 그럼에도 바틀비 이야기는 큰 가치가 있다. 독자는 바틀비를 통해 우울증을 일으키는 슬픔과 절망에 공감하며 마음이 먹먹해지는 울림을 얻는다. 슬픈 소설 「필경사 바틀비」는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이 읽어볼 만한 소설이라 생각된다. 슬픈 사람을 위로하는 음악은 의외로 슬픈 음악이다. 슬픈 음악과 영화, 소설은 슬픈 마음에 공명을 일으켜 회복으로 이끈다. 슬픔의 감동을 주는 예술의 카타르시스 효과는 여러 실험을 통해서도 증명되고 있다. 의학적으로는 정서적인 환기(ventilation)효과라고 한다. 파동의 관점으로 보면 슬픔으로 침체된 마음에 파동을 일으켜 생기를 회복하는 이치일 것이다. 슬픔의 예술을 경험하면 삶에서 슬픔의 가치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그는 자신만 슬픈 게 아니라 그것이 삶이며 우주의 이치임을 알게 된다. 슬픔의 예술이 힘을 줄 수 있다면 우울증의 예술과 이야기는 우울증을 치유해줄 것이다. 존경 받는 예술가나 철학자 중에도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자살한 경우가 많다. 고흐, 버지니아 울프, 헤밍웨이, 들뢰즈 등등. 예술가들은 인생과 세계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표현하고자 삶을 바친 사람들이다. 철학자는 삶의 진리를 무엇보다도 사랑했던 이들이다. 보통 사람들보다 탁월한 열정으로 삶에 사랑을 품었던 그들이 우울증을 견디지 못해 삶을 버렸다. 그는 삶에 대한 사랑의 배반자일까? 처음에 가졌던 사랑이 배반을 당했거나 식어버린 탓일까?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소설 주인공 바틀비와 고흐, 버지니아 울프 등 유명인들을 삼킨 우울증은 끈끈하고 검은 수렁에 비유해 볼 수 있다. 늪이나 수렁의 바닥에서 고대의 멸종된 동물 뼈가 발견되곤 한다. 끈끈하고 검은 수렁에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고 가라앉기만 한다. 그 수렁은 가짜일 수 있다. 나를 죽이는 수렁은 마음이 만들어낸 수렁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헤엄치고 싶은 맑은 물로 바뀔 수도 있다. 한 순간에 수렁이 파도가 되어 파도타기를 할 수도 있다. 수렁을 바꾸어 내가 박차고 오를 수 있는 단단한 대지로 만들 수도 있다. 수렁 안에서 허우적거리게 하는 혼란한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고흐는 그림을 통해 보여주듯이 온통 밝고 높은 곳을 향하고 있다. 밝고 높은 곳은 외향적 세계이다. 나무로 말하면 높고 가늘어지는 가지의 끝이다. 가지 끝에 매달려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고흐가 보여준 예술적 동력일 것이다. 가지 끝의 삶은 어느 순간 위기에 몰린다. 가지 끝에 매달려 힘겹게 추락을 견디다가 힘이 다하는 것이다. 그는 줄기를 따라 내려와야만 한다. 뿌리와 씨앗에 보다 근원적인 생명력이 있음을 느껴야만 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가지 끝의 높고 밝은 것, 외향적인 것에만 인생이 있다고 믿어 뿌리와 씨앗을 성찰하기를 거부한다. 높은 가지 끝으로 치달리고 매달리며 업적과 명성을 쌓아온 이들은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들은 가늘어진 가지 끝을 거머쥔 채 온 힘을 다해 매달려 있다. 어쩌면 너무 나간 탓에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그가 구축한 생명력의 구조물은 빈약하다. 생명의 나무를 타고 상승할 때 아래쪽에도 삶이 있다. 외향뿐만 아니라 내향에도 세계가 있다. 무시되었던 아래와 내향의 세계는 수렁이 되어 그들을 죽음으로 이끈다. 생명의 구조물이 붕괴하도록 위험한 사태를 만든 탓은 그들의 마음에 있고, 이를 강요한 환경에도 있다. 화가 고흐의 죽음처럼 수많은 추측과 이야기를 낳는 경우는 드물다. 높은 이상을 향한 편집증적 삶이 우울증을 불러 온 경우일 수 있다. 고흐는 종교적인 이상주의자였다. 대인관계에서는 애정에 집착했다. 그림에 있어서는 자신의 독특한 관점과 기법을 추구하느라 갈등을 야기하곤 했다. 해바라기와 별이 빛나는 밤 등 노란색 중심의 휘황찬란한 그림세계는 내면의 어둠에 익숙하지 못했던 고흐를 말해준다. 어떤 철학자는 자신의 철학이 삶과 부조화하기 때문에 자살했다. 어떤 철학자는 자신이 천재가 아님을 알고 자살했다. 이들 역시 편집증적 집착이 가져 온 혼란의 희생자들이다. 헤밍웨이는 알콜 중독에다 당뇨병까지 겹치자 비관하여 엽총으로 자살했다. 헤밍웨이는 남성다운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전쟁터를 누비고 사냥을 즐기며 명작소설을 써냈다. 노벨상 수상작인 『노인과 바다』는 바닷가 생활을 즐긴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야성의 삶을 최선으로 여기던 그가 건강을 잃자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여겼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천재적 예술가, 빼어난 책을 쓴 철학자라고 모두가 스스로를 잘 성찰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 정신의 한계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플라톤의 ‘인간은 동굴 속의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말에 잘 표현되어 있다. 