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관악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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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5 정리의 힘
[레벨:20]정아브라함
46 2015-12-19
항상 돈이 없다고 느끼는 이유는 돈을 적게 벌어서가 아니다. 생각하지도 않은 자잘한 것들에 쉽게 돈을 썼기 때문이다. 진정한 부를 쌓으려면 물건은 적게, 돈은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원초적인 해결법은 ‘정리 정돈’이다. 국내 1호 정리 컨설턴트 윤선현의 ‘부자가 되는 정리의 힘’을 참고로 ‘정리정돈으로 부자되는 법 7가지’를 소개한다. ▲ 관객이 1시간 동안 소설을 필사하게 한 안규철 작가의 작품 ‘1000명의 책’. 이 작품의 퍼포먼스에 동참하다 보면, 정리된 ‘클린 스팟’이 얼마나 집중력을 높여주는 지 느낄 수 있다. 해당 작품을 체험할 수 있는 전시회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16년 2월 14일까지 열린다. /조선DB ① 자릿세 613만원, 러닝 머신부터 내다 버려라 집안의 러닝머신을 예로 들면 러닝머신은 대략 1m²를 차지한다. 2015년 서울 평균 평당(3.3m²) 집값이 2000만 원인 것을 생각할 때 러닝머신이 차지하는 1m²의 기회비용은 613만 원인 셈이다. 한 평을 정리하면 2000만 원을, 작은 방 하나를 정리하면 5000만 원을 아낄 수 있다. 집안에서 불필요하게 자리를 차지하는 물건은 과감히 버려 공간을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 ② 시간 도둑 스마트폰, 알림은 꺼둬라 눈으로 보이는 물질적인 것만이 돈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시간도 돈이 될 수 있다. 하루 24시간을 잘 써야 성과도 올리고, 소득도 높일 수 있다. 일단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아라. 그리고 알림을 꺼두어라. 그러면 매번 확인하는 습관을 줄일 수 있다. 최소한 불필요한 메신저나 소셜 미디어 알림을 끄고 오전과 오후에 한 번씩 시간을 정해 확인하는 방법도 있다. ③ 냉장고 옆에는 포스트잇을 두어라 냉장고 옆에 포스트잇을 두고 ‘다 먹어서 다시 사야 할 것’들을 기록하라. 다섯 가지 이상의 항목이 채워졌을 때 장을 보러 가고, 갈 때는 이 포스트잇을 떼어가 과소비를 줄여라. 냉장고 안에 있는 음식 재료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요리 이름도 생각날 때 포스트잇에 적어 놓으면 쓸데없이 외식 하거나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시간 낭비도 줄일 수 있다. ④ 몰입할 수 있는 ‘클린 스팟’을 만들어라 클린 스팟(Clean Spot)은 일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소를 말한다. 요리하는 조리대, 밥을 먹는 식탁, 일하는 책상, 편안히 쉬어야 하는 거실 바닥과 같은 곳이다. 만약 어떤 일 하나를 할 때마다 물건을 치우거나 찾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면 하고자 하는 의욕이 꺾이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사용해야 하는 물건이 잘 정돈되어 있고, 공간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면 하고자 하는 일에 더욱 잘 집중할 수 있게 된다. ⑤ 옷은 계절 구분 없이 한 칸에 보관하라 가구 브랜드 한샘에서 1380명을 대상으로 ‘한 가정 당 몇 벌의 옷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했다. 결과는 남자는 평균 125벌 여자는 평균 185벌이었다. 이미 많은 옷을 소유하고도, 왜 늘 옷이 없다며 불평하는 걸까? 정리로 답을 찾을 수 있다. 가지고 있는 옷들이 적더라도, 입을 만한 옷들이라면, 옷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이 방 저 방 흩어져 있는 옷들을 꺼내 1 이 옷이 필요한지 2 입을 시간이 있는지 3 입으면 기분이 좋아지는지 4 가치가 있는 옷 인지..., 4가지 기준에 따라 분류 해야 한다. 안 입는 옷을 비운 후 계절 구분 없이 모든 옷을 옷장에 보관하는 것이 좋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교체하는 것도 번거롭고, 환절기에 짧은 옷과 긴 옷을 겹쳐 입으면 일교차가 큰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유용하게 입을 수 있다. ⑥ 일시적인 용도의 덩치가 큰 물건은 빌려 써라 유아 완구나 장난감은 아이가 자라고 나면 자리를 차지하는 물건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새로운 유아 완구나 장남감을 사기보다는 ‘토이방(www.toybang.co.kr)’ ‘나이스베이비 (www.nicebaby.co.kr)’ ‘베베월드(www.bebeworld.net)’와 같은 곳을 활용하면 필요할 때만 일정 기간 대여해서 사용할 수 있다. 유아 완구와 장난감뿐만 아니라 러닝머신과 같은 운동기구, TV나 컴퓨터, 복사기와 같은 전자기기도 저렴하게 빌려 필요할 때만 사용할 수 있다. ⑦ 꼭 필요한 물건이라면 비싼 값을 치러라 재테크 전문지 <월스메니지먼트>의 ‘한국 자수성가형 부자들의 특징’이란 칼럼을 보면, 부자 중에는 오래된 가구나 가전제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부자들은 스타일이 변했다고 유행을 좇아 가구나 가전제품을 사지 않는다. 또한, 수수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명품 옷을 선호한다고 한다. 한 가지를 사도 제대로 사서 오래 활용하려는 것이다. 좋은 물건은 소량만 생산되기 때문에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꼭 필요한 물건이라면 적당한 것에 만족하지 말고 좋은 물건을 사는 게 좋다. 적게 사고, 아낀 돈으로 좋은 것을 사면 된다. 좋은 물건은 볼 때마다 즐겁고, 평생 만족스럽게 쓸 수 있게 때문이다.
994 미국에서 박사과정
[레벨:20]정아브라함
55 2016-01-14
재미있는 기사가 있어 올립니다. 경제일반 거시경제 금융정책 예산·조세 산업·통상 정치·사회 경제일반 은행 보험 카드·캐피탈 저축은행·대부업 금융 포커스 세종 풍향계 [3040 해외 이코노미스트]② 이수형 메릴랜드대 교수 "성형수술은 투자가 아니라 소비" 이신영 기자 이메일 sylee@chosunbiz.com 입력 : 2016.01.14 07:00 조선비즈는 지난해 [3040 파워 이코노미스트] 시리즈를 통해 국내에 있는 30대, 40대 젊은 경제학자들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했습니다. 심층 인터뷰를 통해 어떤 연구를 하고 있고 사회 이슈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 들어봤습니다. 2016년에는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30대, 40대 한국인 경제학자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미경제학회(KAEA) 전현직 임원진 등으로부터 추천을 받았습니다. [편집자 주] 성형수술은 내 삶에 정말 도움이 될까? 남학교나 여학교가 남녀공학보다 좋을까? 데이트에서 고백 확률을 높이는 방법은 뭘까? 이런 질문에 답을 찾는 경제학자가 있다. 이수형 미국 메릴랜드대학 교수(41)다. 이력이 독특하다.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42회)를 치러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공무원이 됐다. 서울대 경제학부를 1등으로 졸업하고 행시 재경직 차석으로 공직에 입문한 알파걸이다. ▲ 사진=장련성 객원기자 방학을 맞아 한국을 들른 이 교수는 학교 홈페이지에 있는 공식 프로필 사진보다 훨씬 앳돼 보였다. 사진 촬영을 어색해하면서도 본인의 연구 성과를 묻자 논문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94학번인 이 교수는 재경부 국제금융국에서 4년째 일하다 유학길에 올랐다.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교수는 ‘응용계량경제학’ 전문가다. 수많은 자료에서 의미 있는 패턴을 찾아낸다. 가령 성형수술을 한 사람들을 모아서 이들의 임금이 실제로 올랐는지, 만족하는지를 알아본다. 연구의 최종 목표는 탐색비용을 줄여서 시장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고객이 마음에 드는 제품을 찾으려고 발품을 팔거나 주변에 묻는 등 노력을 탐색비용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전자상거래가 늘면서 가게 하나하나를 돌아다녀야 수고가 덜해 탐색비용이 줄었다고 볼 수 있다. 탐색비용은 물건을 살 때만 적용되지 않는다. 이 교수는 구인 구직, 대학 입시, 남녀 만남 등 생활 속에서 흔히 나타나는 수요와 공급 불일치에 따른 탐색비용과 비효율을 줄이는 방법을 연구한다. 201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앨빈 로스 스탠퍼드대 교수의 제자다. 다음은 이 교수와 일문일답. -왜 재경부를 떠났나. 재경부 재직 당시 일을 잘했다고들 하던데. “재경부에서 마지막 보직이 G20(주요 20개국 회의), WTO(세계무역기구) 도하라운드 등 국제 협상을 다루는 일이었다. 실무자니까 연구 보고서에 코멘트를 써야 했다. 경제학부만 졸업한 것으로는 예리하게 코멘트를 할 수 없었다. 재경부가 유학을 보내주긴 하지만 10년 넘게 근무한 후에 가능해서 마냥 순서를 기다릴 수 없었다. 자비 유학을 결심했다가 다행히 관정장학재단과 스탠포드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게 돼 재정적인 부담이 줄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수도 있지 않았나. “유학을 위해 자의 휴직을 했는데 공무원법상 휴직할 수 있는 기간이 5년이다. 박사학위를 따는 데 6년이 걸렸다. 5년 고생한 게 아까워서 학위를 안 받고 갈 수 없었다.” -고민은 없었나. “많았다. 한국에 계신 은사님들은 돌아와서 (재경부에서 일을 다시) 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셨다. 재경부로 돌아가느냐, 학교에 남느냐 선택할 때는 슬픈 생각도 들었다. 학위를 받는다고 직장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니까. 암울했다.” -한국에 돌아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나. “결과적으로는 잘 선택한 것 같다. 2008년 스탠퍼드대 경제학 박사논문 중 최우수 논문에 주는 랜도상(Landau Working Paper)을 받고 거시경제와 응용계량이 유명한 메릴랜드학에서 교직을 잡았다. 메릴랜드대학에 있으면서 박사과정 때보다 경제학자로서 더 훈련받고 성장할 수 있었다.” -응용경제계량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는. “(재경부 재직 때) G20 등 국제금융협력 업무를 했다. 유학 초기에는 국제금융 전문가가 되려고 했다. 스탠퍼드대학에서 1~2학년을 지내며 응용계량경제학을 접했다. 재밌었다. 응용경제계량학은 자료에서 패턴을 밝히는 학문인데 응용 분야가 넓다. 예를 들어 정부 정책의 효과를 분석할 때 미시 데이타(micro-level data)를 써서 어떤 정책을 쓰면 정말 효과가 있는지 인과관계(causal effect)를 분석하고 이를 수치화한다.” -성형수술, 대학입시, 남녀 만남 등 논문 주제가 다양하다. 공통점은? “시장과 개인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교육의 질을 높이거나 대학입시나 구인 구직에서 미스매치를 줄이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가령 성형수술을 생각해보자.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 등 여러 나라에서 외모 차별이 있다. 이런 차별은 인재를 효율적으로 쓰는 데 방해가 된다. 하지만 사람의 인식을 바꾸기는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이론적으로는 비효율적 차별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성형수술을 할 수 있다. 내 연구는 실제로 성형수술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밝힌 것이다.” -성형수술이 정말 효과가 있나.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전혀 효과적이지 않다. 일단 성형수술이 잘된 사람과 못된 사람 간 격차가 엄청나다. 평균적인 효과가 나타난 사람을 기준으로 하면 시작점이 안 좋은 사람(못생긴 사람)은 효과가 확 나타난다. 문제는 경제적 효과가 있으려면 김태희 정도 돼야 프리미엄이 있다는 것. 결과적으로 성형수술은 노동시장에서 차별을 극복하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 면접에서 외모가 중요하다는 기사를 봤는데 실증분석이 없다. 면접에서 외모가 얼마나 중요한지, 합격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는 아직 모른다. 물론 성형수술로 개인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성형수술로 외모가 나아지면 자신감이 높아질 수도 있다. 성형수술은 인적자본 투자라기보다 개인 만족도를 높이는 소비인 셈이다.” -요즘 연구하는 주제는? “대학 입시에서 탐색비용이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있다. 칠레 정부로부터 10년 동안의 학생 점수와 지원 학교, 최종 입학 결과를 받았다. 분석 결과 학생의 시험 성적이 같더라도 출신과 부모 소득에 따라서 최종적으로 입학하는 학교와 학과의 순위가 차이가 났다. 그러나 대학 입시 제도가 단순해지자 부모의 경제력이 대학 입시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 많이 줄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나? “칠레 학생들은 수능처럼 국가시험을 보고 시험 점수에 따라서 대학에 지원한다. 칠레 대학은 전통 명문대와 신흥 명문대가 신입생 총원의 각각 반을 차지한다. 전통 명문대를 지원할 때는 전통 명문대 컨소시엄이 제공하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지원하는 학교와 학과를 6개까지 선택한다. 컨소시엄은 학생들의 시험 성적과 희망 학과 순위에 따라 1개 학교의 입학증을 준다. 반면 신흥 명문대를 지원하면 한국처럼 학생들이 학교에 지원서를 내야 한다. 문제는 입학 도장을 받으려면 1년 등록금과 맞먹는 보증금을 내야 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신흥 명문대는 주로 수도권에 있다. 외곽에 사는 가난한 학생은 대학에 지원하러 가는 여비조차 버겁다. 이런 구조에서는 여러 학교에 보증금을 낼 여유가 있는 부모를 가진 학생이 유리하다. 신흥 명문대에서 입학 허가를 받는 동시에 전통 명문대에 배짱 지원할 수 있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학생은 전통 명문대를 지원할 때 하향 지원한다. 2012년 상당수의 신흥 명문대가 전통 명문대 입시 컨소시엄에 참여하기로 전격 결정했다. 이로써 온라인으로 보증금 없이 지원할 수 있는 학교 범위가 기존 50%에서 약 80%로 늘어났다. 즉 학생들의 탐색비용이 줄었다. 부모 배경에 따라 입시 결과가 달라지던 정도가 반 정도 줄었다. 칠레 사례이긴 하지만 한국에도 적용할 수 있다. 어느 사회든 학벌이나 부모의 재산 등 자원이 적은 사람은 탐색비용을 부담스러워한다. 자원은 정보와 돈에서 나온다. 이 두 가지가 있으면 탐색비용이 문제가 안 된다. 한국은 입시 제도가 복잡하다. 제도가 복잡하면 탐색비용이 높아진다. 탐색비용을 줄여야 한다. 아직 한국 자료는 마땅한 게 없어서 한국 대학 입시를 못 다뤘다.” -교육과 관련된 논문도 여러 편 썼다. 한국의 대졸 근로자 중 4분의 1이 과잉교육을 받았다는 결과는 놀랍다. 정책적으로 대학 수를 줄여야 하나. “한국에서 대학을 줄여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고 실제로 구조조정이 이뤄진다고 들었다. 한 발짝 물러서서 세계 동향을 보면 모든 나라가 국민 교육을 더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한국 대학진학률이 최근 73% 정도 된다고 알고 있다. 한때 80% 수준에서 좀 떨어지긴 했지만 다른 나라보다 높은 게 사실이다. 높다고 나쁜 건가? 모르겠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걸 못해서 한국을 부러워한다. 대학 구조조정 말고도 다른 가능성을 심각하게 생각하면 좋겠다. 전반적인 경제 산업이 지적 창조력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지적 창조력을 요구하는 직장이 늘어난다면 높은 대학 진학률이 오히려 도움될 수 있다.” -서울대 학생의 A+ 받는 방법이 화제가 됐다. 교수가 하는 농담 하나 놓치지 않고 적고 외운다. 창의적인 교육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우리 땐 안 그랬는데…(웃음) 학문을 하려면 ABC부터 배워야 한다. 외우는 게 지나치면 안 되겠지만 비난의 대상은 될 수 없다. 미국에서 7~8년 교직 생활을 해보니 창의는 그냥 나오지 않는다. 모차르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피나는 훈련을 받았다. 기본 없이는 창의성도 없다. 암기가 기본이 돼야 한다. 암산은 지적 자극제로 수리능력을 개발하는 데 도움될 수 있다. 한국은 쓸 자원이 인적 자원뿐인데 기초 교육이 퇴행하지 않을까 우려한다. 참고로 미국의 많은 학생은 계산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 고도의 수학 능력이 필요한 공학자를 한국이나 인도에서 수입한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기초 교육 강화에 돈을 붓고 있다.” -창의성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질문을 많이 해야 한다. 질문하면 질문하는 학생도, 질문받는 선생도 생각하게 된다. 선생은 교과서를 기본으로 가르치지만 학생이 질문하면 다시 생각해본다. 그 질문을 듣는 다른 학생들도 함께 고민하게 된다. 단순한 질문이 발전할 수 있다. 중국만 가도 학부생이 이상한 질문부터 훌륭한 질문까지 다 한다. 유독 한국과 일본에서 열리는 학회에 가면 조용하다.” -강의를 동영상으로 보여주고 대학 강의실에서는 토론만 하면 된다는 주장은 어떻게 보나. “동영상 강의를 보고 와서 강의실에서 자연스럽게 토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동영상 강의로 내용만 전달하고 시험만 보면 편하지만. 나는 메릴랜드대학에서 노동경제학을 강의한다. 수강생이 대부분 3~4학년이라서 새 학기를 시작하면 졸업 후 뭘 하고 싶은지 물어본다. 공직자, 국제기구, IT 등 매년 수강생 다수가 관심 있는 분야가 다를 수 있다. 관심 분야에 맞춰 수업 내용을 바꾼다. 내가 가르치는 노동경제학 교과서는 언제나 같지만 학생에 따라 응용은 항상 다르다. 그러면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수업을 진행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비슷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도 성별에 따라 임금 차가 있다. 또 여자보다 남자가 관리직에 있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한국 남녀 교육 수준은 거의 차이가 나지 않거나 오히려 여자가 높다. 학교 다닐 때만 봐도 1등은 다 여자 아니었나. (웃음) 그런데 직업을 갖는 순간 남녀 임금 격차가 10%에 달한다. 같은 학교와 학과를 나왔고 나이도 같은데 그렇다.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고 여성의 관리직 비중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성별 격차를 만드는 요인은 여러 가지다. 우선 여성에 대한 차별. 이건 정책적으로 개선돼야 한다. 다른 요인은 여성이 남성보다 위험을 감수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도전정신(competitiveness)이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최근 경제학계에서는 여러 국가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도전정신이 약하게 나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여성은 왜 도전정신이 약한가. 또 도전정신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현재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여성이 태어나면서부터 맞이하는 문화 배경이 도전을 피하는 성향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인도의 모계 사회 부족을 보면 성별로 도전정신에서 차이가 없다. 일부 학자는 성별로 분반하는 교육(남학교나 여학교)이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도 자서전에서 여대를 다닌 게 리더가 되는 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여자만 있으니 남자 도움 없이 눈치 안 보고 공부하고 학교생활을 할 수 있다는 거다. 그러나 이 주장이 사실인지 데이타를 기초로 한 분석은 매우 적다. 내가 연구해보니 교육 환경이 바뀐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학교 교육보다 부모가 어떻게 키우는지가 관건이다. 부모는 ‘여자애가 이래야지’라는 선입견을 심어주면 안 된다. 참고로 부모가 모두 대학을 나온 학생들은 남녀 간 도전정신 차이가 없다.” -미국에는 여자 경제학자가 많나. “적다.” -미국 경제학계에 유리천장이 있는 건가. “경제학은 차별을 싫어하는 학문이다. 차별은 곧 비효율이니까. 학계에 남는 비율이 여자보다 남자가 높다. 한국에 자주 오지만 충격받는 게 있다. 직장에서조차 ‘여자는 일과 안 어울린다’ ‘결혼은 언제 하느냐’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진다. 미국이었으면 소송감이다. 한국은 도대체 몇 년대를 사는지 모르겠다. 속상하다. 공직을 시작할 때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에 여자 사무관이 딱 3명 있었다. 재경직은 내가 처음이었다. 출근하니 ‘여자애가 할 수 있겠냐’고 했다. 충격이었다. 대학 다닐 때까지는 내가 여자라서 못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물론 이후 5~6년이 지나고 나니까 신입 공무원의 반이 여자가 됐다. 사기업과 달리 기수에 따라 승진하니 여자가 밀리는 일도 없고 출산하더라도 보호 제도가 잘 돼 있다. 공무원이나 공기업은 앞으로 여자가 고위직에도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기업에는 여전히 여성의 경력 단절이 많다. 오히려 사기업에서 남녀 차별이 개선되지 않았다.” -육아휴직제도가 얼른 자리 잡아야겠다. “제도가 있어도 아무도 안 쓰기도 한다. 육아휴직제도가 있긴 하지만 여러 사정 때문에 못 쓴다. 몇 명이 육아휴직을 더 쓴다고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다. 관행을 바꾸려면 찔끔찔끔해선 안 되고 거의 전부가 바뀔 정도로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육아휴직 등 복지가 잘돼있다는 북유럽 나라에서도 육아휴직을 처음 도입했을 때는 남자들이 꺼렸다. 정부는 아예 남자들이 육아휴직을 쓰도록 의무로 만들었다. 스웨덴은 육아휴직 중 2개월을 남자가 무조건 써야 한다.” -강력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렇다. 강력한 정책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특히 한국은 공적 영역이 강하다. 정부가 강하게 밀고 나갈 여지가 있다. 강력한 정책 의지가 다른 중진국, 선진국보다 나은 점일 수 있다.” -현실적인 문제를 많이 다뤘다. 경제학계의 전반적인 흐름인가 아니면 유독 관심이 있는 건가. “미국 학계에서도 최근 이론보다 실증적으로 자료를 분석하는 흐름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공직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관련된 현실문제에 관심을 둔다. 한국 문제지만 미국 주류에서 관심 있는 문제를 찾아서 연구한다.” - 온라인 만남 실험도 했다. 소개해 달라. “결혼 적령기에 급하게 배우자를 찾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이때 자신이 상대를 좋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문제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얼마나 본인에게 관심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관심이 별로 없는데도 예의상 관심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경제학에서 이런 경우를 ‘정보의 비대칭성’이라고 한다. 내 실험은 정보의 비대칭성을 온라인 데이트에 ‘장미’를 도입해서 해소했다. 실험 참가자는 데이트 요청은 원하는 만큼 할 수 있지만 오직 2명한테만 장미를 보낼 수 있다. 즉 장미를 받는 사람은 본인이 상대의 호감 ‘탑 2’에 든다는 걸 알게 된다. 연구결과 장미의 효과는 엄청났다. 같은 조건에서 장미를 주면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이는 확률이 30% 높아진다.” -구인 구직시장에서도 이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나? “당연하다. 남녀 만남과 결혼, 구인 구직 모두 매칭 문제다. 예를 들어 지방에 있는 중소기업이 직원을 뽑는데 스펙이 좋은 서울 출신의 여성이 지원서를 냈다고 생각해보자. 기업의 입장에서는 이 지원자가 그냥 지원서를 내본 것인지 정말로 기업에 관심이 있고 열정이 있는지 구별할 방법이 없다. 지원자 역시 이 회사에 정말 관심 있다고 증명할 방법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장미 실험을 적용해보자. 가령 모든 구직자에게 일정 기간 2개 회사만 관심 기업으로 등록하게 해서 회사 측에 이를 알려주는 방법이 있다. 위의 예에서 여성 지원자가 중소기업을 관심 기업으로 등록하고 이를 그 회사가 알았다면 지원자의 진의를 믿고 고용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방법을 쓰는 경우가 있나? “전미경제학회가 그렇다. 매년 북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경제학자를 대상으로 박사를 모집하는 2개 학교나 회사를 관심 학교로 지정한다. 매년 12월 중순에 전미경제학회에서 관심 학교 리스트를 해당 학교나 회사에 전달한다. 내가 있는 메릴랜드대도 채용할 때 장미실험을 쓴다. 하버드나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일할 박사이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워싱턴DC에 오고 싶어하는 지원자를 이런 방법으로 알아내고 채용한다.” -성형 수술, 대학 입시, 남녀 만남, 구인 구직 등 한국에 시사점이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공직에서 시작했으니 경제학계와 실무자 간 연결을 돕고 싶다. 한국도 미국도 학계와 실무자 연결이 참 어렵다. 경제학자가 보기에 어떤 정책은 하면 안 되는데 정책 집행자는 할 때가 있다. 실업 줄이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또는 효과가 마이너스인데 학계에서 제대로 설명 안 하면 그대로 진행한다. 솔직히 경제학 논문은 너무 길고 어려워서 일반인이 보면 뭐하자는 건지 알 수 없다. (웃음) 독일 노동연구소(IZA)가 주도하는 세계경제학자 네트워크는 경제학 논문을 보도자료처럼 그림과 도표, 핵심 주장을 정리한다. IZA는 ‘근거가 있는 정책 수립(evidence-based policy making)’을 모토로 내건다. 정책의 기반이 되는 연구 결과를 제대로 전달하겠다는 것이다. 한국도 곧 IZA와 교류한다. 일본으로 출장 갔을 때 한국이 IZA와 교류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마침 한국개발연구원(KDI) 부원장과 알고 지내는 사이라 다리를 놓았다.” -공직을 떠나 2002년부터 유학했다.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하나는 준비가 덜 된 채 유학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행정고시를 봤으니 학계와는 한 발 떨어졌다. 수학과 수업을 많이 들어야 했는데 어려웠다.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또 하나는 질문. 영어를 못 알아듣는 건 아닌데 쑥스러워서 질문을 못 했다. 미국에서는 아무 말 안 하면 바보로 안다. 차라리 이상한 질문이라도 하는 게 낫다. 말을 해서 제대로 얘기하면 좋은 평가를 받는다. 말을 해서 헛소리를 하면 중간 정도 평가다. 아무 말도 안하면 가장 낮은 평가를 받는다. 한국에서 미국 대학원에 온다는 후배가 있으면 전공과 상관없이 꼭 말해준다. 아무리 바보 같은 생각이나 질문도 말해야 한다. 세계 무대에서는 창의성도 중요하지만 의사소통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 한국에는 완벽주의가 있는지 영어 발음이 틀렸거나 문장 구성이 완벽하지 않으면 영어로 말하기 창피해 한다. 그런데 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세계 무대에 절대 설 수 없다.”
