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관악5부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055 no image 시카고 본부 방문 [1]
[레벨:20]정아브라함
94 2010-01-04
1054 no image 키에프 역사보고서
[레벨:20]정아브라함
52 2010-02-08
다음은 본부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키에프 역사보고입니다. 현대의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는 것같습니다. 2009년도 키에프 UBF 역사보고 2009년도 키에프 센타의 요절 말씀은'첫 사랑을 회복하라'(요한 계시록 2:4,5) 였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주님과의 첫 사랑의 관계성을 새롭게하며 내적 외적으로 성장케 하여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이시간 2009년도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를 돌아보며 주님 주신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세계선교 1) 터키 CIS 지부장 수양회 1월 초에 2009년도 준비를 위한 CIS 지부장 수양회를 1월 17-19일까지 터키의 이즈밀(Izmir)에서 가졌습니다. CIS 65명의 지부장 및 현지 리더 목자들 그리고 외부에서 27명이 참석하여 요한 계시록 2장 말씀을 공부하고 초대 7교회를 순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동안 CIS 지부장 및 리더들은 여러모로 지쳐 있었고 서로서로 위로와 권면이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광대한 영토와 교통의 불편함등으로 서로 만나서 기도할 기회가 적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기도끝에 CIS 지역의 긴 겨울로 인한 침체된 기분도 전환 시키고 짧은 시간이지만 따뜻한 곳에서 햇볕도 받을 겸 에게해가 바라보이는 터키의 에베소 지역에서 수양회를 갖았습니다. 갑바도기아의 카타콤 및 초대교회의 7 교회를 심방하며 초대교회 성도들의 아름답고 올곧은 신앙과 정신을 배우고 우리들의 심령을 새롭게 하는 잊지 못할 아름다운 수양회였습니다. 2) 특강 2월에 미국 톨리도 UBF의 Paul Hong 선교사님과 Sarah Hong 선교사님을 초청하여 2일간에 걸쳐 다윗의 영성에 대한 특강을 가졌습니다. 이 특강을 통하여 올바른 성경적 리더쉽에 대하여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자주 이런 기회를 통하여 이땅 가운데 성경적 가치관을 지닌 훌륭한 리더들이 많이 설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합니다. 3) 유학생 선교사 파송 하나님께서 9월에 K목자를 이스탄불 UBF에서 섬기고 있는 보스포러스 대학에 입학하도록 도우셨습니다. K목자는 어리지만 그동안 신실하게 키에프 제자양성 역사에 동참하였습니다. 바이올린을 통하여 오케스트라를 섬기고 헌신적으로 역사를 섬기며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가 미국 시민권자이지만 이슬람권 제자 양성 역사를 영접하고 터키로 간것은 큰 성령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제임스 포인트 & R 선교사 그리고 M 선교사님과 함께 견고한 성령의 그릇을 이루며 터키 제자양성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게 하시길 기도 합니다. 4) 제임스 포인트 & R 선교사와 공부하던 이스탄불 UBF의 L자매가 터키 극우자들에 의한 핍박을 피하여 키에프 UBF로 오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이 자매가 어리지만 핍박의 상황속에서 주님께 대한 신앙을 담대히 지킨것을 주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와 같은 신앙을 지니고 주님의 이름을 포기 하기보다 자기의 꿈을 포기한 그녀의 순수한 믿음으로 인하여 큰 감동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입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키에프 외국어 대학교에 한 명의 외국인 T/O를 만드시고 L 자매가 입학 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어려운 상황속에서 변함없이 충성하고 제자양성에 온마음을 드리는 제임스 포인트 및 T국 선교님들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이분들을 크게 축복 하시고 주님의 역사에 귀하게 사용하여 주시길 기도 드립니다. 5) 타국 수양회 참석 역사: 주님께서 은혜 주셔서 이스탄불/캐나다/중앙 아시아/모스크바/시카고YDC/런던 UBF의 수양회 및 성탄 예배, 사랑의 교회 지도자 세미나등 세계 각국의 수양회에 목자 및 선교사들이 참석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수 있도록 하신 것을 감사 드립니다. 2. 제자양성 역사 1) 주일 예배 말씀 역사 2009년도에 마가복음과 갈라디아서를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창세기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 양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양무리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풍성한 말씀의 역사를 이루어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부족하고 허물진 저와 김 사라 선교사를 리더들의 말씀을 돕는 성경 선생이요 말씀의 조력자로 사용하여 주신 것을 감사 드립니다. 주일 말씀과 아침 일용할 양식 메신저로서 아브라함 블라드, 알렉산더 노아, 다비드, 요나단, 사무라이 슬라바, 워치맨 디마 목자를 세우시고 꾸준히 말씀을 공급하여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계속하여 주님께서 이들을 이 시대 하나님의 말씀을 지극히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말씀의 종들로 성장하도록 도우시길 기도 드립니다. 2) 5 Felloship을 통한 역사 저희는 현재 5개의 Front로 나누어 제자양성 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1)키에프 공과 대학 -1팀(요나단 목자), (2)공과대학 2팀(사무라이 슬라바) (3)키에프 쉐브첸코 대학 1팀 및 English Club(올레나 목자), 키에프 쉐브첸코 대학 2팀(워치맨 디마) (5)줄라니 선한 사마리아 팀(다비드)) 이를 통하여 저희는 키에프 대학과 키에프 공과대학에 말씀의 씨앗을 꾸준히 뿌릴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사용 하시어서 매주 100-120팀의 일대일을 꾸준히 이루게 하셨습니다. 또한 리더들이 목자의 심정과 책임성을 지닌 제자들로 성장하고 이들의 제자 양육을 통하여 많은 가능성 있는 제자들이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특별히 다비드 & 빅토리아 목자 가정과 Mother스타니슬라바 목자님께 버려지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주시고 선한 사마리아 팀을 통하여 이들을 섬기게 하신 것을 감사 드립니다. 저희는 저희 센타 주위에 학생은 아니지만 알콜과 마약 중독으로 버려진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도와 주는 것이 이 땅위에 낮아지셔서 냄새나고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신 주님을 섬기는 기본적인 신자의 자세라는 것을 영접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이를 통하여 저희 센타가 지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복된 주의 전으로 쓰임 받게 하시길 기도 합니다. 3. 수양회 역사 1) 봄 수양회 봄 수양회를 우크라이나 연합 수양회로 오데사에서 가졌습니다. 창세기 말씀으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기 3장9절)라는 주제로 아름다운 수양회를 갖게 하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이 수양회를 통하여 자라나고 있는 17명의 키에프 형제 자매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자 결단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 수양회를 마음을 다하여 준비하고 섬겨주신 오데사 UBF 동역자님들께 감사 드립니다. 또한 한국의 바쁜 일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 경희 목자님, 최동진 목자님을 한걸음으로 달려 오게 하셔서 이 수양회를 지원하여 주신 경성 센타의 동역자님들께 감사 드립니다. 2) 제 1회 흑해지역 연합 여름 수양회 «Jesus is the Answer»라는 제목으로 요한복음 4장 26절을 요절로 흑해지역 연합 수양회를 가졌습니다. 저희는 갈릴리를 중심으로 제자 양성을 하신 주님의 선교 전략을 본받아 흑해를 중심으로 제자양성을 하고자 하는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흑해 수양회를 우크라이나 및 터키가 연합하여 갖게 되었습니다. 방학 동안임에도 불구하고 전체200명이 참석한 가운데 말씀과 회개의 영이 충만한 수양회를 이루게 하신 주님께 감사들 드립니다. 무엇보다 저희들은 이 수양회를 통하여서 섬기는 리더들이 먼저 회개하고 복음신앙위에 굳게 서는 수양회가 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고 30여명의 우크라이나 및 터키 형제 자매들이 진실하게 회개하고 새롭게 성령충만함을 덧입는 수양회로 축복하신 것을 감사 드립니다. 또한 바쁘신 일정 속에서도 이 수양회에 참석 하시어서 온 마음을 다하여 축복하시고 섬겨 주신 전 요한 선교사님을 비롯하여 이사무엘, 이 옥희 목자님(한국) 김 다윗 목자님(연희) 서 제임스, 서경희 목자님(경성), 안 요셉, 안마리아(시카고) 선교사님을 비롯한 많은 목자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좋은 강의를 하여 주신 폴 고(시카고) 선교사님께도 감사 드립니다. 3) 가을에는 매년 가졌던 전체 가을 수양회를 하지 않고 각 Front별로 성경 아카데미를 가졌습니다. 4) 12월 27일 누가복음 2장 12절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을 주제 말씀으로 성탄 예배를 갖고 많은 불우한 사람들을 초청하여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우간다 베데스타 Medical Center 건축 성탄 보배합을 드렸습니다. 4. 가정교회 역사 1) 7월에 현재 Ph. D 과정에 있는 야로슬라브 목자와 kiev Internationl School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라리사 목자간의 아름다운 가정교회를 이루었습니다. 라리사 자매의 목자인 김 에스더 선교사는 15년전에 유학생으로 이곳 키에프에 왔습니다. 그녀는 김 사라 선교사와 말씀을 공부하며 온전히 헌신된 주님의 제자로 변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15년간을 눈이오나 비가오나 기쁠때나 슬플때나 성공의 때나 실패의 때나 저희 가정과 완전한 동역의 관계를 이루었습니다. 헌신된 연희 센타의 김 마가 선교사님과 가정 교회를 이룬 후에도 변함없이 헌신하고 희생적으로 주님의 역사를 섬기는 것은 성령께서 친히 이루신 아름다운 동역의 산 역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분의 헌신을 축복하시고 오네시모와 같은 라리사 한 자매를 오랜세월 동안 품고 섬겨 가정교회를 이루게 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2) 젠틀맨 싸샤 튜텐코 목자와 올레나 추스 목자: 2010년 1월 3일 새해의 시작과 함께 이 두분을 통하여 가정 교회를 세우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젠틀맨 사샤는 젠틀하고 조용한 목자로서 신실한 형제입니다. 야로슬라브 목자와 함께 키에프 UBF 축구팀을 만들어 Kiev Christian Soccer Club과 적극 연대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결혼식은 마치 축구 스타의 결혼식처럼 환호성이 넘쳤습니다. 요나단 목자와 캔두 목자가 자신의 젊음과 열정을 드려 이 형제를 헌신적으로 제자양성 한 것을 감사 드립니다. 올레나 추스 목자는 전 우크라이나 어학 경시대회에서 대상을 받아 키에프 대학에 대통령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어학에 능통한 능력이 넘치는 자매였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어디에 써야 할지를 알지 못해 죄를 짓는데 쓰다가 그러한 자신에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기숙사에서 절망 가운데 있는 그녀에게 주님은 키에프 센터 최고의 사람 낚는 어부였던 제임스 포인트 목자를 룻 목자와 함께 보내셔서 그녀를 피싱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Cooker인 마리아 피스 목자에게 인도 하셨습니다. 올레나 목자는 영어를 공짜로 공부할 수 있어서 센타에 계속 나왔습니다. 그리고 존 피스, 마리아 피스 목자 가정의 헌신적인 사랑과 열정에 압도되어 자신도 모르게 어느날 목자요 섬기는 자로 변화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새로운 가정 교회를 우크라이나 복음 역사에 귀하게 사용하여 주시길 기도 드립니다. 5. 