동굴의 어둠 속에서 밖으로 나오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스타 연예인처럼 젊을 적에 크게 성공해 온갖 환희를 맛본 사람들 중에 곤경을 겪는 경우가 많다. 초라해지면 그들은 심한 불안과 우울증을 겪는다. 특히 내성적 심연에 대한 조명과 성찰이 부족할 경우 곤경을 겪게 된다. 알 수 없는 심리적 괴물들이 숨통을 조이고, 바위보다 무겁게 심장을 짓누르며,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과 고통을 준다. 암흑이 드리운 내면의 심연을 조명할 수 있을 때 심리적 괴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아침의 태양 아래 밤의 어둠이 물러가듯이 말이다. 행동력, 사고력, 적응력, 면역력 등 나를 살리는 생활의 활기찬 동력은 생명의 심연에서 나온다. 생명력은 심연에서 나와 부챗살처럼 힘차게 뻗어야 한다. 그러나 내성적 성찰이 빈약하기에 행동력, 사고력, 적응력, 면역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주위 평판에 쉽게 흔들려 자책하고 인정에 목을 맨다. 내성적 바탕을 가꾸지 못한 그들은 외향적 세계만이 인생인 줄 안다. 내성적 성찰이 부족한 그들은 상처를 잘 받는 반면에 회복력은 약하다.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 남의 정신을 흉내 내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좀비 같은 인간으로 여겨져 업신여김을 받으며 자존감이 저하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그들은 스쳐가는 작은 눈빛에도 열등감과 수치심의 수렁 속에 빠지며, 타인의 압박을 민감하게 느껴 스스로 유폐하고 억압한다. 내성적 성찰이 부족한 현상은 과학기술문명이 고도화될수록 심해진다. 과학지식, 전문화에 따른 좁은 분야에서 외향의 사물에 정신의 중심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좁은 지식과 경험으로 인간과 세상을 이해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당연히 인간성에 대한 성찰에 서투를 수밖에 없다. 컴퓨터 공학자는 인간사회를 시스템으로 이해하며, 기술자가 생명작용을 기계원리로 인식하는 일이 허다하다. 내성적 성찰이 부족한 이에게 처방은 명상이다. 명상이란 눈을 감아 바깥 세계에 대한 관심을 접고 내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명상을 하자면 삶의 바쁜 걸음을 멈추어야 한다. 필요할 경우 연예인으로서의 삶을 접어야 할 필요도 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사진 크게보기 곤경에 빠지는 사고방식의 함정: 상담사나 정신과 의사들은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에게서 특징적이면서 문제가 있는 사고방식을 관찰한다. 우울증에 취약한 이들은 특정 사안에 대한 편집증적인 집착을 하며, 그로 인한 고통과 곤경을 겪는다. 마치 눈을 가리고 앞만 보게 만든 경주용 말과 같다. 그들은 폭 넓게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이 부족하다. 자신에게 과도하게 불리한 쪽으로 상황을 해석하는 우매함에 빠지곤 한다. 한 예로 발표 때 아홉 명의 청중이 좋아했어도 단 한 명이 비판했다는 이유로 몹시 괴로워하는 경우가 있다. 객관적으로 전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암울한 것에만 에너지를 집중하여 지나치게 염려하는 경우이다. 그는 한 번의 실패 경험을 갖고 일반화하여 앞으로 계속 실패할 것이라 두려움을 갖는다. 단 한 명이 싫어하는 걸 가지고 모두가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 짐작한다. 부정적인 사고방식이 생활 전반에 걸쳐 강화되면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히고 방에 틀어박히며 암울한 미래에 절망할 수밖에 없다. 어떤 이는 회사에서 해직될 걸 걱정하다가 우울증에 걸려 자살한다. 남들이 보면 평범한 회사일 뿐이며, 다른 삶을 살아도 충분히 좋을 것이라 여겨지는 데 말이다. 어떤 이는 연인이나 배우자와의 이별을 비관하다가 죽고 만다. 헤어진 짝에 대한 집착이 이별의 이유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데 말이다. 한국의 노인, 청년층의 우울증과 자살이 심각하다. 그 이유는 삶을 폭 넓게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능력이 길러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궁핍한 시대를 살아온 노인들은 삶을 즐기고 의미를 해석하는 걸 배우지 못했다. 안빈낙도의 진정한 즐거움을 안다면 비관하거나 우울에 빠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청소년들은 오직 대학입시와 성공을 위한 경쟁적인 교육만이 삶인 양 배웠다. 