993 아침습관
[레벨:20]정아브라함
37 2016-01-23
7분만 투자해 인생을 바꾸는 아침습관 7가지 [중앙일보] 입력 2016.01.23 10:25 모든 사람은 잠에서 깨 아침을 맞이한다. 하루의 시작인 아침이 바뀌면 인생도 바뀐다. 7분을 투자해 삶에 변화를 주는 '아침 습관 7가지'를 소개한다. ①1분: 미지근한 레몬물 한 잔을 마셔라. 레몬물 기상하고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몸속에 물을 흐르게 하는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물 마시기는 사람의 몸에 '윤활유' 역할을 한다. 6~8시간 가량 수면을 취하면서 물을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에 기상해선 반드시 물이 필요하다. 레몬은 소화기능을 깨운다. 새콤한 레몬 맛이 아침을 먹기 전, 입맛을 돋우는데 도움을 준다. 달콤한 게 당긴다면 꿀을 약간 넣자. 물을 마시고도 시간이 있다면 아침에 '그린 스무디' 마시기 습관을 길러보자. 미네랄과 섬유질이 풍부한 케일 등 초록 잎 채소는 식사대용으로도 좋다. 혓바닥 닦기 ②1분: 마른 세수하기와 혓바닥 청소. 마른 세수 형식으로 몸을 구석구석 쓸어보자. 너무 세게 쓸어내릴 필요는 없다. 적당히 '드라이 브러시'를 하면 피부가 부드러워지는 효과가 있다. 양치할 때 이만 닦지 말고 혓바닥 청소에 집중해보자. 혓바닥을 잘 닦으면 음식맛도 더 좋아지고 입냄새를 없애는데도 도움이 된다. 거울 보며 웃기 ③30초: 거울 보고 30초만 웃기. 거울을 보고 딱 30초만 웃어보자. 다른 사람들이 아닌 오직 나만을 향해 웃는 30초다.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이 웃으면서 나를 응원한다. 행복한 자기 얼굴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라. ④1분: 100번 제자리 뛰기. 제자리뛰기는 어떤 에너지음료보다 몸에 좋다. 굳이 멀리 달리기를 나갈 필요가는 없다. 제자리에서 몇 번이라도 뛰면서 하루를 시작하라. 움츠렸던 다리 근육을 쓰면서 전신에 기운을 불어 넣어보자. ⑤1분 30초: 음악을 듣거나 오디오 북을 켜라. 지하철도 좋고 버스도 좋다. 어디가 됐든 당신의 귀에 새로운 자극을 주라. 자고 일어난 뒤 당신은 새로운 정보를 흡수할 준비가 되어 '영혼이 배고픈' 상태다. 아침을 잘 챙겨 먹듯이 영혼에도 좋은 음악이나 아름다운 콘텐트를 부어 넣어라. ⑥1분: 뭐든지 일단, 아침에 딱 3문장만 쓰기. 아침에 딱 3문장만 쓰기. 여기에서 포인트는 딱 3개만 쓰는 것이다. 욕심을 내서 4개, 5개씩 쓰고 나면 나중에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도리어 낙담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3가지에 집중하라. 일에 관계된 문장도 좋고 개인적인 것도 좋다. 딱 3문장만 생각나는 대로 써보는 습관을 길러보자. ⑦1분: 침대정돈 침대정돈 집에서 나오기 전, 당신을 행복하게 할 습관 하나가 있다. 바로 침대 정돈이다. 찰스 두히그의 저서『습관의 힘』에 따르면 침대 정돈은 하루 일과에서 생산성 높이기에도 기여한다. 침대 정돈을 하면서 하루의 시작을 산뜻하게 하면 다른 일들도 잘 해내는데도 연결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또 침대 정돈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다른 좋은 습관을 형성하기에도 유리한 위치에 있다. 하나의 좋은 습관을 토대로 여러 개의 좋은 습관을 기를 수 있는데 '디딤돌'로 삼을 수 있는 게 바로 침대 정돈이라고『습관의 힘』은 분석한다. 유튜브 상에서는 '미국 해군 대장이 말하는 매일 자기 침대를 정돈해야 하는 이유'라는 동영상이 화제가 됐다. 그는 "설사 그날 하루가 엉망진창이었어도 침대 정돈을 잘 하는 사람은 최소한 집에 돌아갔을 때 잘 정돈된 침대를 마주할 수 있다"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침대 정돈을 꼭 하자"고 말했다. <iframe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T-rxAtttRiw?wmode=transparent" frameborder="0" width="580" allowfullscreen></iframe> 미국 해군대장이 말하는 매일 자기 침대를 정돈해야 하는 이유. 출처=유튜브
992 no image 운둔근의 의미
[레벨:20]정아브라함
31 2016-01-27
991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후회
[레벨:20]정아브라함
53 2016-02-05
사람이 죽기 전 가장 후회하는 것 5가지 민정현 인턴 기사 인쇄 이메일로 기사공유 기사 스크랩 글꼴 선택 맑은고딕굴림 글자 크게 글자 작게 100자평 22 페이스북 234 트위터 0 더보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 이메일로 기사공유 입력 : 2016.02.04 15:36 | 수정 : 2016.02.04 21:33 자료사진=인디펜던트 자신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호주 출신의 작가이자 죽음을 목전에 앞둔 환자들을 수년 여 동안 병간호한 브로니 웨어의 책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남긴 후회 5가지’가 지난 3일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를 통해 소개됐다. 웨어는 “짧게는 3주, 길게는 12주 동안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환자들 곁에서 지내면서 발견한 것은 그들이 인간관계와 사랑에 대해 가장 많이 후회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밝힌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남긴 후회’ 5가지는 이렇다. 1.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진정한 ‘나 자신’으로서 살지 못했다. 웨어는 “환자들 대부분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진짜 꿈이 무엇인지 조차 깨닫지 못했다”고 했다. 이 후회는 환자들이 죽기 전 가장 많이 했던 후회라고 한다. 2. 직장 일에 너무 바빴다 웨어는 “남성 환자 대부분이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직장 업무를 위해 몸바쳐 일했던 과거가 후회된다’는 의견을 토로했다”며 “그들은 직장에서의 일이 너무 바빠 자신의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으며 사랑하는 배우자와도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한 과거를 아쉬워했다”고 했다. 3. 진심을 표현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많은 환자가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과거를 후회했다. 웨어는 “자신의 감정을 숨긴 결과로 생겨난 ‘억울함’이 환자의 증세를 키운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4. 친구들과 연락하지 못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오랜 친구들과 꾸준한 연락을 유지하는 것은 분명히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하지만 웨어는 “죽어가는 환자들은 오래전 연락이 끊어져 버린 친구를 다시 찾는 것이 불가능하며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너무 늦게 깨달았다’며 후회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5. 자신을 더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다 웨어는 “많은 환자가 행복이란 자기 자신이 만드는 것이란 걸 깨닫지 못했다”며 그들이 행복하지 못했던 이유를 밝혔다. 그가 밝힌 이유는 사람들이 ‘변화’에 대해 두려워하며 타인의 눈치를 보고, 그들이 삶 속에서 만들어 낸 <iframe noResize height="250" marginheight="0" src="http://cad.chosun.com/RealMedia/ads/adstream_sx.ads/www.chosun.com/news@x74" frameborder="0" width="250" marginwidth="0" scrolling="no"></iframe>일반적인 습관과 행동 패턴들로 인해 진정한 행복을 차단당했기 때문이다. 웨어는 “당신의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당신에 대한 생각은 실제로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굉장히 다르다”며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삶은 ‘당신’의 선택이다. 지혜롭고 진실하게 선택하라. 그리고 무엇보다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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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정아브라함
56 2016-02-15
차베스 포퓰리즘의 비극… 생필품難 주민들, 마켓 앞에 1㎞ 줄서 입력 : 2016.02.15 03:00 [베네수엘라 경제난 현장 - 김덕한 특파원 르포] [上] 무상의료 자랑했는데… 시중엔 약도, 약 살 돈도 없다 국영 수퍼마켓 週1회 출입제한… 밤새 줄서도 못사는 물건 많아 17년새 화폐가치 250분의 1로… 공장과 농장은 생산마저 포기 김덕한 기자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무상 임대 주택에 사는 줄리나(여·26)씨의 '직업'은 '바착게로'('일개미'라는 뜻)다. 월요일 밤이면 카라카스에 있는 국영 수퍼마켓 두 군데 중 한 곳인 '비센테나리오'에 가서 밤새 줄을 선다. '바착게로' 수십명은 이곳에서 늘 만나는 낯익은 동료다. 이들을 '바착게로'라고 하는 것은 일개미처럼 긴 줄을 서기 때문이다. 지난 2일 아침 8시 수퍼 문이 열리자 줄리나씨는 신분증과 지문 확인을 거친 후 매장에 들어갔다. 신분증 끝번호가 3번인 그녀는 매주 화요일 수퍼 입장이 가능하다. 익숙한 솜씨로 옥수수가루, 쌀, 스파게티 국수, 우유, 커피, 비누, 생리대, 휴지, 면도기 매대를 순서대로 돌았지만 구매 제한 개수인 2개씩을 모두 산 품목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녀는 "작년 11월까지만 해도 밤새 줄을 서면 못 사는 물건이 두세 가지도 안 됐는데, 지금은 없는 물건이 훨씬 더 많다"고 했다. 줄리나씨는 이렇게 산 물건을 암시장인 메르카도 차카오의 상인에게 넘긴다. 국영 수퍼에서 25볼리바르(Bs·베네수엘라의 화폐 단위)인 쌀(1㎏)은 암시장에서 350Bs, 19Bs인 옥수수가루는 400Bs, 70Bs인 우유는 800Bs에 팔리기 때문에 암시장 상인에게 바로 넘기더라도 서너 배는 받을 수 있다. 정부 가격과 암시장 가격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건 물건이 없기 때문이다. 석유 매장량 세계 1위 베네수엘라는 지금 처참한 생필품난을 겪고 있다. 소비자들은 매장 밖 1㎞까지 물건을 사느라 장사진을 이루고, 폭동을 막기 위해 무장 군인이 매장을 지키는 게 일상사가 됐다. 생필품 사려고 장사진 - 12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한 수퍼마켓 앞에 식료품을 사려는 주민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에서는 극심한 물자 부족 사태로 마트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 물건을 사는 게 일상이 됐다. /AFP 연합뉴스 수출의 95%를 석유에 의존하는 이 나라는 한때 배럴당 120달러가 넘던 원유 가격이 20달러대로 곤두박질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좌파 포퓰리즘 정권의 무능과 부패다. 1999년 우고 차베스 정권이 들어선 후 17년 만에 베네수엘라는 경제뿐 아니라 사회 전반이 총체적으로 망가졌다. 차베스 집권 기간인 1999~2012년 49%였던 빈곤율이 25%까지 떨어지며 '볼리바르 혁명'이라는 칭송을 받았지만, 지난해 빈곤율이 73%로 급상승해 포퓰리즘의 허상을 증명했다. 살인율, 납치 사건 발생 건수 등 범죄율도 크게 높아져 세계에서 가장 치안이 불안한 나라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썼다. 지난 3일 달러 대비 볼리바르화의 암시장 환율이 1000을 돌파했다. 1달러를 가져가면 베네수엘라의 최고액권 화폐인 100볼리바르를 10장이나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차베스가 정권을 잡았던 1999년 환율이 4 안팎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볼리바르화 가치는 17년 만에 250분의 1로 떨어졌다. 그런데도 지금 베네수엘라 정부의 공식 환율은 6.3대1을 고집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1000볼리바르를 줘야 1달러를 구할 수 있는데, 정부는 6.3볼리바르에 1달러를 주도록 환율 정책을 유지하고 있고, 그 환율에 정부가 공급할 수 있는 달러는 말라버렸으니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국영방송 앵커 "월급 14달러‐ 그만두겠다" - 베네수엘라 국영방송 ANTV 스포츠뉴스 앵커 루이스 에두아르도 인시아르테가 지난해 11월 19일 생방송 뉴스 진행 도중“오늘을 마지막으로 뉴스 진행에서 물러난다”며 사직을 선언하는 장면. 인시아르테는 자신의 월급이 1만1200볼리바르로, 암달러로 환산하면 14달러에 불과하다며 사직 이유를 설명했다. /유튜브 캡처 베네수엘라에서 30년째 신발·잡화 공장을 운영해온 이탈리아계 베네수엘라인 더글러스(60)씨는 지난해 공장 운영을 포기했다. 그는 "원자재를 수입하려면 암시장 환율대로 달러를 바꿔서 물건을 사와야 하는데 정부는 제품값을 제한하고 있으니 도저히 공장 운영을 할 수 없다"며 "경제도 돌지 않고 물건도 없고 물가는 계속 오르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했다. 수출·수입도 마비됐다. 3일 오후 카라카스의 라과이라 부두에는 컨테이너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정부가 지정한 필수 품목 54개 가격을 억지로 통제하는 바람에 이 품목 생산자들은 생산을 포기하는 상황이다. 양계 농장은 사료값보다 싼 계란값 때문에 닭을 폐사시키고 카라카스 시내 정육점도 대부분 휴업해 문을 닫았다. 국제사회에서는 "베네수엘라의 국가 부도 확률이 99%"라고 우려하고 있지만, 베네수엘라는 차베스가 시작한 무상 의료, 무상 교육, 무상·저가 임대 주택 제공 등 '그랑미션'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정책은 이미 고장이 났다. 병원엔 약이 없고, 학교엔 교사가 없다. 지난해 전역한 한 예비역 장성은 "병원에서 진단서는 끊어주는데 약국에서 약을 구할 방법이 없다"며 "당신이 만약 아프다면 100달러 정도를 내면 암시장에서 약은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계층은 중산층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달러 예금이나 해외 부동산을 가진 부유층은 달러화 고평가의 혜택을 누리며 달러화 기준으론 엄청나게 싼 물가를 즐기고 있고, 빈곤층은 정부의 가격 통제에 묶인 생필품을 구해 최소한의 생활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중간쯤의 월급 생활자들은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지난해 11월 베네수엘라 한 국영방송 앵커가 방송 진행 도중에 1만1200볼리 <iframe noResize height="250" marginheight="0" src="http://cad.chosun.com/RealMedia/ads/adstream_sx.ads/www.chosun.com/news@x74" frameborder="0" width="250" marginwidth="0" scrolling="no"></iframe>바르인 월급으론 도저히 생활할 수 없다며 "오늘을 끝으로 방송을 떠나겠다"고 한 장면은 유튜브에서 지금도 많은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지금 월급 생활자 대부분은 3만~5만볼리바르 정도를 받는데, 맥도널드 햄버거 세트 가격이 1400볼리바르다. 한때 남미 최고 부국(富國)이었던 베네수엘라는 좌파 포퓰리즘 17년 만에 정상적으로는 살기 어려운 나라로 변했다. [나라 정보] 석유 매장량 1위 베네수엘라는 지금?
989 마음을 여는 길
[레벨:20]정아브라함
32 2016-04-15
어느 국회의원 당선자 이야기입니다. "뛰고 또 뛰니 江南표심 열리더라" [4·13 국민의 심판] 서울 강남을 당선자 더민주 전현희 "강남 유권자 거의 다 만날 정도… 주민들 '명함 10장 받았다'고 해 강남에서 야당이 자리 잡아야 정치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죠" 서울 강남을의 더불어민주당 전현희(51) 당선자는 14일 "여야 모두 민심(民心)이 무섭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라며 "변화를 갈망하던 강남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전 당선자는 이 지역 현역인 새누리당 김종훈 후보를 51.5% 대 44.4%로 이겼다. 새누리당 텃밭인 서울 강남을에서 당선된 더불어민주당 전현희 당선자가 14일 새벽 강남구 수서동 선거사무소에서 어머니 김명순 여사와 샴페인으로 건배하고 있다. /장련성 객원기자 전 당선자는 이날 본지 인터뷰에서 "솔직히 정말 열심히 뛰었다"고 말했다. 그는 "강남을 유권자를 거의 다 만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며 "선거 운동 막판에는 주민들이 '명함 10장 받았다' '오늘도 세 번이나 만났다'고 하더라"고 했다. 경남 통영 출신의 전 당선자는 18대 총선 때 통합민주당 비례대표로 당선된 뒤 19대 때 강남에 출마했다가 낙선했고 두 번째 도전 만에 재선에 성공했다. 치과의사 출신의 변호사인 전 당선자는 작년 10월 일찌감치 다시 강남 출마를 선언했다. 전 당선자는 "대한민국 정치를 바꾸고 지역주의를 깨기 위해 더민주를 택했다"며 "강남에서 야당이 깃발을 꽂아야 정치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제가 정치를 시작한 이유"라고 했다. 이어 "선거운동 때 가장 많이 들은 얘기가 '정치인들 정신 좀 차려라' '국민을 위해 일 좀 하라'라는 말이었다"며 "이번 국회에선 새로운 정치 풍토를 만드는 데 앞장서고 싶다"고 했다. 전 당선자는 "처음 선거운동을 시작할 때 참 많이 울었다"고 했다. "행사장에 가면 '여기가 어디라고 왔느냐'며 쫓겨나는 일이 다반사였고, 유권자들도 냉정했다"고 했다. 2014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남편이 생각나거나, 정치하는 걸 반대한 어머니가 남편 대신 명함을 돌리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많이 울었다고 한다. 전 당선자는 "서러웠지만 다시 찾아가고 또 찾아갔다. 그랬더니 새누리당 조직인 단체들이 먼저 마음을 열더라. 그렇게 보수층이 먼저 무너졌다"고 했다.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자 분위기가 반전되는 <iframe noResize height="250" marginheight="0" src="http://cad.chosun.com/RealMedia/ads/adstream_sx.ads/www.chosun.com/news@x74" frameborder="0" width="250" marginwidth="0" scrolling="no"></iframe>걸 느꼈다고 했다. 그는 "선거일 4~5일을 앞두고 당 자체 여론조사에서 김종훈 후보를 4~5% 앞지르는 결과가 나와 당도, 나도 모두 놀랐다"고 했다. 사실상 더민주는 강남 선거를 방치했다. 김종인 대표가 이곳을 한 번 찾은 게 전부였다. 전 당선자는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지역 특성상 당 지원보다는 유권자를 진심으로 만나는 게 더 중요했다"고 했다
988 부모와 자녀의 게임중독
[레벨:20]정아브라함
46 2016-05-03
횡설수설/정성희]게임중독은 부모 탓? 정성희 논설위원 입력 2016-05-03 03:00:00 수정 2016-05-03 03:00:00 <iframe height="65" marginheight="0" src="http://ar.donga.com/RealMedia/ads/adstream_sx.ads/2014.donga.com/news@x78" frameborder="0" width="270" marginwidth="0" scrolling="no"></iframe> 건국대 산학협력단 정의준 교수는 2000여 명의 청소년과 부모를 심층 분석해 초등학생과 중학생은 부모가 많이 간섭할수록, 고등학생은 부모의 기대가 높을수록 게임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는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부모가 주는 스트레스가 게임 과(過)몰입의 원인이라는 얘기다. 요즘 아이들은 외모든, 성적이든, 취업이든 뭔가 뜻대로 안 풀리면 부모 탓을 하는데, 이젠 게임중독도 부모 탓이라니 부모 노릇 하기 정말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연구도 전체 그림을 이해하려면 관련된 기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연구는 한국연구재단의 사회과학연구(SSK) 지원을 받아 이뤄졌고 보도자료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제공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게임 등 콘텐츠산업을 지원하는 문화부 산하기관이고 한국연구재단은 미래창조과학부가 주무부처다. 관련 기관들이 게임중독의 여러 원인 중에서 유독 부모가 주는 스트레스를 강조한 것은 게임 중독을 가정의 책임, 개인 책임으로 돌리려는 의도인 듯하다. <iframe height="250" marginheight="0" src="http://ar.donga.com/RealMedia/ads/adstream_sx.ads/2012.donga.com/news@x15" frameborder="0" width="250" marginwidth="0" scrolling="no"></iframe> ▷고려대 권정혜 교수가 1999년부터 2012년까지 전문 학술지에 발표된 70개 연구를 메타분석법으로 분석한 결과 인터넷 중독의 위험요인에는 개인의 성격, 사회적 지원 여부, 부모 자녀 관계, 인터넷 자체의 특성, 환경적 요인 등이 있다. 예컨대 자기도피 성향이 있거나 불안 우울지수가 높은 사람은 게임이건 알코올이건 의존하는 경향이 높다. 보건복지부는 게임중독을 마약 알코올 도박중독과 같은 질병으로 규정하고 여기에 질병 코드를 부여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한국 사회에서 자녀의 학업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크다 보니 다른 나라에 비해 청소년들의 스트레스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기 통제를 못 하고 게임에 더욱 몰입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스포츠 음악 영화 독서 등 건전한 여가활동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청소년도 많다. 게임중독에 빠진 부모가 자녀를 돌보지 않는 경우도 있다. 게임중독의 핵심 원인을 부모에게 돌리는 것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잘못 지목하는 우를 범하는 일이다.