2010 새해 방향과 기도제목 저는 2010년을 시작하면서 지난 19년간의 선교 역사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1년 8월이면 키에프 센타도 개척된지 20주년이 됨을 알았습니다. 저는 보리떡과 같은 저와 김 사라 동역자 그리고 김 에스더 선교사를 오랜동안 오병이어로 사용 하시어 광야와 같은 이땅에서 절망의 역사를 소망의 역사로 바꾸시고 황무지에서 장미꽃이 피어나는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신 것에 깊이 감사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양육된 제자들을 통하여 6명의 해외 선교사와 14 가정 교회를 이루신 것을 주님께 감사하고 어떻게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감사의 제단을 쌓으며 보답할 수 있을까를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결과 우리 모임이 추구하는 네비우스 선교 방식을 적용하여 20살 푸르른 청년의 나이가 되는 2011년에 현지 제자에게 리더쉽을 계승 시키고 영적부흥을 위한 성령의 그릇을 잘 이루도록 도와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성령의 방향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이 일을 기뻐 하시고 합당한 방향대로 인도 하시길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2010년 키에프 센타 요절은 로마서 1장 16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입니다. 부요절은 갈라디아서 5장 16절 «성령을 따라 행하라»입니다. 2009년 한해 동안 전 세계 복음의 동역자님들의 사랑과 모든 기도 지원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2010년 기도 제목은 1) 열심으로 복음을 자랑하고 회개와 기도에 힘쓰며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살도록 2) 메신저들과 Front 리더들의 영적 성장 위하여: (1) 제임스 포인트 2)아브라함 블라드 3)야곱 블라디미르 4)노아 자이킨5)요나단 쌀륙 6)다비드 부치코프 7)사무라이 슬라바 8)야로슬라바 9)디마 워치맨 10)싸샤 튜텐코 목자 3) 150팀 일대일과 100명 주일 예배 4) 키에프 센타 역사의 계승을 위하여 견고한 기초를 놓을 수 있도록입니다. 한마디: «첫사랑을 회복하라» 김 베드로 선교사 드림
1053 no image 어떤 에세이 [1]
[레벨:20]정아브라함
83 2010-02-16
어느 잡지에 "아버지의자리"라는 제목으로 몇분의 에세이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하나를 소개합니다. 근무중 혹은 공부중 피곤하면 쉬어가십시요 출판인 고정일 사람들은 아버지를 등신이라고 불렀다. 몸집이 작고 안경도 쓸 수 없을 만큼 약시인 데다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누구든 대차게 나오면 아버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리 억울해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다. 일제 때 아버지는 수레에 된장을 싣고 팔러 다녔고 해방이 되자 군고구마 장사를 했는데, 때때로 못된 사람을 만나 된장통이 엎어지거나 군고구마 항아리가 박살나기도 했다. 만만해 보인 아버지는 이런 행패를 당하기 일쑤였다. 아버지를 따라 다니던 5살짜리 어린 내 가슴에는 그때마다 분노가 치밀었고, 사람들 말대로 아버지는 정말 등신인가보다 생각하며 슬퍼 울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노부모를 두고 어찌 피란가느냐며 어머니에게 애들을 데리고 먼저 떠나라 했다. 이틀 뒤 반나절거리 외가를 눈앞에 두고 우리 가족은 중공군과 미군 사이에 꼼짝 못하게 갇히고 말았다. 어느 날 밤, 한 차례의 섬광이 엄청난 폭발 굉음과 함께 우리가족을 순식간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포연 속에서 나는 참혹하게 조각난 두 동생과 짓이겨진 어머니의 몸을 보았다. 나는 전쟁 고아가 되어 한겨울 눈보라 벌판을 헤맸다. 그때 나는, 이 모든 불행이 사람들 말대로 등신 같은 아버지 때문이라고 원망했다. 서울로 돌아온 뒤 종로5가 적산가옥 지하 단칸방을 빌려 아버지는 동대문 시장에서 꽁치장사를 하시고, 나는 영창서관 사동으로 일했다. 동네아이들에게 내 별명은 언제나 ‘꽁치’였다. 그 시절 아버지는 지나가는 엿장수에게서 고물 빅타유성기, LP판 ‘슈베르트 가곡집’, 달력에서 떼어낸 ‘밀레의 만종’, 일어판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을 사들였다. 아버지는 비가 와 장사를 공치는 날이면 온종일 그것들을 즐겼다. 지금도 나는 가끔 그때를 떠올리며 미소 짓곤 한다. 소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등신이라 불린 아버지에게 그렇듯 숨겨진 감성이 있었다니…. 아버지 회갑 때였다. 후취로 와서 무던하게 살아온 새어머니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시라고 나는 적잖은 돈을 마련해 드렸다. 그런데 아버지는 누가 곤경에 빠졌다는 거짓 사정에 속아넘어가 그 돈을 몽땅 줘버리고 말았다. 이런 일이 전에도 수없이 있었다. 그즈음 사무실로 찾아온 아버지께 나는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등신이라고 하지요!” 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않다가 “나, 간다” 한마디를 던지고는 곧장 발길을 돌리셨다. 몹시 쇠약해진 아버지의 구부정한 뒷모습이 그날따라 무척 힘없어 보였다. 그 얼마 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그날 일을 두고두고 후회해왔다. 아들이 아버지를 힐책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니었다. “아버지, 잘하셨어요.” 그때 왜 따뜻한 말 한마디를 못했을까. 아버지는 조그만 바람에도 고개를 숙이는 여린 들풀이셨다. 사람들에게 멸시당할 때마다 아버지 가슴속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고였을까. 누구도 괴롭히지 않고 당신보다 더 어려운 이를 도우려 애쓴 아버지, 그 선한 아버지가 그립다. 내 가슴에 고인 아버지의 눈물이 오늘도 내 마음에 흘러내린다.
1052 no image 재미있는 통계
[레벨:20]정아브라함
51 2010-02-24
신문에 나온 기사입니다. 마음 속 공상으로 연결되기 쉬운 취미 보다는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는 취미가 인생에 더 나은 결과가 온다는 것을 보여 주어서 참고로 올려드립니다. 조깅이나 마라톤 등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취미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축구도 테레비로 구경하기 보다는 실제로 운동장에서 뛰어 기술을 연마하고 다른 선수나 팀을 압도하는 현실성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요회 목자님들은 CEO에 해당합니다. 2010년에 요회 부도를 내지 말고 배가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참고로 CEO가 골프를 즐기면 회사경영을 등한이 하게 된다는 말도 통용되고 있습니다)이하 기사입니다. ( 최고경영자(CEO)가 스포츠를 즐기는 회사는 부도가 날 확률이 낮다는 흥미로운 조사결과가 나왔다. 신용보증기금은 2002∼2008년에 보증을 서준 36만4436개 회사의 재무적 요인 및 CEO의 성별 연령 등 비재무적 요인과 기업 성과 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CEO의 취미와 기업 부실이 상당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23일 밝혔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경영자가 스쿼시(부실률 2.7%) 마라톤(3.0%) 골프(3.4%) 조깅(3.9%) 테니스(4.3%) 등의 스포츠를 즐기는 경우 부실률이 낮았지만 음악감상(8.6%), 산책(9.1%), 영화감상(10.3%), 인터넷(11.7%)이 CEO의 취미인 회사는 부실률이 높았다. 독서(7.1%) 서예(7.3%) 미술(7.3%)도 부실률이 높은 편이었다. 류재현 신보 리스크관리부 팀장은 “경영자가 지구력이 필요하고 활동적이거나 전문성이 높은 취미를 가진 경우 대체로 부실률이 낮았고 영화 음악감상 같은 비활동적인 취미를 갖고 있으면 부실률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설명했다. 가정이 안정돼야 사업도 잘된다는 것도 입증됐다. 경영자가 배우자 및 자녀와 함께 지내는 경우 부실률은 4.9%로 낮았지만 자녀가 없으면 6.9%, 이혼 등으로 자녀만 있으면 9.8%, 미혼이면 10.9%로 부실률이 높았다. 정재윤 기자 jaeyuna@
1051 no image 창세기 특공대 위한 기도 [3]
[레벨:20]정아브라함
96 2010-08-03
지금 창세기 특공대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주로 신입생 형제자매님들이 특공대가 되어 은혜 새롭습니다. 창세기 공부야 말로 우리 UBF모임이 한국과 세계 기독교에 기여한 공로라고 생각합니다. 고 이사뮤엘 선교사님이 창세기 강의안을 만들어 강의를 시작하고 창세기 1:1공부를 시작하여 많은 한국과 세계의 대학생들이 창세기 공부를 통하여 기독교 인생관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창세기 1:31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을 통하여 많은 운명주의적 형제자매님들이 새롭게 섭리의 인생관을 회복하고 위대한 주님의 종들로 거듭났습니다. 이로써 창세기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고 생명력이 충만한 말씀인가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창세기는 하나의 신화로 치부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한국교회나 교회지도자들도 창세기공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은 안해도 대부분의 교인들도 창세기는 신화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가 신화로 간주되는 한 각 사람의 신앙역시 신화적인 것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심히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은다고 하여 모든 것을 신화로 간주해 버리면 신앙은 설자리가 없습니다. 창세기는 우리의 영혼에 울리는 하나님의 참된 말씀입니다. 창세기 공부를 시작한 우리 신입생 및 새로운 형제자매님들이 창세기 공부를 끝까지 완주하여 기독교 인생관을 확립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사탄이 어찌하든지 이 공부를 방해하기 위하여 의심을 심고 다른 것으로 유혹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탄의 궤계를 물리쳐 주시고 창세기 특공대를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050 no image 한국 명절의 이해 [2]
[레벨:20]정아브라함
69 2010-09-28
우리나라명절인 추석에 하는 조상제사에 관하여 유익한 글이 있어 올려드립니다. [송호근 칼럼] 조상숭배의 나라 [중앙일보] 기사 나도 한마디 (138) 2010.09.27 19:46 입력 / 2010.09.28 00:25 수정 관련핫이슈 [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지난 추석 명절을 잘 쇠셨는지, 부모와 일가친척은 평안하신지, 조상은 만나뵈었는지, 그리고 청명해진 가을밤 그윽한 달빛을 맞으셨는지. 우리 정서엔 꼭 들어맞는 이런 인사의 뒤편에는 앞앞이 말 못하는 갑갑증과 파열음이 꿈틀대고 있다. 부모, 친지와의 만남이 항상 저 환한 달빛과 같으면 좋으련만, 가족사엔 언제나 기대와 원망들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어 서로의 감정선을 건드리지 않으려면 남다른 노력이 필요한 게 명절이다. 말이 명절(名節)이지 수백 년 대물림된 행사를 치러야 하는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흐뭇한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한국만큼 명절이 제례(祭禮), 특히 조상 제사로 일관되는 나라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말 개화기 선교사들은 아름다운 자연과 미몽의 백성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은자의 나라’로 뭉뚱그려 묘사했는데, 세계에서 유례없는 조상숭배 열기만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유교 문명의 종주국인 중국은 물론 주변국인 일본과 월남에서도 조상 제사를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교문화권, 아니 세계에서 한국이 조상 제사를 지내는 유일한 나라가 된 까닭, 오늘날까지도 후손들이 위패 앞에 은덕을 비는 나라가 된 까닭을 정작 우리도 잘 알지 못한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풍경인가라고 어른들은 짐짓 위엄스러운 표정을 짓겠지만, 남녀 간 불합리한 역할, 가족 간 불공평한 노력봉사와 비용조달에 가슴앓이하고 시간을 쪼개 품앗이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소소한 갈등이 끊이지 않는 게 요즘의 추세다. 