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관악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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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5 광주시 -제가 살던 지역에 관한 신문기사 [2]
[레벨:20]정아브라함
41 2015-05-14
중앙일보에 제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광주 양림동 지역에 관한 기사가 있어서 올립니다. 제가 다닌 초등학교가 양림동에 있어서 신문에 소개된 지역이 저의 초등학교 시절 활동무대였습니다. 그 길 속 그 이야기〈61〉광주 양림동 둘레길[중앙일보] 입력 2015.05.14 00:01 / 수정 2015.05.14 09:44 3·1운동, 6·25, 5·18 … 근현대사 100년 흔적 오롯한 ‘예술가 아지트’ 댓글보기0 <iframe style="BORDER-BOTTOM: medium none; BORDER-LEFT: medium none; HEIGHT: 21px; OVERFLOW: hidden; BORDER-TOP: medium none; BORDER-RIGHT: medium none" src="//www.facebook.com/plugins/like.php?href=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7797144&width&layout=button_count&action=like&show_faces=true&share=true&height=21"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 scrolling="no"></iframe>Tweet섹션 2면 지면보기 글자크기 prev <iframe style="BORDER-BOTTOM: 0px; BORDER-LEFT: 0px; WIDTH: 600px; HEIGHT: 397px; BORDER-TOP: 0px; BORDER-RIGHT: 0px" id="gallery_in_article_f" title="빈프레임" src="http://joongang.joins.com/gallery_in_article.html?u=http%3A//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505/13/htm_20150513181111d400d401.jpg&log=1&logtype=0&tid=17797144&servcode=2704&index=0&gCnt=0" frameborder="0" scrolling="no"></iframe>next 광주 양림동 둘레길은 좁은 골목을 헤집으며 광주의 지난 백 년을 만나는 길이다. 사진은 지역 예술가와 주민이 함께 꾸민 펭귄마을. 광주광역시 양림동은 면적 0.68㎢에 불과한 조그만 마을이지만, 많은 이야기가 서려 있다. 양림동은 광주의 근대화가 시작된 곳이다. 20세기 초 외국 선교사가 터를 잡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면서 마을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 작은 마을은 3·1운동부터 6·25, 그리고 5·18까지, 숫자만 표시해도 알 수 있는 우리네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두루 겪었다. 그 흔적이, 그러니까 지난 백 년의 세월이 이 작은 마을에 오롯이 남아 있다. 양림동은 예향(藝鄕)이기도 하다. 수많은 문화 예술인을 낳았고, 지금은 젊은 예술가의 아지트로 거듭나고 있다. 하여 양림동 둘레길을 걷는 건 시간여행이었고, 동시에 아트 투어였다. 100년 묵은 한옥의 운치 윌슨 선교사가 살던 사택. 마당에는 미국에서 가져온 키 큰 나무가 심어져 있다. 양림동에도 둘레길이 있다. 여느 둘레길처럼 산자락을 에두르는 길은 아니다. 양림동의 문화, 역사 유적을 둘러보는 도심 속 4.5㎞의 골목길이다. 2010년 양림동 주민자치위원회가 조성했다. 한데 똑 부러지는 길이 아니다. 점점이 흩어진 수십 개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길이어서다. 하여 길 이름이 적합한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주민도 이름을 헷갈려 한다. ‘양림길’ ‘양림동 근대역사문화 탐방길’ 등 여러 이름이 떠돈다. 이름이야 어떻든 양림동은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야 제맛이다. 여행자는 지도를 들고 저마다 선을 그리며 골목을 헤집고 다닌다. week&은 주민자치위원회가 조성한 길을 참고했지만, 실제로 걸은 길은 조금 달랐다. 길이 처음 생겼을 때보다, 볼거리가 늘었기 때문이다. 출발점은 양림 오거리로 잡았다. 서서평길을 따라 얕은 오르막을 오르니 근사한 고택 한 채가 보였다. 조선 말기인 1899년에 지은 가옥으로, 1965년에 집을 매입한 주인의 이름을 붙여 ‘이장우 가옥’으로 부른다. 남도의 전통 가옥과 달리 ‘ㄱ’ 자 형인데다 창살에 유리를 덧댄 모양도 독특했다. 초등학생들이 마당에 있는 우물 펌프가 신기한지 이리저리 만져보고 있었다. 김현승 시인을 추억하는 ‘다형다방’. 방문객이 직접 차를 타 마시는 무인 카페다. 이장우 가옥에서 북쪽으로 170m쯤 걸으니 최승효 가옥이 나왔다. 1920년 독립운동가 최상현이 지은 집인데 65년 최승효 광주MBC 창립자가 매입했다. 지금은 설치미술가인 아들 최인준씨가 작업공간으로 쓰고 있다. 기본 골격은 전통 한옥이었지만 안채를 덮은 주황색 기와와 아담한 연못은 이국적이었다. 뒤뜰에는 아담한 산책로가 있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무등산이 액자 속 그림으로 들어왔다. 최승효 가옥을 나와 광주천 방향으로 조금 더 걸으니 동굴이 나왔다. 알고 보니 일제가 만든 방공호란다. 양림산(108m) 동쪽 끝자락에 호가 4개 있다. 그 중 하나를 관람객에게 개방한다. 이름은 ‘뒹굴동굴’인데 깊이가 약 20m로 깊지 않았다. 또 다른 방공호는 해설사 조만수(57)씨가 창고처럼 쓰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더위를 피하러 많이 왔어요. 김치나 장류를 저장하는 냉장고 역할도 했지요.” 버려진 땅을 찾아온 작은 예수들 1920년에 지은 최승효 가옥. 개화기 한옥의 변천과정을 보여준다. 뒹굴동굴 옆 양림파출소를 지나 양림산 오르는 길로 들어섰다. 양림동 둘레길에서 가장 우거진 숲길이 이어졌다. 아담한 정자 양파정을 지나 1㎞쯤 걸으니 사직공원 전망 타워가 나왔다. 양림동과 무등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명당이었다. 양림산 남서쪽으로 이어진 길은 기독교 순례길이라 할 만했다. ‘광주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는 이곳을 이해하려면, 20세기 초 호남 지역에 기독교가 유입된 과정을 알 필요가 있다. 파란 눈의 선교사들은 나주를 선교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으나 유교 문화가 강해 쫓겨나다시피 광주로 왔다. 그들은 광주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겨우 자리를 잡은 곳이 성읍 밖 양림산 기슭의 풍장 터였다. 몹쓸 병에 걸려 죽은 사람의 시신을 내다버리는 곳이었다. 선교사들은 기독교를 전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학교를 지어 근대 교육을 했고, 병원을 지어 아픈 이를 돌봤다. 그래서인지 양림동에는 선교사의 이름을 딴 길과 건물이 많았다. 지금도 양림동 주민 약 60%가 기독교인이란다. 사직공원 밑에는 충현원이 있었다. 한국전쟁 때 고아를 돌보는 복지기관으로 쓰였던 장소다. 입구에는 미 공군 러셀 블레이즈델 대령의 동상이 늠름하게 서 있었다. 그는 전쟁 고아 1059명을 살려낸 ‘어린이 비행기 수송 작전’을 지휘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블레이즈델 대령이 평생 붙들고 산 성경 글귀였다고 한다. 충현원 옆 호남신학대학교 뒤편 언덕에는 아담한 묘원이 있었다. 양림동에서, 나아가 호남에서 생을 바친 이방 선교사의 묘지였다. 이끼 낀 자그만 묘비 22개가 소박했던 그들의 삶을 증언하고 있었다. 다시 호남신학대학교 교정으로 내려왔다. 이곳에는 선교사 사택이 몰려 있었다. 양림동에서 자란 김현승 시인을 기리는 시비를 지나니, 회색 벽돌로 지은 서양식 2층 건물이 보였다. 윌슨(한국이름 우일선) 선교사가 살던 집이었다. 집 주변에는 미국에서 옮겨온 피칸나무·흑호두나무가 있었고, 큰 은행나무에는 그네도 걸려 있었다. 영락없는 미국 가정집 풍경이었다. 그들이 한국인보다 한국을 사랑했을지언정 향수(鄕愁)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예술가 아지트로 바뀐 저항의 현장 지난 3월, 사직공원 팔각정을 허문 자리에 전망 타워가 들어섰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피터슨 선교사의 사택이 있었다. 그는 외국인 대부분이 광주를 떠난 80년 5월 마지막까지 시민과 함께한 선교사였다. 그리고 90년대까지 광주의 증언자로 활동했다. 양림동은 시민과 계엄군이 가장 격렬하게 맞섰던 구 전남도청에서 겨우 한 블록 떨어져 있다. 당시 양림동 광주기독병원(구 제중원)에서 부상자를 돌봤는데 시민이 줄지어 헌혈을 했다고 한다. 수피아여중·고 안 쪽으로 들어섰다. 학교 안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서양식 건물 3채가 있었고, 어김없이 오래된 이야기가 서려 있었다. 3·1운동 당시, 수피아홀 1층에서 학생들이 교복을 찢어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둘레길은 대남로 방향으로 이어졌지만 week&은 양림동 안쪽 주택가로 방향을 틀었다. 예술가의 아지트로 떠오른 2015년의 양림동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과연 골목에는 세련된 갤러리와 카페가 많았다. 재미난 벽화도 그려져 있었다. 서울의 서촌을 닮은 분위기였다. 갤러리 늘 최석현(59) 대표는 “양림동은 전통과 서양 문화가 공존하면서도 광주에서 발전이 가장 더딘 동네”라며 “예술가가 모이는 것도 그런 문화적 다양성 때문”이라고 말했다. 수피아여중·고에서 내려오는 길목에는 다형다방이 있었다. 다형(茶兄)은 커피 매니어였던 김현승 시인의 호다. 김현승 외에도 많은 문화예술인이 양림동에서 나고 자랐다. 소설가 황석영, 문순태가 집필 활동을 했고, 중국 혁명가를 지어 중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 작곡가 정율성도 양림동 태생이다. 둘레길은 정율성 거리를 지나 오웬 기념각에서 마무리됐다. 걸은 거리는 약 4.5㎞로 짧았지만 반나절이 후딱 지났다. 역사책 수백 페이지를 단숨에 읽은 것처럼 어질할 정도였다. 양림동은 이제 뜨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서울 서촌, 전주 한옥마을에 견줄 관광지가 될 수도 있다. 광주시는 2009년 양림동을 ‘근대역사문화마을’로 지정하고 예산 307억원을 투자했다. 골목마다 공사가 한창이었다. 부동산 값도 들썩인단다. 문화재 정비나 관광객 편의를 위한 개선도 필요하다. 하나 느림보 마을이 질박한 제 매력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길을 걷는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이달의 추천 길’ 5월의 주제는 ‘가족여행 길’이다. 온 가족이 담소 나누며 걷기 좋은 길 10개를 선정했다. <표 참조> 이달의 추천 길 상세 내용은 ‘대한민국 걷기여행길 종합안내 포털(koreatrails.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걷기여행길 포털은 전국 540개 트레일 1360여 개 코스의 정보를 구축한 국내 최대의 트레일 포털사이트로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한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글=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1054 no image 좋은 시 한편 [6]
[레벨:20]정아브라함
97 2015-05-12
1053 no image 자제력을 키우는 방법
[레벨:20]정아브라함
29 2015-05-09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자제력은 중요한 생활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직장 생활뿐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자제력이 필요할 때가 많다. 평소에 자제력을 높이는 훈련을 해놓는다면,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좀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자제력을 키울 수 있을까? 미국의 온라인 미디어 <리파이너리29>(Refinery29)에 소개된 ‘자제력을 키우는 방법’ 5가지를 소개한다. 나름대로 관련 학술논문들을 근거로 한 것이어서인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첫째, 선택권은 나한테 있음을 명심하라.  유혹에 맞닥뜨렸을 때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음을 상기하라. 2012년 프랑스 프로방스대 연구에 따르면,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자제력이 요구되는 일에서 나쁜 성과를 냈다.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다. 한 그룹엔 자율권이 없다는 메시지를, 다른 한 그룹엔 중립적 메시지를 줬다. 그런 다음 각 그룹에 자제력이 요구되는 행동을 완수할 것을 요구했다. 자율권이 없다는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은 중립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에 비해 자신을 억제하는 힘이 약했고 실행력도 떨어졌다. 또 첫 번째 그룹은 두 번째 그룹보다 자신들의 자제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필요할 때 자신을 통제하는 일 더 쉬워진다. 둘째, 내가 쓰는 단어가 행동을 결정한다.  자기 자신과의 내적 대화는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자기자신과 대화할 때 당신이 어떤 단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당신이 일탈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 <저널 오브 컨슈머 리서치>(Journal of Consumer Research)에 실린 한 논문을 보면, 자기 자신에게 “난 안해”(I don’t)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난 못해”(I can’t)라고 말하는 사람들보다 운동을 귀찮다고 거르거나 정크푸드를 먹고 싶은 욕구를 더 잘 참아냈다. 셋째,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생각하라.  건강에 좋은 습관을 들이려 할 때는 행동계획을 짜는 게 중요하다. 연구자들은 ‘어떻게 그것을 실천할지’보다 ‘왜 바꾸려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성공 확률을 높인다고 말한다. 저널 <중독>(Addiction)에 실린 한 연구 결과는 이를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골초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연구진은 한 그룹에는 ‘건강을 유지하려고 하는 이유’를, 다른 그룹에는 ‘어떻게 목표를 달성할 것인지’를 물었다.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전자의 질문을 받은 그룹이 더 높은 자제력을 보여 담배를 절반으로 줄였다. 넷째, 신체를 단련하라.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체력검정시험을 보던 학창시절에 자주 듣던 말이다. 이를 유식한 말로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라고 부른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많은 정신적 개념들이 신체의 경험에서 나온다는 걸 알아냈다. 예컨대 뭔가를 잊어버리고 싶을 때 “털어버려”(shaking it off)라고 말하는 것이 한 사례가 될 수 있다. 5개의 관련연구들이 2011년 4월 <저널 오브 컨슈머 리서치>에 실렸다. 연구 결과를 한마디로 종합하면, 근육을 강화하면 의지력이 높아져서 고통을 견뎌내고, 유혹을 뿌리치고, 거북한 약을 먹는 능력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다섯째, 틈틈이 명상을 하라.  저널 <의식과 인지>(Conscious and Cognition)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명상은 자제력을 회복시켜주는 단추이다. 스트레스가 심할 때, 그러나 억제할 필요가 있을 땐 명상이 당신에게 필요한 힘을 부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연구진은 참가자들을 세 그룹으로 나눴다. 두 그룹엔 감정을 억제하도록 요구했다. 혐오스런 유튜브 동영상을 보게 한 뒤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해 자제력이 바닥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반면 세번째 그룹은 하고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뒀다. 그런 다음, 자제력 테스트를 하기 전에 이들 세그룹에 선을 그리거나 5분간 명상을 하도록 했다. 그 결과는? 5분간의 명상이 마음을 평안하게 하면서 자제력을 회복시켜 준 것으로 나타났다. 곽노필 기자 nopil@hani.co.kr ▶곽노필의 미래창 http://plug.hani.co.kr/futures
1052 no image [자료] 2015 봄수양회 특강 "물리학자가 보는 창세기" 파일 [2]
[레벨:20]강호영
66 2015-05-06