987 판 커진 멍때리기 대회
[레벨:20]정아브라함
46 2016-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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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 때리기' 대회장 주변은 꽤나 번잡스러웠다. 황금연휴를 맞이해 외출을 즐기러 나온 나들이객의 웃음소리, 대회장 앞 대로를 오가는 차량들의 매연, 한낮의 땡볕 더위, 대기에 가득한 황사와 미세먼지가 대회장을 감쌌지만 참가자들은 '시작'을 알리는 벨 소리가 울리자마자 '멍 때리기'에 몰입했다. 2시간 동안 무심한 눈빛으로 '속세'를 떠난 이들은 변기 커버 위에 올라 앉거나 옆으로 드러눕기, 가부좌 등 각자 개성넘치는 자세를 선보였다. 참가의 변은 ‘여유’와 ‘안정’을 지향했다. 우체국 집배원 문정훈(38)씨는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8~9시에 퇴근하는 여유가 없는 삶 속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어서 나왔다”고 했다. 트로트 가수 리미혜(29)씨는 “요즘 행사철인데 불러주는 데가 없어서 너무 우울해 참가했다”고 했다. 그는 “억지로 잠을 자려고 하면 잠이 안오니까 그냥 하루 대부분을 멍하니 있는다”면서 “데뷔 3년이 지났지만 소속사도 없이 혼자 가수 활동을 하다보니 외롭다”고 했다. 어떤 반전의 계기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1회 대회 우승자였던 초등학생 김지명(당시 9세)양은 우승 뒤 지상파 TV에 출연하는 등 유명인사가 된 바 있다. 1회 대회 우승자였던 초등학생 김지명 양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정신적 이완 대신 우승을 위한 집념이 불타올랐다. 20분쯤 지나자 첫번째 탈락자가 나왔다. 허리가 아파오자 몸을 자주 들썩였던 5세 여자 아이였다. 첫 탈락자가 나오자 다른 참가자들이 내심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황금색 트로피가 탐난다”며 경남 김해에서 올라온 김태우(9)군은 70분 동안 가부좌를 틀고 앉아 관중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1시간 11분 뒤 어깨를 흔들며 끅끅 울기 시작했다. 놀란 경기 진행요원이 헐레벌떡 달려가자 김군은 “엉덩이가 너무 아프다”고 흐느끼며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이날 경기 참가자들은 대회 규칙에 따라 모두 자신의 직업을 나타내는 복장을 입고 왔다. 작업복에 안전벨트·안전모까지 착용하고 참가한 건설회사 직원 김창원(40)씨는 “간만에 휴식을 누리고 싶었다”고 했지만 “한 달 전부터 대회 요강과 ‘멍 때리기’ 요령을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했다”며 전의를 불태웠다. ◇멍 때리러 왔지만…승부는 승부다 진행요원들은 15분마다 선수 검지에 기구를 갖다대 심박수를 체크했다. 또 경기를 관전하던 주변 시민들로부터 참가자들에게 스티커 투표를 받아 점수를 합산했다. 관객 투표 다득점자 중에서 가장 안정적인 심박그래프를 보인 이들이 1~3등이 된다. 그러다보니 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참가자가 속출했다. 시민들의 스티커 투표를 의식해 소파에 누워 TV보는 자세로 목에 팔을 받치고 누운 남성, 플라스틱 박스 위에 변기 커버를 놓고 ‘대변 보는 자세’로 앉은 남성까지 나왔다. 하지만 이들은 ‘멍 때리기’ 본연의 자세에서 이탈한 나머지 상·하반신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갔다. 자신이 잠든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눈꺼풀을 격렬히 깜빡이는 참가자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눈동자에서 힘이 풀려나갔다. 대회엔 규칙이 많았다. 위반 사항이 총 8가지였는데, ▲ 휴대전화 확인 ▲ 졸거나 잘 경우 ▲ 시간 확인 ▲ 잡담 나누기 ▲ 주최 측 음료 외 음식물 섭취 ▲ 노래 부르기 또는 춤추기 ▲ 웃음 ▲ 기타 상식적인 멍때리기에 어긋나는 모든 경우였다. 사또 복장을 한 심사위원 3명이 내내 대회장을 누비며 참가자들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확인했다. 참가자들은 괜한 오해를 살까봐 잔뜩 위축됐다. 옷에 묻은 잔디를 털어내거나 바람에 날아간 모자를 줍느라 움직인 사람들은 어김없이 ‘경고장’을 받았다. 대회가 점차 ‘움직이지 않기 대회’로 변질돼가자 사회자가 뒤늦게 “여러분, 움직이셔도 됩니다”라는 안내방송을 하기에 이르렀다. 안내 방송을 수 차례 했지만, 탈락의 불명예를 쓰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날 대기 미세먼지는 ‘매우 나쁨’(151 ㎍/㎥) 수준이었고, 대회장 30m 밖 로터리에서 차량들이 짙은 매연을 쏟아냈지만, 누구 하나 마음놓고 기침 한 번 하지 않았다. ◇멍 때리기와 명상은 달라… 집중하면 안돼 ‘멍때리다’는 ‘멍하다’의 어근 ‘멍’과 ‘낮잠을 때리다’ 등으로 흔히 일상에서 쓰이는 속어 ‘때리다’를 붙여 만든 단어로, 정신이 나간 것처럼 아무 반응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미국에서는 데이드리밍(daydreaming) 혹은 스페이스아웃(space-out), 중국에서는 파따이(發呆)라고 불린다. 의학적으로는 ‘디폴트모드 네트워크(default-mode network)’라고 한다.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는 점은 비슷해도, 멍때리기는 명상과 다르다. 2013년 책 ‘멍 때려라’를 쓴 강북삼성병원 정신의학과 신동원 교수는 “명상은 휴식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정신의 훈련 과정이자 자신의 감각과 생각의 순간적 몰입”이라고 말했다. 반면 멍때리기는 목적 없이 순전히 생각나는대로 하는 것이다. 신 교수에 따르면 멍때릴 때도 사람의 뇌파는 활발하게 움직인다. 이 때 뇌는 무의식 속에서 주로 과거의 정보를 모아 하나로 정리하는 등의 활동을 한다.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솔루션이 튀어나오기도 한다는 것이 신 교수의 설명이다. ‘멍때리기 대회’ 1회 대회 후원을 했던 황원준 정신과전문의는 “사람의 뇌는 집중하다가도 멍한 상태로 전환해 휴식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쉬는 시간에도 스마트폰을 보면서 뇌를 혹사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멍 때리기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덜어주는 귀중한 시간”이라며 “며칠간 계속 지속된다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단 몇 분, 몇 초의 멍때림은 정신 안정에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iframe height="360" src="https://www.youtube.com/embed/DvHvrv7xh3s?rel=0" frameborder="0" width="640" allowfullscreen=""></iframe> 멍 때리기와 관련한 흥미로운 주장도 있다. 매튜 리버먼 미국 UCLA 교수는 저서 ‘사회적 뇌’에서 “뇌가 디폴트모드 네트워크 상태에서 사회적 세계에 대한 학습을 한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멍때리는 동안 사람들이 자신과 타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매튜 교수는 이를 “(멍하니 쉬면서 인간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 뇌가 인간 종(種)의 성공적 진화를 위해 사회적 지능을 발전시키는 전략을 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멍때리기가 전 세계에서 모두 환영받는 건 아니다. 칠레에서 13년째 거주하고 있는 민원정 칠레가톨릭대 아시아학센터 교수는 “칠레 학교엔 체벌이 없는 대신, 말썽 피운 아이들을 주말에 학교로 불러서 2시간씩 빈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도록 한다”고 말했다. 멍때리기가 칠레에선 일종의 체벌인 셈이다. ◇국제대회로 판 커졌다…외국인 참가자들의 변(辯) 2015년 베이징 멍때리기 대회 우승자 중국인 씬쓰위(辛時雨·23)씨 ‘멍때리기 대회’는 2014년 서울시청 앞 잔디밭에서 처음 열렸다. 당시 이 신기한 시도에 대해 여러 매체가 “피로가 큰 한국 사회의 현상” 등으로 분주히 보도했다. 입소문이 나자 이듬해 중국 베이징에서 2회 대회가 열렸고, 올해가 세번째 대회다. 이번 대회는 외국인 9명이 참여하는 등 국제대회로 판이 커졌다. 대회 주최자 ‘웁쓰양’(38)씨는 “현대사회를 사는 사람이라면 잠잘 때 빼고는 스마트폰을 붙들고 사는데,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모두 공감하는 부분”이라고 했다. 그는 “다음 대회도 일본 등 다른 나라에서 개최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베이징 멍때리기 대회 우승자 중국인 씬쓰위(辛時雨·23)씨는 친구의 권유로 우연히 대회에 참석했다가 우승 트로피까지 거머쥔 경우다. 그는 “멍때리기는 바쁜 나라에서 사람들이 뇌를 보호하는 일종의 ‘쉼표’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도 바쁘지만 중국도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중국어에서도 ‘멍때리기’(發呆)’는 하루에 한 두 번식은 꼭 쓰는 단어가 됐습니다.” 미국인 대니얼 위버그(34)씨 캐나다에서 온 IT엔지니어 윌프레드 리(32)씨는 종이상자로 노트북 모양을 만든 뒤, 컴퓨터 작업을 하는 것처럼 상자를 응시하며 멍때리기 자세 연출에 활용했다. 그는 “한국의 ‘멍때리기’는 일종의 비워내기인 거 같다”며 “뭔가에 집중하는 명상과 달리 멍때리기는 무의식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비워내기가 아닌 내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 생각(집중)한다”면서 “정신건강을 위해 샤워할 때나 지하철 탈 때 틈틈이 ‘멍 때리기’를 연습한다”고 했다. 윌프레드씨는 이날 대회 2등을 차지했다. 한국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는 미국인 대니얼 위버그(34)씨는 “멍때리기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한 번도 멍때리기를 두고 경쟁을 한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이걸 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건지 모르겠다”며 “자연스러운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특별상 받은 인도인 비라 킬라파르티(27)씨 인도인 비라 킬라파르티(27)씨는 2년 전 한국 기업에서 일하게 된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다. 함께 참가한 남편은 대회 시작 40분 만에 엉덩이 경련을 견디지 못하고 탈락했지만, 그녀는 어릴적부터 다져온 요가의 내공 덕분에 종료 벨이 울릴 때까지 침착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는 “상 같은 걸 바라고 대회에 참가한 게 아니다”며 “남편과 행복한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걸로 만족한다”고 했다. 거의 유일하게 긴장을 찾아볼 수 없던 참가자였다. ◇‘멍때리기’에도 1·2·3등?…서울시까지 팔 겉어붙여 이날 우승은 만반의 준비를 해온 참가번호 1번 김창원씨가 차지했다. 1등 상품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모조 트로피를 받아 든 김씨는 “사회자가 웃긴 말을 많이 했는데, (심박동이 널뛰지 않게)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3등은 초등학생 조유나(8)양이었다. 조양의 어머니는 “대회 끝나고 나서 딸이 ‘다리가 많이 아팠다’고 하더라”며 “누가 그러라고 시킨 적도 없는데, 자세를 바꾸면 탈락한다고 본인이 생각했는지 양반다리를 한 채 거의 움직이질 않았다”고 말했다. 참가번호 10번으로 참가했던 트로트 가수 리미혜씨는 결국 빈 손으로 집에 돌아갔다. 리씨는 “심사위원들이 (시험 감독관처럼) 계속 주변을 돌아다녀서 왠지 눈동자라도 돌아가면 경고 받을까봐 꾹 참고 있었다”면서 “참가자들이 다들 이를 갈고 나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iframe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P1_wYYn66fE?rel=0" frameborder="0" width="560" allowfullscreen=""></iframe> 이날 대회에는 기자(양지혜)도 참가했다. 처음엔 기사를 위해 주변 참가자들을 관찰하려는 목적이었지만, 대회 시작 종이 울리자 수상 욕심이 생겼다. 욕심은 정신을 황폐하게 했다. 무릎에 앉은 날파리를 손으로 툭툭 털어내다가 경고를 받은 뒤로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대회 후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에게 이 현상에 대해 물었다. 최 교수는 “멍때리기 자체는 정신·문화적인 가치가 있지만 이걸 대회로 열어 경쟁하고 상을 주는 게 모순적인 것 같다”며 “멍때리기에까지 경쟁과 압박이 틈입한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에서 '한 멍' 하기로 소문난 양지혜 기자도 '48번' 선수로 변신했다. 자신의 직업을 나타내는 옷을 입으라는 규칙에 맞춰 검정 버버리 코트에 노란색 'PRESS' 완장을 팔에 달았다. 대회 시작 전에는 "실컷 멍 때려야지" 싶은 마음에 설렜는데, 치열한 경기 분위기에 휩싸여 오히려 멍 대신 번뇌가 마음에 가득찼다. 대회 끝나고 기사 쓸 생각하니 심박수가 올랐고, 무릎 위로 올라오는 개미를 치웠다가 '옐로카드'를 받았다. '멍때리기'는 쉬워도 '멍때리기 대회'는 역시 쉽지 않다. 대회가 갈수록 인기를 얻자 지방자치단체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서울시 한강사업본부는 22일 이촌한강공원 청보리밭 일대에서 ‘2016 한강 멍때리기 대회’를 개최하기로 하는 등 전국에서 행사 주최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다. 멍때리기에도 1등과 2등과 3등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이날 대회에는 1회 대회 우승자 김지명(11)양은 자원봉사자 자격으로 대회장에 모습을 비췄다. 만사 귀찮은듯한 표정으로 “멍때리기 우승자로서 소감이 어떠하냐”는 질문에도 일절 대꾸를 않던 김양은, 대회가 끝나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 집에 가도 돼요
986 좋은 음식궁합
[레벨:20]정아브라함
15 2016-07-02
같이 먹으면 면역력이 쑥 올라가는 찰떡궁합 음식 이보람 헬스조선 기자 기사 인쇄 이메일로 기사공유 기사 스크랩 글꼴 선택 맑은고딕굴림 글자 크게 글자 작게 100자평 0 페이스북18 트위터 더보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 이메일로 기사공유 입력 : 2016.06.28 14:30 같이 먹으면 독이 되는 음식들이 있는가 하면, 같이 먹으면 약이 되는 음식도 있다. 따라서 어떤 음식이 궁합이 맞는지를 알고 먹어야 제대로 건강식을 먹는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요즘처럼 덥고 습한 날씨로 면역력이 저하돼 하루종일 기운이 없고 피곤하다면, 면역력을 높여주는 찰떡궁합 음식을 챙겨먹는 것도 도움이 된다. ◇된장과 부추 된장과 부추는 영양학적으로 궁합이 잘 맞는 음식이다. 부추는 된장과 함께 먹으면 된장의 짠맛을 줄이고 된장에 부족한 비타민 A와 C를 보완해준다. 또한 부추에는 칼륨이 풍부해서 된장으로부터 흡수된 나트륨을 배출하는데 도움을 준다. 과도한 나트륨 섭취는 고혈압, 심장병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된장을 먹을 땐 부추와 함께 먹는 것이 좋다. 함께 먹으면 효과가 높아지는 찰떡궁합 음식들이 있다/사진-조선일보 DB ◇녹차와 레몬 녹차에는 ‘테아닌’과 ‘카테킨’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면역력을 증진시키고 각종 바이러스 감염을 예방하는데 도움을 준다. 여기에 레몬을 함께 먹으면 레몬의 비타민C가 녹차에 들어있는 카테킨 성분이 소화기관에서 분해되는 것을 감소시켜 보다 효과적인 영양소 흡수를 돕는다. ◇도라지와 오리고기 사포닌이 풍부해 면역력 증강에 도움이 되는 도라지는 오리고기와 함께 먹으면 좋다. 도라지는 면역력을 높이는 음식 및 항암효과가 뛰어난 음식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를 오리고기와 함께 먹을 경우 면역력을 증강시키는 여름 철 보양식으로 손색이 없다. 도라지의 따뜻한 성질이 오리고기의 찬 성질을 감싸 주고, 오리고기에 함유된 불포화 지방산과 엽산, 철분 등 인체에 이로운 영양소가 폭염에 지친 현대인의 원기를 회복시키는 데에 효과적이다. ◇마늘과 등 푸른 생선 마늘과 등 푸른 생선을 함께 섭취 할 경우 면역력을 강화시키는 영양소를 배로 섭취할 수 있다. 마늘은 항바이러스에 효능이 좋은 식품으로 셀레늄과 마그네슘, 비타민B6, 알리신 등 면역력을 높이는 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다. 등 푸른 생선 역시 면역력 증강에 도움이 되는 셀레늄, 엽산, 오메가-3 지방산 등의 영양소가 많다. 마늘과 함께 섭취할 시 생선 특유의 비린내를 없애 폭염에 저하된 식욕과 면역력을 동시에 증진 시킬 수 있다. ◇토마토와 올리브유 라이코펜 성분이 풍부한 토마토는 올리브유와 함께 먹으면 좋다. 라이코펜 성분은 항암 및 항산화 효능이 있어 면역력 강화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 성분은 지용성이기 때문에 올리브유 오일과 함께 볶아 먹으면 보다 효과적으로 섭취 할 수 있다. ◇감자와 치즈 감자와 치즈는 찰떡궁합이다. 감자의 신선한 맛과 치즈의 고소한 맛이 어우러져 그 둘의 맛이 극대화되고, 단백질 음식인 우유로 만들어진 치즈는 감자에는 없는 비타민 A와 단백질을 제공함으로써 영양 면에서도 서로 도움을 준다. 이런 이유로 어린이와 노약자를 위한 건강식으로 추천된다.
985 쓰레기 치우지 못하는 병
[레벨:20]정아브라함
41 2016-07-21
[사회] --> [사회] 게재 일자 : 2016년 07월 21일(木) 산더미 쓰레기 강박적 축적 ‘호더’ 치워줘도 그때뿐 --> ▲ 서울 동작구에서 자원봉사센터와 함께 정리수납을 해준 호더 A 씨 집안의 정리 전후 모습. 동작구 제공 동작구만 年평균 2건 ‘호더’ 다른 자치구 합하면 더 많아 “정신질환 치료도 병행해야” ‘호더(hoarder)를 아시나요?’ 호더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는 일종의 강박장애를 겪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낡고 필요 없는 물건이나 쓰레기를 집 안에 쌓아두는 행동을 반복하는 특징을 보인다.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1987년 사망)도 호더였다고 알려져 있다. 호더는 사회 양극화의 한 단면이며 근래 일본의 최대 사회문제 중 하나인 빈집 증후군처럼 고령화 사회의 산물로도 분석된다. 특히 혼자 남은 어르신이나 자녀가 없는 이혼남녀 등에서도 종종 발생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1일 서울 시내 각 구청에 따르면 호더가 사회문제로 등장한 지 꽤 됐지만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는 아직까지 이들에 대한 체계적이고 정책적인 대응책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동작구 복지담당 관계자에 따르면 연간 평균 15건 정도 쓰레기가 쌓인 집을 지역 자원봉사 단체와 함께 청소해주고 있는데, 이 중 2건 정도가 호더로 분류된다. 나머지는 가구주의 경제적 이유나 건강 문제로 무려 수t의 쓰레기와 함께 생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구에서는 지난 2013년 26가구, 2014년 16가구, 2015년 17가구에 대해 청소 봉사를 실시했다. 이 관계자는 “2013년부터 사업을 시작한 우리 구가 이 정도인 것을 보면 다른 구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라면서 “호더에 대해 그때그때 대응은 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청 직원들과 함께 현장에서 정리활동을 펴고 있는 자원봉사센터(민간위탁)의 박요한 주임은 “호더는 치워주고 나면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더라”면서 “정신질환 치료도 병행해야 하는데 그 부분이 아쉽다”고 안타까워했다. <iframe style="POSITION: absolute; TOP: 0px; LEFT: 0px" id="aswift_1" height="200" marginheight="0" frameborder="0" width="200" allowTransparency name="aswift_1" marginwidth="0" scrolling="no" allowfullscreen="true"></iframe> 서대문구도 10여t의 쓰레기 더미에서 생활하던 할머니가족의 집안을 지역민들과 함께 말끔히 청소했으며, 영등포나 강서, 동대문구 등도 사정은 마찬가지다.서울시 복지담당 관계자는 “25개 구에 정신보건센터가 있어 어느 정도 관리될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전담조직은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또 복지부 관계자는 “현재 실태조사를 하고 있진 않으나 지속적인 관리를 위해 더 심화된 고난도의 가이드라인 개발계획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984 no image 게임중독으로 인생 망친 사람의 항변
[레벨:20]정아브라함
60 2016-07-25
983 no image 검은 바나나 [1]
[레벨:20]정아브라함
53 2016-09-21
'일부러 세일하는 검은 바나나를 삽니다.' - <하루 한 개, 검은 바나나> 중에. 추석 때 형님에게 들은 이야기. '커피를 끊었다'는 말과 함께 "오전에 바나나, 우유 한 잔, 삶은 계란 1개 이렇게 먹은 지 좀 됐어"란다. 그렇게 먹은 이후로 아프던 몸이 좋아졌다면서.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신간 <하루 한 개, 검은 바나나>(시공사)를 보니 형님 말이 괜한 소리는 아니었던 듯. 그 이유를 보자. 우선 검은 바나나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노란 바나나가 숙성이 되면 바나나 껍질 표면에 '검은 반점'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때의 바나나를 '검은 바나나'로 부르는 것. <iframe id="ttx_area_1078087127_99" height="250" marginheight="0" frameborder="0" width="250" allowTransparency marginwidth="0" scrolling="no"></iframe> 노란 바나나는 효소, 식이섬유, 비타민, 항산화물질 등이 든 파워 식품인데, 숙성이 되어 검은 바나나가 되면 그 효능이 더 강력해진다고 저자 쓰루미 다카후미(의료사단법인 모리아이카이 쓰루미 클리닉 이사장 겸 의사)는 주장한다. 칼로리도 낮아지고, 소화와 대사를 촉진하는 효소가 더 풍부해지며 항산화물질(피토케미컬)이 훨씬 풍부해진다는 것. 책에는 실제 아침 식사 대용으로 검은 바나나를 우유와 함께 섭취해 높은 혈압도 잡고, 편두통과 빈혈 증상이 가벼워졌다는 등의 수기도 함께 실려 있다. 뿐만 아니라 체중 감량과 거친 피부도 곱게 정돈시켜 준다니 참고해 봐도 좋을 듯하다. 검은 바나나가 고혈압, 당뇨, 다이어트, 피로감에 특효약이었다니... 색깔 변했다고 그간 내다 버린 바나나가 좀 아깝네.