아마 귀경길에서 언쟁깨나 했을 부부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 소중한 시간을 의례에 쏟아붓고 허둥지둥 돌아설 때 그런 회의가 들지 않겠는가. 우리는 왜 이렇게 유별난 ‘조상숭배의 나라’가 되었을까? 1894년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 여사는 오백 년 도읍지 한양에 종교시설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종교 없는 제국은 없다는 문명사적 시선으로 보면, 사찰은커녕 공자 사당 하나 없는 유교국가의 수도가 이상했을 것이다. 대신 그녀는 무속과 민간신앙에 푹 빠져 있는 조선인들을 목격했다. 콜레라가 습격한 마을엔 고양이 그림이 붙어 있을 정도였다. 가는 곳마다 무당이 있었고, 으슥한 곳마다 귀신이 살았다. 귀신 종류도 다양해 그녀는 36가지 귀신 이름을 세다가 그만두었다. 이 과도한 무속과 민간신앙을 조상제례로 전격 대치한 계기가 바로 조선 건국이다. 고려 말까지도 명절은 하늘과 자연을 경외하는 집단축제였다. 불교에서 유교로 전환한 조선은 민간신앙을 일소할 방법을 주자학에서 찾았다. 제천(祭天)과 제사(祭祀)가 그것이다. 경복궁 우측에 사직단을 지어 하늘신과 토지신에게 제례를 올리고, 좌측에 종묘를 지어 제사의 기원을 마련했다. 15세기 말 성종은 아예 『경국대전』을 편찬해 국법으로 반포했다. 예제(禮制)에 이런 조항이 있다. ‘6품 이상 문관이나 무관은 3대까지 제사 지내고 7품 이하는 2대까지, 일반 서민은 부모에게만 제사 지낸다.’ 잡신을 섬기는 자는 처벌되었다. 빈곤한 서민은 위패를 모시고, 명절 땐 두어 가지 음식으로 족했다. 굶는 판에 더 차릴 것도 없었다. 그러던 것이 양반이 향촌을 장악해 가는 과정에서 봉제사는 충군효친의 규율 수단이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엄격한 격식과 요란한 상차림이 강제됐다. 조상숭배가 통치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놓이자 봉제사는 곧 가문의 위세경쟁으로 변했다. 유교는 내세관이 없는 게 특징이다. ‘조상숭배의 나라’에서 불교와 주술신앙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다. 미국 선교사 헐버트는 『대한제국멸망기』에서 ‘코레아인들은 사회생활에서는 유교에, 사고방식은 불교에 속하며, 곤경에 빠지면 귀신을 믿는다’고 썼다. 21세기 대명천지에 귀신을 믿는 사람은 이제 없어졌고, 외래종교가 유입되자 한국은 다종교사회로 변했다. 그런 와중에 유교는 제천(祭天) 기능을 다른 종교에 넘겨주고 주로 생활의례, 특히 제례(祭禮)로 살아남았다. 명절이라는 축제의 시간을 제사로 종종걸음을 쳐야 하는 ‘조상숭배의 나라’가 된 역사적 배경이다. 이런 내력을 알았다고 해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조상을 기리는 방식은 여럿인데 왜 반드시 상차림 형식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조상숭배가 왜 자기 가문(家門)에만 국한돼야 하는가. 전자는 덮어두고라도 후자는 의미심장하다. 탁월한 학자와 선비, 그리고 민족 영웅과 구국의 정치가들이 가득한 오천 년 역사에서 국민 모두가 사랑하고 존경할 선현들을 기리는 데는 인색했다. 명절마다 천여만 명이 이동하고, 집집마다 족보 하나쯤은 갖춘 세계 유일의 ‘조상숭배의 나라’에서 다 같이 숭배할 조상이 이처럼 없는 것도 너무 특이하지 않은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1049 no image 김형석교수에 관한 기사
[레벨:20]정아브라함
68 2010-11-03
김형석교수님은 연세대철학과 교수였습니다. "영원과 사랑의 대화"라는 수필집을 써서 유명해진 분입니다. 위 제목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영원하신 예수님과 사랑을 갈구하는 한 여인의 대화에서 따온 것입니다. 다음의 기사에 위 책에 관한 뒷이야기가 실려 있어 참고로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만년필로 글을 쓰신다는 것도 배울만합니다. 다음은 기사내용입니다. 김형석(90·철학) 연세대 명예교수는 가난하고 힘들던 시절 사색적이고 서정적인 에세이로 지친 영혼을 위로해준 우리시대의 대표적 멘토다. 1960, 1970년대 그가 펴낸 수많은 에세이집은 방황하던 젊은이들에게 ‘삶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1980년대 후반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더불어 읽을거리가 많아지면서 그의 글이 갖던 절대적 영향력은 차츰 약화됐고 그 또한 대학강단에서 정년퇴임하며 세인의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시대정신을 일깨우는 원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지난 18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고당 조만식 선생 추모 60주기 및 전기 출판기념회에서 ‘고당에게는 꿈이 있었다’는 추모 강연을 했고, 11월9일엔 김수환 추기경 선종 1주년 추모 모임 강연자로도 나설 예정이다. 지난 27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위치한 그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 그는 가을 햇볕처럼 따스한 미소로 맞아주었다. 그의 책을 읽으며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은 어느덧 중년이 됐지만 그는 구순이라는 연세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정정하고 단아한 노철학자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연세대 철학과에서 정년퇴직하신 게 벌써 25년 전인데, 정말 건강하시네요. “어렸을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항상 조심하면서 사는 습관이 붙었지요. 지금도 무리는 안합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건강을 위한 건강에 매달리는 것 같은데 나는 좀 생각이 달라요. 건강이 목적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앓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늘 무리하지 않고 지냈죠. 무슨 일이든 쫓기지 않으며 하려고 노력합니다. 원고나 강연을 청탁받으면 마감날짜 4∼5일 전에 끝냅니다. 많은 일을 하면서도 긴장을 덜 하고 살아온 게 건강 비결인 것 같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 무리하지 않고, 맡은 일도 미리미리 한다는 그는 매일 아침 50분씩 산책을 하고 오후엔 수영을 한다. 그것도 지나치지 않게 한다. “더하고 싶을 때 딱 그만둔다”는 게 그의 말인데, 평생 조심하면서 준비하고 절제하며 살아온 습관이 그의 오늘을 만든 듯싶다. 김 교수는 “얼마전 원고청탁이 들어왔는데 사람이 얼마나 사는 게 좋으냐는 게 주제였다”면서 “객관적으로 얼마나 사는 게 좋으냐를 생각하며 쓰다가 얻은 결론은 일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때까지 사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200자 원고지에 만년필로 원고를 쓴다. 한땀한땀 바느질하듯이 정성을 다해 생각을 모으고 글로 옮긴다. ‘컴퓨터로 쓰면 손의 피로도가 덜할 텐데 여전히 손으로 쓰시냐’는 질문에 “이렇게 만년필을 들고 원고지 앞에 앉으면 생각이 한곳으로 모아지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마치 성직자가 기도하듯이 구도하는 자세로 글을 쓰는 것이다. 그는 최근 서울아산병원에서 펴내는 잡지 ‘아산문화’에 두고온 북녘을 죽기 전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는 내용의 칼럼을 썼다. 마침 이번 주말부터는 금강산지역에서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예정돼 있는 상황이어서 그의 글은 실향민들의 가슴을 울렸다. ―북녘의 고향에 가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고향의 가족에 대한 기억은 어떠신지요. “나는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났고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에서 성장했어요. 북한에 누님과 누이동생, 사촌이 있는데 저쪽에서 내가 반공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 만나는 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한번도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하지 않았어요.” 그의 표정엔 고향에 대한 그리움뿐만 아니라 1947년 월남한 이후 행방을 모르고 살아온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묻어났지만 이내 학자적 냉정함을 찾으며 얘기를 시작했다. 김 교수는 8·15 해방을 북한에서 맞고 2년여 북한체제를 경험한 뒤 1947년 월남했다. 이후 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한 뒤 1954년 연세대에서 철학과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철학자 겸 수필가로 이름을 날린 것은 1961년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펴내면서부터다. 1960, 1970년대 문학평론가인 이어령 당시 이화여대 교수와 함께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했는데 빼어난 수필을 쓸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물으니 이렇게 얘기했다. “연세대에 오기 전에 중학교에 있었는데 내 꿈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모범적인 사립학교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거였어요. 그게 20대 후반의 내 목표였고 일찍이 중학교 교감도 됐지만 자의반 타의반 연세대로 오게 됐어요. 7∼8년 동안 정열을 갖고 가르쳤던 아이들을 만나보면 애들을 버리고 떠난 부모 같은 심정도 들고 해서 그 애들과 대학초년생들에게 뭔가 주고 싶어 ‘고독이라는 병’ ‘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쓴 것입니다. 특히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1961년 여름 미국으로 교환교수로 가기 전 서문을 써주고 갔는데 이듬해 귀국해서 보니 제가 그 책 덕분에 많이 유명해졌더군요.” 1960년대 초 발간된 그의 철학 에세이를 읽은 독자들은 이제 50, 60대 장년층이 됐다. 10년 전 그가 울산으로 강연을 갔을 때 초로의 신사가 다가와서 “선생님께서 우리의 20대 젊은 시절을 키워주셨어요”라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고 울먹인 일도 있다. “제 책의 독자들은 60대가 제일 많습니다. 지금도 강연을 하면 내게 인사하러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분들이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때 받은 영향이 큰 것 같아요. 나나 안병욱 선생이나 그런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글을 썼지만 그 시대(1960∼1970년대)엔 우리의 글이 필요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글은 인간 존엄성과 가치관, 영원한 것에 대한 추구 등 실존적인 문제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는 박정희 정권 때 안전기획부에 끌려가 조사도 받았고, 전두환 정권 때엔 강연이 취소된 적도 있다. “박정희 정권 때 학생들이 강연을 해달라고 해서 김찬국 연세대 신학과 교수와 함께 나섰는데 나는 ‘자유의 조건’을 강연 제목으로 제시했어요. 그런데 기관원들이 와서 ‘자유’를 주제로 한 얘기는 곤란하다며 방해해 강연 자체가 취소된 적이 있어요. 나는 그때 사회적 현실에서 역사를 바꾸는 자유는 투쟁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죠. 이성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만이 자유를 말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다는 게 핵심내용이었는데 기관원들의 공작으로 불발됐어요.” 그는 박정희 시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준 대중의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가 1985년 9월 연세대에서 정년퇴직할 때 고별강연을 했는데 그날은 마침 대규모 시위가 예정된 날이었다. 학교측은 시위 때문에 강연을 미룰 것을 검토했으나 김 교수는 강연을 강행했다. 그런데 데모를 하던 학생들이 시위 도중 하나둘씩 강의실로 들어왔고 강연장은 이내 최루탄 범벅이 된 채 입장한 학생들로 가득 찼다. 그런 상황에서 김 교수는 고별강연을 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내가 연세대에서 잘못 살지 않았구나 싶어 고맙게 생각됐다”고 말했다. 