경주마처럼 눈을 가리고 달리던 그들은 자신이 낙오한 걸 아는 순간 죽음을 생각한다. 진정한 삶은 경기장 밖에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어떤 이에게 우울증은 감기처럼 지나갈 수 있다. 어떤 이에게 우울증은 자신과 타인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다. 대체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인간에게 우울증이 있어야 하는 생명의 이치를 과연 찾을 수 있을까? 그 이치를 알아야만 우울증을 극복하고 더 나은 생명력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명의 현상으로서 우울증: 요즘 의학계에서 우울증을 다양하게 연구하고 있다. 우울증에 걸린 이의 뇌신경 활성화가 일반적인 경우와 다르다는 것을 밝혀낸 연구도 있다. 세로토닌 같은 뇌신경물질 분비의 저하를 이유로 꼽기도 한다. 이런 증세를 완화하는 약물치료, 상담요법이 성행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우울증은 병이 아니며 모두가 겪는 정상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슬픔을 약물로 치료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우울증도 치료할 필요는 없는 거라고 말한다. 그 외에도 연구자에 따라 우울증의 증세에 대한 견해는 매우 다양하다. 무기력, 희망 없음, 깊은 슬픔, 짜증, 집중력 저하, 근심 걱정의 과다, 죽고 싶은 마음 등 몸과 마음에 걸쳐 다양한 증세를 꼽는다. 생명 현상으로서 우울증을 이해할 수 있다면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우울증은 생명의 파동(리듬) 최저점에서 나타난다. 즉 주가지수 그래프가 장기간 최저점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양상이다. 주가지수가 과도하게 장기간 하락했을 경우 많은 투자자들이 절망하여 우울해 한다. 개중에는 자살에 이르기도 한다. 몸과 마음이 함께 만들어내는 생명 파동(리듬)이 최저점으로 떨어져 잘 회복되지 못하면 우울증이 된다. 회복 탄력성이 좋은 생명체라면 금새 털고 일어날 것이다. 회복 탄력성이 좋아야 생명 파동의 흐름이 좋고, 생명력도 좋다고 할 수 있다. 생명의 파동이 최저점에서 정체되는 이유는 많다. 현실 삶의 곤란이 장기간 지속되어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실패가 거듭되면 희망이 사라지고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 있다. 육체, 마음 모두 최악의 상태가 된다. 기질이나 유전적 영향, 뇌신경의 문제로 침잠에 빠질 수도 있다. 체액의 변화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뇌신경의 문제 때문에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다. 치매, 암 등 각종 병에 걸려 우울증이 올 수도 있다. 우울증의 생명현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우울증은 인생의 하락과 침체 국면에서 성찰하도록 해준다. 즉 자신의 내면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 결과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도록 해준다. 우울증은 자아성찰과 방향전환의 신호가 될 수 있다. 여태까지 삶의 의미를 해석하여 보다 가치 있는 삶으로 지향하도록 해준다. 침체기는 에너지 축적, 휴식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굴에서 봄을 대비하는 식이다. 우울증을 극복하여 더 나아진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는 우울증을 감사하게 되리라. 우울증은 관심과 사랑을 원하는 표시로도 작용한다. 침잠이 깊어 자력으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문제이다. 심각한 신체질병, 사고로 인한 장애를 겪을 때 환자는 깊은 우울증에 빠진다. 불황기에 취직이 안 되어도 우울해진다. 해고의 위기에 몰린 직장인도 우울증에 잠을 못 이룬다. 혼인을 원하고 자녀를 희망하지만 꿈을 실현하지 못해 생기는 절망과 우울도 있다. 반대로 부부생활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이 이어져 절망하는 경우도 있다. 이혼, 실직으로 인한 가정파탄은 전 세계의 고통을 다 안은 듯 우울증으로 내몬다. 그 외에도 희망상실, 열등감, 각종 약물중독 등 다양한 이유로 회복불능의 무력감에 빠지고 중증 우울증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가능할 경우 복지, 의료, 일자리 마련 등 사회복지적인 도움으로 우울증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웃의 관심과 도움도 중요한 치유책이 될 수 있다. 뇌신경의 질병이라면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사회적 관심과 사랑이 우울증의 사회를 치유할 수 있다. 본인의 노력도 필요하다. 