982 글 잘 쓰는 법
[레벨:20]정아브라함
42 2016-10-02
글 잘 쓰고 싶은가? 그럼 잠 푹 자라 [남정욱의 명랑笑說] 머리 맑아야 좋은 글 나와 "잘 쓰겠다" 욕심도 버려야 마지막 비결? 뜻대로 안 써져도 좌절하거나 슬퍼하지 말기 글쓰기 강연 요청이 들어왔다. 수락하고 전화를 끊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건 이런 광고 카피였다. '운전은 한다. 차는 모른다.' 딱 그 꼴이다. 글은 쓴다. 그걸로 밥도 먹고 술도 먹는다. 그러나 그게 다다.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혹시나 해서 답이 들어 있을 법한 책부터 찾아봤다.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와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다. 그럴 줄 알았다. 자기 자랑만 늘어놓거나(스티븐 킹) 어쩌다 보니 소설가가 되었다는(하루키)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이야기뿐이다. 머리만 더 복잡해졌다. 아니 더 나빠졌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쓰는 걸까로 시작했는데 조금 지나자 그럼 대체 나는 어떻게 쓰는 것일까로 문제가 심오해진 것이다. 이인성의 소설 '한없이 낮은 숨결'에 야구 선수가 슬럼프에 빠지는 과정을 고백하는 대목이 나온다. 짧아서 그대로 옮긴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저 공을 어떻게 쳐냈던가 의심이 들더니… 야구공 지름이 몇 센티나 됩니까… 그게 보통 시속 백킬로 이상으로 휙휙 날아드는데… 피처가 공을 놓은 순간부터 0.25초 안에 칠까 말까를 결정해서 0.2초 안에 배트를 휘둘러야 되는데…." 논리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는 순간 동물적인 감각이 사라진다는 얘기다. 주변에 미운 야구 선수가 있으면 들려줘도 좋겠다. 뒷일은 책임 못 진다. 글 쓸 때 원칙이 있기는 하다. 일단 글을 잘 쓰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썼던 글 중 엉망인 것들을 보면 하나같이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글이다. 지식과 통찰이 절묘하게 배합된 글을 쓰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인간은 제 수준에 맞는 글만 쓸 수 있다. 그리고 잠을 푹 자야 한다. 잠을 못 자면 글이 나빠진다. 못 자면 여성들 피부가 나빠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해서 마감이 다가오면 일단 어떻게든 잔다. 맑은 글은 맑은 머리에서만 나온다. 마지막은 죄를 짓지 않는 거다. 죄를 지으면 마음이 어수선해서 집중이 안 된다. 나름대로 정리는 했는데 문제는 이게 전혀 대중 강연용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욕심을 자제하고 잠을 잘 자고 죄를 짓지 마세요'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내가 더 궁금하다. 그렇다고 아는 얘기를 써라, 주제에 집중해라같이 하나 마나 한 소리를 지껄이고 싶지는 않다(다들 아는 얘기를 쓴다. 다들 주제에 집중한다. 다만 잘 안 될 뿐이다). 우연히 시작한 글쓰기라 그동안 밑천 안 들이고 장사하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팔아도 항상 남았다. 작년 겨울, 난생처음으로 글을 좀 더 잘 썼으면 하는 욕심이 생겼다. 사람 얼굴이 다 다르다지만 계속 덜어내다 보면 결국 원과 점 두 개, 그리고 선 네 개만 남는다.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미술 하는 사람들이 구상에서 추상으로 옮겨가는 이유와 비슷하다). 팩트를 나열한 <iframe width="250" height="250" src="http://cad.chosun.com/RealMedia/ads/adstream_sx.ads/www.chosun.com/news@x74" frameborder="0" marginwidth="0" marginheight="0" noresize="" scrolling="no"></iframe> 뒤 교훈이나 생각할 거리를 덧붙이는 빤한 글 말고 뭔가 다른 글. 그러면서도 평민들의 파티에 나타난 공작 부인 같은 글. 실패했다. 애초에 없었거나 내가 갖기에는 너무 멀리 있는 글이었다. 높은 데만 바라봤더니 그나마 쓰던 글도 안 써졌다. 원칙 하나가 더 생겼다. 뜻대로 안 되더라도 좌절하거나 슬퍼하지 않기. 아, 역시 강연용은 아니다. 정말 고민된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981 유대인을 해방시킨 고레스 왕에 대한 기사
[레벨:20]정아브라함
30 2016-11-21
페르시아제국 창건자 키루스가 최초의 메시아로 불리게 된 이유 키루스는 고대 페르시아 왕으로 인류 최초의 제국을 건설했다. 그가 23개의 나라를 하나의 제국으로 건설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자신이 정복한 나라의 다름을 그대로 존중했기 때문이다. 입력 : 2016.11.21 07:58 [주간조선: 역지사지의 중요성]   문명을 구성하는 필요조건들이 있다. 가장 요긴한 두 조건은 문자와 도시다. ‘문자’는 인류 문명과 문화의 유전자인 기억을 표시하는 가시적 기호이자, 그 문명을 공유하는 집단이 원활하게 소통하기 위한 도구다. 현재까지 밝혀진 가장 오래된 문자는 기원전 3200년, 지금 이라크 지역 남부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수메르어다. 수메르어는 그림문자로 시작하여 점점 음절문자로 발전해 후에 이곳에 들어와 거주한 아카드인의 문자가 되었다. ‘도시’는 공동의 기억을 향유하는 집단이 문자를 기반으로 행정 기반을 구축한 곳이다. 도시는 그들의 공공의 기호인 문자가 사용되는 추상적인 공간이다. 인류는 기원전 1만2000년경 농업을 발견하여 사냥채집경제에서 농업정착경제로 급격히 재편되었다. 맨 처음 농업이 발견되어 실행된 장소는 서쪽으로는 이집트에서 시작해 이스라엘, 시리아, 터키, 이라크를 거쳐 동쪽으로 이란까지 이르는 지역이다. 학자들은 이 지역이 초승달처럼 생겨 ‘비옥한 초승달(Fertile Crescent)’이라고 불렀다. 위대한 두 오리엔트문명인 수메르문명은 기원전 3200년부터, 이집트문명은 기원전 3100년부터 등장하였다. 두 문명은 기원전 6세기경 몰락하고 그 유산을 그리스를 중심으로 등장한 아테네문명으로 넘긴다. 인류 문명의 중심지가 고대 오리엔트에서 그리스로 넘어가는 중요한 시점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페르시아 제국이 있던 이란 페르세폴리스. /민음사 고대 오리엔트문명이 그리스로 넘어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신과 종교를 기반으로 쌓아올린 문화가 인간과 예술을 기반으로 구축될 서양으로 이전하는 과정에 등장한 제국이 있었다. 기원전 6세기, 오늘날 이란에 등장한 페르시아제국이다. 페르시아제국은 동서양의 문명을 잇는 가교문명이자 인류가 최초로 이룬 제국이다. 동쪽으로는 인도와 간다라, 북쪽으로 스키타이, 서쪽으로는 터키와 이오니아, 마케도니아, 남쪽으론 이집트와 누비아까지,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제국을 형성하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 키루스 고대 페르시아 왕 키루스는 기원전 6세기 인류 최초로 제국을 만들었다. 그가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종교, 이념, 인종, 역사가 다른 23개 나라를 어떻게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통일할 수 있었을까. 영국 역사학자 찰스 프리먼은 키루스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키루스가 이룩한 업적이 알렉산더 대왕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20년에 아케메네스 왕조(페르시아 왕조)를 파괴하였지만 자신이 정복한 지역에 안정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이미지 크게보기 페르시아제국의 창건자 키루스. 키루스가 이룩한 업적이 알렉산더 대왕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20년에 아케메네스 왕조(페르시아 왕조)를 파괴하였지만 자신이 정복한 지역에 안정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역사학자 찰스 프리먼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토머스 제퍼슨, 벤저민 프랭클린, 이스라엘 독립의 주역인 다비드 벤-구리온, 그리고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인 피터 드러커도 키루스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로 뽑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더욱 더 아이러니한 사실은 페르시아와 전쟁 중에 있었던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크세노폰이 ‘키루스 교육기’에서 “키루스는 고대 그리스인이 흠모하고 배워야 할 이상적인 리더”로 소개했다는 점이다. 거대한 오리엔트문명이 무너지고 페르시아제국의 시작을 알리는 그림이 있다.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가 1635년에 그린 유화 ‘벨사살의 연회’다. 이 그림은 현재 영국 ‘내셔널갤러리’에 소장 중이다. 크기가 167.6×209.2㎝나 되는 대형화다. 렘브란트는 구약성서 ‘다니엘서’ 5장에 등장하는 내용에 영감을 받아 ‘벨사살의 연회’를 그렸다. 벨사살은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을 함락한 바빌로니아 왕 네부카드네자르의 아들이다. 벨사살 왕은 예루살렘에서 약탈한 성전 그릇과 잔을 자신들이 신하들을 위해 개최한 술잔치 용기로 사용하였다. 렘브란트는 이들이 흥겹게 잔치를 벌이고 있는 동안 신의 손이 공중에 나타나 벽에 글자를 쓴 순간을 포착하였다. 이 글자는 히브리어지만 언어는 아람어다. 아람어는 오늘날 영어처럼 당시 고대 근동의 국제공용어로 쓰였다. 페르시아제국도 외교 언어로 차용하였다. 렘브란트는 친구이자 랍비인 므나세 벤 이스라엘로부터 히브리어 문자를 배웠다. 아람어를 비롯하여 셈족어는 대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나, 이 그림에서 렘브란트는 아람어를 왼쪽에서 시작하지만, 위에서 아래로 썼다. 그는 비문에서 두 군데 실수를 범했다. 첫째 줄 맨 끝 글자는 ‘사멕(S)’이어야 하는데, 실수로 비슷한 글자인 ‘멤(M)’으로 적었다. 그리고 신의 손과 연결된 글자를 ‘눈(N)’으로 써야 하는데 ‘자인(Z)’으로 잘못 그리는 실수를 범했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아람어 글씨는 오랜 수련을 한 흔적이 보인다. 이미지 크게보기 렘브란트의 그림 '벨사사의 연회'. 바빌론이 페르시아 키루스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는 신의 계시를 묘사했다. 이 아람어 문장을 영어로 옮기면 ‘MENE, MENE, TEKEL, UPHARSIN’이다. 이 문장을 번역하자면 ‘(신이 바빌론의 운명을 정했다.) 계산되어, 계산되어, 저울질하여, 나뉘었다’이다. ‘다니엘서’는 이 말뜻을 ‘신이 바빌론의 마지막을 계산하였고, 저울에 올려 보아 결함이 발견돼서, 나라를 나누어 메대와 페르시아에 줄 것이다’로 풀이한다. 벨사살 왕은 아람어에 정통한 바빌로니아 사제들에게 해석을 요구하였지만 아무도 읽을 수 없었다. 렘브란트는 그들이 해석하지 못했던 이유를 글자 배열로 설명한다. 즉 좌우 배열인 아람어 문자를 신이 상하 배열로 나타냄으로써 바빌로니아 학자들이 해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글을 다니엘만 해독할 수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바로 그날 밤, 페르시아 왕 키루스가 바빌론을 정복한다. ‘키루스 원통비문’의 충격적 내용 키루스의 바빌론 정복 내용을 자세히 기록한 유물이 있다. ‘키루스 원통비문’이다. 키루스 원통비문은 쐐기문자로 기록되었다. 현재 영국 런던의 영국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기원전 539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는 바빌로니아제국의 수도인 바빌론을 함락시킨다. 바빌론 함락은 오리엔트문명이 서양문명으로 옮겨가는 시발점이다. 고대 페르시아인은 스스로를 ‘아리아인(aryan)’이라고 불렀다. ‘아리아’는 원래 문화·종교적 용어로 ‘하늘의 뜻을 알고 그 길을 묵묵히 수행하는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숭고함’이다. 스스로를 아리아인으로 지칭한 민족은 고대 인도인과 이란인이다. 이들은 원래 기원전 4000년경부터 러시아 남부에 거주하던 한 민족이었다. 이들은 기원전 2000년경 남쪽으로 내려오다 한 갈래는 인도로, 다른 갈래는 이란으로 내려가 정착하였다. ‘이란(Iran)’이란 용어도 어원적으로 ‘아리안’과 같다. 고대 페르시아인은 기원전 539년에 바빌로니아제국을, 기원전 525년에 고대 이집트를 정복하여 오리엔트를 통일한다. 이들은 원래 오리엔트에 거주하던 민족이 아니라 인도·유럽인이었다.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은 오늘날 이라크의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위치한다. 키루스는 바빌론을 점령함으로써 그 도시뿐만 아니라 바빌로니아가 점령한 모든 지역인 아시리아,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미지 크게보기 '키루스의 원통비문'을 발굴한 고고학자 호르무즈드 라삼. 고고학자 호르무즈드 라삼(Hormuzd Rassam)은 오스만제국이 위치했던 모술 출신이었다. 그는 20살 때부터 모술에서 아시리아 유물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850년 영국박물관 출신 고고학자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를 만나 본격적으로 고고학 발굴을 시작하였다. 라삼은 레이어드의 도움으로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본격적으로 수학하였다. 1877년 레이어드는 오스만제국의 영국대사가 되어, 바빌론 발굴을 라삼에게 일임한다. 라삼은 1879년 3월 바빌론의 신전인 에사길라의 ‘정초매장물(定礎埋藏物)’에 놓여 있는 ‘키루스 원통비문’을 발견하였다. ‘정초매장물’이란 신전과 궁전 등 기념물적인 건물을 짓거나 수리할 때, 그 사실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 시공주가 건물의 기초 부분에 놓은 유물이다. ‘키루스 원통비문’은 길이가 22.5㎝, 원통 지름이 10㎝인 가운데가 부풀어 오른 배럴 모양의 진흙 비문이다. 이 비문은 기원전 539년 키루스의 바빌론 점령을 기술하고 있지만, 제작 연대는 불분명하다. 키루스가 바빌론을 점령하고 난 뒤 바빌론과 에사길라 신전을 재건하면서 정초매장물로 매장해 놓았다. 여기에 기록된 쐐기문자는 아카드어다. 나중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이 자신의 공적을 새겨놓기 위해 고대 페르시아 문자를 제작한 연대는 기원전 521년이다. 키루스는 다리우스 이전, 당시 오리엔트의 전통적 학문 문자인 바빌로니아의 쐐기문자로 원통비문을 기록하였다. ‘키루스 원통비문’은 모두 45행,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뉜다. 1)1~11행: 바빌로니아의 벨사살 왕에 대한 비난 2)11~19행: 바빌론 신 마르두크가 키루스를 선택함 3)20~24행: 키루스의 명칭과 족보, 그리고 평화로운 바빌론 입성 4)25~34행: 바빌론 재건을 명령함 5)35~37행: 키루스와 그의 아들 캠비세스를 대신하여 마르두크 신에게 기원 6)38~45행: 구체적인 바빌론 재건 내용 등이다. 적대국의 왕을 선택한 신 필자는 ‘키루스 원통비문’의 내용을 아카드어에서 한국어로 처음 번역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1~11a행은 바빌로니아의 벨사살 왕에 대한 비난이고, 11b~19행에서는 마르두크신이 키루스를 선택한다. 바빌로니아신이 적대국인 페르시아제국의 왕인 키루스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키루스 원통비문’은 바빌론의 왕 벨사살이나 나보니두스를 바빌론 사람들의 삶을 힘들게 만들고 그들의 신앙을 황폐하게 만든 악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히려 정복자인 키루스를 해방자 혹은 구원자로 묘사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특히 바빌론의 주신인 마르두크신이 키루스를 통치자로 선택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신전을 재건축했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바빌로니아 쐐기문자로 기록된 '키루스 원통비문'. 구약성서에도 등장하는 원통비문의 내용 이 내용은 바빌론을 점령한 페르시아인들의 의도적 프로파간다인가 아니면 역사적 진실인가. 키루스는 자신이 점령한 나라 국민의 안녕과 인권을 보장한 통치자인가. 만일 유사한 내용을 지닌 문헌이 다른 문명권에서도 발견된다면, ‘키루스 원통비문’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 당시 기록된 유대인의 문헌에서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발견된다. 구약성서 ‘에스라서’ 1장 1~4행이 바로 그런 내용이다. 키루스 원통비문의 1~11a행은 벨사살 왕에 대한 비난이 11b~19행은 마르두크신이 키루스를 선택한 내용이 담겨 있어 바빌로니아신이 적대국인 페르시아제국의 왕인 키루스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충격적 위 내용은 ‘키루스 칙령’이라고 부른다. 학자들은 이 칙령이 기원전 522년에 내려졌다고 추정한다. ‘키루스 원통비문’과 내용이 유사하다. 바빌로니아제국은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을 함락해 그 주민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왔다. 키루스가 539년 바빌론을 탈환하고 그곳에 있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하였다. 그는 다시 이 칙령을 내려, 바빌로니아 왕 네부카드네자르가 파괴하였던 예루살렘을 재건하도록 칙령을 내린다. 키루스는 페르시아제국의 보물창고가 있는 에크바타나에서 자신들의 자금으로 예루살렘을 재건하도록 독려하였다. 유대인의 키루스 평가는 충격적이다. 구약성서 ‘이사야서’는 3명의 저자가 서로 다른 시기에 저술한 내용이다. ‘이사야서’ 40~55장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온 저자가 이사야의 이름으로 저술한 내용이다. ‘이사야서’ 45장 1행에 키루스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2행 이후에 신이 왜 키루스를 선택했는지 장황하게 설명한다. 이 글의 저자는 키루스를 ‘기름 부어 세우신 이’로 부른다. ‘기름 부어 세우신 이’를 히브리 원어로 바꾸면 ‘메시아(Meshiah)’다. 키루스는 바빌론에 유배 중인 유대인들을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보물창고를 동원하여 예루살렘을 재건하였다. 만일 키루스의 칙령이 없었다면, 유대교도 그리스도교도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한 무명 유대인이 키루스를 ‘메시아’, 즉 구원자로 부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키루스의 장점 ‘엔노이아’ 키루스는 자신이 정복한 백성들의 인권을 보장하고 그들의 삶을 개선한,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문을 만든 리더 인간은 자신의 자취를 남기기 위해서, 진화생물학자의 용어를 빌리자면,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물건들을 남긴다. 이런 물건들 중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인류에 보편적이며 혁신을 유발하는 탁월한 유물들이 있다. 인간은 조용히 사라지지만, 유물들은 생존하여 시대에 따라서 자신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을 제공한다. 아카드어로 기록된 ‘키루스 원통비문’과 히브리어로 기록된 ‘에스라서’는 왜 키루스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는지 알려준다. 키루스는 자신이 정복한 나라의 다른 관습, 민족, 종교, 신앙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였다. 키루스가 창건한 페르시아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이 등장하기 전까지 200년 동안 톨레랑스의 정신을 넘어 역지사지를 제국의 근간으로 삼아 안정된 제국의 틀을 놓았다. 바빌론에 유배 중이었던 유대인 예언자는 키루스를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로 칭하였다. 실제 키루스는 바빌로니아제국이 멸망할 때 바빌론 백성들의 안녕과 종교를 보존하고 장려하였다. 유대 문헌 ‘이사야서’와 바빌로니아 문헌 ‘키루스 원통비문’에서 피정복자들은 자신들의 궁궐과 신전이 키루스의 명령에 따라 페르시아제국의 재화로 재건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위대한 그리스 역사가이며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세노폰도 ‘키루스 교육기’라는 책에서 가장 이상적인 왕의 모습을 그리스가 아닌 페르시아제국의 창건자인 키루스에서 찾았다. 키루스는 자신의 철학만이 옳다고 생각한 독선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처지를 나의 처지로 전환하여 깊이 성찰하였다고 전해진다.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장점을 고대 그리스어로 ‘엔노이아(ennoia)’라고 말했다. 엔노이아는 ‘자신의 상식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처지를 깊이 묵상하고 헤아리는 능력’이다. 키루스는 자신의 역지사지의 깨달음을 실천으로 옮겼다. 그는 최초의 세계 제국을 창건한 제왕으로서만 기억되는 인물이 아니다. 자신이 정복한 백성들의 인권을 보장하고 그들의 삶을 개선한,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문을 만든 리더로 기억된다. 키루스는 자신을 넘어선 위대한 인간, 위대한 리더가 되려는 우리에게 묻는다.
980 질병과 고통의 은혜
[레벨:20]정아브라함
32 2016-11-24
나! 참 오래 살 것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놀란다. "권 신부, 아직도 살아있어?" 하고 놀라 묻는 것만 같다. 무슨 소문들이 얼마나 퍼졌기에…. 그도 그럴 것이 5년 전 대장을 잘라내고 그 후유증으로 장이 협착돼 사경을 헤맸다. 겨우 좀 살 만하다 했더니 이번엔 후두암. 33번의 방사선치료가 끝날 즈음 이젠 나아지나 했는데 이번에는 암이 기관지로 옮아갔다. 목숨이 오가는데 혼자 온 나를 보고 "아니, 혼자 왔어요?" 하고 의사가 화를 낸다. 33번의 방사선치료로 목 연골이 약해져 더 이상 방사선치료는 불가능하니 다량의 항암제를 투여하고 그 기관 주위를 냉동시켜보자고 한다. 내가 무엇을 아는가. 그러자고 동의서에 서명했다. 그때 그 심정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링거로 다량의 물을 투여했다. 이제 아침이 되면 준비된 주사 구멍으로 항암제가 투여될 것이다. 그러면 이 땅에서의 나의 삶은 끝이다. 그 후 나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갈 것이며 내 일상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오랜 병원 생활 덕택에 익히 잘 아는 터다. 아, 이 밤이 마지막이다. 인간이라는 종(種)으로 태어나 인간적인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삶은 이 밤이 마지막이다. 아무도 걷지 않는 후미진 병원 뒤뜰을 홀로 걸었다. 내 생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며, 아니 십중팔구 그럴 것이라 생각하며 기도했다. 차분히 조용히 묵주 알을 굴렸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하나도, 정말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서럽지도 원망스럽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기쁨이 샘솟고 죽음까지도 그냥 스쳐지나가는 한 사건으로 다가올 뿐 전혀 생소하지 않았다. 묵주 5단을 마칠 무렵 나는 노래하고 있었다. "찬미하라. 찬양하라. 기뻐 노래하며 춤추라." 그 밤! 마냥 행복한 밤이었다. "그래 암! 너로 인해 난 많이 아프리라. 그러나 너로 인해 나의 이 행복마저 빼앗기진 않으리라. 암아! 이 몹쓸 놈의 암아! 사실 너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나? 이 작은 심장의 박동을 멈추게 하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니? 그래 어쩔 수 있나. 같이 살아야지. 이 몸뚱이 살아있는 그날까지는 같이 사는 수밖에. 오라 어서 와."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20여 년 전 꼭 이맘때 익산의 한 나환우 정착촌에서 살 때다. 성탄 전 4주 대림 피정이 끝나는 날 미사 강론을 시작하며 나는 물었다. "여러분 중에 혹 자신의 병을 하느님이 주신 은총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분 계십니까?" 그 순간, 나는 그때 성당의 분위기를 평생 잊을 수 없다. 얼마나 싸늘하고 적막하고 엄숙했던지. 잠깐의 그 적막이 나에게는 얼마나 길었던지.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적막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지그시 눈을 감은 채―사실 그녀는 시력을 잃었다―혼잣말처럼, 그러나 차분히 고백했다. "네, 이 몹쓸 병은 나에게 큰 은총이지요." 그러자 "맞아요. 은총이죠" "은총이죠"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날 나는 그 미사를 어떻게 마쳤는지 모른다. 솟아오르는 눈물을 참아가며 간신히 그 미사를 마쳤다. 성당을 나오는데 한 자매가 수줍은 듯 다가와 속삭였다. "신부님, 이 몹쓸 병은 저에게 큰 은총이죠. 이 몹쓸 병이 아니었으면 나, 이 좋으신 하느님을 어떻게 알았겠어요. 정말 은총이죠. 은총이에요." 핏기 없는 피부에 그냥 그려놓은 눈썹이 무척 고왔다. 그 고운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늦가을 파아란 하늘, 벌거벗은 감나무에 매달린 빠알간 홍시, 너무도 아름답다. 그 많던 감잎이 그냥 바닥에 다 누웠다. 자기 할 일을 다 마친 것이다. 잎사귀가 다 죽었다고? 아니다. 한 잎 예외 없이 저 빨간 홍시 속에 다 농축돼 살아있다. 하여 때가 되면 다시 산다. 황금빛 들녘이 빈 들이 되었다. 나락이 다 죽었다고? 천만에 한 톨 볍씨 되어 살아 숨 쉬고 있다. 때가 되면 다시 산다. 때가 되어 그 모습이 바뀔 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나이가 들고 병이 들었으니 나도 곧 죽는다고? 아니다. 암도 나병도 심지어 죽음도 앗아갈 수 없는 생명―새로운 생명―이 내 안에 이토록 힘차게 자라고 있는데 죽어 사라지다니, 틀린 얘기다. 아직 몰라서 하는 소리다. 가난, 실패, 암, 나병 등 우리 인간을 절망하게 하는 이 지독한 악마들. 그런데 이 악마들마저도 끌어안고 입 맞추면 곧 아름답고 은혜로운 천사가 되어 이 죄 많 <iframe noResize height="250" marginheight="0" src="http://cad.chosun.com/RealMedia/ads/adstream_sx.ads/www.chosun.com/news@x74" frameborder="0" width="250" marginwidth="0" scrolling="no"></iframe>은 나를 새로운 세계―새로운 생명―로 인도한다. 바스락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 참 정겹다.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좋은가. 얼마나 행복한가. 낡은 나 허물 벗어 새로운 나 되니, 드디어 보이는 이 새로운 세계, 그 진리 안에 머무름. 이것 말고 어디에 행복이 있다고, 지위·신분·재산 그런 것들이 도대체 무엇이라고 저 난리들인지.