그는 늘 가치지향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로 자유의 중요성을 얘기했을 뿐 1970, 1980년대 참여지식인들처럼 투쟁적인 언어로 정권을 직접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날 인터뷰에선 우리 역사 속에서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위상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 얘기했다. “나는 일제강점기 때 유년기를 보내고 20대에 해방을 맞으며 6·25와 4·19, 5·16을 거치며 살아왔지만 대한민국에서 제일 슬펐던 때는 역시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 때부터 전두환 정권이 6·29선언을 하기 전까지입니다. 다시는 우리 역사에서 그 같은 암흑기가 반복돼서는 안됩니다. 그때 저는 조용히 살았지만, 하룻밤도 편안하게 잠들지 못했습니다. 특히 전두환 정권 때에는 지성인까지 침묵을 지키면 안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늘 불안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역사의 암흑기였던 전두환 시대가 끝날 즈음 그는 대학강단을 떠났고 이후 20여년이 흘렀다. 그는 요즘 고민이 뭐냐는 질문에 대해 “민족의 앞날에 대해 많이 걱정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1950년대에는 여러 가지 어렵다고 해도 인생이 뭐냐, 가치관이 뭐냐를 추구하며 살았고, 박정희 시대 후반기부터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많이 쏟았습니다. 그런데 민주화한 이후 요즘 우리 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자리가 잡혀가지만 좌우 대립은 여전한 듯합니다. 지금은 자유와 평등보다 높은 것, 진보와 보수보다 높은 것이 필요합니다. 고당 조만식 선생 추모 강연 때도 얘기했지만 선진국에선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이미 다 끝났습니다. 보수가 열린 사회로 가면 지지하고, 진보가 닫힌 사회로 가면 반대해야 합니다. 소련은 좁은 사회를 추구하다 망했고, 북한도 마찬가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열린 사회가 필요합니다.” 평생 자유로운 지성으로 살고 싶었다는 그는 “젊은 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열린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며, 그래야 우리 민족의 길이 열릴 수 있다”며 강의와 같은 긴 대화를 마쳤다. 인터뷰 = 이미숙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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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정아브라함
72 2011-03-22
조선일보 기자가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재미있게 썼습니다. 학부모와 학부모인 교사의 대화입니다. '취업맘' 자책은 금물, 뻔뻔하고 대범해져야 약간 방임하는 것도 아이에겐 藥… 21세기 최고 경쟁력은'헝그리 정신'새 학년이 시작된 3월의 어느 날,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아무개 어머니, 아무개 담임입니다. 아무개가 아직 구구단을 외지 못합니다. 구구단은 2학년 때 배우는 과정입니다. 수업에 지장이 많사오니 가정에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마녀', 다음과 같이 답장을 보냈다. '선생님, 아무개 엄마입니다. 저는 성실히 세금 납부하여 선생님 월급을 드리고 있습니다. 학생을 가르치는 것은 선생님의 의무지 저의 의무가 아닙니다. 학생이 공부를 못하면 선생님이 학부모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해야 할 터인데 왜 제게 책임을 물으시는지요? 아무개가 구구단을 제대로 욀 때까지 A/S 해주시기 바랍니다.' # '정보수집'차 엄마들 커뮤니티를 기웃거리다 우연히 '이프'라는 사이트에 들어간 영란씨. 저 해괴한 글을 발견하고 한밤중 컴퓨터 앞에서 혼자 배꼽을 쥐었다. 세상에 이런 통배짱 엄마가 있었어? '마녀들의 수다'라는 문패가 붙은 코너에는 이 글 말고도 불순한 엄마들의 목소리가 와글와글했다. '엄마, 아이 캔 스픽 잉글리시가 뭔 뜻이야?' 묻는 중1 딸에게 '영어 못하는 것도 대한민국에선 개성이지' 하고 낄낄대는 엄마가 있는가 하면, '이번 시험에 낙제했으니 부진아 학습을 시키겠다'고 통지해온 선생님께 '우리 애는 명문대학 갈 의사가 전혀 없사오니 그냥 집에 보내달라'며 호기를 부리는 엄마도 있다. 황당해진 담임, 아이를 불러 '니네 엄마 계모니?' 했다는 대목에서 또 깔깔 웃은 영란씨는, '계모'도 좋고 '마녀'도 좋으니, 나도 통배짱 엄마 되어 이 험난한 교육 전장(戰場)을 뚫고 나가리라 다짐하였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통배짱이 시험대에 섰다. 반찬 값이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출산 전 다니던 회사에 파트타임으로 나가 일하는 영란씨. 한 달에 기십만원 하는 학원비가 벅차 겨울방학 동안 학교가 시행한 방과후수업에 3학년 아들 녀석을 등록했던 것인데, 하필 영어는 오전에, 수학은 오후에 있어 도시락을 싸서 보내게 되었다. 한데 퇴근길 동네 수퍼에 들렀더니 같은 학교 학부형인 주인 아주머니가 혀를 찬다. "에이그, 우리 애 데리러 학교에 갔더니 그 댁 아들이 차가운 학교 계단에서 혼자 도시락을 먹고 있습디다." "진짜요?" 사실 확인차 집으로 뛰었다. 아들내미 왈, 도시락 먹으러 제 교실로 갔더니 자물쇠로 잠겨 있고 다시 영어 수업했던 교실로 돌아오니 그 사이 문이 잠겼더라고 했다. 그래서 계단에 앉아…. 이튿날 열일 제쳐놓고 학교로 달려갔다. 교무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당직 선생님 앉아 계신다. "어쩐 일이세요?" 나이 오십줄에 밝게 웃는 여교사와 눈이 마주치자 영란씨 잠시 흔들렸지만 애써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아이가 찬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도시락을 까먹을 때 선생님들은 뭘 하고 계셨습니까. 그렇잖아도 다른 애들처럼 풍족하게 뒷바라지 못해 피눈물이 나는데요, 흐억…." 설움에 북받친 영란씨, 잠시 숨을 골랐다 다시 쏟아부을 태세인데, 선생님 그녀의 손을 덥석 잡는다. "일단 앉으시지요, 추운데 차 한 잔 드시지요." # "방학이라 수업 없는 교실들은 문이 잠겼을 테고 당직 서는 교사들 한둘뿐이니 미처 못 봤을 테지요. 보았다면 그렇게 놔둘 리 없지요. 저희도 자식 키우는 사람인데요." "그러니까 서운하다는 겁니다. 솔직히 일하는 엄마 애들은 뒷전이고 찬밥 아닌가요? 남편 월급만 갖고 살 수 있다면 저도 학교 봉사 열심히 할 수 있다 이겁니다. 아이 손에 열쇠 쥐여주고 집 나서는 심정, 선생님은 모르시잖아요." "재미난 얘기 해 드릴까요? 30년 교직에 있어도 우리 애 선생님 뵈러 갈 땐 심호흡을 했지요. 담임이 까마득한 20대 후배교사인데도 허리 굽혀 인사하게 되데요. 저도 죄 많은 취업맘 아닙니까." "……" "아이 몸에 열이 펄펄 끓어도 학교로 나서야 하는 날엔 남의 집 아이들 잘 키우려고 내 아이를 이렇게 버려둬도 되나 하는 죄책감에 눈물 뚝뚝 흘리며 등교했지요." "……" "재미난 얘기 또 해 드릴까요? 5학년 딸아이가 구구단을 못 외니 그 책임을 선생에게 엄중히 묻는 어떤 어머님 글이 인터넷에 떴더라고요. 뜨끔하고도 통쾌했지요. 우리 딸도 4학년 되도록 구구단 못 외웠거든요. 흐흐!" "…근데, 그 따님 대학은 갔나요?" "가다마다요. 엄마 믿었다간 밥 굶고 대학도 못 간다 싶었는지 알아서 밥 차려 먹고, 알아서 병원 가고, 알아서 공부하고, 알아서 사윗감 물어오고. 그러니까 돈 워리(Don't worry)! 21세기 최고의 경쟁력은 '헝그리 정신'인 거 아시죠? 그거 하나는 제대로 길러준 셈이에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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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정아브라함
67 2011-04-05
아래 신문의 컬럼에 모두 동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경청할 부분이 있어 올려 드립니다. 사설 • 칼럼[아침을 열며/4월 5일] 친구 아무개 목사에게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오랜만이네. 자네 직업이 성직자, 목사이기 때문에 우리 같은 속물들이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소식을 전해주는 친구가 있어 소식은 이따금 듣고 있네. 아닌 게 아니라 지난번에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자네 이야기가 나왔네. 회사 다니다가 근자에 그만둔, 아니 잘린 친구 몇몇은 자네를 퍽 부러워하더구먼. 한 해에 연봉이 몇 억이고 정년도 아직 한참 남았다면서 말이야. 나도 그런 생각이 슬며시 들었네. 자네 교회가 세상에 유명한 아무 아무 교회처럼 몇 만 명의 신도를 가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만 명을 넘는 신자가 있고 거기다 교회가 부자동네에 있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성경 말씀과 동떨어진 삶 오늘 이렇게 소식을 전하는 것은 그 날 그 모임에서 나온 자네 이야기 때문이네. 그날 모임에서 자네가 일본에 쓰나미가 일어난 것을 두고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말을 들었네. 그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네. 왜냐하면 쓰나미에 죽거나 다친 사람들 중에는 적기야 하겠지만 기독교 신자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네. 솔직히 말해 안 믿는다고 쓰나미로 자신의 피조물을 그렇게 비참하게 죽여 버린 하나님이란 존재를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네. 자네 말을 전해 듣고 나는 강도를 맞아 쓰러져 있던 사람을 구한 사마리아 사람이 생각났네. 예수님은 거지반 죽게 된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의 이웃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이라 하셨네. 만약 예수께서 쓰나미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셨다면, 눈물을 쏟으시고 크게 슬퍼하셨을 것이네.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셨을 것이네. 이왕 말을 꺼냈으니, 몇 마디 더 함세. 자네는 새벽이면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교회에 가서 큰 소리로 무엇 무엇을 바란다고 기도를 한다는데(하기야 보통 기독교 신자들도 다 그렇지만), 정말 이해가 안 되네. 예수님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지 말고 아무도 안보는 골방에서 기도하되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가르치시지 않았던가. 자네가 믿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 자네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자네 마음을 다 아실 것이네. 어떤 친구는 자네가 강남의 값비싼 아파트에 산다고 또 부러워하더군. 과연 그런가.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오직 자신만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어찌 하여 예수님과 그렇게 다른가. 자네는 또 세금도 내지 않는다 하였네. 정말인가.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자네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자네는 교회가 늘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고 하지만, 그렇게 으리으리한 수백억짜리 교회를 지으면서 어떻게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겠는가. 또 예수님은 제자들을 여러 곳으로 파견하시며 지팡이 외에는 돈도 먹을 것도 가지지 말고 신발도 그대로 신고 속옷도 껴입지 말라고 하셨네. 그런데 자네는 번쩍이는 양복에, 어찌 그리 값비싼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가. 부디 예수 믿기를 권함 자네 알다시피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네. 아니 어떤 종교도 믿지 않지. 하지만 성경은 종종 읽어본다네. 그런데 자네의 말과 행동이 성경 말씀과 일치하지 않으니, 나로서는 자네가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볼 수밖에 없네. 어릴 적 친구니까 무람없이 부탁하네. 자네 제발 예수 좀 믿어보게. 자네가 입에 달고 사는 말 중에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란 말이 있는데,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니 좀 좋은가. 물론 나는 그냥 이렇게 살다가 불신지옥을 택하겠네만, 자네는 직업이 직업인만큼 예수를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남보다 자네가 먼저 예수를 믿어야 남에게도 믿으라 권할 수 있지 않겠는가. 부디 먼저 예수 믿고 천당 가시게.