오래 된 고무줄이 탄력을 잃어버리는 경우처럼 인간의 마음도 회복탄력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 물론 생명력이 왕성한 몸과 마음의 소유자라면 곧 털고 일어난다. 삶이 막다른 길에 처한 것 같아 우울하다면 돌아서면 될 것이다. 자존심, 기존의 가치관 같은 무거운 짐은 모두 버려야 한다. 절망이 수렁처럼 우울증 환자를 잡고 있다면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모두 버리고 생각해볼 문제이다. 비우고 버리면 가벼워진 몸이 저절로 떠오를 것이다. 모든 우울증이 치유 가능하다고 말하는 건 오만이다. 최악의 경우 육체에 지진이 난 듯 망가지고 혼란에 빠져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신경계가 흐트러지고, 심혈관계가 막히거나, 면역력이 저하되었을 경우의 우울증 해법은 육체의 질병 치유 가능 여부에 달려 있다. 나쁜 환경도 육체와 정신에 씻기 어려운 상흔을 남긴다. 이 경우의 우울증이 장기간 지속되어 마음의 회복 탄력성을 박탈한다. 그럼에도 생명에는 모든 것을 초월하고자 하는 속성이 주어져 있다. 생명의 신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생명이 회복불능 지점으로 미끄러져 가기 전에 스스로를 구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생명의 천성이며 보람이다. 사진 크게보기 단순한 삶의 중요성: 생명의 이치는 단순한 삶을 살라고 명령한다. 누차 강조된 무위, 무소유, 무아와 같은 근원적인 수준의 단순함이 요구된다. 단순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인간 본성의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사랑으로부터 기쁨과 즐거움, 슬픔과 분노가 발현하기 때문이다. 감정의 파동이 일어날 때 비로소 한 인간이 우울증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으리라. 복잡한 인류문명과 사회가 부여한 분업, 세분화된 인생의 길을 버리고 원초적이며 자연적인 단순성으로 돌아가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복잡한 문명, 사회가 분열시킨 삶은 가지 끝에 매달린 경우처럼 절망적이고 위태롭다. 그러나 줄기와 뿌리, 씨앗의 원초성으로 돌아가는 삶은 안정과 안식이 있다. 우울증에 빠지게 한 의식, 관념, 습관, 주변 상황들을 모두 버리고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으로 돌아가 살아보라. 단순한 삶의 장점은 말할 수 없이 많다. 지식인의 권위를 버리고 육체노동을 하면 번뇌가 사라지고 행복이 온다. 유명인의 페르소나를 버리고 서민으로 돌아가 소박하게 살 때 평화를 느낄 수 있다.DA 300 <iframe scrolling="no" frameborder="0" marginheight="0" marginwidth="0" width="250" height="250" title="광고" src="http://dgate.joins.com/hc.aspx?ssn=591&b=joins.com" id="DASlot591" name="DASlot591" style="margin: 0px; padding: 0px; border-width: 0px; border-style: initial; outline: 0px; vertical-align: baseline; background: transparent; max-width: 580px;"></iframe> 자연을 사랑하는 가운데 아름다움 속에서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다면 그는 자연 속의 즐거운 삶, 무위자연의 삶, 무아의 마음, 무소유의 삶,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누리며, 생명의 파동은 봄날의 새싹처럼 다시 일어날 것이다. 자연은 온갖 상처와 패배의 아픔, 허무감을 씻어내고 소생시켜 줄 것이다. 누구든 우울증이 생기면 욕망을 돌아보고 관리해야만 한다. 반환불능점을 지나친 비행기는 돌아오지 못하고 만다. 우울증으로 죽어간 수많은 유명인들이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 1900~1980)은 유태계의 미국인 심리학자이면서 철학자이다. 그는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에서 인간은 자신의 자아실현이 방해될 때에 일종의 위기 상태에 빠지며, 이러한 위기는 인간에 대한 공격성, 사디즘, 마조히즘 및 권위에 대한 복종 또는 자신의 자유를 부정하는 권위주의로 빠지게 된다고 분석했다. 신경증이나 권위주의, 사디즘, 마조히즘 등은 인간성이 개화되지 않을 때에 일어나며 인간을 파탄으로 이끈다고 했다. 이런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롬은 자아를 실현하는 생활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셰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사랑의 기술』(1956), 『소유냐 존재냐?』(1976)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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