979 no image 엔테베 작전
[레벨:20]정아브라함
39 2016-12-06
목차 에어프랑스기 피랍되다 아프리카로 향한 피랍기 군사작전의 가능성 엔테베는 중립 지역이 아닌 적지 적의 심리를 이용한 기습작전의 입안 완성되지 못한 작계, 그리고 협상 시한 구출부대의 규모를 논하다 작전의 세부 공격제대의 임무 지원ㆍ항공제대의 임무 속도전을 수행하라 아프리카 대륙으로 출발하다 야간의 착륙 밤의 정적을 가른 총성 구청사로 돌입하다 구청사의 혈전 대혼란의 현장 우간다군을 제압하라 발빠른 퇴출 구출부대의 퇴출까지 90분 에어프랑스기 피랍되다 1976년 6월 27일 12시 30분경 이스라엘의 로드(Lod) 공항을 떠나 파리로 향하던 에어프랑스 소속 A300 에어버스 여객기 AF-139편이 중간 기착지인 아테네에 내렸다. 아테네 공항의 보안은 허술한 편이어서 금속탐지기에 모니터링 요원도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56명의 승객을 태운 AF-137편은 이륙 3분 만에 피랍되었다. 승객들 가운데 테러범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에어프랑스 소속 AF-139편은 중간 기착지인 아테네에서 이륙하자마자 테러범에게 납치되었다. 보안이 허술한 아테네 공항은 테러범이 항공기에 잠입하는 데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이 여객기에는 254명의 승객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그중 3분의 1이 이스라엘 국민이었다. 여객기를 납치한 테러범은 모두 4명으로, 2명은 혁명분파 소속의 독일 테러범이었고 2명은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PFLP) 소속의 아랍 테러범이었다. 특히 독일인은 남녀 커플로, 남자는 윌프리드 보세(Wilfried Böse)라는 유명한 청부 테러범이었다. 여객기를 납치한 4명의 테러범. (좌측 상단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자엘 나지 알 아잠(Jael Naji Al Azam), 파예즈 압둘라힘 자베르(Fayez Abdur-Rahim Jaber), 브리기테 쿨만(Brigitte Kuhlmann, 여자 테러범), 윌프리드 보세(Wilfried Böse). 이스라엘 정부는 여객기 피랍을 예상하고 최고 정예부대인 사이렛 매트칼(Sayeret Matkal)에 출동대기를 명령했다. 사이렛 매트칼은 부대 명칭 그대로 말하자면 합동참모본부 직할 ‘정찰부대’이지만 실제로는 대테러부대다. 테러범들은 종종 이스라엘로 여객기를 몰고 와서 정치적인 요구를 하는 습성이 있었다. 1972년 아랍 테러범들은 벨기에의 사베나(Sabena) 항공 여객기를 납치하여 로드 공항으로 몰고 와서는 국제 언론 앞에서 요구사항을 열거한 바 있다. 똑같은 상황을 예상한 이스라엘은 사이렛 매트칼을 로드 공항에 대기시키고 인질구출작전을 계획했다. 그러나 피랍기는 이스라엘로 향하지 않고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리비아의 벵가지(Benghazi)에 기착했다. 사이렛 매트칼은 다시 기지로 돌아가 추후 명령을 기다렸다. 벵가지에서 7시간 반을 대기하던 피랍기는 재급유를 받고 이륙하여 동쪽으로 향했다. 부대는 다시 출동대기 상태에 들어갔으며 피랍기가 로드 공항에 내리는 즉시 구출작전을 실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자정이 되자 놀랍게도 피랍기가 아프리카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3시 피랍기는 우간다의 엔테베(Entebbe) 공항에 내렸다. 여기서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 테러범 3명이 납치범들에 합류했다. 아프리카로 향한 피랍기 아테네를 이륙한 피랍기는 리비아의 벵가지를 거쳐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착륙했다. 화살표 실선은 피랍기의 이동 경로이고 점선은 이스라엘 구출부대의 비행계획도다. 승객들은 피랍된 에어버스 여객기가 엔테베 공항에 착륙하고도 무려 9시간이나 더 기내에 억류되었다. 그리고 6월 28일 월요일 정오가 되자 테러범들은 승객들을 공항 구청사의 승객 로비에 감금했다. 그날 늦은 오후 우간다의 대통령인 이디 아민(Idi Amin)은 승객들에게 자신이 직접 테러범들과 인질협상을 하고 있으며, 우간다 병사들이 승객의 안전을 보호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아민은 이스라엘 정부가 테러범과 협상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다음날인 29일 15시 30분경 ‘페루인’이라고 불리는 팔레스타인계 아랍인의 지휘하에 움직이는 테러범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발표했다. 서독, 프랑스, 스위스, 케냐, 그리고 이스라엘에 투옥된 테러범 53명의 석방을 요구했던 것이다. 만약 이들이 석방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 시각으로 7월 1일 14시에 피랍 승객들을 살해하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런 발표가 있자 당시 이스라엘 수상이던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은 각료들을 모아 대안을 검토했다. 이스라엘 국방군 합참의장인 모타 구르(Motta Gur) 장군은 라빈 수상과의 회의에 앞서 군사적 작전을 검토할 것을 자신의 참모들에게 지시했다. 그런데 구르의 참모는 아니지만 이스라엘 공군 유일의 C-130 비행대대장이던 요슈아 샤니(Joshua Shani) 중령은 엔테베에 피랍기가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이미 대략적인 비행계획을 짜고 있었다. 병력과 장비를 싣고 엔테베까지 갈 수 있는 기체는 C-130이 유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공군참모총장이 작전에 관해 물었을 때 모든 문제에 대해 유창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군사작전의 가능성 한편 구르 장군은 라빈 수상에게 군사작전의 가능성을 보고했지만 당시로서는 대수롭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당시로서는 이디 아민이 피랍사건의 중재자로 공정히 활동하는 듯 보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내각은 이 독재자와의 협상을 통해 인질을 석방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또한 승객의 3분의 2가 이스라엘 국민이 아니었으며 항공기도 이스라엘 국적기가 아니라 프랑스 국적기였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가 협상의 주도권을 갖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서 우간다는 무려 4,000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져 있었다. 애당초 이런 거리를 극복하고 인질구출작전을 실행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한편 같은 날 저녁 합참부의장인 예쿠텔 아담(Yekutiel Adam) 장군은 사이렛 매트칼의 이전 부대장이었던 에후드 바라크(Ehud Barak) 대령을 호출했다. 그는 바라크에게 군사작전의 가능성을 특공대원들과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비공식적으로’ 토의할 것을 명했다. 이에 따라 바라크는 밤새 특수부대원들과 토의를 마치고 다음날 아침 최초의 인질구출방안을 제시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특수부대가 고무보트를 가지고 엔테베 공항 인근의 빅토리아 호수로 강하하여 강을 건너서 공항으로 잠입한 뒤, 인질을 구출하고 우간다군에게 투항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은 이전까지 한 번도 고무보트로 하드덕(Hard Duck)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그중 가장 작은 문제일 정도로 계획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서는 이 계획이 가장 최선의 대안이라고 생각되었다. 엔테베는 중립 지역이 아닌 적지 작전에 필수 요소는 정보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정보가 너무 적었다. 이스라엘과 우간다는 원래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이 첨단 제트기의 제공을 거부하자 이디 아민은 1972년에 이스라엘과 단교를 선언했다. 정식 외교 채널조차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정보를 수집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우간다의 무관으로 파견된 바 있던 이스라엘군의 바루크 바레프(Baruch Bar-Lev) 준장이 이디 아민과 직접 통화를 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바루크 바레프 준장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민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팔레스타인 테러범들에게 동조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은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태가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해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인질을 구출하여 우간다군에게 투항한다는 계획 또한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터였다. 그럼에도 강하작전 준비는 계속되었다. C-130 대대장인 샤니 중령은 고무보트 강하 시험을 실시했다. 처음 시험은 실패하여 고무보트가 터졌지만, 이후 문제를 해결하고 하드덕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한편 엔테베에서는 유대인이 아닌 승객 47명이 석방되었다. 이들이 프랑스 대사관을 거쳐 파리로 돌아가자 정보당국은 피랍 상황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특히 이디 아민이 테러범에게 협력하고 있을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우려는 석방 인질들의 증언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강하작전의 가능성을 확인한 목요일 저녁, 전혀 다른 구출작전을 새롭게 입안해야만 했다. 적진에 침투하여 인질을 구해오는 어려운 작전이었다.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은 인질협상의 중재자를 자처했지만, 실은 팔레스타인 테러범을 지원하고 있었다. 사진은 이디 아민(좌)과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의 다정한 모습이다. 적의 심리를 이용한 기습작전의 입안 특수전의 핵심 요소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보통 ‘기습’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정답이 아니다. ‘기습’이란 적이 대비되어 있지 않을 때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수전에서 적은 대개 기습을 예상하고 대기하고 있다. 특수부대가 타격할 주요 목표에는 언제나 우수한 경계 병력이 있고, 인질구출작전에는 특수부대의 기습을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는 테러범이 있다. 특수부대에게 ‘적이 대비되어 있지 않을 때 공격’하는 사치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다. 특수부대는 상대적 전력 우위에 승부를 거는 부대다. 실제적으로 병력이 적더라도 ‘기습, 속도, 그리고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적을 ‘기만’하고 ‘압도’하여 상대적 전력 우위를 통해 임무를 완수한다. 즉 특수전의 핵심 요소는 ‘상대적 전력 우위’에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군은 엉뚱한 곳에서 이런 ‘상대적 전력 우위’를 찾았다. 새로운 구출작전을 입안하는 가운데 다소 ‘엉뚱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C-130 수송기를 곧바로 엔테베 공항에 착륙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훌륭한 의견이었다. 당시 이스라엘군이 우간다까지 직접 날아가서 작전을 수행하는 무모한 짓을 할 거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엔테베 공항에 직접 착륙하는 것은 최고의 기습효과를 가져올 것이 틀림없었다. 적의 심리를 활용한 기만이자 기습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야간에 조명 없이 C-130을 착륙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스라엘 공군은 이전에 한 번도 블랙아웃 랜딩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실행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프로토타입 야시경을 보유했던 이스라엘 공군은 시나이(Sinai) 사막에서 야간 착륙 시험을 성공하면서 구출작전이 가능함을 입증했다. 이스라엘군은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사상 최대의 구출작전을 계획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공군에서 이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항공기는 C-130뿐이었다. 완성되지 못한 작계, 그리고 협상 시한 이 작전계획은 매우 단순한 것으로, C-130 4대를 엔테베 공항에 착륙시키는 것이었다. 엔테베 공항은 최근에 개수가 이루어져 구청사와 신청사로 나뉘어 있었는데 인질들이 있는 곳은 구청사 쪽이었다. C-130 1번기가 구청사에 착륙하면, 사이렛 매트칼이 인질 구출작전을 수행한다. 1번기에 사이렛 매트칼과 함께 동승한 공수부대원은 신청사를 점거한다. 2번기에는 탑승하는 장갑차와 특수부대 및 공수부대는 사이렛 매트칼을 증원하여 화력지원 임무를 맡는다. 3ㆍ4번기에 탑승한 예비 병력에게는 구출한 인질들을 안전하게 탑승시키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구출작전의 총지휘관인 댄 숌론(Dan Shomron) 준장은 구출작전 자체에 대해서는 대체로 만족했으나, 전력 구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했다. 구출부대는 테러범뿐만 아니라 우간다군과도 교전을 벌여야 했기 때문에 전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렇게 작전계획이 아직 구체화되지 못한 사이에 협상 시한이 다가왔다. 구르 합참의장이 라빈 수상에게 아직 군사작전을 실행할 수 없는 상태라고 보고하자 이스라엘 정부는 긴급회의를 열고 테러범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로 결정했다. 여태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라빈 정부는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해 협상을 벌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테러범을 풀어줄 용의까지 있었다. 이때까지 무려 206명의 인질이 붙잡혀 있었으며, 그중 절반 이상이 이스라엘 국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외교적 부담이 큰 탓도 있었다. 한편 이런 이스라엘의 결정을 받아들인 테러범들은 인질 처형 시기를 7월 4일 일요일로 연장해주었다. 또한 테레범은 100명의 인질을 추가로 풀어주었다. 이제 엔테베 공항에는 이스라엘 국민이거나 이스라엘 국적이 아닌 유대인들, 그리고 에어프랑스 승무원 12명까지 포함해 총 106명의 인질이 남게 되었다. 이로써 유대인을 공격하겠다는 테러범의 의도는 명백해졌다. 이는 오히려 여론에 홀로코스트의 악몽을 상기시키면서 이스라엘 정부에게 항전 의지를 심어주어 군사작전을 결심하도록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스라엘 합참의장인 구르 장군(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은 인질을 구출하기 위한 군사작전에 회의적 이었다. 피랍된 지 3일이 지나도록 뚜렷한 정보를 수집하지 못했지만, 구출부대장 숌 론 장군(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은 제한된 정보로 최선의 작전을 구상했다. 구출부대의 규모를 논하다 한편 당시 국방장관이던 시몬 페레스(Shimon Peres)는 참모들을 불러 의견을 물으며 구출작전의 가능성을 심도 깊게 논의했다. 구르 합참의장은 여전히 단 이틀간의 준비로는 이런 대규모 구출작전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작전은 사상자 발생 가능성이 높았고, 이스라엘군으로서는 마알랏(Ma’a lot) 초등학교 참사(1974년 5월 15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테러범 3명이 마알랏의 한 초등학교에 난입하여 105명의 학생과 교사를 인질로 잡은 사건. 진압작전에서 25명의 학생이 사망하고 56명이 부상을 입었음.) 이후에 더 이상 군사작전으로 인한 재앙을 감당할 처지가 아니었다. 또한 주요 목표 지점인 엔테베 공항 구청사에 대한 정보가 너무 피상적인 점도 문제였다. 열띤 토의 끝에 페레스 장관은 곧바로 세부 작전의 입안과 훈련 실시를 지시했고, 숌론 장군을 작전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참모들은 작전은 언제라도 취소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명확한 방향이 보이지 않던 구출작전은 사이렛 매트칼의 부대장 요니 네타냐후 중령이 작전의 세부를 수립하면서 방향을 잡았다. 요니는 단 이틀 만에 구출작전의 모든 상황을 세세히 재현하면서 구출작전이 실현 가능함을 참모부에게 설득했다. 회의가 끝난 직후 숌론 장군은 사이렛 매트칼 부대장 요나단 ‘요니’ 네타냐후(Jonathan ‘Yoni’ Netanyahu)를 호출했다. 숌론이 제시한 작전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사이렛 매트칼이 구청사와 인근 지역을 점령하는 동안 공수부대와 골라니(Golani) 부대가 신청사와 관제탑을 제압하고 인질구출부대의 증원 및 호위 병력으로 대기한다는 것이었다. 숌론은 대규모 병력으로 전력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요니의 입장은 달랐다. 더욱 작고 기동성 있는 부대의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숌론의 작계는 너무 광대해서 실행에 옮기는 데 제한 사항이 많으므로, 병력의 규모를 줄여 더욱 유연성 있는 작전을 실행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요니의 주장이었다. 결국 숌론은 부대 구조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대신 요니가 작전의 세부를 구상하도록 전체적인 기본 방안만을 제시해주었다. 요니는 밤새 작전의 세부를 검토했다. 작전의 세부 결국 다음날인 7월 2일 금요일 오전 7시를 기해 숌론은 최종 작전 명령을 하달했다.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 모사드(Mossad)가 석방된 인질들을 조사하면서 인질의 정확한 위치, 우간다군의 배치 현황 등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수집 중이었지만, 이는 그때까지 사이렛 매트칼에게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 이에 따라 작전계획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상태로 입안되었다. 요니가 입안한 부대 편성과 임무는 다음과 같다. 구분 구성부대 및 지휘관 임무 지휘제대 지휘통신부 (지휘 : 댄 숌론 준장) 1. 작전 전반에 대한 지휘통제 2. 통신 총괄 공격제대 사이렛 매트칼 (지휘 : 요니 네타냐후 중령) 1. 구청사 내의 인질구출작전 실시 2. 구출 인질을 C-130까지 호송 지원제대 사이렛 찬하님/사이렛 골라니 (지휘 : 숄 모파즈) 1. 적 증원 병력이 공격제대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차단 2. C-130을 보호하며 지상급유 지원 3. 주기된 우간다군 미그기를 파괴하여 차후 추적을 방지 4. 구출된 인질들이 C-130에 탑승할 때까지 안전하게 보호 항공제대 C-130 비행대대 (지휘 : 요수아 샤니 중령) 1. 구출부대를 엔테베 공항까지 은밀히 수송, 야간 착륙 2. 지상에서 재급유 실시 후 인질 및 병력을 싣고 퇴출 공격제대의 임무 우선 C-130 1번기가 모든 조명을 끈 채로 어두운 활주로에 착륙한다. 이를 위해서 C-130 비행대의 대대장 샤니 중령이 직접 1번기의 조종간을 잡을 예정이었다. 한편 착륙한 1번기가 활주로 북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특수부대 1개 조가 수송기에서 뛰어내려 후속 기체를 위해 지상유도등을 설치한다. 1번기에서 내린 구조대는 우간다군으로 위장하고 구청사로 접근한다. 원래는 사이렛 매트칼이 이디 아민 일행으로 위장하고 구청사로 접근하려고 했었다. 때마침 이디 아민이 아프리카 통일기구(OAU)에서 회담을 마치고 우간다로 돌아올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실로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민이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는 바람에 이 계획은 중지되었고, 대신 우간다군 고위 장성의 방문처럼 위장하기로 했다. 원래 사이렛 매트칼은 이디 아민 일행으로 위장하고 구청사로 접근하려고 했었다. 마침 이디 아민은 아프리카 통일기구에서 회담을 마치고 우간다로 돌아올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실로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민이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는 바람에 이 계획은 중지되었고, 대신 우간다군 고위장성의 방문처럼 위장하기로 했다. 사진은 위장을 위해 사용된 벤츠 승용차를 C-130 수송기에 싣는 모습이다. 이에 따라 35명의 사이렛 매트칼 대원들은 모두 우간다 군복을 입기로 했다. 그러나 대원들은 우간다인처럼 보이기 위해 검은색 위장크림을 칠하지는 않기로 했다. 어차피 야간에 기습하는 작전이므로 우간다군 경계병에게 발각될 위험이 적었고, 얼굴에 검은색 위장크림을 칠할 경우 오히려 내부소탕 시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편 차량으로는 벤츠 승용차 1대, 랜드로버 군용 지프 2대를 선택했다. 랜드로버는 우간다군이 흔히 사용하는 병력수송차량이고, 벤츠는 우간다 장성이 관용차량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구청사에 도착한 부대는 3개 조로 나뉘어 작전 1팀이 3개 출입문을 동시에 파쇄하여 1층으로 진입한 뒤 테러범을 제압하고 인질을 구출한다. 이와 함께 작전 2팀이 구청사 2층으로 올라가 주둔하고 우간다군을 제압한다. 한편 지휘통제반은 청사 외부에서 대기하면서 랜드로버에 탑재된 50구경 기관총으로 위협지대(구청사 위층 및 관제탑)를 제압한다. 요니는 관제탑을 공격 목표에서 제외했다. 관제탑을 공격하려면 인원이 더 필요한 데다가 공격 과정에서 희생자가 나올 확률 또한 높았기 때문이다. 특수전에서는 목표가 집중될수록 소요 인원과 작전 시간이 줄어들고, 그렇게 되면 그만큼 상대적으로 전력 우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작전 명령은 최종 협상 시한 이틀 전에 하달되었다. 따라서 부대원들이 작전을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하루도 못 되었다. 지원ㆍ항공제대의 임무 인질구출부대에 있어 가장 큰 위협은 바로 구청사 200미터 부근에 위치한 우간다군의 기지였다. 여기에는 무려 1,000명의 병력과 함께 미그(MIG) 전투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을 차단하는 임무는 사이렛 매트칼이 아닌 사이렛 찬하님(Sayeret Zanchanim, 공수특전부대)과 사이렛 골라니(Sayeret Golani, ‘골라니’ 보병여단 소속의 정찰대)로 구성된 합동기동부대에게 맡겨졌다. 다수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지원제대에는 M113 장갑차 4대가 포함되었다. 사이렛 매트칼이 인질을 구출하는 동안 사이렛 찬하님은 구청사 인근에 차단선을 구축하여 우간다군의 증원을 막는다. 또한 일부가 우간다 공군의 미그기에 폭탄을 설치하여 적 전투기의 C-130 요격을 사전에 방지한다. 한편 사이렛 골라니는 C-130 근처에 남아 항공기를 보호하고 인질과 구출대의 퇴로를 확보한다. 항공제대는 사실상 가장 어려운 임무를 맡았다. 4,000킬로미터 거리를 급유 없이 침투비행하고, 야간에 조명도 없이 아군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적진 한가운데에 착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련한 지휘관과 조종사들은 그 짧은 시간에도 훈련을 반복하면서 단기간 내에 야간비행기술을 놀랄 만큼 향상시켰다. 이렇게 작전을 준비하는 동안 최종 협상 시한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작전의 실행까지는 채 이틀도 남지 않았다. 속도전을 수행하라 토요일 아침이 되자 대원들은 지정된 시간보다 앞서 부대에 집결했다. 최종 검열을 위해 인질구출계획의 수정과 장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출동 직전까지도 새로운 정보들이 속속 들어왔기 때문이다. 장비 점검이 끝나자 공격부대인 사이렛 매트칼의 지휘관인 요나단 ‘요니’ 네타냐후 중령은, 이 작전의 최대 목표는 인질 구출이지 적의 근거지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시간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30분에서 1시간 안에 인질 구출부터 퇴출까지 완수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는 인질 구출에 직접적인 방해 요소로 작용하는 목표물 이외에는 가급적이면 교전을 피해야 한다. 그리고 인질 구출에 성공하고 나면, 그때는 부수적인 목표물과도 교전한다. 이런 기본적인 방침을 세우고 우발사태 발생 시 행동 요령들을 토의하면서 사이렛 매트칼의 전술 토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11시 30분경 사이렛 매트칼과 공군 수송비행대대를 포함한 구출부대는 합참의 장성들 앞에서 작전계획을 보고했다. 구출부대는 13시 20분 로드 공항에서 출발하여 시나이 반도의 샤름 알셰이크(Sharm al-Sheikh) 항공기지로 향했다. 수송기와 지상 구출부대와의 합동훈련은 아직 실시된 바가 없었고 지휘계통도 조종되고 있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정부는 아직 구출작전의 실시 여부를 결정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예비기를 포함한 5대의 C-130 수송기는 러시아 정보수집선과 이집트 레이더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저공비행으로 사막 위를 날았다. 무더운 사막 위를 저공비행하던 수송기는 심한 난기류까지 만나서 샤름 알셰이크 항공기지에 착륙했을 때에는 모든 대원들이 심한 멀미에 시달렸다. 심지어는 사이렛 매트칼 대원 중 1명은 심한 구토증세로 구출작전에서 제외되기까지 했다. 아프리카 대륙으로 출발하다 15시 30분, 숌론 장군은 구출부대의 출동을 명령했다. 더 이상 출발을 미루었다가는 자정의 공격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라빈 수상이 아직 구출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임무가 취소된다면 부대를 소환하면 그만이었다. 