1046 no image 은혜로운 글 [4]
[레벨:20]정아브라함
89 2011-06-02
다음은 ab.jr가 어디선가 읽고 보내온 글입니다. 아버지들에게 위로를 주는 글입니다. 아버지들이 읽기 원합니다. 아버지는 누구인가?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 딸의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지만,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장소(그 곳을 직장 이라고 한다)는,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은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달린 용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 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이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 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식을 결혼 시킬 때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최고의 자랑은 자식들이 남의 칭찬을 받을 때이다. 아버지가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가장 좋은 교훈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라는 속담이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그럴 듯한 교훈을 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생각도 하고 남 모르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이중적인 태도를 곧잘 취한다. 그 이유는 “아들,딸들이 나를 닮아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몇 살이든지, 아버지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변하는 아버지의 인상은, 4세때 ~ 아빠는 무었이나 할 수 있다. 7세때 ~ 아빠는 아는 것이 정말 많다. 8세때 ~ 아빠와 선생님 중 누가 더 높을가? 12세때 ~ 아빠는 모르는 것이 많아. 14세때 ~ 우리 아버지요? 세대 차이가 나요. 25세때 ~ 아버지를 이해하지만, 기성 세대는 갔습니다. 30세때 ~ 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세때 ~ 여보! 우리가 이 일을 결정하기 전에,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50세때 ~ 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였어. 60세때 ~ 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꼭 조언을 들었을 텐데....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결코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두 배쯤 농도가 진하다. 아들 딸들은 아버지의 수입이 적은 것이나, 아버지의 지위가 높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잇지만, 아버지는 그런 마음에 속으로만 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맘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도 안 하지만, 혼자 차를 운전하면서는 큰소리로 기도도 하고 주문을 외기도 하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 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 간다. 아버지! 뒷동산의 바위 같은 이름이다. 시골 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 큰 이름이다. 아버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옮긴글==
1045 no image 재미있는 기사
[레벨:20]정아브라함
58 2011-11-15
다음은 어떤 신문에 나온 기사입니다. 기사 내용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실정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아버지는 평생 목회만 하다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친가, 외가 가족 모두 아무도 빼먹지 않고 주일 예배 꼬박꼬박 지키는 집안이라 교회에 익숙하다. 그런데 근래들어 이렇게까지 기독교인이 욕먹는 분위기는 예전에 본 적이 없다. 옛날에는 “쟤 교회 다닌대” 그런 말을 할 때, 사람들 생각은 그럼 착한 애겠구나, 내지는 좀 재미없고 심심한 애겠구나, 뭐 그런 거였다. 요즘에는 “누구누구씨 교회 다닌대”, 할 때 아무도 그를 착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재미없고 심심할 거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오히려 땅값도 잘 알 것 같고, 세금 피하는 법에도 훤할 것 같고, 시세차익 같은 것도 쫙 꿸 것 같고 막 그렇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누구누구씨가 평소에 괜찮은 사람으로 보였다면 사람들은 실망도 한다. 누구누구씨 그렇게 안 봤는데 교회를 다닌다고? 확실히 기독교인을 보는 시선이 좀 묘해져서, 이 분위기에서 ‘저 교회 다녀요’ 하고 말하는 건 커밍아웃까지는 아니라도 좀 민망해진 감이 있다. 그래서 “저 교회 다녀요”, 다음에 붙이는 말이 자꾸 늘어난다. 저 교회 다니지만 저희 교회 큰 교회 아니구요, 저희 목사님은 세습 목회 반대하시구요, 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그런 선교는 안 좋아하구요, 저는 리처드 도킨스도 읽는다니까요, 이렇게 주섬주섬 변명을 하는 내용인즉슨, 나는 교회를 다니지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 ‘개독’ 아니라는 이야기다. 우리 친척들은 모여서 장로 대통령이 되라고 참 열심히 기도했다. 그런데 장로 대통령이 되니까 희한하게도 교회 다니는 게 ‘쪽팔린’ 세상이 왔다. 이게 다 이명박 대통령 때문이라고 몰아붙이는 꼴이 될까봐, 혹시 내가 일방적으로 우기는 건 아닌지 열심히 생각해 봤다. 아무래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 더 약삭빠를 것 같고, 잘 우길 것 같고, 꼼수 잘 쓸 것 같은 사람처럼 이미지를 일신하고 만 것은 장로 대통령 때문이 맞는 것 같다. 여전히 오세훈을 좋아하는 우리 친척들 사이에서도 곽선희 목사님(소망교회 창립자)은 얼마나 속이 상하실까, 그러는 걸 보면 확실히 그렇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해 본 적이 없으니 어떤 사람들 눈에는 참 시시한 목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절대 이 세상에 욕심 낼 것 없다, 좋은 차, 좋은 옷, 이런 것 욕심낼 것 없다고 가르쳤다. 어차피 천국에 가면 얼마든지 좋은 것이 많으니 살아서 욕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기독교인이 보통사람과 가장 다른 점은 죽음 이후에도 생이 계속된다는 것을 믿고, 그리하여 구원받아 영원한 삶을 믿는다는 것일 텐데, 이명박 장로님을 보면 좀 민망하다. 내곡동 게이트도 그렇고 돈에 대한 순수한 ‘욕정’의 소유자라고 이렇게 놀림을 당하는 걸 보면, 누가 죽고 난 후에 삶이 있다고 하겠는가. 이래서야 누가 기독교인이 사후의 삶을 믿는다고 하겠는가. 그럼 예수 믿는 사람은 거지같이 살아야 되냐, 예수 믿고 축복 받아서 물질적으로 잘 풀리는 것도 은혜다, 하고 버럭들 하시겠지만 평생 교회 다녀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그린벨트 언제 풀릴지, 귀신같이 알 사람 취급보다는 좀 재미없고 심심한 사람 취급이 백배 나은 것 같다
1044 no image 성탄시 [1]
[레벨:20]정아브라함
88 2011-11-23
가을수양회 정해찬 목자님의 메세지를 듣고 저의 소감을 성탄시로 적어 보았습니다. 제목 "이름 모를 여인의 편지" 나는 당신의 이름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날 바리새인의 집 뜰에서 나는 당신을 보았답니다. 당신은 사람들의 서슬 퍼런 눈빛 속에서도 다만 고요히 얼굴을 숙이고 들어와 예수님 뒤로가 섰지요. 그런데 얼마 있다가 당신은 예수님 발 곁에 앉아 우셨습니다. 처음에는 조용히 흐느끼다가 어느 샌가 통곡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람들 시선이 당신에게 향하였지만 당신은 그냥 울기만 하셨지요 나는 그때 가만히 당신 쪽으로 다가갔답니다. 당신의 눈물이 마치 비처럼 예수님의 발에 떨어졌습니다. 당신의 눈물로 예수님 발은 흥건하게 젖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긴 머리를 풀어 예수님 발을 닦았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우는 내내 당신이 그렇게 발을 닦아 드리는 내내 예수님은 그윽한 눈길로 당신을 그냥 보고만 계셨습니다. 오- 사람들 눈에 어찌 그처럼 많은 눈물이 담겨있지요? 사람의 눈물이 어찌 다른 사람의 발을 그처럼 젖게 할 수 있지요? 사람의 울음이 어찌 그리 서러울 수 있지요? 긴 눈물 뒤에 나는 당신이 향유병을 따서 예수님 발에 그 향유 붓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름 모를 여인이여 나는 그때 나의 눈 속 눈물병에도 아직 쏟지 않은 눈물이 담겨 있음을 알았습니다. 하여 아름다운 당신은 나에게 말합니다. 너의 그 눈물이 연민의 눈물이 되지 않게 하라 너의 그 눈물이 분노의 눈물이 되지 않게 하라 너의 죄로 인하여 통곡하라 너의 눈물이 빗물처럼 쏟아지게 하라 그 눈물이 모두 회개의 눈물이 되어 예수님 발을 적시게 하라 다만 너의 눈물병에 담긴 그 눈물들을 그냥 가지고 가지 말라
1043 no image 유익한 기사 [3]
[레벨:20]정아브라함
71 2011-11-25