2015년 봄수양회 특강 물리학자가 보는 창세기 말씀 / 창세기 1:1-25 요절 /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강의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yUE4MG6fY3A 지난 4월 초 세계 최대의 입자 가속기인 Large Hadron Collider (LHC)는 2년 동안의 휴식과 정비를 마치고 재가동되었습니다. 75억 유로, 현재 환율로 9조원에 달하는 비용을 들여 만든 이 기계는 스위스-프랑스 국경에 걸쳐 있으며 지하 175m에 둘레 27km짜리 터널 속에 들어 있습니다.[1] 이 실험에 100개국 이상에서 온 1만명 이상의 과학자와 기술자가 동원되었습니다. 이 가속기는 지극히 작은 입자를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가속하여 충돌시키는 장치입니다. 이를 운용한다고 해서 당장 응용 성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경제적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도대체 인류는 이런 가속기를 왜 만들고 실험하는 것일까요? LHC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말로 대답하면 우주의 초기 상태를 재현하고 모든 물질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 한 가지가 궁금해서 이런 거대한 기계를 만들어 수많은 과학자들이 탐구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우리의 기원을 알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이것이 과학을 하는 근본 이유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성경의 창세기도 같은 문제 의식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없이는 우리 인생의 의미도 목적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장엄한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온 인류가 그토록 알고자 해온 문제에 대한 해답입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이 해답을 받아 들이고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았습니다. 그 중에는 과학자도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과 종교, 과학과 성경이 대립된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혹은 객관적인 세계는 과학에게 맡기고 성경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격언으로만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과학의 놀라운 진보가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객관적인 세계는 과학에게 모두 맡겨도 되고, 우리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완전한 대답도 과학이 줄 수 있는 것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과학이 무엇이며 과학자들은 무엇을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또한 과학과 성경, 특히 창세기가 대립되는지 조화되는지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2] 1. 무엇이 과학인가? 1.1 과학에 대한 오해 우선 과학이란 무엇일까요? 과학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과학기술을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삶을 편리하게 해주는 스마트폰, GPS 시스템, 비행기로부터 CT나 MRI처럼 발달된 의학 기구, 나아가 무시무시한 전투기나 핵폭탄을 떠올립니다. 많은 사람이 과학에 열광하고 과학 연구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과학기술이 주는 혜택과 과학의 성취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과학의 열매이지 과학 그 자체는 아닙니다. 오늘날 과학에 대한 오해는 대부분 과학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에서 출발합니다. 많은 영화와 소설에서 과학자는 문제를 척척 해결하고 세상의 문제를 푸는 해답처럼 나옵니다. 최근 영화 『인터스텔라』의 광고 카피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가 과학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를 잘 요약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자가 생각하는 과학과 대중이 생각하는 과학은 상당히 괴리되어 있습니다. 과학에 대한 언론 보도나 대중 과학 서적은 이런 현상을 심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의 연구는 매우 제한된 조건에서 이루어지며 그 답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도 조심스럽습니다.[3] 하지만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야 하는 과학 기사는 성과를 과장하며, 과학적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인도합니다. 이 과정에서 명성을 얻고 연구비를 얻어야 하는 과학자와 대학은 이를 방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중 과학 서적은 유익한 면도 있지만 조심스럽게 읽어야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 책들의 전반부는 대개 과학적으로 이미 입증된 사실을 잘 설명합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책의 재미를 위해서, 혹은 아직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이론을 홍보하기 위해서 입증되지 않은 가설 설명으로 가득합니다. 예를 들어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를 보면 전반부는 양자 역학과 상대성 이론 같이 실험적으로 잘 검증된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후반부에는 초끈 이론이나 허수 시간 같이 제안만 되고 검증된 적이 없는 이론을 설명하는데 마치 전반부의 이론들처럼 후반부의 이론도 확실한 사실인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나아가 결론에서는 과학과 우주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내놓습니다. 과학자도 철학을 말할 수 있지만, 이는 과학이 아닙니다.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저자의 철학도 과학으로 받아들일 위험이 있습니다. 분명 과학자들이 논문으로 발표하는 공식적이고 신중한 연구 결과와 과학 기사나 대중 과학서적을 통해 얻게 되는 과학 지식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C.P. 스노우, 『두 문화』, 오영환 옮김, 사이언스북스(2001) 1.2. 과학적 방법론 그렇다면 진짜 과학은 무엇일까요? 과학을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인 정의에 따르면, 과학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해 실험과 관측으로 검증 가능한 체계적인 지식을 쌓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과학적 방법론에 따르는 학문이 과학입니다. 과학적 방법론은 우리가 고등학교 과학책 처음 부분에서 배우게 됩니다. 먼저 관찰을 통해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을 세웁니다. 이 가설을 실험과 관측을 통해 검증하여 반복적으로 옳은 것으로 증명되면 가설이 이론이나 법칙이 되는 것이고 아니면 버려집니다. 인문학이나 사회학도 이 방법론을 따르면 인문과학, 사회과학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과학적 방법론에서 중요한 것은 가설과 실험, 관측입니다. 가설이 없으면 어떤 실험을 해야 할지도 알기 어렵고 데이터를 해석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가설은 실험이나 관측으로 검증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실험은 실험군과 대조군을 설정하고 엄격한 변인 통제를 한 후 통계적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4] 이 검증은 한 번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 사회에 논문으로 결과를 발표함으로써 다른 과학자들이 또 다른 실험으로 독립적으로 검증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하면 이론이나 법칙이 됩니다. 이렇게 가설을 실험과 관측을 통해 엄밀하게 검증하는 방법이 과학적 방법론입니다. 과학적 방법론은 연구자가 범할 수 있는 여러 오류를 방지합니다.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결과만을 모으는 오류, 우연히 한 번 일어난 현상을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오류 등을 막아줍니다. 과학자 사회의 검증을 통해 재현 가능한 결과만 살아남습니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가설이 옳은지에 대해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 심판자가 됩니다. 실험과 관측이 중요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사람의 편견이 개입할 여지를 줄여주고 자연에게 객관적인 판단을 맡깁니다. 이것이 과학적 방법론이 그토록 강력한 이유입니다. 물론 과학적 방법론의 한계도 잘 알아야 합니다. 첫째, 이는 철저히 귀납논리를 따라갑니다. 지금까지 하얀 백조만 보았다고 해서 검은 백조가 없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검은 백조 한 마리를 발견하는 순간 앞서 옳은 것으로 판정된 이론은 무너집니다. 아울러 이는 과학이 정의상 하나님의 뜻대로 주어지는 초자연적인 사건인 기적의 가능성에 대해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반복적인 실험을 할 때마다 하나님이 기적으로 응답해주시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5] 과학은 초자연적인 사건을 검토해본 후 이것이 진짜 기적인지 자연 현상인지 혹은 속임수인지를 구별하는 역할을 할 수는 있습니다.[6] 그렇지만 기적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수치화하기 어려운 분야일수록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돈이 많을수록 행복하다는 가설을 검증하려면 행복을 수치화할 수 있어야 하는데, 행복도라는 것이 엄밀하게 정의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수치화한다고 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탐구하는 대상의 복잡성이 늘어날수록, 혹은 직접 실험하거나 관측하기 어려울수록 신뢰도가 떨어집니다. 반복적인 실험을 통해서 철저하게 규명된 기본적인 물리 법칙은 믿을 만 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변수가 개입되고 관측이 불완전한 자연사는 신뢰도가 떨어집니다. 지구의 역사에 대한 이론이 그 동안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보십시오. 또 임상 과학적 방법론이 정립된 후로도 질병 치료 방법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보십시오. 모든 과학적 지식이 동일한 신뢰도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한계와 적용되는 조건을 잘 살펴야 합니다. 넷째, 무엇보다도 과학은 ‘어떻게’에 대해서는 효과적인 답을 하지만, ‘왜’에 대해서는 불완전한 대답밖에 줄 수 없습니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은 중력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왜 이런 중력이 존재하며 왜 이런 형태인지에 대해서 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중력의 본성이나 본질에 대해서 뉴턴에서 아인슈타인으로 패러다임 전환은 있었지만 질문을 더욱 깊은 수준으로 끌어간 것일 뿐입니다. 과학적 방법론은 만능이 아니며, 이를 통해 얻은 결과는 신중하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홍성욱, 『과학은 얼마나』, 서울대학교출판부(2004) 1.3. 과학주의 이처럼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검증할 수 있는 지식만이 과학입니다. 하지만 과학에 대한 오해로 인해 과학의 일부인 것처럼 보여지는 과학주의가 있습니다. 과학주의는 과학적 지식이 사실에 대한 유일한 지식의 원천이고 가장 우월한 세계관이라는 주장입니다. 나아가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종교는 열등하거나 무의미하며, 과학이 진보하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 것이라고 봅니다. 이는 과학 자체에 대한 신앙이라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SNULIFE에서 전도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과학만 믿어요”하면서 거절한다는 한 학생의 댓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과학주의입니다. 보통 과학주의는 자연스럽게 자연주의로 이어지고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을 정당화하는 데 쓰여집니다. 모든 시대 모든 사회는 세계관을 필요로 합니다. 세상의 근본 문제에 대한 잠정적인 답이라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신화를 만들어 세계를 설명했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은 아폴론의 수레가 태양을 끌고 달리기 때문이고, 번개가 치는 것은 제우스가 분노한 결과라고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세계관의 일부였습니다. 현대에는 이것을 과학이 대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과학적 지식이 어떻게 검증되었고 어떤 한계를 가진 것인지 잘 모르면서도 소위 “과학적”인 설명을 믿습니다. 과학주의적 설명은 우리가 왜 존재하고 우주가 운행하는지에 대한 현대의 신화가 되었습니다. 현대 과학주의자들이 퍼뜨리는 신화의 핵심은 모든 것이 우연에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우주도 우연히 생겨났고, 생명도 우연히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인생도 우연히 생긴 것이라는 것이 이 신화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세계관인 이상 이것은 다른 경쟁적 세계관과 대등한 링에서 겨루어보아야 합니다. 세계관은 증명이 불가능한 전제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관과 종교는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우며, 이는 과학주의가 또 다른 종교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와 모든 것이 우연의 법칙을 따르는 자연만으로도 설명된다는 전제는 과학주의자들의 신앙이지 증명된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전제들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나아가 과학주의의 전제를 인정하더라도 내부 모순이 발생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의 이성이 우연과 진화의 산물이라면 우리의 논리와 과학적 탐구를 믿을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과학주의의 주장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믿을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또한 우연히 세상이 생겨났다는 주장을 믿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우주의 근본 법칙인 물리 법칙과 물리 상수가 너무나 정교하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과학주의는 매우 부실한 세계관이자 신화에 불과합니다. 이런 과학주의 무신론 과학자들이 몇 명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대표적인 사례인데, 그는 그의 저서 『만들어진 신』에서 종교를 비웃고 무신론이 과학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관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를 매우 피상적으로 이해하며 현대 종교학과 신학에서 극복된 프레이저 경의 견해를 가지고 종교를 정의해서 공격합니다.