1번기에는 숌론 장군과 지휘부, 요니와 사이렛 매트칼 대원 29명, 사이렛 찬하님 대원 52명, 벤츠 승용차, 랜드로버 2대가 실려 있었다. 2번기에는 지휘부 추가 인원, 사이렛 찬하님 17명, 그리고 장갑차 2대와 숌론의 지휘용 지프 1대, 3번기에는 사이렛 골라니 30명과 장갑차 2대, 그리고 지프 1대, 4번기에는 사이렛 골라니 20명, 의료반 20명, 지상재급유 요원 10명, 그리고 급유펌프가 실려 있었다. 이렇게 잔뜩 병력과 장비를 실은 C-130은 이륙 시부터 제한중량을 초과한 상태였다. 비행은 약 7시간 반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샤름 알셰이크를 이륙한 C-130 편대는 고도 50피트로 초저공비행을 하면서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레이더 감시망을 피해 홍해를 건너 에티오피아에 도달했다. 일단 에티오피아 영공에 접어들자 C-130은 다시 고도를 2만 피트로 올리고 정상적인 비행을 했다. 당시 에티오피아에는 대공수색 레이더가 없었기 때문에 구출부대가 발각될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에서 남남서로 비행을 계속하던 편대는 케냐의 북쪽을 거쳐 우간다로 향했다. 그리고 22시 30분경 드디어 우간다의 빅토리아 호수 인근에 도착했다. 이제 몇 분만 더 가면 엔테베였다. C-130이 엔테베 공항 관제탑과 착륙 중인 브리티시 항공 여객기의 교신 내용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한편 작전의 총괄지휘를 위한 공중사령부도 출동했다. 예쿠텔 아담 합참부의장과 벤야민 펠레드(Benjamin Peled) 공군참모총장은 보잉 707 지휘통제기에 탑승하여 구출부대의 총괄적인 지휘와 이스라엘 본국과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야간의 착륙 계획에 따라 나머지 C-130 수송기 3대는 편대에서 이탈하여 상공에 대기하고, 1번기가 엔테베 공항으로 접근을 시작했다. 숌론 장군과 요니 중령도 조종석에 모여 지상을 향해 C-130이 내려가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C-130은 모든 조명을 끈 채 레이더만으로 고도를 측정하면서 지상으로 향했다. 원래는 야시경을 사용하기로 했었지만 장비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어 레이더 착륙을 감행했다. 베테랑 조종사 샤니 중령의 완벽한 조종하에 기체는 1976년 7월 3일 23시(엔테베 현지 시각으로는 자정)에 엔테베 공항에 착륙했다. 1번기가 23시(현지 시각 자정)를 기하여 착륙을 개시하면서 구출작전이 시작되었다. 기체가 착륙하자 기내는 작전 준비로 바빠졌다. 사이렛 매트칼은 벤츠와 랜드로버의 시동을 켜고 출발할 준비를 했다. 한편 사이렛 찬하님 대원 10명은 착륙한 뒤 정지하기 위해 감속하는 C-130의 사이드 도어로 뛰어내려 활주로에 비상등을 설치했다. 활주로의 끝에 도착한 C-130은 기수를 돌려서 구청사 방향으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C-130의 후방 램프가 열리면서 3대의 차량이 쏟아져 나왔다. 우간다군으로 위장한 사이렛 매트칼 대원들이 드디어 구출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밤의 정적을 가른 총성 29명의 사이렛 매트칼 대원들은 모두 우간다 군복을 입고 있었다. 이들은 벤츠 승용차 1대와 랜드로버 군용 지프 2대에 탑승했다. 라이트를 켠 3대의 차량은 약 70킬로미터 속력으로 달렸다. 라이트를 끄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오히려 끄고 달릴 경우 우간다 경비 병력에게 의심을 살 위험이 있었고, 또 어두운 밤에 헤드라이트를 켜면 강렬한 빛 때문에 눈이 부셔 경비병들이 차량 안의 이스라엘 특수부대원들을 알아보기 힘들 게 분명했다. 약 1분을 달리자 차량 행렬은 구청사로 향하는 차량 전용 도로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길 양쪽에서 우간다군 경비병 2명이 나타났다. 오른쪽 경비병이 벤츠를 향해 정차 명령을 내렸다. 벤츠가 계속 달리자 경비병은 소총을 장전하고 차량을 세우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경비병이 사정권 내에 들어오자 요니는 벤츠의 속도를 줄이고 마치 신분을 증명이라도 할 듯 창문을 내렸다. 뒷좌석에 앉은 요니와 다른 대원은 소음기를 단 베레타(Beretta) M1951 권총을 경비병들에게 발사했다. 그러나 경비병은 쓰러지듯 총알을 피하며 다시 일어섰다. 아무리 숙련된 대테러부대원이라 해도 이동하는 차량에서 좁은 승용차 창문 사이로 움직이는 표적을 맞히는 것은 쉽지 않다. 길가 오른쪽에 있던 경비병은 일어서서 벤츠 앞에 소총을 발사했고, 왼쪽 경비병은 구청사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후방의 두 번째 랜드로버에 탑승한 대원들이 사격에 가세해 경비병들을 모두 사살했다. 그러나 밤의 정적을 가르는 총성으로 인해 이제 기습의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요니는 대원들에게 전속력으로 달릴 것을 지시했다. 청사까지는 겨우 200미터도 남지 않았다. 우간다군으로 위장한 사이렛 매트칼의 기만전술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비록 최초의 교전으로 기습의 효과를 잃기는 했지만, 테러범들은 어둠 속에서 구출부대를 우간다군으로 착각했다. 사진은 우간다 군복과 AK로 무장한 사이렛 매트칼 대원의 모습이다. 구청사로 돌입하다 구청사 쪽으로 다가가면서 요니의 눈앞에는 테러범들과 우간다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누구도 사이렛 매트칼의 차량 행렬에 총격을 가하지 않았다. 구청사의 중앙홀 입구에 차량을 세운다는 원래의 계획과는 달리, 요니는 벤츠와 랜드로버를 구청사 관제탑 아래쪽에 신속히 세웠다. 인질구출부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테러범과 우간다군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요니는 정차와 동시에 대원들에게 건물 소탕을 명령했다. 사이렛 매트칼의 부지휘관인 무키 베처(Muki Betzer) 소령은 자신의 공격제대를 이끌고 구청사 건물로 돌진하면서 건물 밖의 우간다 병사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그러자 테러범들은 달아나면서 외쳤다. “우간다 놈들이 미쳤어! 우리에게 총질하고 있어!” 사이렛 매트칼의 위장작전이 효과가 있음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사이렛 매트칼은 일단 구청사에 도착한 이후 3개 제대로 나뉘었다. 그리고 대원들은 작전계획에 따라 구청사의 진입구에 집결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대원들이 진입을 주저하는 듯 보였다. 요니는 전진하라고 수차례 소리쳤지만 무키는 계속 대기하고 있었다. 시간이 핵심인 구출작전에서 조금이라도 주저하면 그것은 인질의 사망으로 연결된다. 요니는 무키 앞으로 달려 나와 돌격을 지시했다. 실제로 지연된 시간은 15초 정도였지만, 요니에게는 1초가 아까웠던 것이다. 그 순간 도열한 대원들의 뒤에서 총성이 들렸다. 관제탑 뒤의 나무 박스 사이에서 우간다 경비병이 대원들을 향해 총격을 시작한 것이다. 대원들은 곧바로 응사하여 불청객을 제압했다. 그러나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방금 전의 총격에 요니가 쓰러졌던 것이다. “요니 중령이 쓰러졌다!” 대원 하나가 외쳤지만 대원들은 멈출 수가 없었다. 요니는 이미 작전의 준비 단계에서 대원들에게 확고히 지시했다. 자신을 포함하여 누가 쓰러지더라도 개의치 말고 작전을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대원들은 요니를 신경 쓸 여유도 없이 그의 지시대로 3개 제대로 나뉘어 작전을 진행했다. 사이렛 매트칼은 공격제대 2개 및 지휘통제반, 이 3개조로 나뉘어 구청사를 공격했다. 다행히도 엔테베 공항 구청사는 단교 이전에 이스라엘 시공사가 건설한 건물이었기 때문에, 사이렛 매트칼은 구청사의 청사진과 사진 및 동영상 등을 확보해놓고 있었다. 구청사의 혈전 요니의 돌격 명령에 제일 먼저 달려 들어간 것은 아미르 오퍼(Amir Ofer)라는 22살의 젊은 대원이었다. 아미르가 중앙홀의 입구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이 보이자 테러범 1명이 유리창을 뚫고 AK-47 소총을 난사했다. 아미르는 첫 번째 출입문 대신 두 번째 출입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실내 한가운데 인질들이 엎드려 있었다. 또다시 총알이 아미르 쪽으로 날아왔다. 아미르는 누운 자세로 자신을 노리는 테러범을 향해 기관단총을 발사하여 사살했다. 그리고 CQB(근접전투기술)의 기본에 따라 오른쪽 벽을 계속 따라가면서 테러범을 찾았다. 한편 아미르의 뒤를 따라 두 번째로 진입한 암논 펠레드(Amnon Peled)가 그의 왼쪽을 돌면서 실내를 수색했다. 그때 엎드려 있던 인질들 사이에서 2명의 남녀가 AK 소총을 들고 아미르를 겨누면서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원래 이들은 창밖에서 이동하고 있는 구출부대원들을 조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달려 들어온 아미르에 놀라 반사적으로 조준 방향을 바꾼 것이었다. 펠레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테러범 2명을 탄창 하나로 해치웠다. 바로 이때 무키 소령과 아모스 고렌(Amos Goren)이라는 대원이 동시에 중앙홀로 들어왔다. 기둥 뒤에 숨어 있던 테러범 한 명이 아모스를 겨누고 AK 소총을 발사했다. 이와 동시에 아모스도 그 테러범을 발견하고는 사격을 시작했다. 둘은 거의 동시에 총을 발사했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모스의 탄환이 테러범의 총을 뚫고 들어가 공이를 멈추고 테러범을 사살한 것이었다. 불과 0.1초도 안 되는 간발의 차이로 아모스의 발사가 빨랐던 것이다. 대혼란의 현장 C-130이 착륙한 지 3분 만에 테러범 7명 중 4명을 사살하고 인질을 확보했다. 그러나 아직 인질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는 아니었다. 우간다군을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테러범들이 공격해올 가능성도 높았다. 인질을 확보하고 중앙홀을 점령한 작전1제대의 대원들은 긴장했다. 제일 먼저 진입한 아미르는 갖고 있던 확성기로 영어와 헤브루어로 인질들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외쳤다. 그러나 혼란에 빠진 인질들은 간단한 지시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인질들 가운데 1명이 갑자기 일어났다. 대원들이 긴장하고 총을 겨누었지만 어린 소녀임을 알고 총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다음 인질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대원들의 지시를 듣지 못하고 일어난 19세 청년이 테러범으로 오인되어 사살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인질 가운데 또 다른 2명이 사살된 채 발견되었는데, 테러범과 대원들 간의 총격이 오가는 과정에서 도비탄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렇게 인질을 확보하고 있는 사이에 작전1제대의 나머지 팀은 VIP 라운지 점령을 시작했다. 그러나 대원들은 VIP 라운지 정문이 잠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원 중 한 명이 안쪽으로 수류탄을 던졌지만 수류탄은 도로 밖으로 튀어나와 대원들 옆에서 터졌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대원 1명만이 파편에 경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곧바로 다른 진입구를 찾은 팀이 VIP 라운지로 돌입하자 2명이 손을 올리고 대원들에게 다가왔다. 대원들은 그들에게 멈추라고 외쳤지만 그들은 계속 다가왔다. 대원들은 이들이 인질인지 테러범인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다가오는 자들의 허리춤에서 수류탄 주머니를 보았다. 대원들은 주저 없이 소총을 발사했다. 이와 동시에 테러범의 손에 꽉 쥐어져 있던 수류탄이 떨어지면서 폭발했다. 그러나 또다시 기적적으로 중상자는 없었다. 팀원들은 VIP 라운지 인근을 계속 수색하다가 한쪽 방에서 죽어 있는 테러범을 발견했다. 대원들이 방금 가한 치열한 총격 과정에서 도비탄에 맞아 숨진 것이 분명했다. 구출부대는 작전 개시 3분 만에 테러범을 모두 사살하고 인질을 확보했으며, 15분 만에 구청사를 장악했다. 1분 1초를 아끼고 목표를 인질 구출에 집중한 요니의 판단이 적중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성공적인 작전을 입안하고 지휘한 요니는 이 작전의 유일한 사망자가 되었다. 우간다군을 제압하라 작전1제대가 인질을 구출하는 사이 2제대는 구청사의 2층을 공격했다. 2층은 원래 식당이 있던 자리로 인질사건이 발생한 이후 우간다군 경비 병력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대원들은 계단을 올라가면서 눈에 보이는 병사들을 하나둘씩 사살했다. 그러나 막상 2층에 올라갔을 때 남아 있는 것은 담요와 침낭뿐이었다. 총격이 시작되자 우간다군은 현장에서 도망간 것이 분명했다. 한편 구청사 밖에서는 지휘통제반이 관제탑의 우간다군과 치열하게 총격을 주고받았다. 지휘통제반은 랜드로버에 탑재된 50구경 기관총을 관제탑에 발사했지만 적의 사격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청사를 점령한 대원들도 교전에 참가했지만 적의 사격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는 없었다. 다소 총격이 잦아들자 군의관이 쓰러진 요니에게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AK 소총탄이 요니의 쇄골 아래를 뚫고 들어갔다. 부상이 심해서 요니를 살릴 수 없음을 안 군의관은 베처에게 상황을 알렸다. 부지휘관인 베처는 자신이 작전지휘권을 인계받았음을 전 대원에게 알렸다. 이제 문제는 관제탑을 포함한 청사 주변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한편 작전이 시작된 지 6분이 지나 2번기가 착륙했다. 1번기가 차량을 전개한 장소에 대기 중이던 숌론 장군은 2번기로부터 자신의 지휘 지프를 수령하고 장갑차 2대를 이끌고 구청사에 도착했다. 관제탑에 있던 우간다군이 간헐적으로 사격을 가해오자 숌론은 장갑차에 교전을 명령했다. 장갑차에서 기관총과 RPG를 발사하자 관제탑은 이내 조용해졌다. 교전 와중에 3번기도 도착했다. 나머지 장갑차 2대가 3번기로부터 발진하여 구청사 뒤편에 전개했다. 엔테베 도심으로부터 이어지는 도로에서 나타날지도 모르는 우간다 증원 병력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그사이 최초에 전개했던 장갑차 2대 중 1대가 인근의 우간다 공군기 쪽으로 향했다. 장갑차는 주기되어 있던 우간다군 미그-17기들을 산산조각 냈다. 이스라엘군이 우간다군의 미그기를 공격한 것은 이스라엘군의 안전한 퇴출을 위해 사전에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디 아민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의 복수라는 성격이 더 짙었다. 이로써 작전 개시 15분 만에 인질의 구출과 우간다군 제압이라는 어려운 임무가 완수되었다. 그러나 작전이 완전히 성공했다고 말하기에는 일렀다. 모든 인질과 부대원이 엔테베에서 안전히 퇴출하기 전까지는 작전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실제로 특수전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퇴출이기 때문이었다. 발빠른 퇴출 몇 분 후에 재급유팀과 의료진을 실은 4번기가 도착했다. 의료진이 요니를 포함한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가운데 재급유팀도 재빨리 작업에 들어갔다. 한편 구청사를 확보한 구출부대는 인질을 청사 앞쪽에 모아 랜드로버와 트럭으로 수송기까지 후송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인질의 호송에 여념이 없는 사이 엔테베로부터 이어진 도로에 우간다군을 태운 수송트럭 2대가 나타났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이 준비한 장갑차는 손쉬운 표적을 쓸어버렸다. 어둠과 혼란 속에서 인질들은 구출부대원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다. 대원들이 여러 차례 소지품을 버리고 차량에 탑승하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인질들 중 몇몇은 소지품을 챙기기 위해 호송 대열을 이탈하여 구청사로 돌아가기도 했다. 또 공포 속에서 히스테리에 빠진 인질 몇몇은 대원들의 지시를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대원들이 강제로 수송기로 끌고 가야만 했다. 게다가 어둠과 혼란 속에서 대원들은 인질의 수조차 점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퇴출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인질이 아니라 재급유였다. 사이렛 매트칼이 구청사를 점령하는 사이 사이렛 찬하님은 교전 없이 신청사를 점령하고 연료탱크를 확보해놓았다. 그리고 사이렛 매트칼과 사이렛 골라니가 구청사를 확보하고 인질을 소개하는 동안 재급유팀은 사이렛 찬하님과 합류하여 신속하게 재급유를 시작했다. 수송기 4대에 전부 재급유하기 위해서는 무려 40분 이상이 추가로 필요했다. 그러나 구출부대에게는 이런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때 707 공중지휘통제기로부터 긴급전문이 들어왔다. 케냐 정부가 이스라엘군의 재급유를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엔테베에서 나이로비까지라면 약 1시간 거리로 현재의 연료로도 문제가 없었다. 구출부대는 재급유를 중단했고, 인질을 태운 수송기 1대가 먼저 엔테베 공항을 이륙했다. 시계는 23시 5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구출부대의 퇴출까지 90분 이렇게 인질을 소개하고도 구출부대의 상당수는 엔테베에 남았다. 인질 호송 수송기로부터 구출자가 모두 105명이라는 보고를 받자, 공중지휘통제기는 지상의 숌론 장군에게 남은 인질이 있는지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정보에 따르면 인질 수는 106명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실제로 구출된 인질은 이스라엘인 93명과 에어프랑스 승무원 12명을 합해 총 105명이었다. 구출되지 못한 인질 1명은 치료를 위해 구청사에서 병원으로 옮겨졌던 73세의 도라 블로크(Dora Bloch)였다. 그녀는 다음날 이디 아민의 수하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숌론은 잔류 인질이 없는지 청사 주변을 수색했다. 피랍기 내부에 인질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기된 에어버스기까지 수색했다. 철저한 수색 끝에 구출부대는 더 이상 남아 있는 인질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편 구출부대는 공항 청사 주변의 주차장에 시간지연식 폭약을 설치하여 우간다군의 추적 의지를 꺾고자 했다. 7월 4일 0시 30분 3대의 C-130이 엔테베를 이륙하면서 모든 작전은 종료되었다. C-130이 최초로 착륙한 지 90분 만에 인질을 구출하고 모든 대원을 회수한 것이다. 무려 4,000킬로미터의 거리를 극복하고 적지에서 인질을 구한 엔테베 인질구출작전은 모세의 출애굽기를 특수전 영역에서 재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신이 만든 기적이라기보다는 강한 전투력과 뛰어난 리더십, 그리고 뜨거운 동포애가 만들어낸 피와 땀의 결과였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인도한 모세처럼 이스라엘 특수부대는 20세기 최대의 인질구출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작전 결과, 테러범 7명과 우간다군 45명이 사살되었고, 인질 4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구출부대원 1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상 최대의 인질구출작전에서 사망한 단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구출부대의 지휘관 요니 네타냐후였다. 촉망받던 장교인 요니 중령은 지휘관이 최전선에서 이끄는 강한 군대 이스라엘 국방군의 전통을 장렬하게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과연 이스라엘 정부와 국방군이 이런 위험한 작전을 감행했어야만 했는가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당시 이스라엘군은 욤 키푸르(Yom Kippur) 전쟁의 실망스런 성과로 인해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특히 대테러작전에서는 1974년 마알랏 초등학교의 인질구출작전에서 23명의 초등학생이 사망하고, 1975년의 텔아비브 사보이 호텔에서는 인질 8명과 대원 3명을 잃는 등 눈에 띄는 실패를 거듭해왔었다. 작전 실패라는 최악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이스라엘군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도박에 뛰어든 셈이었다. 그러나 훌륭한 리더십과 창조력, 강인한 전투력, 그리고 강한 애국심으로 무장한 젊은 이스라엘 특수부대는 사상 최악의 재앙이 될 수도 있는 사상 최대의 인질구출작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수행해 성공해냈다. 무엇보다도 뛰어난 전문 특수전력에 대한 지도부의 신뢰가 없었다면 작전은 실행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최고의 부대를 만드는 것은 단순히 예산이나 인력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도부가 일선부대를 얼마나 굳게 신뢰하는가의 문제라는 점을 엔테베의 인질구출작전은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다. 이스라엘 최고의 특수부대 사이렛 매트칼 이스라엘은 특수전 전력을 가장 효율적이고 성공적으로 운용하고 있는 국가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특수부대의 수와 병력이 다양하며, 실전 경험 또한 풍부하다. 특히 이스라엘의 특수부대가 다양한 것은 각 임무나 지역에 따라 그에 맞는 특수전 부대를 양성해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특수부대에는 사이렛이라는 이름이 붙는데, 이는 헤브루어로 ‘정찰대’라는 뜻이다. 이런 다양한 특수부대들 가운데 가장 정점에 있는 것이 육군의 사이렛 매트칼이다. 육군 제269사이렛 매트칼은 직역하자면, ‘제269합참직할정찰대’가 된다. 사이렛 매트칼은 영국의 SAS를 본떠 1958년 창설된 특수부대로, 전략정찰, 직접타격, 대테러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이스라엘 최고의 특수부대다. 사이렛 매트칼이 가장 많이 수행하는 임무는 전략정보의 수집으로, 조직 편성상으로도 사이렛 매트칼은 군 정보부의 통제를 받도록 되어 있다. 사이렛 매트칼은 이스라엘 최초의 헬기비행대대가 창설된 지 1년 후에 창설되었고, 이후 두 부대 사이에는 긴밀한 공조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사이렛 매트칼은 이스라엘군의 어느 부대보다도 아랍 적국의 영토로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사이렛 매트칼은 초기에는 존재 자체가 극비사항이었기 때문에 대원 선발도 비밀리에 실시되었다. 대원은 지휘관이나 모병관이 개인적으로 믿는 정예군인만을 선발했다. 즉 지원한다고 받아 주는 것이 아니라 부대가 직접 고르는 방식으로 대원을 선발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부터 지원자를 받기 시작했는데, 고된 훈련 과정을 거쳐 정예 중의 정예만을 선발하고 있다. 선발된 이후에도 20개월 동안 더 훈련해야 부대원으로서 활동할 수 있다. 사이렛 매트칼로의 배속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일종의 특권으로 여겨지고있다. 특히 에후드 바라크, 벤야민 네타냐후(엔테베 작전 시 지휘관 요나단 네타냐후의 동생) 수상이 사이렛 매트칼 출신이고, 이외에도 국방장관, 합참의장, 모사드 국장 등을 배출해내어 부대의 자부심은 매우 높다. 불타오르는 사이렛 매트칼의 부대휘장 아래 모인 대원들의 모습. 사이렛 매트칼은 최고 정예 부대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수상과 장관, 참모총장을 배출한 부대로도 유명하다. 그림자 전사 세계의 특수부대 연관목차 (15/24) 그림자 전사 세계의 특수부대 서문 특수부대란 무엇인가? 특수부대의 역사 이 책의 구성 감사의 말씀 [네이버 지식백과] 이스라엘 특수부대 사이렛 매트칼의 엔테베 작전 - 20세기 최대의 인질구출작전 (그림자 전사, 세계의 특수부대(그들의 성공과 실패의 역사), 2009. 5. 11., 플래닛미디어)
978 no image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
[레벨:20]정아브라함
45 2016-12-17
[DBR 경영의 지혜]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은 ‘그릿’장재웅기자 입력 2016-12-16 03:00:00 수정 2016-12-16 03:00:00  1940년 미국 하버드대 연구팀은 대학 2학년생 130명에게 5분간 러닝머신에서 뛰어보라고 요청했다. 표준 체력보다 훨씬 높은 강도로 러닝머신을 세팅해놓은 탓에 5분을 버텨낸 학생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연구팀은 이 130명의 학생들을 대학 졸업 후 매 2년마다 연락해 근황을 물어보며 추적 연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이 학생들이 60대가 된 시점에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들이 수십 년간 겪은 직업적 성취도와 사회적 만족도, 심리적 적응 수준은 스무 살 때 러닝머신에서 버텨낸 시간에 비례한다는 점이었다.  성공을 결정짓는 요소로 보통 지능, 성격, 경제적 수준 등을 말한다. 그러나 신간 ‘그릿’(Grit·비즈니스북스·2016년)의 저자인 앤절라 더크워스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 교수는 다른 어떤 조건보다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그릿’이라고 정의한다. 그릿은 ‘열정이 있는 끈기’, 즉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꾸준히 정진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더크워스 교수는 고교 수학교사로 근무할 당시 머리가 좋은 학생 중 일부가 예상외로 그저 그런 성적을 거두고, 오히려 사회 통념상 머리가 좋지 않다고 판단되는 학생 중 상당수가 높은 성적을 보이는 점에 의문을 품었다. 또 고교 때 형편없는 수학 점수를 받았던 학생이 로켓을 만드는 세계적 공학자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성공에는 재능이나 성적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작용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 심리 연구를 시작했다.  저자는 힘들기로 악명 높은 미 육군사관학교 신입생 훈련 시 누가 중도에 탈락하고 누가 끝까지 훈련을 받는지, 문제아들만 있는 학교에 배정된 초임 교사 중 누가 그만두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치는지, 거절이 일상인 영업직에서 어떤 영업사원이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좋은 판매 실적을 내는지를 연구했다. 그리고 그 모든 성공의 한가운데에 ‘그릿’이 있음을 밝혀냈다. 더크워스 교수는 책을 통해 “성공한 사람들이 가진 특별한 점은 결국 열정과 결합된 끈기였다”고 강조했다. 장재웅 기자 jwoong04@donga.com