다음은 중앙일보 기사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왜? 실제로 뇌가… 내 처지에 화가 나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고? 주변에 감사할 일을 세가지 꼽아보자. 순간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나아질 지 모른다. "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니카전서 5장 18절)"는 성경 대목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일반인인에게 많이 음송된다. 그런데 여기에 과학적 논리가 숨어있었다. 종교에 무슨 과학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이를 미국 심리학자들이 오랜 연구 끝에 감사의 과학적 변화를 확인했다. 연구 요지는 감사하면 뇌 좌측의 전전두피질을 활성화해 스트레스를 완화시켜 주고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reset(재설정)`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은 효과라고 설명했다. 감사가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한 감정이라는 여러 심리학자들의 연구를 재확인한 것이다. 미국 마이애미대 심리학 교수 마이클 맥클로우는 "잠깐 멈춰서서 우리에게 주어진 감사함을 생각해보는 순간 당신의 감정시스템은 이미 두려움에서 탈출해 아주 좋은 상태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승리에 도취된 감정을 느낄 때와 유사한 감정의 선순환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감사하는 게 좋을까. 왜 감사한지를 생각하고, 꼽아보고, 음미하는 게 효과적이다. 감사가 가지는 힘은 다른 사람들과 연결돼 있다는 안정감을 준다는 것. 미국 시카고에서 심리클리닉을 운영하는 심리학자이자 자기계발서 베스트셀러 작가인 마르얀 트로이아니는 환자들과 상담을 하면서 불만을 제한하고 감사함을 더 표현하게 하면서 효과를 봤다. 그는 "감사일기나 공책은 중요한 치유의 도구가 돼 가고 있다"고 말했다. UC데이비스의 심리학 교수인 로버트 에몬스는 실험을 통해 "감사하는 사람은 훨씬 살아있고, 경각심을 가지며 매사에 적극적이고 열정적이며, 다른 사람들과 더 맞닿아 있다고 느낀다"고 말한다. 그는 『감사의 과학』이란 책을 2권 집필하고 감사일기의 효과에 대한 연구발표를 내놓기도 했다. 그는 "생리학적으로 감사는 스트레스 완화제로 분노나, 화, 후회 등 불편한 감정들을 덜 느끼게 한다"고 했다. 에몬스는 12살에서 80살 사이의 사람들을 상대로 한 그룹에는 감사 일기를 매일 또는 매주 쓰도록 하고, 또 다른 그룹들에는 그냥 아무 사건이나 적도록 했다. 한달 후 중대한 차이가 발생했다. 감사 일기를 쓴 사람 중 4분의 3은 행복지수가 높게 나타났고, 수면이나 일, 운동 등에서 더 좋은 성과를 냈다. 그저 감사했을 뿐인데 뇌의 화학구조와 호르몬이 변하고 신경전달물질들이 바뀐 것이다. 감사함을 느끼는 순간 사랑과 공감 같은 긍정적 감정을 느끼는 뇌 좌측의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된다.
1042 no image 재미있는 유머 [5]
[레벨:20]정아브라함
90 2011-12-14
우리 사무실 어떤 분이 메일로 보내준 유머입니다. 심심풀이로 읽어보십시요 변호사님께 오전에 약간 망그러지고 와서 , 망중한... 기분도 풀 겸 후배로 부터 받은 유머 하나 전달해 드립니다 ( 구문일지도 모릅니다. 부담없이 지우시면 됩니다) 경상도 내이티브 스피커들은 다 이해 되실텐데 이해안되시는 분은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서창희 드림 <경상도학교수업시간> [학생(이름 안득기)가 수업시간에 졸다가 선생님께 들켜서 불려나갔다] 선생:니 이름이 뭐꼬? 학생:안득깁니다. 선생:안드끼나? 니이름이 머냐꼬! 드끼제? 학생:예! 선생:이짜슥바라! 내...니 이름이 머냐꼬 안무러 봤나? 학생:안득깁니다. 선생:정말 안드끼냐? 학생:예! 선생:그라모 니 성말고, 이름만 말해 보그라. 학생:득깁니다. 선생:그래!드끼제? 그라모 성하고 이름하고 다 대보그라. 학생:안득깁니다. 선생:이자슥바라.드낀다 캤다,안 드낀다캤다. 니 시방 나한테 장난치나? 학생:샘요, 그기 아인데예! 선생:아이기는 머가 아이라카노! 반장아, 니 퍼떡 몽디 가온나! (껌을 몰래 씹고 있던 반장은 안 씹은 척 입을 다물고 나간다) 반장:샘예.몽디 가꼬 왔는데예~~~ 선생:이머꼬?몽디 가오라카이 쇠파이프를 가왔나? 햐~요새키 바라,반장이라는 새키가 칭구를 직일라꼬 작정했꾸마... 야~니 이반에 머꼬? 반장:예?? 입안에...껌인데예~~~~~ 선생:머라꼬? 니가 이반에 껌이라꼬? 날씨도 더버서 미치겠는데 뭐~이런놈들이 다있노! 시방 너그 둘이서 낼로 가꼬노나? 그날 반장과 득기는 뒈지게 맞았다
1041 no image 시대의 정신병 [3]
[레벨:20]정아브라함
115 2011-12-21
다음은 중앙일보 기사입니다. 읽으면서 이 사회가 무엇인가 매우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강한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자기 개성을 갖지 못하고 의류판매회사의 판매전략에 걸려들어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다른 사람의 평가를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이 시대 정신병 속에서 아이들이 매우 불쌍합니다. 2012학번 형제자매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라는 점을 우리가 알아야겠습니다. 그래도 성적이 좋을수록 그런 옷을 입지않는다는 말이 있어 조금은 위로가 됩니다. 이나리 기자 경제부문 차장 퇴근길에 오른 A씨에게 고교생들의 대화가 들렸다. 이들은 모두 같은 브랜드의 옷을 입고 있었다.  “1학년 땐 너처럼 무조건 검은색만 입어야 돼. 2학년 때는 나처럼 색깔 들어간 거 입어도 괜찮아. 단 형광색이 들어간 건 3학년 전용이야. 잘 알아둬.”  대화 주제는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의 패딩 점퍼였다. A씨 얘기에서 알 수 있듯 이 점퍼는 요즘 우리 십대들이 가장 많이 입는 옷이다. 오죽하면 ‘노스(노스페이스) 교복’이니 ‘교복 패딩’이니 하는 말까지 생겼을까. 얼마 전까지 산 강북 동네엔 남자 중·고등학교가 나란히 있었는데 아침이면 꼬리 문 노스 행렬이 교문으로 꾸역꾸역 밀려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노스 광풍이 본격화한 건 2008년 무렵이다. 과거 이 브랜드는 고가의 전문가용 의류란 이미지가 강했다. 한데 몇몇 학생이 이를 교복 위에 걸치면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선도그룹 중엔 미국 조기 유학생 출신이 적잖았다. 미국은 이 브랜드의 최대 시장이다. 예쁘고, 기능 괜찮으며, 잘나가는 애들이 입는 옷. 관심을 증폭시킨 건 스타 마케팅이었다. 이 브랜드는 2009년 업계 최초로 유명 산악인 대신 젊은 여배우를 모델로 기용했다. TV 노출도 잦아졌다. ‘1박2일’류의 야외 버라이어티가 득세하면서 출연진 의상도 함께 떴다. ‘나PD 노랑 점퍼’ ‘이승기 파카’ 같은 것들이다. 이는 한정 판매, 노(No) 세일 전략과 맞물려 노스를 십대의 ‘필수 간지 아이템’으로 격상시켰다.  물론 과거에도 나이키 운동화 같은 인기몰이 제품은 있었다. 그에 비해 노스 열풍은 훨씬 격렬하고 냉혹하다. 지난 주말 포털 인기 검색어 1위를 차지한 이른바 ‘노스페이스 계급’ 게시물을 보자. 같은 패딩이라도 20만원대는 ‘찌질이’, 30만원대는 ‘중상위권’, 60만원대는 ‘있는 집 날라리’용이다. 70만원대는 ‘대장’ 계급을 상징한다. 50만원대 이상엔 따로 ‘등골 브레이커’란 별칭이 붙었다. 부모의 등골을 휘게 하는 제품이란 뜻이다.  이 비싼 걸 비강남권 아이들이 더 많이 입는 건 아이러니다. 새로 이사한 강남 동네에도 아파트 담 바로 뒤에 남자 고교가 있다. 여기 학생들은 노스를 입는 비율이 확연히 낮았다. 중3 아들은 “성적이 좋을수록, 잘사는 집 애일수록 노스를 덜 입는다”고 전해줬다. 진짜 부자들이 로고 가득한 루이 뷔통 가방을 싫어하는 것과 같은 연유일까. 반면 보통의 십대에게 노스 착용은 또래 주류로 입성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 절박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네티즌 B씨가 올린 중고 노스 판매담이다.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이미 예약 판매가 끝났는데 중학생 하나가 뒤늦게 전화했다. 아이는 “지금껏 짭(모조품)밖에 못 입어봤다”며 악착같이 매달렸다. 어머니까지 동원했다. “형편이 어려우니 도와달라”는 엄마 목소리 뒤로 욕설 섞인 아들의 애타는 다그침이 이어졌다. B씨는 결국 그 제품을 아이에게 넘겼다. 어머니가 불쌍했기 때문이란다.  최근 발생한 인천공항철도 노무자 참사 사건에도 이 제품이 등장한다. 중학생 아들의 소원인 노스를 사주고자 새벽 작업에 나섰다가 변을 당한 사연이다. 이 비정규직 아버지의 월급은 160만원 남짓이었다.  이렇다 보니 집안 사정은 아랑곳 없이 노스에 매달리는 십대들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다. 하지만 이게 어디 애들 탓일까. 웬만해선 계층 상승을 꿈꾸기 힘든 세상이다. 그 불안과 좌절을 옷으로라도 견뎌보려는 아이들이 안쓰럽다. 돈으로 사람 값 매기기야 어른들만 하겠는가. 더 속상한 건 취향의 실종이다. 취향은 자아의 징표이며 ‘영혼의 액세서리’다. 교양처럼 평생 갈고 닦아야 한다. 기업은 ‘고도의 마케팅’으로, 어른은 천박한 물질주의로, 학교는 규제와 줄 세우기로 그 귀중한 학습 기회를 빼앗아버렸다. “학생들이 노스에 빠진 건 우리 교육이 산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란 우스개가 하나도 안 우스운 이유다. 그런 면에서 “노스 중독을 없애려면 코트까지 교복화해야 한다”는 모 교수의 제안은 그야말로 코미디다. 아이들이 진정 구하는 건 ‘간지’가 아닌 위안이요 희망임을 정녕 모르는 걸까.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
1040 no image 자녀교육 자료 [6]
[레벨:20]정아브라함
125 2012-03-27
1039 no image 독일이 왜 강한가 [3]
[레벨:20]정아브라함
108 2012-05-17