[7] 나아가 과학을 신봉한다고 하면서 종교 바이러스니 밈(meme)이니 하는 가설로 종교의 전염성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용어만 과학적으로 보일 뿐, 과학적 주장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신을 믿게 하는 밈이 뇌에서 뇌로 건너 다니는 것은 관측된 적도 없고, 실험적 증명도 불가능합니다. 그는 과학자라면 당연히 무신론자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과학을 통해서 증거들을 검토한 사람들 중에는 창조주를 인정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앨런 샌디지라는 천문학자는 처음으로 정확한 허블 상수와 우주의 나이를 측정하고 퀘이사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는 저명한 무신론자 과학자로서 1985년 미국 댈러스에서 열린 과학과 종교에 관한 회의에 초청 받았습니다. 모두 그가 무신론을 지지하는 강연을 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그는 물질, 시간, 공간, 에너지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태초에 어떤 초월적 존재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과학적 증거를 검토한 끝에 기독교인인 된 것을 고백했습니다. 일부 과학주의자들의 기대와 선전과는 달리 신을 믿는 과학자들은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줄어들지도 않았습니다. 1916년 과학자들에게 인류와 적극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신을 믿는지에 대해 물은 결과 40%가 믿는다고 했고, 40%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1997년 완전히 똑같은 질문을 한 결과 여전히 40%의 과학자가 신을 믿고 있었습니다.[8]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신을 믿는 과학자가 줄어들리라는 가설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무신론적인 과학자들조차 과학 때문에 무신론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성향과 믿음 때문에 무신론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다윈주의에 대한 반대 서명을 모으는 운동[9]이 있습니다. 여기에 서명한 수백 명의 과학자들은 현직에서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다윈주의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을 공개적으로 표명했습니다. 도킨스의 기대와는 달리 과학주의는 과학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과학주의라는 증명할 수 없는 세계관에 기초하여 자기의 철학적인 견해를 말하고 있을 뿐 과학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경우 과학자로서의 권위를 내려놓고 철학적 논증을 통해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과학주의는 결코 과학이 아닙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과학주의자가 아닙니다.[10] 알리스터 맥그라스, 『도킨스의 신』, 김태완 옮김, SFC(2007) 알리스터 맥그라스 · 조애나 맥그라스, 『도킨스의 망상』, 전성민 옮김, 살림(2007) 앤터니 플루, 『존재하는 신』, 홍종락 옮김, 청림출판(2011) 1.4. 과학철학과 과학사회학의 응답 과학주의는 과학에 대한 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과학이 과연 절대적인 진리이고 다른 학문에 비해 우월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20세기부터 많은 학문적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 출발은 논리 실증주의라고 하는 주로 빈 학파가 주장한 사상에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이들은 형이상학과 신학은 검증 불가능한 진술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무의미하며, 논리적이거나 실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주장만 의미가 있다고 하면서 논리학, 수학, 자연 과학적 지식의 우월성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주장의 기초가 되었던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이 비트겐슈타인 자신으로부터 반박을 당했습니다. 나아가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가장 엄밀한 수학에서조차도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명제가 있다는 것을 보이면서 점차 논리 실증주의는 빛을 잃었습니다. 빈 학파와 교류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던 칼 포퍼는 과학의 정의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는 과학에서 최종적인 진리란 없으며 반증 가능성이 있는 것만이 진짜 과학이라고 주장합니다. 과학의 핵심은 자기 비판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과학 발전의 성격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이루어집니다. 토머스 쿤은 그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을 역사와 사회적 맥락 속에서 바라봅니다. 그는 과학자들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 내는 대담한 모험가가 아니라 오히려 확립된 세계관 속에서 작업하는 퍼즐풀이자에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쿤은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도입합니다. 정상과학, 즉 이미 과학자들 사이에서 인정 받은 과학이 패러다임으로 작용하여 과학자의 인식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무너지는 과학 혁명이 때로 가능한데, 과학자들은 기존 패러다임의 영향 때문에 기존 이론과 다른 결과가 나타나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새로운 결과가 반복해서 나타나면 그제서야 과학자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이 그러했고, 뉴턴 역학에서 양자 역학으로의 전환이 그러했습니다. 현대 과학철학과 과학사회학은 과학도 어떤 고정된 진리가 아니며, 과학자들도 완전한 진리 탐구자가 아니라 당대의 패러다임에 종속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주장했습니다. 게다가 현대에는 과학이 산업화되면서 연구 자금을 내어주는 기관에 따라 결론이 바뀌는 사태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담배 회사가 연구 자금을 대주는 경우에는 담배의 해악을 말할 수 없고, 특정 약품 회사가 돈을 대주는 경우에는 경쟁 약품의 부작용을 과장해야 합니다. 이는 과학자가 사회와 분리되어 있는 고고한 진리 탐구자가 아님을 잘 보여줍니다. 따라서 과학적 주장도 비판적 검증이 필요하며, 다른 학문에 비해 우월성이나 우선권을 가진 학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과학자가 자신의 철학적 편견에 따른 견해를 과학적인 것처럼 말할 때가 있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주장은 과학과 분리해서 보고 철학적 논증에 따라 판단해야 합니다. 토마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김명자 옮김, 까치글방(1999) 칼 포퍼, 『추측과 논박: 과학적 지식의 성장』, 이한구 옮김, 민음사(2001,2002) 코페르니쿠스 외, 『과학고전선집 – 코페르니쿠스에서 뉴턴까지』, 홍성욱 편역, 서울대학교출판부(2006) 지아우딘 사더, 『토마스 쿤과 과학전쟁』, 김환석 · 김명진 옮김, 이제이북스(2002) 홍성욱, 『과학은 얼마나』, 서울대학교출판부(2004) 윌리엄 브로드 · 니콜라스 웨이드,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 김동광 옮김, 미래인(2007) 2. 창세기와 과학 2.1. 창세기 1장의 특수성 이제 과학과 창세기의 관계를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과학주의자들은 창세기 1장을 과학과 모순되며 과학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신화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을 조심스럽게 읽으면 본문이 다른 신화와 강력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다른 신화에 섞일 수밖에 없는 문화적인 요소가 없습니다. 보통 신화에는 첫 신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느니, 거대한 기둥들이 세상을 떠받히고 있었다느니 하는 문화적 요소가 반드시 포함됩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에는 이런 문화적 영향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이집트의 창세 신화에서 신은 물에서 나타나서 세상을 헤매다가 발 디딜 곳을 만들고자 땅을 만듭니다. 여기서 벌써 중력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발 디딜 곳으로 내려간다는 발상 자체가 중력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무로부터 창조를 말합니다. 시공간이나 중력같이 고대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조차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고대인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는 창세기가 결코 고대인의 머리 속에서 나온 신화가 아님을 간접적으로 증명합니다.[11] 2.2. 창세기를 읽는 바른 방법 그러나 창세기 1장을 읽을 때, 잘못된 성경 해석 방법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중요한 단계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원 저자가 무엇을 의도하였고 당시 처음 이를 듣고 읽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사람들에게 과학적인 지식을 주기 위해 창세기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는 당시 사람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그들의 언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용어가 오늘날 과학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라고 해서 비판하면 안됩니다. 하늘에 있는 광명체 중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고 태양 빛을 반사하는데도 광명체라고 했다고 엄밀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것은 부당한 비판입니다.[12] 광명체라는 단어는 light emission하는 물체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reflection하는 물체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역으로 창세기의 문장들을 과도하게 해석하여 창세기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해석해도 곤란합니다. 예를 들어 궁창 위의 물을 노아의 홍수 이전까지 하늘 위에 있었던 수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창세기 저자가 의도한 해석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성령께서 저자가 깨닫지 못했어도 심어 놓으신 의미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랬다면 다른 본문을 통해 증명되거나, 신빙성 있는 과학적 사실로 증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집중하고 본문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해석이 다양하게 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무에서부터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질서 있고 심히 좋게 창조하셨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2.3. 창세기를 보는 크리스천 과학자들의 견해 창세기를 바라보는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의 견해는 몇 가지로 갈립니다. 첫째, 전통적인 창조론(창조 과학)이 있습니다. 이는 성경의 창조 과정을 있는 그대로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들은 진화론을 비판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창조론이 옳다고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창조론은 진화론의 증명되지 않은 기초를 공격하여 그 실체를 드러냈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둘째, 지적설계론이 있습니다. 과학이 지적 설계자가 창조한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낼 수 있다고 보고 정보 이론에 기초하여 지적 설계자를 증명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이 좋은 예입니다. 예를 들어 박테리아의 편모는 지극히 복잡하고 효율적인 세포 기계입니다. 여기서 단 한 부품이라도 없어지면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는 누적적인 진화로 이런 편모가 생겨났다고 하는 주장에 대한 강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더 근본적으로 DNA에 새겨진 정보는 DNA를 만드는 물리, 화학적 과정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마치 종이와 잉크가 있다고 해서 책에 적힌 정보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정보는 지적 설계자의 개입을 필요로 합니다. 지적설계론은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여 지적 설계자의 개연성을 발견했다는 중대한 의의가 있습니다. 셋째, 전통적 견해가 있습니다. 앞의 견해들은 의의가 있지만 창세기를 이해할 때는 전통적인 견해를 따르는 것이 가장 균형 잡힌 방법일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떤 성경 본문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러한 본문을 당시 우세한 과학 이론들에 얽매여 해석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모호한 문제들과 관련해 우리 믿음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여러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본문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창세기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의 신비가 담겨 있고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문제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의 시간으로 제시된 7일이 24시간이 일곱 번 반복된 것이 아니라고 다른 성경 본문을 들어 해석했는데, 이는 현대에 밝혀진 시간의 상대성을 이해하면 매우 앞선 통찰입니다. 시간은 관찰자에 따라 다르게 흘러갑니다. 상대성이론을 이해한다면 신적 관찰자의 속도나 중력에 따라 시간을 다르게 측정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본래 의미를 해치지 않고 과학과 대립하지 않으면서도 창세기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봅니다. 과학과 신학(성경)은 다른 영역이기 때문에 연역적으로 한 쪽에서 다른 쪽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고 논리 구조도 다릅니다. 그러나 과학과 성경이 서로 모순이 없음을 보임으로써 학제간 교류와 마찬가지로 서로 교류하고 상호 지지를 할 수 있습니다. 2.4. 물리학자의 눈으로 본 창세기 그렇다면, 창세기와 과학이 상호 지지를 해줄까요? 저는 물리학자의 눈으로 이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 과학자와 철학자, 신학자들의 견해도 참고했고, 입자물리학자로서 저의 해석도 있습니다.[13] 첫째, 빅뱅과 우주의 시작 문제가 있습니다. 