977 김형석 교수와의 대화
[레벨:20]정아브라함
47 2016-12-29
기자가 전화를 했을 때 그는 강연차 마산에 가 있었다. 주말 오후에나 좀 시간이 난다고 했다. 100세 가까이 살고 있으면서도 일주일에 1번 이상 대중 강연을 하며 지내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올해 우리 나이로 97세. 기자를 만나 두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자세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고, 목소리에 힘이 빠지지도 않았다. 노익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100년을 살아보니』 저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인터뷰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평생 조심스럽게 살아…20살 못넘길 것 같다는 얘기 듣기도 신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무리하지 않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것 같아요 오래 살아보니 더불어 살았던 때가 행복… 사랑이 있는 고생은 의미있게 남더라 나이 들었다고 후회할 것도, 인생 다 갔다고 안타까워할 것도 없다 아직 누군가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일할 수 60∼70년대 김태길 전 서울대 교수, 안병욱 전 숭실대 교수와 함께 ‘철학자 겸 수필가’ 트로이카 시대를 펼쳤던 그의 이름이 요즘 다시 회자되고 있다. 올 여름 펴낸 수필집 『100년을 살아보니』를 통해서다. 혼탁한 세태 속에 그 연령에도 꼿꼿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조심조심, 미리미리. 이 두 키워드가 그의 인생과 건강을 관통한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 ‘20살 넘게나 살 수 있을까’ 하는 주변의 걱정 속에서 자란 그다. “늘 조심스럽게 살아왔다”는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요즘도 그는 강연 준비를 2주일 전에 다 끝내놓는다. 무슨 일이든 미리미리 해놓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그래야 스트레스를 안 받는다. 그렇게 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보지 못한 길을 가고 있는 그의 특별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진 크게보기 올해 우리 나이로 97세의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60~70년대 `철학적 수필가`의 명성을 다시 확인시켰다. 『100세를 살아보니』라는 책을 통해서다. 오래 살아보니 더불어 살았던 때가 행복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사랑이 있는 고생은 의미있게 남는다"고 했다. 조문규 기자 질의 :1920년생 평안남도 대동 출생인데 고향은 어떤 곳인가요. 응답 :“대동강 서남쪽 만경대 가까운 곳입니다. 오래전부터 노송이 많이 있고 그 아래 예배당이 있고 그래서 마을 이름이 송산리라 했어요. 소나무산이 있는 마을. 교회에서 신망학교를 세웠는데 거기서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시골이었지만 자그마한 문화촌이었습니다.” 질의 :만경대는 김일성 생가로 알려져 있는데…. 응답 :“내가 초등학교 5~6학년을 다닌 학교가 김일성도 다녔던 창덕소학교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만경대가 김일성 생가는 아니에요. 김일성 어머니가 거기서 3∼4㎞ 떨어진 칠골이라는 마을 분인데 만경대에 시집을 와서 김일성을 첫 아들로 낳게 되요. 옛날엔 애를 낳을 땐 처가에 가서 낳았잖아요. 그래서 만경대는 김일성 아버지 집이지 김일성이 거기서 낳지는 않았어요. 김일성 외가는 완전히 기독교 집안입니다. 김일성 외삼촌이 강랑욱 목사라고 유명했던 분입니다. 김일성도 15살 때까지는 교회도 다니고 기독교 분위기에서 자랐죠.” 질의 :김일성 일가와 얽힌 얘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응답 :“큰외삼촌이 김일성과 같은 해 태어나 같은 마을에 살았습니다. 김일성 어머니가 우리 외가와 같은 강씨였어요. 김일성 어머니가 젖이 적어 우리 외할머니가 대신 먹여주기도 했답니다.” 질의 :그래요? 응답 :“그런데 그 큰외삼촌과 둘째 외삼촌 두 명이 공산당에 피살됐어요. 그리고 내 친사촌 동생이 반공운동 하다가 잡혀 들어간 일이 있는데 그때 우리 외할머니가 찾아가서 ‘내가 김일성을 석 달이나 젖 먹여 키웠는데 이래도 되는가’ 라고 말해서 풀려나기도 했답니다. 해방 직후 혼란스러울 때 얘깁니다.” 질의 :그런 비화도 다 있었군요. 응답 :“해방되고 9월쯤 김성주가, 김일성 본명이 김성주에요, 돌아왔다고 환영한다고 만경대에 간 일이 있어요. 내가 25살. 김일성은 32세였죠. 사람들이 김일성보고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나 물었더니, 친일파 숙청, 사유지 국유화 등 대여섯 가지를 얘기하더라고요. 그때 저건 자기 생각은 아니고 조직에서 나오는 얘기를 교과서 외우듯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었죠. 그리고 얼마 있다가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바뀌어서 집권하게 되죠.” 사진 크게보기 질의 :1939년 평양 제3중학교를 졸업하신 걸로 되어 있는데 어떤 학교였나요. 응답 :“창덕소학교 졸업 후 처음에 숭실중학교를 갔습니다. 유명한 기독교 학교였죠. 내가 3학년 때 폐교가 됩니다. 신사참배를 안했다고 일제가 학교 문을 닫아버린 겁니다. 그 학생들을 흡수한 게 일본학교인 제3중학교였어요.” 질의 :숭실중학교는 윤동주 시인도 다녔었죠. 응답 :“윤동주는 숭실중학교 3학년을 같이 다니다 만주 용정으로 갔습니다. 같은 반에서 공부했는데 나이는 윤동주가 3년 위였습니다. 좀 늦게 공부했죠.” 질의 :숭실중학교 시절 윤동주는 어땠나요. 응답 :“두 가지를 기억합니다. 그때도 시를 썼는데 좋은 시인이 될 거라고 봤습니다. 또 성격이 착하고 양순하기 때문에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진 않았더라도 마음은 항상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런(적극적인)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다 억울하게 당했다고 봅니다. 당시 일본에 한국 학생들이 많았고 그들이 모여 학생회를 만들었는데, 회장이나 간부는 일본 경찰이 늘 감시했습니다. 윤동주는 그런 친구들과 어울리다 이름이 올라 있어서 예비검속에 걸린 것이죠. 아주 성격이 깨끗하고 착했죠. 집안이 전부 기독교 집안이고, 신앙생활을 하니까 그 같은 시가 나왔다고 봅니다.” 질의 :이어 일본 조치(上智)대 철학과를 졸업하셨는데 주로 어떤 철학을 공부했습니까. 응답 :“일본 조치대 예과 1년, 학부 3년 마치고 1945년 졸업했어요. 철학 일반을 쭉 공부하고, 그 다음에 연세대에 와서 강의를 맡아 하면서 계속 공부했죠. 이론철학(논리학)과 실천철학(윤리학) 가운데 나는 윤리학과 역사철학을 전공했다고 할 수 있어요.” 해방이 되면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 그는 2년간 평양에 머물다 월남한다. 이어 중앙중학 교사를 7년간 지냈다 1954년(34세)부터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30여 년간 후학을 양성하다 1985년 정년퇴임했다. 퇴임 이후에도 저술과 강연으로 현역 시절 못지않은 활동을 계속해왔다. 사진 크게보기 질의 :일본 조치대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한 일은 뭔가요. 응답 :“평양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2년 있다가 월남했습니다. 평양에 있는 2년 동안 중학교를 하나 만들어서 교장을 하며 농촌교육에 종사했죠. 일본에서 같이 있던 친구들을 교사로 오라고 해서 학교를 운영했습니다. 그 학교 이사장이 잡혀갔는데 나보고 어서 월남하라고 해서 월남하게 됐습니다.” 질의 :당시 평양에는 조만식 선생도 있었지요. 응답 :“조만식 선생도 숭실중학교 출신입니다. 김일성이 정권을 잡았어도 당시 평양을 포함해 북한 사람들은 조만식 선생을 더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그러자 김일성이 평양의 고려호텔에 조만식 선생을 가둬놓았습니다. 사모님을 제외한 누구도 면회를 못했어요.” 질의 :책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평생 몇 권의 책을 펴냈나요. 응답 :“좀 많을 거에요. 한 40권 되지 않을까요.” 질의 :1959년 동양출판사에서 간행한 수필집 『고독이라는 병』이 첫 책이죠. 전후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는 평가를 받는데…. 응답 :“61년 펴낸 『영원과 사랑의 대화』 와 함께 두 책이 다 베스트셀러였죠. 첫 책인 『고독이라는 병』은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책입니다. 우리나라에 수필문학이 정립이 안 된 상태였는데 서울대 피천득 교수가 수필집 『인연』을 내면서 수필문학이 개척이 됐죠. 이어 저의 『고독이라는 병』이 나오면서 수필문학이 자리를 잡아가게 돼요. 그 다음부터 수필문학이 일반화됐다고 할 수 있어요.” 질의 :『영혼과 사랑의 대화』는 어땠나요. 응답 :“원고를 삼중당에 넘기고 1년간 미국에 가 있는데 1년 후 돌아와 보니 『영혼과 사랑의 대화』로 제가 유명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해 출판연감을 보니 그때까지 비소설이 소설보다 많이 나간 적이 없었는데 『영혼과 사랑의 대화』로 기록을 세웠습니다. 박계주 소설 『순애보』가 6만부 나간 기록이 있는데, 『영혼과 사랑의 대화』는 1년에 그보다 몇 배 더 나갔습니다. 비소설이 소설보다 더 많이 나가긴 처음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애들 6명 학교 보내고 있었는데 수입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질의 :인기의 비결이 뭐였다고 보나요. 응답 :“제가 중앙학교 학생들에게 정이 많이 들어 있었다가 연세대에 왔을 때였습니다. 그런 경험을 살려 『영혼과 사랑의 대화』에서 고교 상급자가 후배에게 상담해주는 식으로 글을 썼는데 그것이 요즘 말로 히트를 쳤다고 그럴까요. 당시 대학생 중에 안 읽은 학생이 없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질의 :가장 많이 호평을 받은 책은. 응답 :“『영혼과 사랑의 대화』죠. 또 하나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많이 나간 책은 『철학입문』입니다. 삼중당이 ‘인문학 입문 시리즈’를 기획하며 나에게 철학분야를 쉽게 써달라고 해서 썼는데 무척 많이 나갔습니다. 서울대 교수들이 시험 답안 채점하다가 비슷한 답안이 많아 물어보니 김형석 교수의 『철학입문』 보고 썼다고 하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15판 정도 나갔습니다.” 질의 :본인이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은. 응답 :“역시 『영혼과 사랑의 대화』와 『고독이라는 병』 이죠. 아무래도 독자 호응이 많았으니까. 제가 펴낸 책이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철학분야에선 『철학의 세계』 『종교의 철학적 이해』 『역사철학』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필분야가 있고, 세 번째 기독교분야에선 『예수』 『어떻게 믿을 것인가』 두 책이 베스트셀러였습니다. 세 분야에서 제일 많이 나간 것은 역시 수필이고, 그 다음이 기독교입니다. 철학은 전공자들이 주로 보고.” 질의 :철학자와 수필가 어느 쪽이 더 본인에게 맞는 호칭일까요. 응답 :“본업은 철학인데 밖에 나가면 수필가가 되고 말았어요. 고등학생들도 김형석 교수하면 수필가라고 하죠. 얼마 전 여고 3학년에 강의하러 갔는데 수필가로 소개했습니다.” 1920년 태어난 동갑내기 철학자이자 수필가인 김태길(2009년 타계) 전 서울대 교수, 안병욱(2013년 타계) 전 숭실대 교수의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60~70년대 철학자이자 수필가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다. 이 세 명의 1세대 철학자들은 수필을 통해 당시 젊은이들의 윤리-실존적 상처를 어루만지고 위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진 크게보기 질의 :김태길, 안병욱, 김형석 세 분의 공통점이 많습니다. 모두 장수한 점도 그렇고…. 응답 :“돌이켜보니 60~70년대 젊은이들이 어려웠고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젊은이들에게 관심과 희망을 준 이들이 시인이나 종교인이 아니라 우리 셋이엇던 것 같아요. 제일 영향을 많이 주었던 것 같습니다. 6년 전인가 충청북도 영동에 강연을 가서 끝나고 앉아 있는데 지방 유지가 와서 그래요. ‘우리 60~70년대 정말 어렵게 살았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어려웠는데 안병욱 선생과 김형석 선생이 방송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내서 그걸 보면서 희망을 갖고 살았다’고 하더군요. 기독교인이었던 듯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때 안병욱 선생님이 입원중이라 전해드리진 못했습니다.” 질의 :세분이 친하게 지내셨죠, 누가 더 인기가 많았나요. 응답 :“학문적인 면은 김태길 선생이 앞서고, 사회활동은 안병욱 선생이 앞서고, 나는 그 중간쯤 될 거에요. 한번은 안병욱 선생이 내게 전화를 해서 ‘셋이 일만 했지 이제 80이 넘었는데 1년에 4번 만나서 차도 마시고 우리 셋이 좋은 시간 가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김태길 선생에게 전화해서 얘기했더니 ‘그거 하나만 생각하고 또 다른 생각은 안하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이제 한 사람씩 떠나갈 텐데 남은 사람은 힘들어서 어떻게 사나. 이렇게 떨어져서 일하다가 한 사람이 가면 이제 갔구나 하고 생각하지….’ 그렇게 서로 존중하면서 친했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김태길 선생 먼저 가고 나서 안병욱 선생이 ‘이제 김형석 교수 혼자 남게 될 거 같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됐어요.” 질의 :많이 힘드셨겠네요. 응답 :“김태길, 안병욱 선생에 이어 제 어머니와 집사람 마저 떠나니까 집이 텅 빈 것 같았습니다. 1년은 참 힘들었어요. 김태길 선생은 충청도 교향으로 가고. 안병욱 선생과 나는 이북이니 강원도 양구를 택했어요. 양구 박수근 미술관 옆에 ‘철학의 집’을 지었는데 안병욱 선생과 나의 기념관입니다. 다 지었는데 좀 더 크게 지을 예정이다. 안병욱 선생 장례식을 거기서 했습니다. 나도 거기 가서 할 겁니다. 한 달에 한번은 양구에 갑니다. 가서 강연도 하고 얘기도 하고 인문학 강좌도 만들어, 서울 제자 교수들이 가서 도와도 줍니다. 다들 좋게 느껴요. 시인 소설가 미술가는 기념관을 만드는데 철학자는 없잖아요. 잘됐다고 생각해요. 어린 시절 사진도 거기 다 있습니다.” 질의 :존경하는 스승이 누구인가요. 응답 :“첫째는 도산 안창호 선생입니다. 마지막 강연을 들었습니다. 감옥 있다 건강이 안 좋아 가출옥 했을 때 고향에서 강연을 한 번하고 교회에서 설교도 하다 몇 달 후 돌아가셨습니다. 마음의 한 스승입니다. 또 한 분은 중앙학교에 7년간 재직할 때 만난 인촌 김성수 선생입니다. 인품이 좋은 분이셨습니다. 많이 배웠어요. 그리고 김태길 안병욱 선생과 친하게 지내며 스승 못지않게 존경하며 지냈습니다. 세 명 모두 정년퇴직 하고도 계속 사회적으로 일했습니다. 셋이 만나면 사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시대 젊은이들에게 가치관을 줘야하는데….” 질의 :세 분이 활동하던 시대를 ‘수필 철학’ 시대라고 불러도 될까요. 응답 :“세 명의 공통점입니다. 철학적 문제를 수필 수상의 형식을 밟아서 전해줬습니다. 상아탑적인 철학에선 철학자들이 대중을 자꾸 자기들에게 오라고 하는데 우리는 가서 데리고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 역할이었습니다. 철학에서 인문학으로 확장해 나갔죠. 책도 많이 썼지만 독자도 많았습니다. 그것을 통해 고전이 많이 읽혔다고 본다.” 질의 :60~70년대 젊은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위로했다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응답 :“그렇게 보는 게 편할 것 같아요. 이 시대에 어떤 가치관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라도 그런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셋 다 실존주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구라파에 실존주의가 유행했던 시대였죠. 그 실존주의를 한국적인 우리 문제로 풀어내려고 했습니다.” 사진 크게보기 질의 :실존주의란 무엇인가요. 응답 :“인간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문제를 철학적으로 답해 보는 거죠. 과거엔 철학의 대상이 존재였습니다. 자연이 되기도 하고 종교가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실존주의는 인간 자체를 연구하는 거고, 인간의 문제를 자아에서, 즉 나 자신이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절망, 죽음 같은 문제들이 떠올라오게 되죠. 제1차세계대전부터 2차대전 직후까지 실존주의가 세계적인 과제가 됐습니다. 한국에선 6ㆍ25전쟁 이후 실존주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질의 :실존주의는 지금도 필요한 철학인가요. 응답 :“실존주의는 개인 문제인데 지금은 사회과학적 과제가 더 커졌습니다. 사회철학적인 시대라고 할까요. 사회가 자꾸 변하는 거죠. 실존주의를 일으킨 사람은 니체, 키에르케고르 같은 철학자입니다. 그들은 사회문제보다 개인의 문제를 다뤘다고 봐요. 2차대전 이후엔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실용주의 등이 나오면서 개인보다 사회의 문제가 부각됐습니다. 우리 셋도 실존주의에서 출발해서 그걸 바탕으로 한국적 사회문제로 확장해 나갔습니다.” 질의 :한국적 사회문제란 무엇입니까. 응답 :“정신적 황폐 속에서 인간과 인생의 가치, 역사의 방향 이런 걸 모색하던 때였습니다. 한국적 가치관의 탐구라고 할까요. 우리 민족의 공통된 가치관을 찾아보려는 거죠. 우리 전 시대에 잠깐 나왔던 실학사상 같은 것이 우리 시대에도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질의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보십니까. 응답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같은 나라가 세계를 이끌어 가는데 그 나라들의 특색 가운데 하나는 국민의 70~80%가 독서를 많이 한다는 겁니다. 그걸 못하는 나라는 정신적인 영도력을 못 가집니다. 남미를 여행해보면 책 읽는 사회가 아니죠. 아시아에서 독서 하는 나라는 일본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조금 좇아가는데 아직 멀었습니다. 문화에 참여하는 국민이 많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국은 큰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정치보다 문화로 가야한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어제 마산에서 강의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교육은 콩나물에 물주기와 같습니다. 물을 안 주면 말라버립니다. 대학으로 끝난다고 하면 그걸로 마르는 거고, 50대에 끝난다면 거기서 말라버립니다. 콩나물 물주기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질의 :올해 새로 펴낸 수필집 『100년을 살아보니』를 보면, 인생에서 보람 있는 나이를 60~75세로 해놓았습니다. 응답 :“왜 60세냐, 60이 되니까 내가 나를 믿게 되더라고요. 후배들 보기에도 떳떳하고, 명예만 좇지도 않고. 그리고 75세까지는 계속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콩나물에 물 안주면 거기서 끝나버립니다. 계속 책 읽고 생각을 하면 85~86세까지는 연장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까지 사회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이 나이까지 강연을 하는 이유는 내 수준보다 사회 수준이 낮으니까 그런 것 아닐까요. 김태길, 안병욱 선생과 내가 세 명 모두 다 60년대 초반에 미국에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 교수들과 백인들이 제일 많이 한 얘기가 바로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선 60이면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때 우리 세 명 모두 공통의 자극을 받았습니다.” 질의 :최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을 어떻게 보시는지. 응답 :“법적으로는 잘못이 없다고 해도 질서를 무너뜨렸습니다. 인촌 김성수 선생한테 인간관계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직장과 사회생활 할 때 절대로 아첨하는 사람은 가까이 두지 말고 나도 아첨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무리 개인이 유능해도 옆에 유능한 사람을 두지 않으면 성공 못합니다. 편가르기 하는 사람은 절대 데리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편견을 가진 사람은 집단 이기주의가 됩니다. 지금 정치가 편가르기 아니에요.” 질의 :법보다 질서가 더 중요한가요. 응답 :“김영삼 정부 때부터는 힘이 아니라 법이 지배하는 사회가 됐잖아요. 그건 중간 사회이고 선진사회는 질서가 중요해요. 법보다 양심, 도덕과 윤리가 중요해요. 국민들은 그 질서를 믿고 살았는데 큰 일 났다고 생각하여 촛불집회에 나오는 거죠. 지도자가 법의 제제를 받는 걸 원하지 않지만 그걸 안하면 질서사회로 올라가질 못해요. 박근혜 대통령에 바라는 게 있다면 이겁니다. 잘못한 것은 더 많이 얘기하라, 어떻게 피해갈까를 생각 말고. 정치는 친구가 있어야 하는 것. 혼자서는 정치를 못해요. 뭔가 출발부터 지금 와서 보니까 잘못 들어선 것 같아요. 아첨하는 사람, 편가르는 사람을 멀리하는 것은 인간관계 기본인데 그걸 몰랐던 거 같아요.” 질의 :선생님 수필의 오래된 주제는 ‘영원’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영원’은 어떤 의미인가요. 응답 :“종교와 실존철학(윤리, 역사)에서 모든 과제가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사는데 그 결과가 영원과 일치하면 역사에 남고 시간으로 끝나면 역사에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영원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철학은 영원에 대한 애모심입니다. 지성적이고 고독한 사람은 영원을 찾아갑니다. 깊은 고독에 빠져보지 않으면 영원을 창조 못 합니다.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은 고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의 :‘영원’은 좀 추상적인 얘기로 들립니다. 이번에 펴낸 『100년을 살아보니』는 제목부터 아주 구체적이어서 더 끌리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어떻게 쓰게 됐나요. 응답 :“앞으로 글을 얼마나 쓸까 싶어서 2015년 2016년에 많이 썼습니다. 출판사에서 100년 가까이 살 경우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할만한 것을 써봐달라고 해서 쓰게 됐어요. 책 제목은 출판사에서 그 제목을 가져와서 달게 됐습니다.” 사진 크게보기 질의 :100년 가까이 살아보니 느낌이 어떠신지요. 응답 :“오래 살아보니 더불어 살았던 때가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남겨준 것이 쌓여서 역사가 되고 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의 짐을 내가 대신 져준 기억이 행복하게 오래 남습니다. 젊은이의 고민을 대신해 주고, 기독교의 고민, 정치가의 고민을 내가 대신 생각해보았을 때 같은 경우죠. 사랑이 있는 고생은 의미있게 남는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나이 들었다고 후회할 것도 없고, 인생은 다 갔다고 안타까워할 것도 없습니다. 아직 누군가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창조적일 수 있습니다.” 질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같은 것은 없나요. 응답 :“나는 인생을 아름답다고 봐요. 인간은 선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동안은 누구나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양구에 가면 내 글이 하나 있습니다. 자다가 우연히 일어나서 메모를 했습니다.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진리를 위한 그리움과 겨레를 위하는 마음이었다. 무거운 짐이었으나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그 메모를 지금도 보면 결국 내 인생이 학자로서 진리를 찾은 것과 불행한 동포들 사이에 살면서 겨레를 위해 마음을 가졌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무거웠지만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습니다. 자다가 깨서 메모를 남겼는데 내 친구들이 이 글을 보고 그럴 거라고 하더군요.” 질의 :후회되거나 아쉬웠던 일은. 응답 :“후회되는 것도 많지만 오래 생각 안 해요. 잘못되고 후회되는 것에 매달리는 것보다 잊어버리고 앞으로 가자는 생각이죠. 만회할 수 있는 게 뭔지를 생각하는 편입니다.” 질의 :평생을 기독교와 함께했는데 요즘 한국 교회를 어떻게 보시나요. 응답 :“내가 기독교인인데다 연세대에 있어서 잘 압니다. 대교회주의는 안됩니다. 교회를 위한 교회는 안 된다는 얘깁니다. 그런걸 교회주의라고도 합니다. 그리스도 정신으로 사회와 역사에 희망을 주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교회가 커지면 교회주의에 빠지고 교회가 목적이 됩니다. 그건 아닙니다.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하버드, 예일 등 세계의 명문 대학은 모두 신학교로 시작했지만 그런 학교들을 지금 기독교 대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교가 인문학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타락합니다. 세계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교회를 살린 나라는 후진국가이고, 기독교 정신을 살린 나라는 선진국가입니다. 구라파에 기독교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교회가 희망을 줘야 합니다. 영원은 영원불변이 아니라 영원히 창조적이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창조적이고 희망적입니다, 철학자들은 다 그렇게 보는데 교회 목사들이 교리화하면서 형식만 남았습니다.” 사진 크게보기 질의 :건강의 비결은. 응답 :“지금 내가 100살이 다 되어 가는데 건강의 원동력은 경험 안 해본 사람은 잘 모릅니다. 오래 사신 분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욕심이 적은 사람, 일을 잘하는 사람. 욕심 많은 사람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건강합니다. 80 넘어서도 일하는 사람은 다 건강합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해줘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건강 비결 자꾸 물어보는데 대개 나도 모른다고 합니다. 찾아내라고 합니다.” 질의 :크게 아팠던 적은 없었나요. 응답 :“어려서 건강이 나빠서 항상 조심해야 했어요. 14살에 건강이 너무 나빠서, 무슨 병인지 잘 모르겠는데 간질병으로 부모님이 생각했는가 봐요. 달리기하다 쓰러지고 그래서, 부모님과 의사는 얘는 희망이 없다고 그랬어요. 나도 느끼고요. 건강 때문에 중학교 못갈 줄 알았어요. 어머니는 제가 20살까지만 사는 것 봤으면 좋겠다고 하셨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건강에 무리는 절대 안 해요. 강연을 많이 다녀도 2주일 전에 강연할 준비를 미리 다 해놓죠. 급박하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내일 모레 강연이 있다고 하면 충분히 잠도 자고요, 나는 일하기 위해 사는 거 같아요, 그런데 행복해요. 그리고 무리를 안 하고요. 오래 사는 사람은 절대 무리를 안 해요. 신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오래 사는 게 아니고 무리하지 않는 사람이 오래 사는 거 같아요. 제가 아는 130세까지 산 목사님이 계셨는데 절대 무리를 안 해요. 100세까지도 정신이 깨끗했어요.” 질의 :운동은 얼마나 하시는지. 응답 :“50이 넘으면 운동하는 게 좋아요. 운동을 위한 운동은 하지 말고요. 독일 갔더니 국민운동이 수영과 자전거더군요. 어딜 가든 자전거길이 있고 공공시설엔 수영장 있어요. 옳다고 봐요. 80 넘으면 제일 먼저 오는 게 다리 힘이 빠져요. 지금 내 나이에 걸어다니는 사람 별로 없거든요. 그건 자전거 타는 게 좋아요. 나는 중학교 4학년을 자전거 타고다녔어요. 옛날이지만 도움이 되는 거 같아요. 지금은 수영을 하고 있어요. 나는 약은 가능한 잘 안 먹어요. 나이 들면 소식할 수밖에 없어요. 나처럼 일 많이 하는 사람은 많이 먹어야 해요. 육식을 해도 다 소화시켜요. 100살 넘으면 먹고 싶어도 못 먹어요.” 질의 :다시 태어난다면 꼭 해보고 싶은 일은. 응답 :“다시 태어나도 지금 하는 일 하겠습니다. 교육과 학문.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봐요.” 그는 지금도 200자 원고지에 만년필로 글을 쓴다. 매일 장문의 일기를 쓰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매주 세 번 수영을 한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976 초대교회 역사 [1]