아래 글은 유럽위기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중심을 지키는 독일에 대한 중앙일보 기사입니다. 우리도 신록이 무르익는 센터 옆 공원길을 산책하면서 우리의 근본을 묵상하여 강한 개인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만복 호서대 기계공학부 교수 그리스발 유럽 재정위기 상황에서 독일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최근 프랑스와 그리스의 선거 결과로 위기 가능성이 재론되자 다시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주위의 지인들이 묻는다. 독일의 강한 힘의 원천이 무엇이냐고. 정치 전문가가 아닌 공학도지만, 독일에서 공부하고 독일회사에 오래 근무해 독일을 비교적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왜 독일이 강한가? 경험을 통해 나는 바로 산책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독일인들은 유난히 산책을 좋아한다. 산책은 이들의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평생 엄격하고 규칙적인 산책 습관을 지킨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를 잘 알고 있다. 또한 하이데거, 야스퍼스 등 유난히 저명한 독일 철학자가 많다. 산책과 철학과 과학기술의 연계성을 찾는 것, 이는 필자에겐 아주 흥미로운 관심사였다.  과학이란 결국 자연을 이해하는 학문이다.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과 가까이 다가가서 함께 호흡하며 관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산책은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고 사색의 여유를 주며 철학적 사고력을 강화시켜 관념의 합리성과 논리성을 갖추게 한다. 자연을 이해하는 능력은 결국 과학의 발전으로 연결된다. 고대의 피타고라스, 아리스토텔레스, 아르키메데스와 근대의 파스칼 등 위대한 철학자들은 모두 뛰어난 과학자였다. 칸트도 수학과 물리학에 심취해 첫 저서가 철학이 아닌 물리학에 관한 것이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학을 바탕으로 한 기술력은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 무한경쟁력의 토대가 되었다. 끊임없이 “왜”라고 묻는 철학적 통찰을 모든 학문에 접목시켜 기술과 실제 응용분야의 기본을 강화했다. 이러한 사고의 틀을 정치·경제·사회·교육 등 국가운영체계에 도입해 시스템화에 성공한 것이 바로 독일의 힘이다. 한마디로 그륀틀리히(gruendlich·근본적)라는 단어가 독일의 사회제도와 독일인의 사고의 기본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유럽의 맹주로서 역할을 계속 담당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흔히 독일인의 특성을 이야기할 때 근면과 검소함을 이야기한다. 이들이 원래 근면하고 검소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사고의 틀에 의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기본적으로 형성된 사고의 틀이 행동에 나타나는 중요성과 함께 국가제도의 틀이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간파할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일본은 침몰한다는 말에 공감하고, 중국의 일당 독재 시스템의 붕괴를 예견하고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은 일찍이 독일 시스템을 도입해 국가제도와 국민의식에서 많은 공통점이 있다. 중국 또한 이상하리만큼 테크노크라트로 구성된 국가 지도자들이 독일의 제도를 선호하고 있어 이는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 이들은 오래전부터 독일의 합리성과 논리성에 의한 흔들리지 않는 뿌리의 저력을 인지하고 배워 튼튼한 자생력을 갖추었으며, 향후 지속적으로 밑으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능력에 따라 보장하고 추호의 편법을 허락하지 않고, 개인의 관념과 부정부패를 거의 허용하지 않는 사회구조, 초월적 권력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한 힘을 요구하는 정치풍토를 이룬 독일의 원동력을 우리는 어떻게 도입하고 배울 것인가? 그동안 많은 지도자가 내놓은, 국가를 위한 수많은 정책의 결과는 과연 무엇인가? 불안하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작금의 국제정세에 우리도 이제 국가 정책과 제도에 “왜”라는 질문을 심각히 던져야 한다. 산책은커녕 빌딩 숲에 둘러싸여 오로지 아스팔트 길을 따라 학원만 오가는 우리 자녀의 정서를 다시금 돌아볼 때다. 이만복 호서대 기계공학부 교수
1038 60억분의 1의 생각
[레벨:20]정아브라함
65 2012-08-11
다음은 런던올림핀 금메달리스트 양학선의 인터뷰입니다. 양학선 단독 인터뷰 "가난이 왜 부끄러워요?" 달동네 소년은 철봉에 매달려 하늘을 바라봤다. 멀고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파란 하늘. 10년의 세월이 흘러 소년의 작은 꿈은 마침내 그 하늘에 닿았다. 그리고 소년의 이야기는 '민들레 꽃씨'가 되어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퍼지고 있다. '건전한 젊은이 상'과 '효자의 아이콘'으로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양학선(20·한체대). 10일(한국시간) 런던 올림픽선수촌 근처에서 그를 만났다. 런던올림픽 선수촌 근처에서 스포츠동아와 인터뷰하는 양학선. 런던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트위터@setupman11 ● 꼭 되돌려주고 싶은 '과분한 사랑' - 대한체조협회 포상금(1억원), SM그룹의 2억 짜리 아파트에 이어 LG그룹 구본무 회장이 5억원의 격려금을 준다고 하던데…. "매일 아침 일어나면, 인터넷에 제 이름 치고 검색해봐요. 너무 좋은 일이죠. 1억도 엄청 큰 돈인데 5억이나 도와주신다니…. 실감이 안나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감사해요." - 평생 지원하겠다는 '너구리' 라면도 화제더군요. 팬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던데…. "사실 어머니(기숙향 씨·43)는 다른 라면을 더 좋아하시는데, 제가 '너구리'만 먹으니까 종종 끓여주시거든요. 라면이 이렇게 이슈가 돼서 놀랐어요. 주변에서 '라면 먹으면 운동 잘 못할 거다'고 하시는데, 매일 밥만 먹을 수는 없잖아요. 라면 먹고도 잘 하면 되죠.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도와주시는 마음이 다 감사한 일이에요." - 팬들은 양학선 선수가 '너구리' 라면 CF를 하면 좋을 것 같다던데…. "CF야 기회가 된다면…. 그런데 그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잖아요." - 훈련비를 모아 부모님께 드렸다는 얘기 등으로 효자의 아이콘이 된 것 같아요. "에이…. 어느 자식이라도 부모님께 저처럼 했을 거예요. 결과가 잘 나와서 제게 눈길이 쏠리는 거겠죠. 지금도 우리가 모르는 어느 집에서 저보다 더 가난하게 생활하면서 꿈을 키우는 선수들이 있을 거예요. 사실 저희 집도 비닐하우스에서 산 지 2년 됐는데, 이제야 알려진 거잖아요. 제가 그 선수들 마음 누구보다 잘 알죠. 제게 큰 사랑을 주신만큼, 꼭 그런 선수들을 돕고 싶습니다." ● 가난이 왜 부끄러워요? - 부모님께서는 '이런 데 사는 게 아들에게 누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하시더라고요. "부모님이라면 다 그러실 것도 같아요. 하지만 전 한번도 저희 집이 가난하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적이 없어요. 제가 광주체고를 다닐 때에요. 미장일을 하시는 아버지(양관권 씨·53)께서 학교 기숙사 공사장에서 일하셨거든요. 체육관에 가다보면 멀리서 아버지가 보이곤 했어요. 그 때마다 아버지께 달려가서 반갑게 인사하고 그랬는걸요. 부모님이 창피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어요. 왜 그걸 부끄러워해야 하나요? 부모님이 얼마나 열심히 사셨는데요. 가난해도 '운동이면 운동, 공부면 공부' 열심히만 하면 그 대가는 반드시 돌아오는 것이라고 믿어요. '가난해서 뭘 못했다', 이런 말은 핑계가 아닐까요? 부모님은 제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을 물려주신 분들이에요. 돈 많아도 안 좋은 분들도 많잖아요." - 어떤 것을 물려주셨나요? "아버지께서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어요. '거짓말 하지 마라. 남 등쳐먹는 것 아니다.' 그래서 항상 정직하게 운동해왔고, 그 결과가 나온 것 같아요. 앞으로도 그 가르침대로 살아야죠. 또 좋은 몸도 물려주셨잖아요. 아버지께서 지금은 마르셨는데요. 젊으셨을 때는 근육도 많고, 날렵하셨대요. 태권도도 잘 하셨다고 하고…. 순발력은 아버지께 물려받은 것 같아요. 어머니는 지금은 살이 좀 찌셨지만…. 저도 런던 오기 직전에 알았는데요. 어머니께서 어릴 적에 육상을 하셨대요. 도마 종목 하려면 도움닫기도 중요하잖아요. 달리는 능력은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것 같아요. 감사해요." ● 힘들 때마다 떠오른 어머니의 눈물 - 부모님은 아들이 방황한 적도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가출도 하고. "중3 겨울방학 때였어요. 운동이 너무 힘드니까, 운동 안하는 친구들이 부럽더라고요. 그 추운 날씨에도 집 나가서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어느 기사 보니까 포항에서 잡혀왔다고 나오던데, 잡혀온 건 아니고요. 경북 구미에서 선배 집에 있다가 제 발로 돌아왔어요." - 그 때 부모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어머니께서 '그렇게 힘들었느냐?'며 오히려 저를 다독여주셨어요. 펑펑 눈물을 흘리시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해요. 주름도 그 때 더 많이 생긴 것 같아 죄송해요. 저라고 운동하면서 왜 힘든 때가 없었겠어요. 그 때마다 저를 위해 우시던 어머니 모습이 생각나서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어요." - 지금의 양학선이 그 때의 자신에게 한마디를 해준다면? "재능은 있는데 저처럼 삐딱하게 나가려고 하는 후배가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아요. '지금 그만두면 그간의 노력이 다 날아가잖아. 끝까지 꿈을 꿔보자'라고요." ● 먼 미래의 꿈은 교수 - 달동네에 살던 시절의 양학선은 어땠나요? "그 때는 딱지치기를 참 많이 했는데…. 동네 애들 것 다 따와서, 딱지만큼은 제가 부자였어요. 지는 게 싫어서 손이 바닥에 쓸릴 정도로 딱지를 쳤어요. 어릴 때도 자존심이나 강단은 있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2학년 때였을 거예요. 어떤 친구가 '피부도 까맣다'며 저를 계속 놀리는 거예요. 저도 모르게 얼굴로 주먹이 날아갔어요.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때 운동을 시작한 뒤로는 화나는 일이 있어도 한번 더 생각해요. 부모님 얼굴도 떠올리고…." - 언제 체조에 재능이 있다고 느꼈나요? "처음에는 그냥 집에 혼자 있기 싫어서 철봉에서 놀았어요. 트램폴린도 하고…. 초등학교 때부터 남들보다 체조 기술을 빨리 배우긴 했던 것 같아요. 중학교 올라갈 때였어요. 쓰카하라 더블(손 짚고 옆 돌아 몸을 펴고 두 바퀴 비틀기. 양학선이 금메달을 딸 때 구사한 쓰카하라 트리플보다 한 바퀴 덜 도는 기술)을 시도해봤는데 되더라고요."(대한체조협회 김대원 전무이사는 "당시 쓰카하라 더블은 세계 최고 선수들이 쓰던 기술이다. 양학선이 어린 나이에 그 기술을 시도했다면, '도마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며 감탄했다) - 앞으로는 어떤 꿈이 있나요? "일단 4년 뒤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에 도전하려고요. 채점 규정이 바뀌는 것을 봐서 신기술도 만들어야 하고요. 먼 훗날에는 한체대에서 교수를 하는 게 꿈입니다. 제 전문분야가 체조니까, 체조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연구하고 싶어요. 운동 대신 공부만 하라면, 잘 할 자신 있는데…. 살면서 아쉬웠던 적은 있지만, 한번도 절망한 적은 없었거든요. 어떤 분들이 '큰 관심이 앞으로 부담이 되지 않겠느냐?'고 하시는데, 저는 이렇게 대답해요. '제가 하던 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요?' 앞으로도 부모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예의바르고 겸손하게 살겠습니다." 런던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트위터@setupman11