우주에 시작이 있다는 시각은 과거 잘못된 견해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우주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창조주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14] 그러나 현대 과학은 우주가 시작이 있었다는 것, 시공간에도 시작이 있었다는 것을 강력히 증명했습니다. 태초가 있었으며 그 때 무에서 유가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창세기는 현대 과학의 결과를 경쟁적인 세계관들에 비해 가장 적합하게 설명합니다. 간혹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있다고 하면서 양자 진동이 그런 예라고 경우도 있는데, 이는 무에 대한 정의가 잘못된 것입니다. 법칙도 상수도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는 아무 것도 나올 수 없습니다. 오직 자연을 초월한 존재만이 무에서 유가 생기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미세 조정 문제가 있습니다. 물리학자들은 밝혀진 과학적 사실을 보면서 두 가지 의문을 가집니다. “근본 법칙은 어디서 오는가?” 그리고 “물리 상수는 왜 이렇게 생명에 적합하게 조정되어 있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만유인력의 법칙을 봅시다.[15] 여기서 G는 중력 상수입니다. 우리는 실험적으로 측정하여 G가 얼마인지 알고 있을 뿐이지, 왜 그런 값이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이 중력 상수를 아주 조금만 바꾸어도 우주는 금방 붕괴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진공에서의 빛의 속도, 플랑크 상수 등 왜 그런 값이 되었는지 알 수 없는 물리 상수들이 30가지나 됩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중성자의 질량이 700분의 1 늘어나면 별들의 핵융합이 멈춥니다. 강한 핵력의 크기를 자연의 기본 힘들의 세기가 가능한 범위의 1051분의 1만큼 바꾸면 수소를 제외한 모든 원자가 해체됩니다. 이 물리상수들이 우연히 우리에게 적합하도록 정해졌다고 주장하려면 수없이 많은 우주 중에서 우연히 생명이 살기 적합한 우주가 있는데 이것이 우리 우주라고 믿어야 합니다. 평행 우주니 다중 우주니 하는 것이 이런 주장입니다. 이는 전혀 증명되지 않았고 증명하기 불가능에 가까운 믿음입니다. 이에 대해서 어떤 과학자는 “수천 억 개의 우주를 믿는 새로운 교회에 가입하라”고 비꼬았습니다. 다시 만유인력의 법칙을 봅시다. 왜 중력이 두 물체의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 제곱에 반비례해야 합니까? 왜 중력은 인력만 있고 척력은 없습니까? 도대체 이런 법칙은 어디서 왔습니까? 설사 다중 우주를 믿는다고 해도 다중 우주가 탄생하게 되는 법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연히 생겼다고 믿는 것은 매우 근거 없는 믿음입니다. 셋째, 우주의 초기 상태는 물과 같았습니다.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는 것은 초기 물질이 생기기 전 고온 고압의 상태를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 속에서도 물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물은 우리가 알고 있는 H2O가 아니라 액체 같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16] 실제로 입자 가속기 RHIC에서 발견된 사실은 초기 우주가 물과 같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물과 같았던 초기 물질이 팽창을 통해 식으면서 여러 입자가 나온 것입니다. 이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시면서 하늘[17]을 창조하신 모습과 조화됩니다. 우주가 팽창하면서 초기 물과 같던 물질이 온 우주로 퍼져나가 원시 은하를 만든 것입니다.[18] 넷째, 빛의 특수성이 있습니다. 3절에 나온 대로 빛이 가장 먼저 창조된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빛은 광원 없이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광명체가 존재하기도 전에 빛이 존재했다고 하는 것은 고대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참으로 타당한 통찰입니다. 여기서 빛은 모든 힘을 매개하는 gauge boson으로 보입니다. 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이라는 자연의 네 가지 힘은 각각 그 힘을 이를 매개하는 입자가 있습니다. 이런 힘이 없이는 어떠한 물질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빛을 먼저 창조하신 것은 현대 물리학과 합치되는 설명입니다. 다섯째, 오직 말씀으로 창조하신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물리학은 처음에 물질을 탐구했으나 점차 에너지가 더 본질적인 것이라고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더 탐구해보니 정보가 더욱 본질적이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물리 법칙과 상수, 생명의 DNA 등은 모두 정보입니다. 그렇다면 정보가 어떻게 전달될 수 있을까요? 정보를 실어 나르기 가장 적합한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은 지극히 본질적입니다. 창조의 과정에서 다른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모습은 참으로 본질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Logos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말씀의 정보 전달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물리학적으로도 자연스럽고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과학신학: 자연과학과 신학의 대화』, 박세혁 옮김,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2011) 리 스트로벨, 『창조설계의 비밀』, 홍종락 옮김, 두란노(2005) 윌리엄 뎀스키, 『지적 설계』, 서울대학교 창조과학연구회 옮김, IVP(2002) 앤터니 플루, 『존재하는 신』, 홍종락 옮김, 청림출판(2011) 3. 창세기 말씀 역사 3.1. 제가 받은 은혜 저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신앙인이고 동시에 현직에서 연구하고 있는 물리학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자연의 질서를 탐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장은 제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창세기 말씀을 통해 받은 은혜를 두 가지만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창세기는 제게 사람의 이성을 사용하여 자연 질서를 파악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자연이 우연히 아무 목적 없이 생겨난 것이라면 아무 목적 없는 진화의 결과 얻어진 사람의 이성은 믿을 수 없습니다. 과학을 하는데 필수적인 날카로운 이성은 믿을 수 없는 우연의 산물에 불과합니다. 나아가 우연히 생긴 세상에 자연 법칙이 존재하고 질서가 있다는 것은 더욱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인격을 가지시고 논리적이신 창조주가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면 달라집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에는 이성도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저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성을 신뢰하고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렘10:12는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의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의 명철로 하늘을 펴셨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명철로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세상을 합리적이고 질서 있게 세우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 말씀을 공부할수록 저의 이성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비판정신은 살아나며 창조적인 생각이 솟아 나옵니다. 연구를 하면서 먼저 일용할 양식을 먹고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면 지혜의 근원되시는 분께서 지혜를 주시는 것을 많이 체험합니다. 둘째, 창세기는 자연을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저의 인생도 완전하게 인도하고 계심을 믿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생존에 적합하도록 우주의 물리 법칙을 세심하게 조정하시고 지구를 생명에 적합한 위치와 안정적인 궤도에 놓으셨습니다. 저 광대한 우주부터 가장 작은 원자 속 세계까지 질서 있게 창조하셨습니다. 제가 탐구하는 핵입자물리는 강한 핵력, 약한 핵력, 전자기력이 얼마나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 원자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게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를 깊이 탐구하면 할수록 세상을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신 창조주가 계시다는 확신을 줍니다. 이렇게 우리를 위해 아름답고 안정적인 자연을 완벽하게 창조하신 분께서 어찌 우리 인생을 완벽하게 인도하시지 않겠습니까? 자연을 보고 창세기를 보면 저를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됩니다. 저를 창조하신 분이 바라시는 제 인생의 목적이 있고 제 삶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은 제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평안을 줍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저를 위해 모든 것을 만드신 사랑으로 또한 예수님을 보내셔서 저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온 세계에 새겨져 있고 제대로 탐구하기만 하면 과학을 통해서도 그 사무치는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창세기 1장과 과학은 결코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세기는 과학이 답할 수 없는 과학적 탐구 결과의 의미와 목적을 알려줍니다. 과학을 제대로 연구하기만 하면 창조주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과학주의적으로 과장된 추론이 아니라 확립된 과학적 지식만을 따라가면 과학은 창세기를 오히려 지지해줍니다. 또한 창세기는 과학이 가능하다는 논리적 전제를 줍니다. 이 말씀으로 마치고자 합니다. 전12:1a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후배님들이 이 청년의 때에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깊이 있는 학문을 하고 동시에 성경을 통해 창조주를 기억한다면 창조주께서 만나주십니다. 성경을 통해서도, 동시에 학문을 통해서도 창조주를 만날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1] 둘레 27km면 지름이 9km입니다. 관악캠퍼스 남북 길이가 2.5km입니다. [2] 각 장 끝에 기록한 참고 문헌 목록은 모든 참고 자료를 다 포괄하지 않습니다. 각 장의 주제에 대해 더 깊이 알아보고자 하는 경우에 제시된 책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3] 2009년 5월 18일자 PhD comics( http://www.phdcomics.com/comics/archive.php?comicid=1174 )는 A와 B는 상관 관계가 있다는 논문이 대학 홍보물과 언론 보도를 통해 A가 반드시 B를 일으키며, 건강을 위해서는 A를 피해야 한다는 대중적인 오해로 바뀌는 것을 풍자합니다. [4] 어떤 새로 개발된 위장약이 위통을 감소시킨다는 가설을 검증해야 한다고 합시다. 우선 충분한 숫자의 피험자를 데려와야 합니다. 한두 명에게 약을 먹이고 결과를 보는 것은 실험이 아닙니다. 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에게는 약을 주고 다른 그룹에게는 약이라고 하면서 밀가루로 만든 위약을 줍니다. 약을 먹는 그룹을 실험군, 위약을 먹는 그룹을 대조군이라고 합니다. 이 때 연령이나 현재 건강 상태 등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신중하게 변인 통제를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젊은 사람들을 실험군에 몰아넣고 늙은 사람들을 대조군에 모으면 약의 효과를 과장할 수 있습니다. 위약을 먹은 사람들도 약을 먹는다고 믿으면 효과가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를 위약효과라고 합니다. 그래서 진짜 약을 먹은 사람들이 위약을 먹은 사람들과 비교해서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을 정도로 큰 효과를 봐야 이 약이 효과가 있다는 가설이 검증되는 것입니다. [5] 전에 어떤 과학자들이 기도가 질병 치료에 효과가 있는지 실험했는데 이는 지극히 잘못된 실험입니다. 기도가 성경이 말하는 대로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대화라면, 병자를 치료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반드시 치료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달린 문제입니다. 수치화 할 수 없는 개인의 믿음과 귀납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어떻게 실험할 수 있습니까? 아울러 기적적인 치료가 있었다고 해도 통계는 이를 일회적인 사건으로 보고 다른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사례들 속에 묻어버립니다. [6] 그런 의미에서 부활 논증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 부활의 역사성과 사실성을 점검하기 위해 과학적인 지식은 도움이 됩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 매우 사실적이라는 것, 고고학적인 십자가 처형의 근거, 매우 이른 시기 성경 사본의 존재 등에 대해 과학은 역사학, 심리학, 사회학 등과 연대하여 강력한 판단을 제시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리 스트로벨, 『예수는 역사다』, 윤관희 · 박중렬 옮김, 두란노(2002)에 실린 여러 학자들의 논증이 도움이 됩니다. [7]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은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대한 서평에서 “생물학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유일하게 『영국의 조류』(저자 주석 - 새에 대한 기초적인 교양서)인 사람이 생물학에 대해 장황하게 지껄이고 있는 것을 상상해 보라. 그러면 신학에 대한 리처드 도킨스의 논의를 읽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대충 알게 될 것이다”라고 평했습니다. 도킨스는 초대 교회 교부인 터툴리안이 “불합리하기에 반드시 믿어야 한다”라는 말을 했다며 혹평했는데, 터툴리안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의 자료 조사의 정확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합니다. 