[레벨:20]정아브라함
40 2017-02-17
신문에 그리스정교회 신부가 대담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우리에게 유익한 몇가지가 있어 참고로 올립니다. 게재 일자 : 2017년 02월 17일(金) “교회가 진보·보수로 성향 나누는 건 우스운 얘기”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회장을 맡고 있는 암브로시오스 대주교는 “한국의 교회가 여러 단체로 나뉘어 있지만 이는 교회의 역사에서 없었다. 사도들이 보수다, 진보다 라고 자기 성향을 나타낸 적이 있느냐?”라고 되물었다. 한국정교회 대교구 성니콜라스 성당으로 들어서고 있는 대주교. 김호웅 기자 diverkim@ - 한국정교회 대교구장조성암 암브로시오스 교회는 정치적·세속적 아닌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모임 계속 갈라지는 모습 보이고 외형적 대형화만 추구한다면 신자 없는 텅 빈 교회 될 수도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 해 타인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보다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반성해야 그리스도교 위기 벗을 수 있어 인터뷰 = 엄주엽 선임기자(문화부) 1970∼1980년대 초만 해도 서울 마포에서 서대문 쪽으로 향하다 아현 고개에 못미처 오른편 구릉에 이국적인 둥근 돔(dome)의 성당이 우뚝 솟아 눈길을 끌었다. 지금은 빌딩과 아파트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이곳이 1968년에 지어진 비잔틴 양식의 한국정교회 대교구 성니콜라스 성당이다. 당시에 ‘웅장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는데, 워낙 커진 한국의 교회와 성당 건물에 익숙해져 이제 이곳은 ‘아담한 예배당’이란 표현이 어울린다. 세계적으로 정교회(正敎會·Orthodoxy Churches)는 가톨릭, 프로테스탄트(개신교)와 함께 3대 그리스도교로 어깨를 나란히 한다. 20세기 시작과 함께 한반도에 들어왔지만 역사적 굴곡 속에서 교세를 키우진 못했다. 한국정교회 대교구장 암브로시오스 아리스토텔리스 조그라포스(한국명 조성암·趙聖巖) 대주교는 정교회의 중심 뿌리인 그리스 출신으로, 한국에 온 지는 햇수로 19년째다. 지난해 11월 개신교 중심의 국내 진보적 단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회장을 맡았다. 정교회 대주교가 세계교회협의회(WCC) 산하 NCC(나라별 단위협의회) 수장을 맡기는 세계적으로도 처음이라 화제가 됐다. 지난 2일 찾은 암브로시오스 대주교의 집무실은 응접 소파도 놓지 못할 정도로 작았다. 낡은 책상에는 컴퓨터가 놓여있고, 벽에 걸린 정교회의 성화(聖畵)인 이콘(icon)이 없다면 대주교의 방이라고 느끼지 못할 만큼 검박했다. 탁자도 없이 의자에 마주 앉아 인터뷰를 했다. 깊고 맑은 눈, 긴 회색 수염 사이의 부드러운 목소리, 진지하며 따뜻한 분위기의 인물이었다. NCCK 회장이라는 선입견 탓에, 다소 파격적일 것이란 기대는 맞지 않았다. 역시 ‘오소독스’ 교회의 대주교였다. 가벼운 질문부터 했다. ―대주교께서 수염을 기른 것은 정교회의 전통입니까? “정교회 성직자들이 대개 수염을 기르니 그렇게 생각할 만합니다. 고대부터 그리스 등의 지중해 연안 남자들은 수염을 기르지 않으면 이상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도 수염을 다 길렀습니다. 수염은 정교회의 교리나 전통이 아니고, 기르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그 지역의 외형적인 전통일 뿐입니다.” 하긴, 성화 속의 예수도 항상 수염을 기른 모습이다. 초대 교회 전통을 잇는 정교회 성격과 무관하진 않을 듯하다. ―성 니콜라스 성당의 이콘이 아름답습니다. 가톨릭 성당과도 다른 분위기입니다. 정교회에서 이콘이 종교적 의미가 있겠지요? “이콘은 로마 박해시대의 카타콤바(catacomb·초대 교회 때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피난처로 사용된 지하묘지)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예술적으로 높은 경지지만, 장식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주된 목적은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성서는 글로써 가르침을 전하지만, 성화는 그 구성과 회화로써 가르침을 전합니다. 성화를 숭배하진 않습니다. 우리가 부모나 선조의 기일이나 장례식 예배에서 사진을 보고 절을 하거나 입을 맞추듯, 성화를 보면서 존경을 표하는 것, 공경하는 것입니다. 4세기 신학자이자 성인인 성 대 바실리오스는 ‘공경은 화폭이 아니라 그 실체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지요.” 그리스도교는 7∼8세기 성화에 대한 ‘우상’ 논쟁이 치열했다. 787년 제7차 세계공의회(公議會·그리스도교 지도자와 신학자들이 모여 교회의 신조와 원칙에 관한 문제를 결정하는 회의)가 삼위일체의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고, 성인들을 ‘공경’하기 위해 성화를 사용할 수 있다고 정리를 했다. 대주교는 대학원에서 예술사를 전공했을 만큼 성화에 대한 조예가 깊다. ‘성화와 불화의 유사성’이란 논문을 내기도 했다. “이집트 시나이에 있는 성카테리나 수도원에서 2년간 도서관장을 지냈습니다. 그곳은 바티칸 다음으로 성서 필사본이 많고, 세계에서 가장 큰 성화갤러리가 있습니다. 연구를 위해 전 세계에서 온 저명한 학자들을 만나면서 예술사를 공부하게 됐습니다. 이후 한국에 와서 성화와 불교의 탱화와 닮은 점을 보게 됐지요. 비잔틴(동로마제국) 예술이 문화적 차이가 큰 불교 예술과 닮은 점에 항상 의문이 있었어요. 알렉산더 대왕 때 인도까지 진출하며 비잔틴 예술이 불상 등에 영향을 미쳤고, 나중에 실크로드를 통해 불교문화와 교류했습니다. 글이나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예술과 그림으로는 느낌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성화와 불화의 유사성은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정교회가 한국에서 널리 알려져 있진 않습니다. ‘오소독스’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원형’ ‘정통’의 의미가 종교적으로 짙은 것 같습니다. “정교회, 곧 ‘오소독스’라는 용어는 초대 교회의 1000년 동안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1000년 동안 ‘하나의 교회’였으나 1054년 커다란 분열을 맞게 됩니다. 초대 5대 관구에서 나중에 가톨릭으로 지칭되는 로마 교회와 예루살렘·안티오키아·알렉산드리아·콘스탄티노플의 4개 교회가 분리되는데, 이 4개 교회에 ‘오소독스’를 붙입니다. 올바른 교회, 교리를 지켜 내려온 교회라는 의미입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오소독스’를 ‘바를 정자(正)’로 번역해서 ‘정교회(正敎會)’로 했습니다. 역사나 학문적으로 보더라도 정교회는 분열 이전 7차례 세계공의회를 통한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홀로 있게 되면서 여러 변화를 겪습니다. 사례 하나만 들면, 정교회에는 미혼과 기혼 성직자가 있는데, 이것이 원래 초대교회 때 모습입니다. 사도들 중 결혼 한 분도, 안 한 분도 있었지요. 분열된 후에 가톨릭은 미혼 사제만을 가지게 됩니다. 로마 교회는 홀로 남다 보니 실수와 잘못을 하면서 16세기에 다시 한 번 커다란 분열을 맞습니다. 이른바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가 다시 분열돼 나온 거지요. 가톨릭은 가장 최근에만 봐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새로운 교리를 만드는 등 많은 변화를 하며 현재의 모습이 됐습니다.” ―가톨릭이 변화를 겪기도 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구원의 보편성을 이르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인정하는 등 현대에 맞게 변화해온 건 긍정적으로 봅니다만. “예수그리스도는 변하지 않는 분입니다. 예전이나 오늘이나, 성서의 말씀이나 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변할 수 있습니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교리적인 가르침이 변질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 19년째 한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암브로시오스 대주교는 “한국 젊은이들이 내면과 외면이 모두 아름다운데, 성형이나 머리 염색으로 고유한 아름다움을 해치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가톨릭은 교황부터 하이어라키, 곧 위계(位階)가 분명한데, 정교회는 다른 것 같습니다. “가톨릭과 정교회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사도 시대 때는 공의회(公議會)라는 민주적인 시스템을 가졌습니다. 성서 등에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사도 혼자 결정하는 게 아니라 같이 모여 논의했고 모든 교회에 알렸습니다. 하지만 서방 교회 가톨릭은 교황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서 바로 교황의 ‘무오류설’이라든지 다른 교리를 만들어 내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누구라도 실수할 수 있고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동방의 정교회는 나만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나만이 결정하고 승인하는 존재(교황)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였던 초대교회가 나뉘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사도들은 모두 평등한, 수평적 관계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중심이 된 다섯 교회는 ‘동등한 가운데’ 로마 교회의 주교가 의장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지금도 정교회는 가톨릭과 일치한다면 동등한 가운데 첫째 자리로 로마 교회를 인정할 것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에 비해 정교회는 ‘예수의 부활’을 중시합니다.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정교회를 사람들이 ‘부활의 교회’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부활절을 가장 큰 축일(祝日)로 중요시합니다. 초대교회는 부활을 가장 중시해, 부활절 전에 사순절(四旬節)을 어떻게 지내고, 어떤 예배를 지냈는지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언급했다시피,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와 신앙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탄생은 큰 축일이지만 구원의 시작, 곧 그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인류 역사에서 여러 현자와 다를 게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었다 부활한 유일한 분으로서 부활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한번은 죽지만 영적·육적으로 부활함으로써 영원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한국은 그리스도인이 많지만, 성탄절은 누구나 기리면서도 부활절은 조용하게 지내는 것을 봅니다. 한국의 자살률이 다른 나라보다 높습니다.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달하고 인식할 수 있다면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흔히 한국정교회에 대해 ‘그리스정교회냐, 러시아정교회냐’는 질문을 한다. 세계적으로 3억 명 정도의 정교회 신도가 있는데, 그리스와 러시아정교회가 양대산맥이라고 할 수 있다. 정교회는 대관구나 대교구가 없어도 그 지역의 명칭을 붙여 한국정교회, 미국정교회 등으로 불러 자치적 성격을 강조한다. ―한국정교회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정치적 격동과 함께했습니다. 한국정교회의 역사를 한번 짚어주십시오. “1900년 2월 17일 러시아 모스크바 대주교청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에 의해 처음 성찬예배가 이뤄지며 한국에서 정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지만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일본이 러시아인과 선교사들을 추방합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 자체에서 정교회가 박해를 받아 한국정교회에 대한 지원이 완전히 끊겼고, 서울 정동의 성당과 토지 등 정교회 재산도 일본정교회 소유가 돼 교회 유지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한국이 일본과 러시아를 모두 적대시하면서 한국정교회는 ‘고아’가 돼버립니다. 한국전쟁으로 단 한 분의 한국인 김의한(알렉세이) 신부가 납북됐죠. 유엔군으로 참전한 그리스군 종군신부들의 노력으로 회생의 기회를 맞았고, 1955년부터 지금까지 세계총대교구청에 속하며 2004년 대교구가 됩니다. 현재는 한국에 2개의 수도원과 7개의 성당 그리고 소성당 몇 개가 더 있습니다.” 원래 정동에 있던 성당과 토지 등 정교회 재산은 한국전쟁 이후 미국정교회의 도움을 받아 일부 되찾게 된다. 이런 역사적 질곡에서 자유로웠다면, 한국정교회는 지금 훨씬 큰 모습이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처음 전도한 그리스의 유서 깊은 에기나섬이 고향으로 알고 있습니다. “에기나섬은 그리스의 부산항이라고 할 수 있는 아테네 남쪽의 지중해 항구 피레오스에서 가까운, 아름다운 섬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에기나섬에서 바울로부터 그리스도교가 전파됐고 신약성서도 그리스어로 처음 쓰였으며 신앙적으로도 깊게 전해진 데 대해 자부심이 큽니다. 고등학교시절까지 에기나섬에서 보냈고, 신학은 아테네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미국으로 가서 더 공부한 뒤 박사학위를 끝내고 한국에 오게 됐습니다.” ―아테네 신학대를 우등으로 졸업했고, 미국 유학 후 교회의 주요 보직을 맡기도 했는데, 본격적인 목회지로 한국을 선택한 건 좀 의외로 보입니다. “혼자 결정한 것이 아니고, 교회로부터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프린스턴대에서 공부할 때 당시 한국의 소티리오스 대주교가 전화를 하셨습니다. 아무 인연도 없던 한국 정교회에 도움이 돼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도 가본 적이 없어 당황스러웠지요.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교수제안이 있었고, 그리스와 미국, 캐나다에서도 목회 요청이 있었지만 1998년 한국을 선택했습니다. 몇 차례 한국을 다녀가면서, 여러 여건이 부족한 여기에서 더 할 일이 많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출세가도’와 명예, 안락을 버리고 한국정교회의 반석이 되고자 한 것이다. 그의 ‘조성암’이란 한국명에서도 그런 의지가 읽힌다. “한국인으로 살려면 한국 이름이 필요하겠더군요. 조그라포스의 ‘조(趙)’, 암브로시오스의 ‘암(巖)’에서 따왔고, 가운데 ‘성(聖)’자를 넣었지요. 사도 베드로처럼 ‘거룩한 반석(聖巖)’이 되고자 하는 바람입니다.” ▲ 성니콜라스 성당의 예배 모습. ―그리스는 정교회가 국교지만, 한국은 ‘종교 백화점’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종교가 있습니다. 처음에 낯설지 않았습니까. “한국으로 오기 전에 그리스에서만 있다 온 게 아니고, 미국과 시나이 등에서 머문 경험이 있어서 크게 이상하진 않았어요. 미국도 한국처럼 다양한 종교가 있고, 시나이도 이슬람권이어서 이웃종교에 대한 경험을 했던 거지요.” 그는 한국외국어대에서 오랫동안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등 젊은이들과 교유를 했다. ―한국에 온 지 19년이 되셨습니다. 한국인, 특히 한국의 젊은이는 어떻습니까. “한국 사람들의 마음과 외모 모두를 사랑합니다. 한국인들은 내면에 느낌과 감각이 풍부하고 예의 바르고 경건합니다. 외모도 곧고 검은 머리카락, 쌍꺼풀이 없어 더 매력적인 눈 등이 아름답습니다. 한국의 전통문화와 노래는 수준이 높을 뿐 아니라 제가 아주 좋아합니다. 다만 요즘 젊은이들에 대해 우려하는 게 있습니다. 한국사람이 가진 고유의 모습, 문화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대학에서 학기가 바뀔 때마다, 남학생이고 여학생이고 얼굴과 머리색이 바뀌어 못 알아 봅니다. 다시 인사를 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온 게 다 좋은 게 아닌 건 이미 누구나 알지 않나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준 아름다운 문화와 마음, 외모에 대해 감사하면서 사는 게 더 중요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지속해서 스트레스를 받고, 해결이 안 되면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하는데, 안타깝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면서 살아야지요.” 최근 여러 관점에서 관심과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국내외 종교 상황으로 대화를 옮겼다. 암브로시오스 대주교는 정교회가 역사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에큐메니컬(교회 일치) 운동을 길게 강조했고, 한국교회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성소수자 논란에 대해선 보수적인 느낌을 받았다.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이 NCCK의 가장 큰 행사가 될 것입니다. NCCK 회장을 맡고 계시지만, 정교회의 역사에서 종교개혁은 좀 비켜있습니다. 정교회에서 보는 종교개혁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종교개혁 500년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분열이 얼마나 더 지속될 것이냐는 문제의식입니다. 500주년을 행사로서만 보내면 안 되고, 자기반성을 하고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신자도 많고 재정도 탄탄하니 교회의 일치 문제를 생각할 게 없다’는 교회가 많습니다. 상처를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분열된 교회의 모습이 일반 사람들이 교회를 부정적으로 보는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2030∼2040년이 되면 한국 그리스도교 교인 수가 상당히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 중에는 교회의 세속화와 목회자들의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교회의 갈라진 모습이 주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연말 통계청이 조사한 바로는 한국에서 개신교인 수가 가장 많았습니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는 교회의 대형화만 추구하고 목회자의 세습, 각종 비윤리적 행태들로 비판받고 있기도 합니다만. “이런 상황을 어느 누구도 자의적으로 판단하거나 비판할 수 없습니다. 다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크게만 짓다 보면 대형교회는 나중에 신자가 없는 텅 빈 교회로 남을 수 있습니다. 성직자부터 신자들 모두 깨달아야 할 것이 교회가 정치적인, 세속적인, 세상의 집합체가 아니고 사람의 구원을 위한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성적으로, 신앙적으로 구원을 위한 삶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NCCK의 신년메시지에서 언급했지만, 다른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고 하기보다 자신이 먼저 반성하고 회개해야 그리스도교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처음 그리고 마지막 하신 말씀이 ‘회개하여라’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식민지 - 전쟁 - 분단 등을 겪으면서 진보 - 보수로 나뉘어 여전히 갈등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진보다, 보수다 하는 건 우스운 얘기입니다. 교회는 성서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한국의 교회 단체들이 NCCK, 한기총, 한교총 등으로 많이 나뉘었는데, 교회의 역사에서 보면 교회가 진보다, 보수다, 뭐다, 뭐다 한 적이 없습니다. 사도들이 보수다, 진보다 자기 성향을 나타낸 적이 있습니까?” ―보수 개신교 쪽에서 대선주자들에 대해 성적 소수자 문제에 대한 입장을 묻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과 성소수자에 대한 주교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개인 의견은 될 수 없고, 교회의 가르침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서적으로 초대교회부터 개개인은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끊을 수 있어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성소수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먼저 말초적인 것만 생각하는 것을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그것 이외에도 많은 것을 주셨다는 것을 이해하라고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자신들만의 ‘게토’를 만들지 말라, 사회가 우리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반대라고 말할 겁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다는 겁니다. 회개하고 다시 돌아온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이슬람 국적자의 입국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으로 시끄럽습니다. 한국에서도 일부 개신교회의 이슬람 포비아가 적지 않습니다. “이슬람을 적대시하는 모습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평화를 찾는 게 아니라 적대감만 표출돼 다툼이 커질 뿐입니다. 나라마다 입국하는 사람에 대해 엄격하게 절차를 거치는 건 그 나라의 사정이지만,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명찰을 붙여 무조건 되고, 안 되고는 문제가 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을 박해했던 과거의 경험을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의 경우 1453년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의해 비잔틴이 함락되면서 터키 즉 이슬람 지배하에 역사적으로 큰 박해와 순교자가 생겼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정교회는 한 번도 이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인공지능(AI) 등 과학의 발전도 종교에 위기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 형상을 닮은 존재로서, 그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나와도 사람을 대신할 순 없습니다. 사람은 몸과 뇌만 가진 게 아니라 정신과 마음이 있습니다. 로봇이 대신할 수 없습니다. 대학에서 학생들한테 얘기하는 게, 기계와 과학문명을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하라는 것입니다.” (통역 도움:박인곤 요한 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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