1037 재미있는 기사 [2]
[레벨:20]정아브라함
118 2012-08-22
다음은 중앙일보에 나온 레이건대통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생활이 이런 유머가 넘치면 좋겠습니다. 배인준 주필 로널드 레이건(1911∼2004년)에 관해 많이 알려진 얘기들이 생각난다. 그는 1981년 70세에 미국 40대 대통령이 됐다. 그리고 1984년 73세에 재선에 도전해 월터 먼데일 후보(당시 56세)와 TV토론에서 만났다. 먼데일=당신의 나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레이건=나는 이번 선거에서 나이를 문제 삼을 생각은 없습니다. 먼데일=그게 무슨 뜻입니까? 레이건=당신이 너무 젊고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시청자=폭소! 먼데일은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다. 레이건의 고령을 걸고넘어지려다 자신의 경험 부족을 부각시킨 꼴이었다. 레이건이 정색을 하고 ‘왜 나이를 따지느냐. 나는 건강하다’는 투로 응수했다면 먼데일은 더 파고들 여지를 포착했을지 모른다. 다른 장면에서 레이건은 “배우가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통령이 어떻게 배우가 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만약 그가 ‘나는 배우만 한 것이 아니다. 일찍이 1962년에 공화당에 입당했고, 미국 3대주(州)에 드는 캘리포니아 주지사도 지냈다. 그래도 자격이 없단 말이냐’는 식으로 맞받았다면, 사실이긴 하지만 레이건의 매력은 돋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 美 전 대통령 (공화, 1981~1989년) 사진 더 보려면 Click! 허파에 총 맞고도 잊지 않은 유머 대통령 레이건이 기자들의 고약한 질문에 시달리다 “개××(son of bitch, S.O.B.)!”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며칠 뒤 기자들이 ‘S.O.B.’라는 글자를 새긴 티셔츠를 레이건에게 선물했다. ‘개××’ 발언의 복수를 당한 레이건은 “기자 여러분은 모두 애국자입니다. 예산 절약(Saving Of Budget·SOB)하란 뜻이지요. 충고 잘 새기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해피엔딩이었다. 모욕을 참지 못하겠다며 권력과 권위로 기자들을 누르려 했다면 대통령과 언론의 불화만 커졌을 가능성이 있다. 어느 날 레이건은 연설을 이렇게 시작했다. “나에게는 대통령이 될 만한 아홉 가지 재능이 있습니다. 첫째, 한 번 들은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탁월한 기억력! 둘째, 에 또 … 그게 뭐더라? …” 청중은 박장대소하며 그의 연설을 받아들일 마음의 문을 열었다. 독선이 느껴지는 주장보다 이런 허(虛)와 유머가 정치 지도자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높일 수 있다. 1981년 3월 정신병자 존 힝클리가 노동계 지도자들과 오찬을 하던 레이건을 향해 총을 쐈다. 총알이 심장에서 12cm 떨어진 대통령의 허파를 관통했다. “여보, 난 고개 숙이는 것을 잊었을 뿐이야!” 의식이 깨어난 후 레이건이 부인 낸시에게 한 첫마디였다. 수술실로 들어가면서는 의료진을 향해 “당신들 모두가 훌륭한 공화당원이라는 것을 나에게 확신시켜 주시오”라는 말로 수술 성공을 부탁했다. 비상상황에 국민을 안심시키는 여유, 이것도 중요한 리더십이다. ‘다수의 행복은커녕 소수의 특권만 증식시킨’ 공산주의를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강하게 비판한 인물이 레이건이다. 하지만 그는 목청만 높인 것이 아니라 유머로 공산주의의 허구를 세계에 각인시켰다. “소련의 헌법은 발언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를 보장한다. 그러나 미국의 헌법은 발언 후의 자유와 집회 후의 자유를 보장한다.” “공산주의자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읽은 사람이고, 반공주의자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잘 아는 사람이다.” 레이건은 소련 붕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미국 지도자로 역사에 남았다. 레이건은 ‘위대한 소통자(great com-municator)’로 불리며 사후에도 미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작년 갤럽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이 생각하는 가장 위대한 대통령’ 2위가 에이브러햄 링컨(14%)이었고 1위가 레이건(19%)이었다. 레이건의 말처럼 대통령은 국민이 바라는 일을 위해서는 배우의 역할도 잘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이전에,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인물이든 자신을 능숙하게 연기할 줄 알아야 한다. 물론 ‘연기’도 자신의 생각과 같지 않은 국민의 생각, 그리고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따가운 소리까지 겸허하게 받아들일 때 ‘가식이 아닌 진정성’으로 국민 가슴을 파고들 것이다. 대선주자들 표정 언행 메마르다 우리 대선 주자들은, 이미 무대에 오른 사람이나 아직 객석에 숨어 있는 사람이나, 스스로는 소통을 잘하고 있다고 내비친다. 하지만 다들 각자가 친 보호막 속에서 자기에게 편리한 방식의 소통만 할 뿐이다. 대선의 원초적 본질은 권력전쟁이겠지만 그래도 지도자감은 국민에게 따뜻함과 여유와 웃음을 나눠줄 수 있어야 할 텐데, 표정과 언행들이 너무 메마른 감이 있다. 탁 트인 득음(得音)이랄까 득도의 경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소통자’가 그립다. 하기야 국민도 정치인의 유머에 함께 웃고 박수칠 마음의 여백이 부족한 듯하다.
1036 no image 찬송가를 둘러싼 교계의 싸움 [1]
[레벨:20]정아브라함
61 2012-08-30
다음은 찬송가를 둘러싼 교계의 싸움에 관한 기사입니다. 이러한 교계 이면의 모습을 알고 우리가 정신차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야겠습니다. 낯뜨거운 찬송가 '잇속 다툼' 내달 중순 '표준 찬송가' 편찬 단일 찬송가와 경쟁 두쪽 위기 판매수익 둘러싼 갈등이 발단 권대익기자dkwon@hk.co.kr 한국교회는 선교 100주년을 맞아 <통일 찬송가>(2006년 <21세기 찬송가>로 수정 증보)라는 단일 찬송가를 만들어 모든 교회에서 공통으로 사용해 왔다. 지금까지 30년 동안 이어온 이 같은 단일 찬송가 체제가 막을 내린다. 9월에 <표준 찬송가>(가칭)라는 새 찬송가집이 나오기 때문이다. 새 찬송가 출판 작업 중인 한국찬송가공회(비법인공회ㆍ위원장 김용도 목사) 관계자는 29일 “늦어도 9월 중순 새 찬송가인 <표준 찬송가> 시제품을 내놓을 계획”이라며 “수록될 530곡의 선곡과 편찬을 마무리했으며 검수작업도 거의 마쳤다”고 말했다. 교단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등 12개 교단장은 지난 달 말 만나 “<21세기 찬송가>를 포기하고 새 찬송가를 지지”하기로 했다. 지지 교단에는 예장 통합ㆍ대신ㆍ고신ㆍ합신,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 기독교한국침례회(기침), 예수교대한감리회(예감), 기독교한국루터교, 구세군대한본영 등이 포함돼 있다. 비법인공회측은 새 찬송가 제작 이유로 현 단일 찬송가인 <21세기 찬송가>에 함량 미달의 찬송가가 적지 않은데다 외국 찬송 21곡에 매년 4억8,000만원, 국내 찬송 15곡에 매년 9억원의 저작권료를 지불하는 점을 들고 있다. 하지만 새 찬송가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지금도 한 해 200억원 가까운 돈을 벌어다 주는 찬송가 판매 수익 다툼이 자리잡고 있다. 개신교계에서는 <21세기 찬송가>가 판매 첫 해인 2007년 4월~2008년 3월에 390만권이 팔려 585억원 어치를 판매했다. 지금도 매년 100만부 정도가 팔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당초 (재)한국찬송가공회(법인공회ㆍ대표 서정배 김춘규)가 대한기독교서회(서회)와 예장출판사에 독점출판권을 줬다가 두란노, 아가페, 성서원, 생명의말씀사 등 4개사와도 출판 계약을 하면서 불거졌다. 찬송가 독점판매권이 깨지자 서회와 예장출판사가 이를 문제 삼아 비법인공회와 함께 법인공회를 상대로 2008년부터 12건의 민ㆍ형사 소송을 내며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다. 새 찬송가는 ‘찬송가 장사’를 둘러싼 갈등의 부산물인 셈이다. 이와 관련, 미래목회포럼 대표 정성진 목사는 “찬송가를 둘러싼 싸움을 지켜보면서 참담함을 떨쳐 버릴 수 없다”며 “한국교회 연합의 상징이자 자부심인 하나의 찬송가가 두 개로 나눠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iframe id="frm_MobileLink" height="30" marginheight="0" border="0" src="http://www.hankooki.com/common/mobilelink/mobile_hk.htm" frameborder="0" width="675" allowTransparency marginwidth="0" scrolling="no" leftmargin="0" topmargin="0"></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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