저명한 무신론 철학자 마이클 루즈는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은 내가 무신론자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만든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8] 이는 사실 “우리와 의사소통 하는 신”을 믿는지를 물은 것으로, 이신론자와 같은 다른 형태의 유신론자를 포함하면 유신론자 과학자의 숫자는 크게 늘어날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이 연구가 기대했던 유신론 과학자 수의 의미 있는 감소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9] http://www.dissentfromdarwin.org [10] 양자 역학 창시자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막스 플랑크는 “종교와 자연과학은 회의주의와 독단론, 불신과 미신을 반대하는 끊임없고 지칠 줄 모르는 십자군 전쟁에서 힘을 합쳐 싸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폴 디랙은 “신은 대단히 높은 수준의 과학자이며 고등수학을 이용해 우주를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에르빈 슈뢰딩거는 “과학이 제공하는 세계상은 대단히 불충분하다. (중략) 아름다움과 추함, 선악, 신과 영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과학은 가끔 이런 영역의 질문에 대답하는 척 하지만, 그 대답이 너무 엉터리일 때가 많아서 진지하게 받아들일 마음이 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11] 혹 창세기 1장의 역사성을 믿지 않고도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성경 전체와 모순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을 믿지 않고 예수님만 믿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창세기 1장을 비유나 신화로 이해하는 순간 기독교 신앙은 무너집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만들지도 않은 것에 대해 어떻게 완전한 주권을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나아가 만물을 다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 외의 다른 실체들의 권세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성경은 창세기 1장에 기초하여 만물이 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조되었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창조 신앙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창세기 1장의 역사성을 믿지 않는 것은 사상누각적 신앙입니다. [12] 후대에 형성되었으며 일상 언어와는 다른 과학 용어의 정의를 사용하여 과학이 아닌 다른 분야의 글을 공격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물리학에서는 힘을 가해도 물체가 이동하지 않으면 물체에 일을 해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쓰는 일이라는 용어는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13] 저의 해석이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충분히 개연성 있는 해석이라고 봅니다. [14] 심지어 중세 신학을 대표하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주의 시작이 있었다고 하면 창조주가 있는 것은 당연하니까 자기는 우주에 시작이 없었다고 보고 창조주를 증명하겠다고 했습니다. 중세에도 우주에 시작이 있었다는 생각은 지배적이지 않았습니다. [15] F = G m1m2/r2, F는 두 물체에 작용하는 힘의 크기, m1과 m2는 두 물체의 질량, r은 두 물체 사이의 거리입니다. 중력은 두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 제곱에 반비례합니다. 이때 G는 중력 상수입니다. [16] 이는 9,10절의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셨다는 표현과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혼돈(formless) 가운데 있었던, 빛이 창조되기도 전의 물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물과 동일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빛이 창조된 이후라면 각종 원소들이 생겼을 것이기 때문에 9,10절에서처럼 바다를 이루는 물(H2O)이 되었다고 해도 맞는 해석일 것입니다. [17] 14-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궁창에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신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창세기 1장의 궁창이 단순히 지구의 대기권인 하늘이 아니라 우주 공간임을 알려줍니다. [18] 넷째 날의 태양 창조는 태양이 비로소 원시 태양에서 지금의 형태에 가까워진 것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1051 고린도 이야기
[레벨:20]정아브라함
16 2015-04-25
어느 여행가의 글 여행 5화. 많이 읽혀진 고린도의 편지와 오렌지 꽃향기 다음라이프 | 유로자전거나라 | 입력 2015.04.20 12:10 | 수정 2015.04.20 13:18 즐겨찾기 추가 댓글42카카오스토리 트위터 페이스북 툴바 메뉴 폰트변경하기 굴림돋움바탕맑은고딕 폰트 크게하기 폰트 작게하기 메일로 보내기 인쇄하기 스크랩하기 내 블로그로내 카페로 고객센터 이동 -여름 성수기에나 번지점프를 할 수 있지 지금은 안 해요. '어? 고린도에서 번지점프를 꼭 하고 싶었는데..' 고린도 운하의 다리 밑에는 번지점프를 할 수 있게 시설을 갖춰 놓아 성수기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로 여자들이 하는 것을 보게 되니 그녀들의 간 크기는 남자들과는 다른가 보다. 고대 운하가 없었던 때에 아테네에서 델피까지 배를 타고 가게 되면, 펠로폰네소스 반도 밑으로 돌아서 가는 것과 고린도의 동쪽에 도착한 뒤 배를 육로로 이동하여 서쪽에 배를 다시 띄운 후 항해하는 방법이 있었다. 뱃길이 약 550Km 차이가 있어 육로로 배를 이동하는 방법을 택하고는 하였는데 한계가 있었기에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운하를 만들고 싶었했다. 하지만 운하는 오랜 세월이 지난 1893년에서야 비로서 만들어진다. ↑ 운하를 지나는 배 양쪽 끝에 수문 역할을 하는 다리가 놓여 배가 지나갈 때 다리전체가 바다 속에 잠겼다가 배가 지나간 후에 다시 올라온 다리에서 팔딱거리는 물고기를 보곤 한다. 잠수교 옆에는 고대에 배들을 운반했던 육로가 조금 남아있어서 현장학습을 나온 학생들을 보며 어릴 때 시청각 자료도 없이 외워야 했던 학창시절이 생각나기도 한다. ↑ 잠수교와 디올코스 (배를 육로로 운반한 길) 고린도에서는 기독교 전도자였던 바울을 간과할 수 없다. 1928년 지진으로 고린도 주민들은 생활 터전을 옮겨 신도시를 건설하였고, 정교회에서는 바울을 기념하는 교회를 세워 1대 사도로 바울이, 2006년부터 디오니시오스 신부가 89대 교회 지도자로 기록되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많이 들어본 사랑에 대한 글이 적혀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 사랑이란? 바울에 대한 평가는 그의 삶만큼이나 매우 다양한데 그가 고린도에 온 것은 AD50년경으로 추정한다. 고린도가 BC146년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었으나 고린도의 지형적인 조건으로 BC44년에 다시 도시가 건설되어 풍요로움을 되찾고 있었으며 한 세기를 못 채워 바울이 방문하였을 때는 새로운 상업의 중심도시로 급성장하여 약 30만 명이 있는 큰 도시가 되어있었다. 아크로 고린도의 최정상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는데 아마도 1000여명의 여 사제들이 양쪽 항구에 들어오는 배들을 바라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을 것이다. 희극 배우들이 바람둥이를 가리켜 '고린도 사람같이 산다.'라는 표현이 만들어질 만큼 아크로 고린도는 아프로디테 신전 여 사제들의 역할로 문란한 도시가 되어 버렸다. 바울의 눈에 비춰진 고린도의 이런 모습들은 그에게 큰 도전이 되지 않았을까? 1년 6개월을 머물며 교회를 세우고 떠난 후에 걱정이 되어 보낸 4통의 편지가 2편으로 편집되었다는 견해도 있는데, 유실된 편지가 있는지, 편지가 편집되었는지 현재 2편만이 성경에 수록되어 고린도 전, 후서로 전해지고 있다. 고린도에 다시 방문한 바울은 아크로 고린도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을까? 2000년 전의 북적거림은 빈말이 되어 신전이 있었다는 팻말만이 남아있지만 이오니아 해와 에게 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명당임에는 틀림없다. 아크로 고린도에 올라가 보는 것이 쉽지 않은데 무작정 집을 떠나 그리스에 온 청년을 만난 덕분에 이곳까지 올라와 보게 되었다. 인생의 진로에 대한 고민과 답답한 마음으로 계획 없이 집을 나선 청년과 함께 탁 트인 양쪽 바다를 보며 청년의 답답한 마음과 생각이 다소 정리되기를 바랐었다. ↑ 아프로디테 신전 터에서 본 이오니아 해와 에게 해 그리스에서는 바울을 기독교 전도자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이콘에서 볼 수 있다. 성령이 임하는 모습을 표현한 이콘을 보면 12사도들이 그려져 있는데 가장 가운데 베드로와 바울이 그려져 있다. 실제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고 12제자에 속하지 않았음에도 기독교의 전도자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하기에 바울을 12사도에 표현한 것이다. 당시 최고의 수식어를 다 갖고 평탄대로의 앞날이 보장되어 있었던 청년이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역할에서 180도 바뀌어 예수를 전하는 자로, 종국에는 순교까지 하는 삶은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루고 있어 그에 대한 그리고 전하고자 했던 이에 대한 궁금증을 더하게 한다. ↑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는 모습 현재 고린도 유적지는 폐허 위에 다시 세운 기원 전후 시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만큼 고린도에는 로마시대의 유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신화, 역사, 기독교, 유물, 풍경 등 특별히 관심을 갖는 분야가 각기 다른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조각품 하나에 큰 관심을 가진 분이 있었다. 일명 높이 보정용 샌들을 신고 있는 조각으로 그분의 카메라가 방향을 바꾸며 하나의 조각상을 위해 수많은 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어떤 일을 하시는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재활의학과 교수이었다. 이렇듯 보는 입장에 따라 무심히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조각상이 누군가에는 큰 의미로 다가옴을 본다. ↑ 보정용 샌들 성지순례로 고린도에 오는 분들도 많이 있는데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보고 가는 곳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재판을 받았던 장소이다. 로마의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아꼈던 세네카의 형 갈리오가 새 총독으로 51년 7월 1일 고린도에 부임했을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하여 재판을 받게 되는데, 바울이 변론하기도 전에 갈리오는 소송을 중단시킨다. '유대인 여러분, 사건이 무슨 범죄나 악행에… 나는 이런 사건에 재판관이 되고 싶지 않소.' 피고가 법을 어긴 부분이 없어 재판할 필요가 없다고 명확하게 판결한 곳으로 비마(연단)라고 적혀 있다. 바울이 있었던 장소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회당에서 나와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갔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곳의 정확한 장소는 모른다. 알려진다면 순례 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겠지만.. ↑ 바울의 재판이 있었던 곳 고대 그리스 비극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두 가지 유형이 고린도와 연관되어 있다. 비극의 결정판인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와 그 후손에게 이어지는 이야기 그리고 버림을 받아 극단의 선택을 한 메데이아의 이야기가 얽힌 샘이 있다. 또한 눈이 아주 좋은 사람들이라면 시시포스가 받고 있는 형벌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어쩌면 그 형벌의 원인 제공이었던 샘이 고린도에 남겨져 시시포스가 흘리는 땀과 함께 물을 쏟아내고 있다. ↑ 글라우케 샘 ↑ 아폴론 신전 ↑ 피레네 샘 '이게 바다야? 호수지!' 에게 해의 사로닉만에는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 이용한 겐그레아 항구가 있는데 지진으로 사라져 지금은 동네 주민들이 즐기는 해변으로 남아있다. 힘들었던 고린도의 생활을 정리하고 떠나면서 마음을 새롭게 하고자 머리를 깎았던 곳이며 로마서를 건네주었던 곳이다. 여유가 있으면 지진으로 잠긴 바다 속의 부두를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남는 곳이다. ↑ 겐그레아 프로크루스테스의 잣대란 말이 있다. 사람이름인데 침대에 특수 장치를 해서 길이가 유동적인 침대에 사람을 눕혀 침대보다 작으면 늘려서, 크면 자르는 못된 짓을 하다가 테세우스에 의해 똑같은 방법으로 정리가 된다. 그래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혹은 잣대란 모든 것을 자신의 잣대로 해석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테세우스가 아테네까지 가는 길에 있었던 일로 그의 여정 일부가 고린도에서 에피다브로스로 가는 길에 펼쳐지고 있다. 주변 경치는 차로 마냥 달리기엔 아쉬움을 남긴다. ↑ 아크로 고린도에서 보는 풍경 고대 그리스인들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물리치료, 자연요양, 적당한 운동 그리고 심리치료를 병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대 종합병원이라 불린 에피다브로스에는 몸을 정결케 하기 위한 목욕시설, 치료를 위해 환자가 꿈꾸는 곳과 그 꿈을 해석하는 곳, 실내음악당, 스타디움, 연극장, 기원을 위한 신전, 숙박시설 등이 고루 갖춰져 있었다. 그리스 신앙을 우상숭배로 여겨 금지되어 버려지고 지진으로 인해 그나마 남은 것들은 대부분 소실되었는데 유일하게 완벽한 모습으로 남은 연극장이 있다. 산비탈인 것처럼 흙에 묻혀있다 발견되어 거의 완벽한 모습을 보존하고 있어서 현재는 6~9월에 연극 공연을 하는 곳으로 사용된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장소로 아늑하게 느껴지는 산기슭에 있고 앞이 탁 트여 마치 자연을 무대로 둔 느낌을 준다. BC4세기 유명한 조각가의 아들 폴리클레이토스 2세에 의해 만들어졌고 BC2세기에 확장되어 약14,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그리스 극장의 특성인 원형 오케스트라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 중앙의 제단에 서서 소리를 내어 보면 마치 마이크 앞에 서서 말하는 것 같은 느낌에 전율을 느낀다. 이제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관리하여 아쉽지만…
1050 no image 언더우드의 기도 [2]
[레벨:20]인금철
64 2015-04-02
봄 학기 부지런히 양들의 심령에 말씀의 씨를 뿌리시는 목자님들을 보면서,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부활절 예배 기도문을 올려 봅니다. The heart of Chosun that I cannot comprehend Lord, nothing is visible at this moment. Lord, you have planted us on this barren and poor land, where not even a single tree can grow tall enough. It is such a miracle that we could come to this land across the wide wide Pacific Ocean. Nothing is visible, though, in this land on which we seem to have been dropped off by your hand. Only stubbornly stained darkness can be seen. Only Korean people chained with poverty and superstition can be seen. They don't even know why they are chained, what suffering is. They just distrust us and express anger to us as we tell them how to take away their suffering, which is not suffering to them. The thoughts of Korean men are not visible. The mind of this government is not visible. We are afraid that we may not have any more opportunity to see the women commuting on kamas(-a cart covered and carried by men). And we do not see what to do. Yet, Lord! We will obey. We believe that you begin your work as we humbly obey, And that the day will come when our spiritual eyes will see your work according to your Words,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We believe that we will see the future of the faith of Korea. Although we are as if standing on a desert with bare hands, although we are condemned to be Western devils, We believe that the day will come when they will rejoice with tears realizing that they are one with our spirit in Christ, and that we all have one Kingdom and one Father in Heaven. Although there is no church to worship you, no school to study, although this land is filled with doubt of suspicion, contempt, and disdain,we believe that in the near future this land will become a land of blessing
1049 no image 메가처치 [1]
[레벨:16]한베드로
58 2015-03-19
한국 교회 팽창주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신광은 목사·칼럼니스트 강만원… '한국의 메가처치' 비판 저서 내 "신자도 목사도 굶주린 듯 더 큰 교회 추구""성서에 바탕 둔 원형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17일 마주 앉은 ‘메가처치를 넘어서’의 저자 신광은(위) 목사와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의 저자 강만원(아래)씨는 대안적 교회상에 대한 생각은 달랐지만 신의 광대함과 교회의 거대함을 혼동하는 현재 모습이 “말기적 상황” “임계점을 넘어선 일탈”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명현 인턴기자(숙명여대 미디어학부 4) 한국 개신교회의 성장세는 독보적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개척 50여년 만에 재적 교인 76만명을 기록한 세계 최대 교회가 됐다. 세계 50대 메가처치(Mega-church) 중 24곳이 한국에 있다. 성장에 관한 세계적 모델로 자리매김해 왔건만, 국내에선 환호는커녕 갈수록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 된다. 이 괴리는 어디서 비롯된 걸까. 소장신학자인 신광은 목사는 ‘메가처치를 넘어서’(포이에마)에서 메가처치를 “단지 큰 교회가 아니라, 충분한 규모를 이루고도 굶주린 듯 성장을 추구하는 병든 교회”로 정의하고 한국 교회 팽창주의의 원인과 부작용을 분석했다. 국내 1~4세대 메가처치의 실례와 그 욕망의 뿌리를 조목조목 다뤄 이 현상을 고민하려는 이들이 교재로 삼을만하다. 개신교 인터넷 언론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강만원씨는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창해)를 통해 교회가 외형주의와 목사우상화에 사로잡혔다고 일갈한다. 17일 기독교의 역사와 성경의 문체론적 분석을 통해 한국의 메가처치를 비판한 두 저자를 함께 만나 고민과 대안을 들었다. -메가처치 현상이 얼마나 심각한가. 신광은 목사= “출석신자 2,000명 이상인 곳이 전체교회의 1.7%다. 문제는 98.3%의 비메가처치 중 메가처치를 지향하지 않는 교회가 거의 없다. 잠재적 메가처치들이 부단히 성장하려 닦달하며 정글이 돼간다. 성도들은 자신의 도덕성과 관계없이 급류에 휘말리듯, 내 교회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속에 자기중심적이 되어간다. 신자들을 서로 빼오고, 사람들은 좋은 설교, 주일학교를 찾아 대교회에 몰린다. 신자는 신자대로, 교회는 교회대로 이기심을 키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더 이기적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강만원씨= “20군데까지도 다니며 교회를 고른다. 설교가 좋은가, 목사가 이름있나, 음향ㆍ영상이 좋나, 건물이 크고 쾌적한지. 선택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다만 주로 심적자극, 교회의 크기가 선택 기준이 된다. 사람 많은 교회에 가서야 ‘여기가 제일 은혜 있어’그런다.” -부작용은 무엇인가. 신=“교회가 남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 준 예수의 모습과 점점 멀어진다. 맨 정신으로 신앙을 하며 교회에서 버틸 수 없다는 이들이 늘고 있다. 그런 분들은 한결같이 나갈 교회가 없다고 한다. 이대로라면 한 세대 후 공동화가 나타난다.” 강=“외형을 택하고 본질, 즉 신앙을 버리게 된다. 사랑의 교회가 서초동에 수천억 원짜리 건물을 짓는데, 바로 옆에선 가난에 고통 받던 세 모녀가 동반자살했다. 새 건물 입장예배에서 ‘주님이 다 하셨다’고 한 오정현 목사의 말에 분노가 일었다. 왜곡이다. 예수는 이웃을 외면하고 성전을 지으라고 한 적이 없다.” -건축에 왜 집착할까. 강= “신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에 대한 확신 없이, 큰 건물을 눈으로 보고 싶어한다. ‘이렇게 큰 교회는 우연히 지어지지 않으며 이런 은혜를 받은 곳이라면 내게도 축복ㆍ구원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 “80년대 이후 교회들이 건물로 신도를 선점했다. 건축을 성장동력으로 삼은 것이다. 일단 크게 짓고 성도들에게 빈 자리를 채우라고 독려했다. 경쟁적으로 건축에 계속 투자했다. 모든 교회에 대한 모든 교회의 투쟁 상태다.” -목회자들도 규모를 키우는 역할을 했나. 신=“메가처치 현상을 이끄는 주된 인식이 규모를 신성의 증거로 보는 것이다. ‘3년 만에 3,000명을 모으다니 그 목사님은 대단해’라며 신성을 부여한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어마어마한 성장 앞에서도 사람들은 초자연적 신성을 느낀다. 이런 성장은 조용기 목사와 떼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메가처치 담임목사에게 교회의 모든 자원이 집중된다. 성장유익이 목사에게 돌아오니 교회는 계속 성장을 추구한다. 그게 싫은 사람은 입다물고 떠나는 수밖에 없다.” 강=“카리스마나 리더십을 발휘할 순 있어도 신앙이 결여된 경우는 문제가 심각하다. 집중된 권한을 누리며 변질된 신학을 강변하기도 한다. 성추행 혐의 전병욱 목사도 80명 규모 교회를 2만명 규모로 키워내지 않았나.” -메가처치가 교단과 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신= “몇 군데만 연합하면 한국 교회, 심지어 사회의 주요의제를 선점할 수 있다. 신학교도 메가처치가 교수를 마음에 안 들어 하면 골치 아파한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도 영향력이 막강하고 보수ㆍ우경화에 힘을 보태는 실정이다. 교단도 손을 못 댄다.” 강= “메가처치가 돈줄이니 당연하다. 비신도들은 자꾸 그런 모습을 통해 개신교를 평가한다. 겸손 희생 낮아짐 섬김 등을 찾아보기 힘드니 전체가 비판 받는다.” -대안은 없을까? 신=“상황인식 자체가 대안이다. 그간 마음대로 건물 짓고, 재정 쓰는 자유의 무한확대 속에 교회가 컸다. 자기의지로 이 무한자유를 제한하겠다는 결단을 해야 공교회성, 공동체성이 회복된다. 그런 뜻을 담은 반(反)메가처치 신학 선언을 제안한다. 꾸준히 교회의 지향을 고민해야 한다.” 강=“철저하게 성서에 바탕을 둔 성서적 원형교회(아르케 처치)로 돌아가야 한다. 교황의 교회, 목사의 교회도 아닌, 목사와 평신도의 계급ㆍ차별이 없는 형제들의 교회에서 계명을 실천하는 방법을 추구해야 한다.”
1048 no image 걷기에 관한 유익한 글 [1]
[레벨:20]정아브라함
40 2015-03-19
걸을수록 뇌가 젊어진다고? 걷기의 마법②[J플러스] 입력 2015-03-19 01:34:08 댓글보기3 <iframe style="BORDER-BOTTOM: medium none; BORDER-LEFT: medium none; HEIGHT: 21px; OVERFLOW: hidden; BORDER-TOP: medium none; BORDER-RIGHT: medium none" src="//www.facebook.com/plugins/like.php?href=http://jplus.joins.com/ARTICLE/Article.aspx?listid=13631591&width&layout=button_count&action=like&show_faces=true&share=true&height=21"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 scrolling="no"></iframe>Tweet 글자크기 J플러스의 게시물은 중앙일보 편집 방향 및 논조와 다를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저는 영화 '와일드'(1월 22일 개봉, 장 마크 발레 감독) 감상을 계기로 '걷기'로 삶의 새로운 전환점을 찾은 사람들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영화의 기초가 된 원작 '와일드'의 저자인 셰릴 스트레이드 뿐만 아니라 작가 파울로 코엘료와 서영은, 그리고 『나는 걷는다』의 저자인 베르나르 올리비에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제가 관심을 가진 것은 걷기가 어떻게 그들을 그토록 바꾸어 놓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서론만 쓰고 마무리를 못했습니다. 한때 삶을 포기할 정도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그들이(파울로 코엘료와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자살을 시도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종교나 혹은 다른 약물의 힘이 아닌 오로지 죽기살기로 매달린 걷기의 힘으로 다시 살아갈 용기를 되찾았는지 조금 더 파헤치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걷기의 마법같은 힘을 더 살펴볼까 합니다. 1. 걷기, 어두운 생각을 사라지게 하다 "내게 필요한 건 깨끗한 최후였다." (『떠나든 머물든』,올리비에 베르나름 지음) 참 비장하지 않습니까. 나이가 거의 예순이 되었을 때, 은퇴와 아내의 죽음으로 절망과 고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던 올리비에 베르나르(77)가 한때 품었던 다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스스로 세상을 그렇게 하직할 결심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우연히 몇년 자신이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여행책 『여정에서』(자크 라카리 에르 지음)를 떠올리고, 2300㎞의 도보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단지 걷기 위해, 뭔가 배우기 위해 떠난다기 보다는 자신의 은퇴 프로그램을 세우겠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걸으면 걸을수록 그는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체험을 하기 시작합니다. 나이에 대한 자신의 편협했던 생각도 떨쳐 버리면서 말이죠. "나는 완벽하고 유연한 존재로 거듭나고 있었다. 근육이란 약간 자극만 하면 생겨나서, 나이하고는 상관없었다. 몸이 다시 만들어지면서 나도 다시 젊어졌다. 내 신체기관은 엔도르핀이라 부르는 그 행복의 호르몬을 끝없이 만들어냈다. 그건 배낭의 무게에도 불과하고 나를 거의 춤추게 만드는 자연적이고 유익한 마약 같았다." 마약이라니요. 아마도 이런 게 마라톤 뛰는 사람들이 달리며 경험하게 된다는 희열의 경지, 아마추어 마라토너인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빠져들게 한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와 같은 것인가 봅니다. 그러니까 올리비에 베르나르의 그것은 '워커스 하이'( Walker's High)라 할 수 있겠네요. 걷는다는 것은 분명히 몸을 움직여 하는 일인데, 지루해보이는 그 단순하고 반복적인 몸의 움직임이 정신적 쾌감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베르나르는 또 이런 말을 합니다. "걷는다는 것은 육체적이기보다 정신적 훈련임을 그때 깨달았고, 이후에도 수없이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두운 생각을 사라지게 한다. 나는 눈으로, 몸으로, 세상을 흡수했다. " 걷는 일이 고통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루에 수십 킬로미터씩 걷는 일은 충분히 그럴 법한데 베르나르는 펄쩍 뜁니다. 산티아고 길에 "이제 곧 당신의 고통은 끝이 납니다"라고 쓰여진 푯말이 있다는데, 그는 이런 말뚝을 보았을 때 깊은 분노마저 느꼈다고 말합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 위에 오줌을 누었다고 하지요. 왜냐하면, 그의 느낌은 고통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랍니다. 그에게 걷기는 고통이 아니라 새로운 기쁨과 환희였기 때문입니다. 2. 살아 있다는 감각을 일깨우다 사실, 걷기를 이렇게 예찬한 사람은 그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국내에서 2002년에 출간된 프랑스 사회학자 다비드 드 브르통의『걷기 예찬』은 '걷기'의 바이블로 통합니다. 이 책을 감명깊게 읽은 독자들이 한 둘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후에 그는『느리게 걷는 즐거움』도 펴냈는데, 브르통은 걷기를 단지 건강을 위한 운동으로만 보는 편협한 시각에 반대합니다. 그는, 몸의 육체적인 감각이 정신을 더 넓은 세계로 이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고 한 말은 그런 맥락입니다. 그는 걷기가 '내 몸과 만나는 시간이며, 내 정신과 영혼을 만나는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최근 『느리게 걷는 즐거움』을 읽는 저는 그가 걷기를 감각의 예술로 언급한 대목('온몸의 감각이 열리다')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걸을 때 우리는 시각뿐만 아니라 냄새와 소리, 촉감을 만끽하며 예기치 않은 차원으로 펼쳐지는 감각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걷기는 무엇보다도 감각의 예술이다…살아 있음을 열정적으로 느끼고 인간의 조건이 무엇보다도 신체 조건임을, 세상의 기쁨이 육신의 기쁨이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고 구태의연한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서 얻는 기쁨임을 절대 잊지 못한다." 3.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는 자유 걷기는 분명히 체력을 소모하는 일인데, 그 일이 큰 기쁨이 되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요. 걷기를 예찬한 프랑스의 철학자 프리데리코 그로(신기하게도, 걷기 얘기를 하다보니 프랑스인들이 연이어 출동합니다)는 그의 저서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에서 그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걸을 때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잠시 잊고, 내 몸으로 길을 밀고 나가며 순수한 존재감을 되찾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걷기를 어린아이의 놀이에 비유합니다. "걸을 때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냥 걷기만 할 뿐이다... 걷기는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고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도록 함으로써 어린 시절의 그 영원성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걷기가 어린아이의 놀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날의 날씨와 햇살, 나무의 크기, 푸른 하늘을 보며 감탄하는 것이 걷기다. " "여러 날, 몇 주 동안 걸을 때 우리가 결별하는 것은 단지 직업과 이웃, 사업, 습관, 근심, 걱정만이 아니다. 걷는다는 것은 우리의 몸만 필요로 한다...두 다리만 있으면, 그리고 볼 수 있는 두 눈만 있으면 충분하다. 걸어야 한다. 혼자 떠나야 한다. 산을 오르고 숲을 지나가야 한다." 놀랄 만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누구나 경험해봤음직한 그런 내용 아닌가요. 브르통도 『느리게 걷는 즐거움』에서 똑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걷기는 정체성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더 이상 자신의 얼굴, 이름, 개성, 사회적 지위 등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걷기는...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압박과 사회적 그리고 개인적 책임감으로 인한 긴장을 풀어준다." 4. 걷기는 어떻게 뇌를 자극하는가 걷기가 부리는 마법의 힘에 대해 과학자들은 두뇌와 연관지으며 설명합니다. 걸을 때 지속되는 다리의 움직임이 뇌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사실 운동이 중요한 것은 단순히 신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경 세포를 활성화하는 효과가 있어 궁극적으로 뇌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노인들이 치매에 걸리지 않으려면 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가, 운동이 뇌 자극을 해주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많은 의사들은 노년엔 더욱 걷는 게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자녀들은 연로하신 부모님께 택시비를 드리며 '힘들게 버스 타거나 걷지 마시라'고 당부하는데, 사실은 그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진심으로 부모님의 건강을 위한다면, 그분들이 스스로 걸어 다니려 하시는 것을 굳이 말리지 말라는 조언입니다. 『걸을수록 뇌가 젊어진다』는 책은 일본 교토대 명예교수인 오시마 기요시(88)가 쓴 책입니다. 의학박사인 그는 두뇌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소개하며, 걷기와 뇌의 관계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고 합니다. 주목할 것은, 그 역시 걷기를 단순히 운동의 차원에서만 권하지는 않고, 창의적인 두뇌활동을 위해 걷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파했다는 점입니다. 책은 손바닥 만한 크기에 아주 얇은 분량이지만, 걷기의 힘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논지는 분명합니다. '즐겁게 걸으면 나이가 들어도 뇌가 늙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뇌를 속이 꽉 찬 만두에 비유하는데, 만두소를 에워싸고 있는 만두피와 같은 게 대뇌변연계라고 설명합니다. 대뇌변연계의 가장 바깥쪽 표피는 대뇌신피질인데, 대뇌신피질이야말로 인류 진화의 결실이라고 말합니다. 생명 활동과 관련된 뇌간을 에워싸는게 대뇌변연계라면, 이것을 둘러싸고 대뇌신피질이 '사고하는 뇌'라는 것입니다. 창조적인 사고에 대뇌신피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죠. 걸을 때 느껴지는 쾌감은 뇌간을 통과해 대뇌변연계에서 대뇌신피질에 도달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걸을 때 우리는 끊임없이 두뇌의 광범위한 부위를 계속 자극하고 단련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는 사랑을 할 때 느끼는 설렘과 걷기가 뇌의 광범위한 영역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사람이 걷기 위해서는 눈으로 보고, 손을 흔들며 균형을 취하고, 피부로 공기의 온도를 느끼고, 코로 냄새를 맡으면서 온몸의 감각을 총동원해야 한다. 이런 정보가 대뇌신피질에 전달되는 것이다…걷는 동안에 우리의 뇌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바로 이것이 걸으면 뇌 나이가 젊어지는 이유다." 그에 따르면, 몸을 사용하지 않으면 근육이 굳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뇌도 쓰지 않으면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데, 뇌의 신경회로망을 자극하는 최고의 방법이 걷기라는 것이다. "자신감, 바로 이것이 포인트다. 걷는 동안 적극적인 마음가짐과 의욕이 솟는다. 몇 시간동안 머리에 쥐가 나게 하던 수학 문제가 잠깐 동안의 산책으로 스르르 풀리는 경우가 있다. 걷기의 힘이다." 도파민은 뇌에서 분비되는 일종의 '쾌감 물질'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도판민이 뇌에 방출돼야 우리는 쾌감을 느끼고 의욕을 갖게 되지요. 아름다운 음악을 듣거나 훌륭한 경치를 접했을 때 우리는 감탄사를 연발하게 되는데, 그것은 도파민이라는 물질이 뇌 전체에 쾌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시마 기요시 선생은 걷기야말로 도파민이 분비되기 쉬운 뇌 속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등 공신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트레스가 쌓일 때, 자신감을 잃었을 때, 몸이 찌부드드할 때, 마음에 분노가 일렁일 때, 할 일이 없을 때, 인간관계로 머릿 속이 복잡할 때 '일단 걸으라'고 조언합니다. 자, 어떻습니까. 셰릴 스트레이드, 파울로 코엘료, 올리비에 베르나르가 산티아고 길을 걷고 돌아와 어떻게 작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인지 의문이 좀 풀리시나요. 한때 삶의 고단함에 기력을 잃었던 그들은 세상과, 아니 자기 자신과 맞장뜨자는 비장한 각오로 걷기에 자신을 내던진 다음 베스트셀러 작가로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런 극적인 변화는 걷기가 준 큰 선물임에 틀림없습니다. (누구나 다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가장 큰 선물은 작가가 되었다는 결과 그 자체보다, 그들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좌절감에서 벗어난 것, 살아 있다는 희열을 충만하게 느낀 그 순간의 체험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제 봄비가 촉촉히 내렸습니다. 겨우내 몸과 마음을 움츠리게 했던 추위도 저만치 물러갔습니다. 이제, 우리 봄길을 함께 걸어볼까요. 책상 앞에서 컴퓨터 키보드 두드리며 떠드는 이론은 이제 그만! 저도 이번 봄엔 걷기의 마법을 온몸으로 체험해 볼까 합니다.
1047 no image 일본을 배우자
[레벨:20]정아브라함
37 2015-03-04
다음은 한겨레에 실린 운전습관에 관한 일본인들 이야기입니다. 자동차 문화1 - 일본이 우리보다 부자인 까닭 낙서장 2015/03/03 16:10 http://blog.hani.co.kr/jinwoongyong/46617 일본에서 차를 빌려 운전할 때의 일이다. 일본은 우리와 다르게 차들이 도로 왼쪽으로 다니기 때문에 첫 운전에 겁이 덜컥 났다. 운전대가 오른쪽에 있다 보니 운행 중 차가 자꾸 왼쪽으로 치우쳤다. 깜빡이등과 와이퍼 조작하는 게 반대로 달려있으니 깜빡이를 켜려다가 와이퍼를 켜기 일쑤였다.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우리 좌회전 하듯 우회전을 신호 받고 크게 돌린다는 점이었다. 차선이 없는 골목길에서 우측통행하다가 좌측통행하는 상대방 차량과 정면으로 부딪힐 뻔도 했다. 그러나 진땀나는 운전도 잠시뿐이었다. 몇 십분 뒤에는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운전할 때보다 편안한 느낌이었다. 일본에서의 운전이 우리보다 편안한 이유는 그들의 느긋한 운전 속도 때문이었다. 속도제한이 시내는 시속 60km, 고속도로는 시속 80km였다. 하지만 처벌이 무서워서 속도를 안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감시카메라가 없는 구간이 많았는데도 과속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경적을 사용하지 않았다. 조급하게 달리는 차도 없었고 설령 그런 차가 있으면 양보들를 해줬다. 그렇게 일본에서의 운전은 마치 꿈을 꾸듯 천천히 조용히 편안하고 느긋했다. 그 꿈은 한국으로 돌아와 주차장에 주차해 두었던 차를 빼고 나오는 순간부터 단번에 깨졌다. 내 뒤에선 빨리 가라는 경적 소리에 헤드라이트가 불을 뿜고, 앞차 간격을 조금이라도 벌리면 그 틈에 깜빡이도 켜지 않고 새치기를 했다. 조급하게 달리는 차들이 많았고 설령 느긋하게 가는 차가 있으면 왕따를 시켰다. 일본을 모방하기에 급급했던 우리가 아닌가? 그런데 왜 자동차 속도는 일본을 따르지 않을까? 빨리 가려고 위협과 위법을 반복하는 차들을 보면 대개 비싼 차들을 많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빨리 가려는 것은 이해하지만 부자들이 왜 더 조급해 할까? 많이 가질수록 더 불안하기 때문일까? 그런 불안한 마음은 가난한 마음이다. 물질이 부유해지기보다 마음이 부유해지기가 그토록 어려운 일이란 걸 새삼 우리나라 도로에서 폭주를 하는 사람들에게서 알게 된다. 일본이 우리보다 부자인 까닭은 단지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자동차를 천천히 몰기 때문이다. * 일본차가 연비가 좋다는데 알고보면 천천히 몰아서 더 그런 것이다ㅋㅋ
1046 no image 건강에 관한 글
[레벨:20]정아브라함
29 2015-02-26
스트레스를 받으면 암 등 각종 질환에 쉽게 노출된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스트레스가 건강에 나쁘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왜 나쁜지는 명확히 모른다. 결론부터 말하면 스트레스가 우리 몸에 좋지 않은 것은 신체의 자체 방어무기인 면역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는 질병과 싸우는 면역체계에 영향을 미쳐 외부의 세균, 바이러스 등의 병원체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만든다. 실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은 환절기마다 감기에 잘 걸리고, 치주염 등이 악화돼 고생한다는 연구결과가 많다. 짧은 기간의 스트레스는 백혈구의 이동을 활성화해 건강에 이롭다는 몇몇 보고도 있지만 스트레스 요인에 장기적으로 노출되면 코티솔 호르몬의 장기간 방출로 초기 면역반응을 억제하고, 백혈구 분화에도 지장을 초래하는 등 면역계에 이상을 야기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특히 스트레스는 면역체계의 핵심인 ‘흉선’이란 조직을 위축시키고, 세로토닌 아세틸콜린 등 뇌 내 신경전달물질의 분비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 때문에 인체의 면역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져 세균이나 바이러스, 박테리아 등 각종 병원체에 쉽게 감염된다. 감기나 폐결핵 등의 감염성 질환은 물론 류머티즘, 암 등의 발생도 면역력 약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면역력은 스트레스 외에도 과로, 수면부족, 과음, 과도한 운동, 잘못된 식습관, 전자파나 환경호르몬에의 노출 등으로도 저하된다. 면역력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은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으로 이뤄진 자율신경이다. 자율신경은 사전적으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신경으로 몸속의 장기 등을 지휘하는 기관이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심장이 뛰고, 위에서 소화액을 내보내며 연동운동을 시키고, 간의 해독기능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자율신경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생명을 관장하는 기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자율신경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두 가지의 신경은 길항상태(서로 맞버티고 있는 상태)에서 조절되고 있다. 교감신경은 일을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흥분하거나 고민할 때 작용하는 신경이다. 부교감신경은 휴식을 취하거나 음식을 먹거나 자고 있을 때 몸의 안정을 유지케 해주는 신경이다. 이 두 신경의 길항상태가 만들어내는 자율신경이 우리 몸속 대부분 세포들의 활동을 지배하고 있다. 인체의 화학 방어무기인 백혈구도 예외는 아니다. 백혈구는 과립구, 임파구 대식세포 등으로 이뤄져 있다. 그중에서도 과립구와 임파구는 방어기능의 최전선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과립구는 활성산소를 이용해 세균 등과 같은 이물질을 공격, 분해 처리한다. 임파구는 항체를 만들고 이를 무기 삼아 바이러스처럼 비교적 작은 외적을 공격한다. 암세포와 싸우는 것도 임파구다. 그런데 과립구는 교감신경의 지배를 받고, 임파구는 부교감신경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백혈구를 이용한 인체의 면역체계가 최상의 상태에 도달하려면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과립구가 지나치게 많아지면 오히려 우리 몸을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이 생길 수 있으며, 임파구가 저하돼 있으면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인체가 대항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인들 대부분은 교감신경이 너무 항진돼 있고, 부교감신경은 너무 저하돼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직접적으로 백혈구의 면역기능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흔히 안정을 취하면 면역력이 높아진다고 하는 것도 교감신경이 지나치게 항진돼 있는 현대인들의 부교감신경이 활성화 되며 면역기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그래서 많은 전문가는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 적당한 운동으로 교감신경을 자극하는 한편 부교감신경도 활성화될 수 있도록 스트레스를 덜 받고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생활습관을 가지라고 권한다. <참고서적=아베 도오루의 ‘면역혁명’>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1045 故 고토 겐지 씨가 생전 인터뷰서 전한 ‘간증’
[레벨:17]정철헌
39 2015-02-10
“선택 직면할 때 말씀 믿고 결단… 분쟁 지역 관심 가져 달라” IS에 의해 참수된 것으로 알려진 일본 기독 언론인 고토 겐지 씨의 신앙과 사연이 알려지면서, 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그는 시리아로 출국을 하루 앞둔 지난해 5월 27일, 일본 크리스천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만약 취재하다가 목숨을 잃어버리거나, 누구에게 도 간호를 받지 못하고 죽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국에서 아버지 되신 주 예수님이 맞아주시면 외롭지 않겠다’는 다소 소극적인 생각으로 세례를 받기로 결심했었다”면서 “우리가 매일 살아 있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간증했다. 세례를 받은 이후 고토 씨는 수많은 기적을 체험했다고 한다. 아직 취재에 미숙했던 그가 당시 매우 혼란스럽던 체첸공화국으로 홀로 향했 다. 체첸행 비행기 옆에는 스페인에서 온 기자들이 있었다. 고토 씨는 어디에 묵을 것인지, 통역은 어떻게 할 것인지 아무 것도 정하지 못한 상황이었으나, 그들은 처음 만난 젊은 일본인 언론인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주었다. 당시 고토 씨는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체첸에서 취재를 하기는커녕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것을 그 때도 느꼈다”고 했다. 고토 씨는 “시리아 및 분쟁 지역에서 취재 중 중요한 선택에 직면할 때가 있다. ‘어느 길로 가면 안전하게 목표를 수행할 수 있을까’ 고민한 다. 그럴 때면 항상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 4:7)’는 말씀이 뇌리를 스친다. 선택을 해야 할 때 ‘나는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지 않 은가’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하나님 아버지는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믿고 결단한다”고 했다. 고토 씨가 취재를 갈 때마다 놓지 않고 들고 다니는 성경이 있다. 그는 수십 년 전 A교회 목사에게 받은 이 성경을 늘 소중하게 보고 있었다 . 이 성경에는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는 말씀이 적혀 있다. 겐지 씨는 “이 말씀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일을 하고 있다. 비참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많은 현장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반드시 나를 도와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그는 “(내전 중인 지역에) 관심을 계속 가져줬으면 좋겠다. 시리아에서 일어나는 일은 ‘먼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거나 ‘우리 일본인(혹은 한 국인)과는 관계 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 시리아 사람들이 제가 카메라를 돌렸을 때 이야기를 해 주었을까? 그것 은 그들이 이 영상을 통해서 일본(혹은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기 때문”이라며 수많은 강연을 통해 강조하기 도 했다. 일본 크리스천투데이는 “지금 고토 씨의 가족에게 애도의 뜻을 표한다. 슬픔에 빠진 가족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셔서 위로 와 평안을 주시기를 기도한다”고 애도를 표했다. 국제 언론인으로 활약해 온 고토 겐지 씨는 영상제작회사를 거쳐 1996년 통신사 ‘인디펜던트 프레스’를 설립했다. 이후 세계 각국의 분쟁 지역, 빈곤과 에이즈 문제 등을 위주로 취재해 왔다. 그가 전한 현장 소식은 NHK, 아사히 신문, TBS 등의 매체를 통해 보도됐다. 크리스천투데이 / 강혜진
1044 다시금 돌아보고, 다시금 내다보며...
[레벨:20]인금철
80 2015-02-09
오늘(2.9) 신문에 난 기사인데, 많이 생각하게 하네요. 지난 번 오베드로 선교사님 보고에 20세기 초반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미국의 많은 독신 자매 선교사님들이 생각났습니다. 기사의 주인공이 크리스챤인지, 선교사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런 스피릿이 미국 젊은이들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신선한 도전이고 충격이 됩니다. 미국의 강대한 힘은 이런 정신에서 나오지 않을까 생각이 되네요. 우리에게 하나님은 2041년까지 10만 선교사 파송의 비전을 주셨는데, 성령께서 청년 학생 형제,자매님들의 심령에 만민구원의 환상을 부어 주시고, 세계로 나가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도 새롭게 각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그녀의 죽음은 사실일까, 속임수일까. 지난 6일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미국인 민간인 인질 카일라 뮬러(26·사진)가 요르단이 폭격해 무너진 건물에 깔려 숨졌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요르단 내무장관 나세르 주데흐는 트위터에 “테러리스트들이 수십년 동안 써먹어 온 낡아빠지고 역겨운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요르단의 공격으로 애꿎은 희생자만 발생했다고 몰고가려는 선전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도 “IS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어떤 증거도 없다”고 밝혔다 뮬러는 대학 졸업 후 인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 분쟁지역에서 구호활동가로 일했다. 시리아에서는 폭격으로 학교가 파괴된 아이들과 함께 예술작품을 만들며 치유에 힘썼고, 흩어진 가족들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뮬러는 평소 ‘내가 살아 있는 한 이러한 고통을 정상적이거나 받아들일 만한 일로 만들지 않겠다’고 말했다”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이 그의 일관된 삶이었다”고 보도했다. 뮬러는 시리아 북부 알레포 지역으로 떠났다가 2013년 8월4일 IS에 납치됐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7일 “IS는 이미 지난해 7월 뮬러의 부모에게 미국에 수감돼 있는 테러 용의자 아피아 시디퀴가 석방되지 않으면 뮬러를 살해할 것이라고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뮬러는 시리아 북부 알레포 지역으로 떠났다가 2013년 8월4일 IS에 납치됐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7일 “IS는 이미 지난해 7월 뮬러의 부모에게 미국에 수감돼 있는 테러 용의자 아피아 시디퀴가 석방되지 않으면 뮬러를 살해할 것이라고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1043 no image 성탄합창 파트별 연습용 [3]
[레벨:20]서정수
50 2014-12-13
1042 no image 성탄시를 올려 봅니다 (- -;;) [4]
[레벨:17]김진화
144 2014-12-12
1041 no image 그대를 향한 serenade [7]
[레벨:14]하마리아
109 2014-12-01
띵띵띵 띵띵띵 띵띵띵 뚝뚝뚜뚜 뚝뚝뚜뚜 `♪ 천만년이 지나도 마음 변함 없어요~ 주를 향한 나의 마음 변함이 없을꺼에요~ 라라라라라라라라~~우우우후 ♬ 나의 삶을 이렇게 축복할 수 있을까 오직 주님만이 나의 삶을 채워줄 수 있어요 라라라라라라라라~~우우우후 ♬ 아무것도 없는 내 삶에 오셔서 신실한 약속 말씀해주셨네 주님만이 그 약속 지킬 수 있어요~ ♪ 주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어요~ ♪ 오오오~ 사랑합니다~ 으음~~ 오오오~ 오오~ 주님 사랑합니다~~ *그대가 나에게 보내는 세레나데 ♪ 너는 복의 근원~ 너는 나의 의미 ♪ 너는 나의 시작~ 너는 나의 계획 ♬ 너를 통해~ 세상을 복되게 하리라~ 너를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하리라~라라 너는 복의 근원~ 너는 나의 의미~ ♪ 너는 나의 시작~ 너는 나의 계획~ ♬ 너를 통해 세상을 복되게 하리라~ 음~~ 너를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하리라~~ 아~~ 너는 복의근원. 너는 나의 의미. 너는 나의 시작. 너는 나의 계획~~ 우우우우우~~ 우우우우우우~~ 너는 나의~~ 우후후~ ^-------^ * 주일 특송을 들으며, 주님과 우리가 나누는 세레나데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적어봅니다.. 그대는 나의 백합화.. 나도 그대의 백합화~ 아가서의 서로를 향한 사랑고백이 떠오르는 찬양인것 같아요 특별히.. 주님께서 '너는 나의 의미...' 하실때 심장이 터질듯 두근거렸습니다.. 오늘은 첫눈이 왔어요.. 우리의 그대이신, 주님과의 아름다운 첫사랑을 떠올리는 하루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내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아가2.2
1040 no image 책을 또 찾습니다 [2]
[레벨:16]한베드로
90 2014-11-22
1039 no image 기적을 만들어낸 세 여인!! [3]
[레벨:20]인정훈
98 2014-11-10
기적을 만들어낸 세 여인!! 보스턴의 한 보호소에 앤(Ann)이란 소녀가 있었다. 앤의 엄마는 죽었고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아빠로 인한 마음의 상처에다 보호소에 함께 온 동생마저 죽자 앤은 충격으로 미쳤고 실명까지 했다. 수시로 자살을 시도하고 괴성을 질렀다. 결국 앤은 회복 불능 판정을 받고 정신병동 지하 독방에 수용되었다. 모두 치료를 포기했을 때노(老)간호사인 로라(Laura)가 앤을 돌보겠다고 자청했다. 로라는 정신과 치료보다는 그냥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날마다 과자를 들고 가서 책을 읽어주고 기도해 주었다 그렇게 한결같이 사랑을 쏟았지만 앤은 담벼락처럼 아무 말도 없었고, 앤을 위해 가져다 준 특별한 음식도 먹지 않았다. 어느 날, 로라는 앤 앞에 놓아준 초콜릿 접시에서 초콜릿이 하나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용기를 얻고 로라는 계속 책을 읽어주고 기도해 주었다. 앤은 독방 창살을 통해 조금씩 반응을 보이며 가끔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얘기했고, 그 얘기의 빈도수도 많아졌다. 마침내 2년 만에 앤은 정상인 판정을 받아 파킨스 시각장애아 학교에 입학했고, 밝은 웃음을 찾았다. 그 후, 로라가 죽는 시련도 겪었지만 앤은 로라가 남겨준 희망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으로 시련을 이겨내고 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졸업했고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에도 성공했다. 수술 후 어느 날, 앤은 신문기사를 봤다. "보지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를 돌볼 사람 구함!" 앤은 그 아이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로 결심했다. 사람들은 못 가르친다고 했지만 앤은 말했다. "저는 하느님의 사랑을 확신해요." 결국 사랑으로 그 아이를 20세기 대 기적의 주인공으로 키워냈다. 그 아이가 "헬렌 켈러" 이고, 그 선생님이 앤 셜리번(Ann Sullivan)이다. 로라는 앤과 함께 있어주고 앤의 고통을 공감하면서 앤을 정상인으로 만들어냈고, 앤도 헬렌과 48년 동안 함께 있어주었다. 헬렌이 하버드 대학에 다닐 때는헬렌과 모든 수업에 함께 하면서 그녀의 손에 강의내용을 적어주었다. 빛의 천사 헬렌 켈러는 3중 불구자이면서도 절망하지도 않고 삶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왕성한 의욕과 꿋꿋한 의지를 가지고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 스스로 피눈물나는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하버드대학을 졸업하던 날, 헬렌은 브릭스 총장으로부터 졸업장을 받고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설리번 선생님도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식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헬렌의 뛰어난 천재성과 설리번 선생님의 훌륭한 교육을 일제히 찬양하였습니다. "항상 사랑과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 앤 설리번 선생님이 없었으면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토록 의지가 강한 그녀가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책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만약 내가 사흘간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엔..... 나를 가르쳐 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겠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서 아름다운 꽃과... 풀과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습니다. 둘째 날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터 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엔..... 아침 일찍 큰길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점심때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의 상품들을 구경하고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사흘간 눈을 뜨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상처에 대한 적절한 분석과 충고가 아니라 그냥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한 마음은 충고를 주기보다 자신을 줄 때 아뭅니다. 좋은 충고보다 좋은 소식이 중요합니다. 헬렌켈러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으나 그녀의 스승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를 안고 있는 헬렌켈러를 전세계가 놀라게 한 인물로 만든 사람이 바로 앤 설리반 (ANN SULLIVAN)이다. 헬렌켈러를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은 감각기관 뿐이었다. 헬렌켈러는 손가락으로 상징적인 터치를 통하여 말하는 법을 배우고 열심히 공부하여 박사도 되고 영감을 주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앤 설리반은 늘 되풀이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시작하고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 실패할 때마다 무엇인가 성취할 것이다. 네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할 지라도 무엇인가 가치있는 것을 얻게 되리라. 시작하고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 절대로 포기 하지 말라. 모든 가능성을 다 시도해보았다고 생각하지말고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1038 no image 책을 찾습니다. [2]
[레벨:16]한베드로
69 2014-11-08
1037 no image [책소개] 존 스토트,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레벨:20]서진우
60 2014-10-15
존 스토트,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이 책은 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책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반박을 하기보다는 자신의 견해를 담담하게 적고 있습니다 여섯 가지 이유 중 첫째는 예수님이 찾으셨기 때문입니다 거부하는1인을 줄기차게 쫓아오시는 예수님을 천국의 사냥개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씀에 기초해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의 변화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역이니라 말씀과 훗날 그의 서신서에 근거해 예수님께서 그의 생각을, 예수님의 소문을 통해 기억을,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양심을, 탐심으로 고통하도록 함을 통해 영혼을, 내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감을 통해 끊임없이 예수님께로 돌이키도록 이끄셨음을 논증합니다 다메섹에서 사울은 그저 더는 도망가지 못하고 항복한 것 뿐이지요 예수님이 지금도 나를 쫓아오고 계신가 생각해보고 예수님이 아직까지 나를 쫓아오고 계시다는 사실에 섬뜩하면서도 감격스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두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본인에 대한 주장을 다루고 있고 다음은 십자가의 의미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음으론 성경이 나를 비롯한 인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고 다음으론 구원의 의미와 필요성을 다루고 있고 인간의 욕구의 측면도 다루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책이 얇고 각 장이 간결합니다 기독교를 믿는 이유... 우리가 심심찮게 접하는 질문이고 개인 스스로 고민이 될수도 있는 부분인데 이 책은 좋은 뼈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초기에 있는 양들부터 성숙한 리더들에게까지 모두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1036 no image 가을의 기도
[레벨:20]인금철
43 201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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